벽암록(碧巖錄) 제10칙 목주약허두한( 睦州掠虛頭漢)
垂示云。 恁麼恁麼。不恁麼不恁麼。 若論戰也。 箇箇立在轉處。 所以道。 若向上轉去。 直得釋迦彌勒。文殊普賢。 千聖萬聖。天下宗師。 普皆飲氣吞聲。 若向下轉去。 醯雞蠛蠓。蠢動含靈。 一一放大光明。 一一壁立萬仞。 儻或不上不下。 又作麼生商量。 有條攀條。 無條攀例。 試舉看。 |
수시(垂示)하여 이르되, 이렇다 저렇다, 이렇지 않고 그렇지 않다 하며 만일 논쟁한다면, 낱낱이 유전(流轉)하는 곳에 있는 것이라 그래서 이르기를, “만약 향상(向上*)하여 굴러가면 석가, 미륵, 문수, 보현과 천성만성(千聖萬聖), 천하종사(天下宗師)가 모두 음기탄성(飲氣吞聲*)하겠지만, 향하(向下)하여 굴러가면 초파리, 눈에놀이나 꿈틀대는 미물들이 저마다 대광명을 놓고, 저마다 벽립만인(壁立萬仞*)하리라" 하였다. 혹 향상도 향하도 아닐 것이라면 또 어떻게 절충해야 하는가? 조문(條文)이 있으면 조를 따르고 조가 없으면 예(例)를 따른다. 예를 들어 살펴보자. |
*飲氣吞聲; '기를 마시고 소리를 삼킨다'는 것은 '분하지만 표현할 방법이 없음'을 말한다.
*向上; 禪林用語。下에서 上에, 末에서 本에 이르는 것.
반대로 上에서 下에, 本에서 末에 이르는 것을 向下라 한다.
미혹의 경계에서 깨달음의 경계로 直入하거나 上求菩提의 工夫를 向上門이라 하고,
自利門에 속하며 逆卍字[卐]로 표시한다.
반대로 自悟의 境을 順應하여 迷의 境에 들어가 化他의 妙用을 자재히 示現하는 것을
向下門이라 하고, 利他門에 속하며 順卍字로 표시한다.
*壁立萬仞; 壁立千仞. 「천 길 높이 솟은 암벽」이라는 뜻으로,
중국(中國) 장안에서 촉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대검(大劍)과 소검(小劍) 두 산(山)의 극히 험준한 절벽, 즉 검각(劍閣)을 말한다.
이 험준한 절벽처럼 우뚝 솟아 어찌해볼 수 없는 기상에 비유하는 용어이다.
【一○】舉 睦州問僧近離甚處 (探竿影草) 僧便喝 (作家禪客。 且莫詐明頭也解恁麼去) 州云。老僧被汝一喝 (陷虎之機。猱人作麼) 僧又喝 (看取頭角。似則似。 是則未是。只恐龍頭蛇尾) 州云。三喝四喝後作麼生 (逆水之波。未曾有一人出得頭。 入那裏去) 僧無語 (果然摸索不著) 州便打云 (若使睦州盡令而行。 盡大地草木。悉斬為三段) 這掠虛頭漢 (放過一著。落在第二)。 |
【제10칙】 목주 약허두한( 睦州掠虛頭漢) 목주(睦州*)선사가 어떤 스님에게 "최근에 어디에 있었는가?" 하고 묻자, (탐간영초<探竿影草*>로다.) 그 스님이 갑자기 할(喝) 하였다. (작가 선객아! 명석한 체하지 말아야 그것을 알 것이다.) 목주가 "노승이 네게 일할(一喝)을 당했구나." 하니, (날조된 호랑이 기개로 사람을 놀리려느냐?) 그 스님이 또 할(喝) 하였다. (앞머리를 보면 그럴듯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니, 용두사미일까 두렵구나.) 목주가 "3할 4할 한 뒤에는 어쩔 셈인가?" 하자, (거꾸로 치는 파도에서 빠져나온 사람 아무도 없다. 어디로 기어 들어가려느냐?) 그 스님은 대답하지 못했다. (과연, 모색해볼 길이 없구나.) 목주선가가 후려치며 말했다. (가사 목주가 온 힘을 다했더라면 온 대지초목이 다 베어져 세 동강이 났으리라.) "이 약허두한(掠虛頭漢*)아!" (한 수 봐주어서 제2의문<第二義門*>에 떨어졌구나.)。 |
*睦州(780~877); 唐代僧. 黃檗希運禪師의 法嗣. 江南人으로 俗姓은 陳.
