首楞嚴經

수능엄경(首楞嚴經) 제 4권

碧雲 2025. 4. 19. 05:56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
諸菩薩萬行首楞嚴經 卷第四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
제보살만행수능엄경 제 4권
  唐天竺沙門般剌蜜帝譯       당 천축사문 반랄밀제 역
   
爾時富樓那彌多羅尼子。
在大眾中即從座起。
偏袒右肩右膝著地
合掌恭敬而白佛言。
그때 부루나 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가
대중 속에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꿇어
합장하며 공경히 부처님께 아뢰었다.
*富樓那彌多羅尼子(Pūrṇamaitrāyaṇī-putra); 佛의 十大弟子中 說法第一인 富樓那의 full name. 
大威德世尊善為眾生。
敷演如來第一義諦。

世尊常推說法人中我為第一。

今聞如來微妙法音。
猶如聾人逾百步外聆於蚊蚋。

本所不見何況得聞。

佛雖宣明令我除惑。

今猶未詳斯義究竟無疑惑地。

世尊如阿難輩。
雖則開悟習漏未除。

我等會中登無漏者。
雖盡諸漏
今聞如來所說法音。
尚紆疑悔。
"위덕 높으신 세존께서 중생들을 위하시어
여래의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잘 말씀하여 주셨나이다.
세존께서 항상 '설법하는 사람 중에
제가 제일이다' 하셨으나
지금 여래의 미묘한 법음을 듣자니
마치 농인(聾人)이 백 보(步) 밖에서
모깃소리 귀 기울이듯 하여
본래 보이지도 않겠거니와
하물며 어찌 들어지리이까?
부처님께서 비록 뚜렷히 밝히시어
저희들이 의혹이 없게 하셨으나
이 이치의 구경(究竟)에 의혹없는 경지까지는
아직 상세히 알지 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아난과 같은 이들은
비록 깨달았다고는 하나
익혀진 번뇌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고,
저희 회중에 무루(無漏)에 오른 자도
비록 모든 번뇌가 다했을지언정
지금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음을 듣고
오히려 의혹을 품게 될 것이옵니다. 
*第一義諦; 如來藏心은 不空不有하여 即性即相하니 第一義라 하고,
佛이 證한 바가 決定코 無妄審實하니 諦라 한다. 
世尊若復世間一切根塵

陰處界等。
皆如來藏清淨本然。
云何忽生山河大地。
諸有為相次第遷流終而復始。

又如來說地水火風本性圓融。

周遍法界湛然常住。

世尊若地性遍云何容水。

水性周遍火則不生

復云何明。
水火二性俱遍虛空不相𣣋滅。

세존이시여!
만약 세간의 모든 6근(根) 6진(塵)과
5음(陰) 12처(處) 18계(界) 등이
다 여래장으로서 청정본연하다면
어찌하여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겨나
모든 유위상(有爲相)이 차례로 변천해 흘러
끝났다가 또 다시 시작하나이까?
또 여래께서 ‘지수화풍(地水火風)은
본래 성품이 원융하여
법계에 두루 퍼져 담연하게
항상 머물러 있다’고 하셨거니와,
세존이시여! 만약 흙의 성품이 두루하다면
어떻게 물을 용납하며,
물의 성품이 두루 미친다면
불은 곧 생기지 못할 터인데,
다시 어째서 설명하시기를
물과 불의 두 가지 성품이 허공에 가득하되
서로 능멸(凌滅)하지 않는다고 하십니까? 
世尊地性障礙空性虛通。

云何二俱周遍法界。
而我不知是義攸往。
惟願如來宣流大慈。
開我迷雲及諸大眾。
作是語已五體投地。
欽渴如來無上慈誨。

세존이시여! 흙의 성질은 장애하는 것이고,
허공의 성질은 비어 통하는 것인데
어찌 둘 모두가 법계(法界)에 두루하겠습니까?
저는 그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오니
오직 원컨대 여래께서는 큰 자비를 베푸시어
저와 대중들의 미혹의 구름을 벗겨 주소서!”
이렇게 말하고서 오체투지하여
여래의 위없이 자애로운 가르침을
흠모하여 갈망하였다. 
   