얼굴에 별 일곱 개가 있고 형상이 기이하여 사람들의 멸시를 받았다.
開元寺에 禮佛 다녔는데 스님들은 똑같이 대해주는지라 父母를 졸라 出家하였다.
持戒가 精嚴하고 學은 三藏을 通하여 觀音院의 講主가 되어 명성을 높이다가
후에 다시 개원사로 돌아와 남몰래 포혜(蒲鞋)를 짜서 노상에 내다 팔아 모친을 봉양하니,
세월이 지나 사람들이 알고서 진포혜(陳蒲鞋)라 불렀다.
學人이 와서 물으면 묻는 대로 즉답을 하고 말솜씨가 예리하여 당할 자가 없었기에
四方이 흠모하여 號를 陳尊宿이라 하였다.
*탐간영초(探竿影草); 臨濟四喝의 하나로 〈人天眼目註〉에
「탐간(探竿)은 물고기 잡는 어구로 대 끝에 미끼를 묶고 물 속에 넣어
물고기가 모이게 한 뒤에 투망하여 잡고,
영초(影草)는 풀을 베어 물에 담가두고서 물고기가 숨어들기를 기다려 투망하여 잡으니,
모두가 물고기 잡는 방편이다. 善知識이 배우는 이들에게 하는 것도 그와 같다.」 하였다.
*약허두한(掠虛頭漢); '노략질 일삼는 골빈놈'.
겨우 조금 알고서 남의 행동이나 언구 모방하기를 일삼는
禪徒인 체하지만, 禪徒가 아닌 자들을 일컫는 말.
*第二義門; 第一義門은 向上門, 第二義門은 向下門이니,
하는 짓을 봐서는 두들겨 패주어야 옳겠으나,
한 수 봐주어서 그의 수준에 따라 말해주었다는 뜻이다.
大凡扶豎宗教。 須是有本分宗師眼目。 有本分宗師作用。 睦州機鋒。如閃電相似。愛勘座主。 尋常出一言半句。 似箇荊棘叢相似。 著腳手不得。 他纔見僧來。 便道見成公案。 放爾三十棒。 又見僧云。上座。 僧回首。州云。 檐板漢。 又示眾云。 未有箇入頭處。 須得箇入頭處。 既得箇入頭處。 不得辜負老僧。 睦州為人多如此。 |
대저 종중(宗中)의 가르침을 바로 세우려면 반드시 본분종사(本分宗師)의 안목과 본분종사의 작용(作用)이 있어야 하거니와, 목주선사는 기봉(機鋒)이 번쩍이는 전광과 같아서 좌주(座主) 감험(勘驗)하기를 좋아하였다. 평상시의 일언반구가 온통 가시 투성이어서 손발을 붙여볼 수 없었으니, 그는 스님들이 오는 것을 보기만 하면 견성공안(見成公案)을 말하고, 그에게 30방(棒)을 놓았다. 또 스님들을 보면 "상좌(上座)!" 하고 불러서 그 스님이 고개를 돌리면 "담판한(檐板漢*)이로군" 하였다. 또 시중(示眾)하여서는 「어떤 입두처(入頭處*)가 아직 없거든 반드시 입두처를 얻어야 하고, 기왕 입두처를 얻었거든 노승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된다.」 하였다. 목주는 사람들에게 흔히 이와 같이 하였다. |
這僧也善雕琢。 爭奈龍頭蛇尾。 當時若不是睦州。 也被他惑亂一場。 只如他問近離什麼處。 僧便喝。 且道他意作麼生。 這老漢也不忙。緩緩地向他道。 老僧被汝一喝。 似領他話在一邊。 又似驗他相似。 斜身看他如何。 這僧又喝。 似則似是則未是。 被這老漢穿卻鼻孔來也。 遂問云。三喝四喝後作麼生。 這僧果然無語。 州便打云。這掠虛頭漢。 |
저 스님이야 잘 새겨들었다지만 용두사미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당시에 목주가 아니었다면 그에게 한바탕 혹란(惑亂)을 당했을 것이다. 그가 근래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 스님이 갑자기 할 하였는데, 말해보라. (물어본) 그의 뜻이 무엇인가? 이 늙은이야 바쁠 것 없으니 느긋하게 말하기를, “노승이 네게 일할(一喝)을 당했구나.”고 하였으니, 흡사 그의 말은 받아 한 구석에 밀쳐둔 것 같았다. 또 그를 시험하는 모양새와 같이 삐딱한 자세로 그가 어찌 하는지 살폈더니, 이 스님이 또 할을 하였는데, 그럴듯 하기는 하나 그렇지 못했기에 이 늙은이에게 도리어 콧구멍이 뚫려버렸다. 이윽고 “3할 4할을 한 뒤에는 어쩔 셈이냐?" 물으니, 그 스님이 과연 대답을 못하는지라 목주는 곧 후려치며 “이 약허두한아!” 하였다. |