爾時世尊告富樓那。及諸會中。
漏盡無學諸阿羅漢。

如來今日普為此會。
宣勝義中真勝義性。
令汝會中定性聲聞。
及諸一切未得二空。

迴向上乘阿羅漢等。
皆獲一乘寂滅場地。
真阿練若正修行處。
汝今諦聽當為汝說。

富樓那等欽佛法音默然承聽。

그때 세존께서 부루나와 회중의
번뇌가 다하여 더 배울 것이 없는
모든 아라한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래가 오늘 널리 이 회중(會衆)을 위해
승의(勝義) 중 진승의성(眞勝義性*)을 펼치면
지금 너희 회중(會中)의 정성성문(定性聲聞*)과
아직 이공(二空; 我空,法空)을
얻지 못한 모든 이들과
상승(上乘;大乘)에 회향한 아라한 등이
다 일승(一乘;佛乘)의 적멸도량이요
참다운 아란야(阿練若*)인 바른 수행처를 얻으리니
그대들은 이제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너희를 위해 설하리라.”
부루나 등이 부처님의 법음을 흠모하여
묵연히 받들어 듣고 있었다. 
*眞勝義性; 「真諦」, 즉 「勝義諦」
*定性聲聞; 정해진 성품의 성문, 즉 '너는 어쩔 수 없는 聲聞이다'고 결정된 사람.
*阿練若(aranya); 阿蘭若. 출가인이 수행하고 머무는 고요한 곳. 寺院의 總名. 
   
佛言富樓那。
如汝所言清淨本然。
云何忽生山河大地。
汝常不聞如來宣說
性覺妙明本覺明妙。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부루나야
네가 말한 것과 같이 청정본연한데
어찌하여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겼느냐?
너는 듣지 못했느냐? 여래가 늘 말하기를
 ‘성각(性覺*)은 묘명(妙明)하고
본각(本覺*)은 명묘(明妙)하다’ 하였느니라."
*性覺은 真如의 體性이 타에 의지함이 없이 스스로 깨어있다는 의미이고
*本覺은 그것이 他因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본래 깨어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富樓那言唯然世尊。
我常聞佛宣說斯義。

부루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항상 부처님께서 그러한 이치를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나이다.” 
   
佛言
汝稱覺明為復性明稱名為覺。

為覺不明稱為明覺。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각(覺)이다 명(明)이다 하는 것이
성품이 밝은 것을 각(覺)이라 칭하는 것이냐
성품이 밝지 못한 것을
밝은 각[明覺]이라 칭하는 것이냐?” 
   
富樓那言
若此不明名為覺者則無無明。

부루나가 말했다.
“만약 이 밝지 못한 것을 각(覺)이라 한다면
곧 밝힐 것[無明]이 없겠나이다.” 
   
佛言若無所明則無明覺。

有所非覺無所非明。

無明又非覺湛明性。

性覺必明妄為明覺。

覺非所明因明立所。

所既妄立生汝妄能

無同異中熾然成異。

異彼所異因異立同。

同異發明。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만약 밝힐 바가 없다면 밝힐 각(覺)도 없으려니와
밝힐 것이 있다면 각(覺)이 아니요
밝힐 것이 없다면 밝음[明]도 아니리니
밝음이 없음[無明]은 더욱
각담명성(覺湛明性*)이 아닌 것이며,
성각(性覺)은 반드시 밝아야 하련만
허망하게도 밝힐 각이 되어버리느니라.
각(覺)은 밝힐 것이 아니건만
밝힌다는 것으로 인해 대상[所]이 되어버리고
대상이 기왕에 허망히 성립하니
네게 허망한 할 일[能;功用]이 생겨서
같고[同] 다름[異]이 없는 가운데
치연하게 다름을 이루고[業相],
다른 것을 저것과 다르다 하니
다름으로 인해 같음이 성립되고[轉相],
같음과 다름이 분명해지느니라. 
因此復立無同無異。

如是擾亂相待生勞。
勞久發塵自相渾濁。

由是引起塵勞煩惱。
起為世界靜成虛空。
虛空為同世界為異。
彼無同異真有為法。
그로 인해 다시
같음도 없고 다름도 없음이 성립하며[現相],
이러한 요란(擾亂)이 서로 접하여 피로[勞]를 내고
그 피로가 오래되면 티끌이 일어나
저절로 서로 혼탁해지거니와
이로 말미암아 진로번뇌(塵勞煩惱*)가 일어나게 된다.
일어나면 세계가 되고 고요하면 허공을 이루니,
허공은 같음이요 세계는 다름이 되거니와
같고 다름이 없어야 참된 유위법(有爲法)인 것이다. 
*覺湛明性; 本覺의 圓明한 性品.
*塵勞; 塵垢勞惱. 凡夫는 世塵에 垢染되어 身心이 勞亂하다.
*煩惱; 吉隸舍(kleśa). 有情의 身心에 惱, 亂, 煩, 惑, 汚 등을 일으키는 精神作用의 總稱.
貪欲, 瞋恚, 愚痴 등의 諸惑이 煩心惱身하니 이를 일러 煩惱라 한다.
覺明空昧相待成搖。

故有風輪執持世界。
각(覺)의 명(明)과 허공의 어둠[昧]이
서로 거들어 흔들림을 이루기에
그 때문에 풍륜(風輪)이 있어
세계를 붙잡아 지탱하는 것이며, 
因空生搖堅明立礙。

彼金寶者明覺立堅。

故有金輪保持國土。

허공의 매(昧)로 인해 흔들림이 생기고
명(明)을 굳혀 푸른 돌이 생기게 하나니
저 금보(金寶)라는 것은
명각(明覺)이 굳어진 것이기에
그러므로 금륜(金輪)이 있어
국토를 보전하고 지탱하는 것이며,  
堅覺寶成搖明風出。

風金相摩。
故有火光為變化性。
寶明生潤火光上蒸。

故有水輪含十方界。

각(覺)이 굳어져서 금보가 되고
명(明)이 흔들려 바람이 일어나
바람과 금보가 서로 마찰하니
불빛이 생겨 변화하는 성품이 되었으며
금보의 밝음은 윤택한 기운을 내고
불빛은 위로 증발하기에
그러므로 수륜(水輪)이 있어
시방세계를 머금고 있는 것이니라.
火騰水降交發立堅。

濕為巨海乾為洲潬。

以是義故彼大海中火光常起。

彼洲潬中江河常注。

불은 솟아 오르고 물은 떨어지면서
서로 교차하여 굳어지니
습한 곳은 큰 바다가 되고
건조한 곳은 육지와 섬이 되며,
이러한 이치로 저 큰 바다에서는
불빛이 항상 일어나고
육지에서는 강물과 냇물이
항상 흐르는 것이니라. 
水勢劣火結為高山。

是故山石擊則成炎融則成水。

土勢劣水抽為草木。
是故林藪遇燒成土因絞成水。

交妄發生遞相為種。

以是因緣世界相續。

물의 힘이 불보다 부족하면
맺혀서 높은 산이 되기 때문에
산에서 돌이 부딪치면 불꽃이 일어나고,
녹으면 물이 되는 것이며,
흙의 힘이 물보다 약하면 싹터서 초목이 되기에
그 때문에 숲과 늪이 타면 흙이 되고,
짜이면 물이 되기를
교차하며 허망하게 일으켜
번갈아 서로 종자(種子)가 되나니
이러한 인연으로
세계가 서로 연속되는 것이니라. 
復次富樓那
明妄非他覺明為咎。

所妄既立明理不踰。

以是因緣
聽不出聲見不超色。

色香味觸六妄成就。

由是分開見覺聞知。
同業相纏合離成化。

또 부루나야,
명이라는 허망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각명이 허물이 된 것이며,
허망한 것이 기왕 성립하면
밝은 이치가 넘어가지 못하는지라
이러한 인연으로
듣는 것은 소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보는 것은 색(色)을 벗어나지 못해
색향미촉(色香味觸) 등의
여섯 가지 허망함이 이루어지고,
이로 말미암아 견문각지(見聞覺知)로 나누어져서
같은 업이 서로 얽히고 합하고
분리되고 이루어지며 변화하느니라.
見明色發明見想成。