驗人端的處。 下口便知音。 可惜許。這僧無語。 惹得睦州道掠虛頭漢。 若是諸人。 被睦州道三喝四喝後作麼生。 合作麼生祇對。 免得他道掠虛頭漢。 這裏若是識存亡。 別休咎。腳踏實地漢。 誰管三喝四喝後作麼生。 只為這僧無語。 被這老漢便據款結案。 聽取雪竇頌出。 |
단적으로 사람을 시험하는 데서 입을 벌리자마자 소리를 알아버렸으니, 애석하게도 그 스님은 대답을 못하고 목주에게 '약허두한'이라 말하게 하였는데, 만약 여러분이라면 목주로부터 “3할 4할 한 뒤에는 어쩔 셈인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만 '약허두한'이라는 말을 듣지 않겠는가? 그 속에서 만일 존망(存亡)을 알고, 길흉을 식별하며 진실한 경지를 밟는 사람이라면 뉘라서 “3할 4할 한 뒤에는 어쩔 셈인가?"라는 말에 뚫려버리겠는가? 다만 그 스님이 대답을 못하게 된 것은 이 늙은이에게 조목에 의거하여 판결을 받은 것이다. 설두가 송출한 것을 들어 취하거라. |
*檐板漢; 禪林用語。등에 널판재를 지는 인부.
앞만 겨우 볼 뿐 뒤나 좌우를 살피지 못하는 사람이니,
禪林에서는 見解가 偏執하여 融通性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入頭處; 明白해진 곳.
兩喝與三喝 (雷聲浩大。雨點全無。 自古至今。罕有人恁麼) 作者知機變 (若不是作家爭驗得 只恐不恁麼) 若謂騎虎頭 (㘞瞎漢。 虎頭如何騎。 多少人恁麼會。 也有人作這見解) 二俱成瞎漢 (親言出親口。 何止兩箇。自領出去) 誰瞎漢 (教誰辨。賴有末後句。 洎乎賺殺人) 拈來天下與人看 (看即不無。覷著即瞎。 闍梨若著眼看。 則兩手掊空。 恁麼舉。且道是第幾機) |
두 번의 할과 세 번의 할은 (뇌성<雷聲>은 우렁찬데 빗방울은 전무하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사람 드물었다.) 작자(作者)라야 임기응변[機變]할 줄 알거니와, (작가가 아니라면 어찌 시험해 볼 수 있으리오만 다만 그렇지 못할까 염려된다.) 만약 호랑이 머리에 올라탔노라 한다면 (에라, 눈먼놈아! 호랑이 머리를 어떻게 올라타겠느냐? 그러나 다소의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어떤 사람은 그런 견해를 짓는다.) 둘 다 눈먼 놈이 되었으리니, (친절한 말은 친절한 입에서 나오는데, 어떻게 둘을 막겠는가? 자진출두해야 하지.) 누가 눈먼 놈인지 (판결은 누가 하느냐? 어떤 말후구(末後句)로 대개는 사람을 속여 죽이더라.) 천하와 사람들이 살펴보게 데려오너라. (살펴보면 없지 않지만 보면 곧 눈이 먼다. 스승[闍梨]이 착안해서 살핀 즉 양손으로 허공 그러모으기일 터인데, 이런 경우라면, 말해보라 몇 번째 근기겠느냐?) |
雪竇不妨有為人處。 若不是作者。 只是胡喝亂喝。 所以古人道。 有時一喝不作一喝用。 有時一喝卻作一喝用。 有時一喝如踞地獅子。 有時一喝如金剛王寶劍。 |
설두에게는 어쩔 수 없는 위인처(為人處)가 있었다. 만일 작자(作者)가 아니라면 다만 이것은 호할난할(胡喝亂喝*)일 것이라, 그래서 고인이 말하기를, 「어느 때의 일할(一喝)은 일할의 용(用)을 짓지 않고, 어느 때의 일할은 일할의 용을 짓기도 하며, 어느 때의 일할은 거지사자(踞地獅子*)와 같고, 어느 때의 일할은 금강왕보검(金剛王寶劍*) 같다」 하였다. |
*胡喝亂喝; 큰 소리로 할을 하지만 학인에게 어떤 이익도 주지 못하는 野狐禪者의 할을 말한다.
圓悟스님은 이를 「뇌성은 크지만 초목을 적셔줄 비 한방울 없는 것
(雷聲洪大 雨點全無)」이라 하였다.
*臨濟四喝; 〈臨濟錄〉에 「어느 때의 일할(一喝)은 金剛王寶劍과 같고,
어느 때의 일할은 踞地金毛獅子와 같으며, 어느 때는 일할이 探竿影草와 같고,
어느 때는 일할이 不作一喝作과 같다.」고 하였다.
'金剛王寶劍 같은 喝'이란 大機를 發하는 喝로서
學人이 知解情量과 名相言句에 얽매어 있을 때 寶劍으로 截斷하듯이 하는 喝이요,
'踞地金毛獅子'의 할은 大機大用의 喝로서 修行者가 小機小見에 빠져 있을 때,
들짐승 간담을 찢는 獅子의 咆哮와 같은 一喝로 깨뜨려버리는 것이며,
'探竿影草'는 學人의 修行정도를 勘驗하는 喝이요,
'不作一喝用'은 向上의 一喝이니, 할을 쓰지 않음으로써 다른 3종 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興化道。我見爾諸人。 東廊下也喝。西廊下也喝。 且莫胡喝亂喝。 直饒喝得興化。上三十三天。 卻撲下來。氣息一點也無。 待我甦醒起來。 向汝道未在。何故。 興化未曾向紫羅帳裏撤真珠。 與爾諸人在。 只管胡喝亂喝作什麼。 |
흥화(興化)선사가 말하기를, “내가 보건대 여러분들이 동처마[東廊] 밑에서 할(喝)하고 서랑 밑에서 할하는데, 그런 호할난할을 하지 말라. 설사 할하여 흥화(나)를 33천(天)에 올렸다가 다시 밑으로 내쳐서 숨소리 하나 없게 하더라도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려 일어나서 여러분들에게 아직 덜 되었다고 말하겠다. 어째서인가? 흥화가 자라장(紫羅帳*) 속에서 진주를 줍도록 여러분에게 준 적이 없는데, 오로지 호할난할만 해서 무엇하겠느냐?" 하였고, |
*흥화(興化;830~925); 魏府興化存獎禪師(臨濟玄禪師法嗣).
唐末禪僧。河北薊縣人, 俗姓孔。
盤山스님에게 出家하여 具足戒를 받았고, 후에 臨濟義玄의 문하에서 受學하였다.
魏府韓公의 叔의 勸請으로 魏府 興化寺 주지를 맡아 臨濟의 禪風을 날렸기에
世稱 興化存獎이라 하였고, 敕諡는 「廣濟大師」이다.