異見成憎同想成愛。
流愛為種納想為胎。

交遘發生吸引同業。
故有因緣生羯囉藍遏蒱曇等。

명(明)을 보아 색(色)이 일어나고
밝게 보아 상(想)을 이루는데
견(見)이 다르면 미워하고 상(想)이 같으면 사랑하여
그 사랑을 흘려서 씨가 되고
상(想)을 받아들여 태(胎)가 되어서
서로 만나 생을 이루려고 같은 업을 끌어들이므로
어떤 인연이 있어 갈라람(褐羅藍*)과
알포담(謁蒲曇*) 등이 생기느니라. 
*褐羅藍; 입태 후 7일간의 상태. *謁蒲曇; 27일간의 상태
胎卵濕化隨其所應。
卵唯想生胎因情有。

濕以合感化以離應。

情想合離更相變易。
所有受業逐其飛沈。
以是因緣眾生相續。
태란습화(胎卵濕化)가 그 감응할 바에 따라
난생(卵生)은 오직 상(想)으로 생기고,
태생(胎生)은 정(情)으로 생기며,
습생(濕生)은 합(合)하여 감응하고,
화생(化生)은 분리[離]하여 감응하니
정상합리(情想合離)가 서로 변하고 바뀌되
지닌 바 업을 받아 그 부침(浮沈)을 따르나니
이러한 인연으로 중생이 상속되는 것이니라.
   
富樓那想愛同結愛不能離。

則諸世間父母子孫相生不斷。

是等則以欲貪為本。
부루나야! 생각과 애욕이 함께 맺혀서
애욕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곧 모든 세간의 부모와 자손이
서로 끊임없이 태어나게 되는데,
이러한 것이 곧 욕탐(欲貪;淫欲)이 그 근본이 되고, 
貪愛同滋貪不能止。
則諸世間卵化濕胎。
隨力強弱遞相吞食。
是等則以殺貪為本。
탐(貪)과 애(愛)가 함께 돕고 탐욕을 그치지 못하면
모든 세간의 태란습화가
그 힘의 강약에 따라 번갈아 서로 잡아먹게 되는데,
이러한 것이 살탐(殺貪)을 근본이 되며, 
以人食羊羊死為人人死為羊。

如是乃至十生之類。
死死生生互來相噉。
惡業俱生窮未來際。
是等則以盜貪為本。
사람이 양을 잡아먹으면 양은 죽어서 사람이 되고
사람은 죽어서 양이 되거니와,
이렇게 십생(十生)의 무리가
죽고 죽고 나고 나면서 번갈아 서로 잡아먹으며
악업으로 함께 나서 미래세상을 다 하나니,
이러한 것이 도탐(盜貪)의 근본이 되느니라.
汝負我命我還債汝。
以是因緣經百千劫常在生死。

汝愛我心我憐汝色。

以是因緣經百千劫常在纏縛。
唯殺盜婬三為根本。
以是因緣業果相續。
너는 나의 목숨을 빚지고, 나는 너의 빚을 갚아서
이러한 인연으로 백천 겁이 지나도록
항상 생사에 머물고,
너는 나의 마음을 사랑하고
나는 너의 모습을 어여삐 여기는
이런 인연에 백천 겁을 항상 얽혀 지내면서
오직 살생 투도 사음[殺盜淫]의 셋을 근본 삼으니,
이러한 인연으로 업과(業果)가 상속되느니라. 
富樓那如是三種顛倒相續。

皆是覺明明了知性。
因了發相從妄見生。

山河大地諸有為相次第遷流。

因此虛妄終而復始。

부루나야! 이와 같은
세 가지 전도(顛倒)가 상속되는 것은
모두 이 각명(覺明)의 명료한 지성(知性)이
요지하고자 상(相)을 내고
망견(妄見)을 쫓아 생기는지라
산하대지의 모든 유위상(有爲相)이
차례로 변천하여 흘러가는 것이거니와,
이러한 허망함으로 인해
끝마쳤다가는 다시 시작되는 것이니라. 
   
富樓那言
若此妙覺本妙覺明。
與如來心不增不減。

無狀忽生山河大地諸有為相。

如來今得妙空明覺。
山河大地有為習漏何當復生。
부루나가 말했다.
“만약 이 묘각(妙覺)의 본래 미묘한 각명(覺明)이
여래의 마음과 더불어
늘어남도 없어짐도 없어야 할 터인데
까닭없이 산하대지(山河大地)와
모든 유위상(有爲相)이 홀연히 생겼다면
여래께서는 이제 묘공명각(妙空明覺)을 얻으셨지만
산하대지 유위(有爲)의 묵은 번뇌가
어찌 또 다시 생기게 되나이까?” 
   
佛告富樓那譬如迷人。

於一聚落惑南為北。
此迷為復因迷而有因悟所出。
부처님이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마치 미혹한 사람이
어떤 마을에서 남쪽을 북쪽인 줄 알고 있다면
이러한 미혹은 미(迷)로 인해 있는 것이냐?
오(悟)로 인해 나온 것이냐?” 
   
富樓那言如是迷人。
亦不因迷又不因悟。

何以故迷本無根云何因迷。

悟非生迷云何因悟。

부루나가 말했다. “이와 같이 미혹한 사람은
미(迷)로 인한 것도 아니요
또 오(悟)로 인한 것도 아니옵니다.
왜냐하면 미혹은 본래 뿌리가 없는데
어떻게 미혹에 기인하겠사오며,
깨달음은 미혹을 낳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깨달음에 기인하겠나이까?”
   
佛言彼之迷人正在迷時。

倏有悟人指示令悟。
富樓那於意云何。
此人縱迷。
於此聚落更生迷不。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저 미혹한 사람이 진정으로 미혹했을 때에
문득 어떤 깨달은 사람이 가르쳐 깨닫게 한다면
부루나야! 네 생각에는 어떻겠느냐?
이 사람이 비록 미혹했다 하여
그 마을에 다시 미혹이 생기겠느냐?" 
   
不也世尊。 “그렇지 않겠나이다. 세존이시어!” 
   
富樓那十方如來亦復如是。
此迷無本性畢竟空。

昔本無迷似有迷覺。

覺迷迷滅覺不生迷。

“부루나야, 시방의 여래도 역시 그러하니라.
이 미혹은 근본이 없고
그 성품이 필경에 공한 것이어서
옛부터 본래 미혹이 없었으나
미혹이라는 각(覺)이 있는 듯 하다가
미혹을 깨달아 미혹이 소멸하면
각(覺)에서는 미혹이 다시 생기지 않느니라.
亦如瞖人見空中花。

瞖病若除華於空滅。
忽有愚人。
於彼空花所滅空地待花更生。

汝觀是人為愚為慧。

또 마치 예인(瞖人;눈병 난 사람)이
허공 꽃을 보는 것과 같아서
눈병이 없어지면 꽃이 허공에서 사라지려니와,
혹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그 허공 꽃이 없어진 빈자리에서
그 꽃이 다시 생기기를 기다린다면
네가 보건대 그 사람이
우둔한 것이냐 지혜로운 것이냐? 
   
富樓那言空元無花妄見生滅。

見花滅空已是顛倒。

敕令更出斯實狂癡。

云何更名如是狂人為愚為慧。

부루나가 말했다. “허공에는 원래 꽃이 없건만
헛되이 생멸(生滅)을 보는 것인지라
그 꽃이 허공에서 소멸하는 것을 본다는 것이
이미 전도(顚倒)인 것이요,
움을 다시 트게 한다는
이것이야 실로 어리석고 미친 짓인데
어찌 다시 이런 미친 사람을
우둔하다 지혜롭다 하겠나이까?”
   