*紫羅帳; 紫色의 엷은 비단으로 지은 장막. 高官이나 貴人의 居處로 하사되었다。
臨濟道。 我聞汝等。總學我喝。 我且問爾。 東堂有僧出。 西堂有僧出。 兩箇齊下喝。 那箇是賓。那箇是主。 爾若分賓主不得。 已後不得學老僧。 所以雪竇頌道。 作者知機變。 這僧雖被睦州收。 他卻有識機變處。 且道什麼處。是這僧識機變處。 |
임제(臨濟)선사는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너희 모두가 나의 할(喝)을 배운다는데, 내가 이제 너희에게 묻거니와, 동당(東堂)의 어떤 스님이 나서고, 서당(西堂)의 어떤 스님이 나서서 두 사람이 나란히 할을 한다면 누가 손님이고, 누가 주인이겠느냐? 너희가 만약 손님과 주인을 구분하지 못할 것이라면 이후로는 노승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래서 설두가 송하여 말하기를, "작자(作者)라야 기변(機變)할 줄 안다"고 한 것이다. 이 스님이 비록 목주에게 제지[收]를 당했으나, 그에게도 기변(機變)할 줄 안 곳이 있었다. 말해보라. 어디가 저 스님이 기변할 줄 안 곳인가? |
鹿門智禪師。點這僧云。 識法者懼。 巖頭道。若論戰也。 箇箇立在轉處。 黃龍心和尚道。 窮則變。變則通。 這箇些子。 是祖師坐斷天下人舌頭處。 爾若識機變。 舉著便知落處。 |
녹문(鹿門) 지(智)선사는 이 스님 점검하기를, “법을 알면 겁이 난다” 하였고, 암두(巖頭)는 “싸우기로 말하자면 저마다의 이끌어가는 방도가 있다” 하였으며, 황룡심(黃龍心)화상은 “궁한 즉 변하고, 변한 즉 통한다” 하였으니, 이 사소한 것들이 조사가 천하인의 혀끝을 좌단한 곳이거니와, 여러분이 기변할 줄 안다면 들추자 마자 곧 낙처(落處)를 알 것이다. |
有般漢云。 管他道三喝四喝作什麼。 只管喝將去。 說什麼三十二十喝。 喝到彌勒佛下生。 謂之騎虎頭。 若恁麼知見。 不識睦州則故是。 要見這僧太遠在。 如人騎虎頭。 須是手中有刀。 兼有轉變始得。 |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3할 4할 뒤에는 어쩔 셈인가?'라는 말을 뚫고 할(喝)로 일관해 나갈 것이지 무슨 30, 20 할을 말하는가?" 하지만, 할(喝)이 미륵불 하생(下生)하기에 이르러야 호랑이 머리에 올라 탔다 할 것이라, 이렇게 지견(知見)한다면 목주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주 멀리 있는 이 스님을 보는 것은 마치 사람이 호랑이 머리 올라타는 것과 같아서 모름지기 수중에 칼이 있어야 하고 겸하여 전변(轉變*)이 있어야 한다. |
*轉變; 轉化變異.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솜씨. 機變(臨機應變).
雪竇道。若恁麼。二俱成瞎漢。 雪竇似倚天長劍。 凜凜全威。 若會得雪竇意。 自然千處萬處一時會。 便見他雪竇後面頌。 只是下注腳。 又道誰瞎漢。 且道是賓家瞎。是主家瞎。 莫是賓主一時瞎麼。 拈來天下與人看。 此是活處。雪竇一時頌了也。 為什麼卻道。 拈來天下與人看。 且道作麼生看。 開眼也著。合眼也著。 還有人免得麼。 |
설두는 '그렇다면 둘 다 눈먼 놈이 될 것이다' 하였으니, 설두는 천장검(天長劍*)을 기대어 늠늠하게도 온전한 위엄을 떨쳤다. 만일 설두의 뜻을 알면, 자연히 천처만처(千處萬處)를 일시에 알아서 설두의 그 뒤 송(頌)은 단지 주각(注腳;註釋)을 단 것임을 볼 것이다. 또 '누가 눈먼 놈인가?' 하였는데, 말해보라. 손님이 장님인가, 주인이 장님인가? 설마 손님과 주인이 한꺼번에 눈이 먼 것인가? '천하와 사람들이 살펴보게 데려오라' 이는 활처(活處*)를 설두가 일시에 송(頌)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천하와 사람들이 살펴보게 데려오라'고 말했을까? 말해보라. 어떻게 살필 것인가? 눈을 떠도 집착이요, 눈을 감아도 집착일 터인데, 어떤 사람이 면해지겠는가? |
*天長劍; 하늘에 닿는 칼. *活處; 살아날 길. 빠져나갈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