佛言如汝所解云何問言。

諸佛如來妙覺明空。
何當更出山河大地。
又如金礦雜於精金。
其金一純更不成雜。

如木成灰不重為木。

諸佛如來菩提涅槃亦復如是。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이해한 바와 같다면 왜
제불여래의 묘각명공(妙覺明空)에서
언제 다시 산하대지가 생기느냐고 묻느냐?
또 마치 금광석에 순금이 섞여 있다가
그 금이 일단 순금이 되면
다시는 섞이지 않는 것과 같고,
마치 나무가 타서 재가 되면
다시는 나무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제불여래의 보리(菩提)와 열반도 그러하느니라. 
富樓那又汝問言。
地水火風本性圓融周遍法界。

疑水火性不相𣣋滅。

又徵虛空及諸大地。
俱遍法界不合相容。

부루나야, 또 네가 말하기를
 '지수화풍(地水火風)은 본성(本性)이
원융(圓融)하여 법계에 온통 두루하다면
물의 성품과 불의 성품이
서로 능멸(凌滅)하지 않을까 의심하고,
또 온 허공과 모든 대지가
다 법계에 두루하다면
서로 용납하지 못한다' 하였는데, 
富樓那譬如虛空體非群相。

而不拒彼諸相發揮。

所以者何。
富樓那彼太虛空日照則明。
雲屯則暗風搖則動。
霽澄則清氣凝則濁。
土積成霾水澄成映。
부루나야, 비유컨대 허공의 체(體)는
여러 모양(相)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저 모든 현상이 발휘되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 것과 같다.
어째서인가?
부루나야, 저 드넓은 허공은 해가 비치면 밝고,
구름이 끼면 어두우며,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개면 맑으며, 기운이 엉키면 탁하고,
흙먼지가 쌓이면 흙비가 되고,
물이 맑으면 비치기 때문이니라 
於意云何如是殊方諸有為相。

為因彼生為復空有。

若彼所生。
富樓那且日照時既是日明。

十方世界同為日色。
云何空中更見圓日。
若是空明空應自照。

云何中宵雲霧之時不生光耀。

當知是明非日非空不異空日。

네 생각에 어떠하냐?
이러한 다른 방면의 모든 유위상(有爲相)이
저들(해, 구름, 바람)로 인해 생기느냐,
허공에 있는 것이냐?
만약 저들로 인해 생기는 것이라면
부루나야, 우선 해가 비칠 때에는
기왕 해가 밝을 것이라
시방세계가 다같이 햇빛일 터인데,
왜 허공에서 다시 둥근 해를 보느냐?
만약 이 허공의 밝음이라면
허공이 마땅히 스스로 비출 터인데
어째서 밤중이나 구름이 끼었을 때에는
빛을 내지 못하느냐?
이 밝음은 해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며,
허공, 해와 다른 것도 아님을 알 것이로다. 
觀相元妄無可指陳。

猶邀空花結為空果。

云何詰其相𣣋滅義。

觀性元真唯妙覺明。

妙覺明心先非水火。
云何復問不相容者。

真妙覺明亦復如是。
汝以空明則有空現。
地水火風各各發明
則各各現。
若俱發明則有俱現。

상(相)을 보건대는 원래 허망하여
가리켜 개진(開陣)할 수 없음이
마치 공화(空花)를 마주하여
허공 열매를 맺기 바라는 것과 같거늘,
어찌 그것을 힐난하여
서로 능멸하는 뜻이다 하겠느냐?
그 성품을 보건대 원래 진실하여
오직 묘각명(妙覺明) 뿐이요,
이 묘각명한 마음은 우선 물도 불도 아니거늘
어찌하여 다시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인지를 묻느냐?
참된 묘각명도 역시 그와 같아서
네가 공으로 밝히면 공이 나타나고,
지수화풍으로 각각 밝음을 내면
곧 각각으로 나타나며,
만약 한꺼번에 밝음을 내면
곧 함께 나타나는 것이니라. 
云何俱現。
富樓那如一水中現於日影。

兩人同觀水中之日。
東西各行則各有日。

隨二人去一東一西。

先無准的不應難言。
此日是一云何各行。
各日既雙云何現一。

宛轉虛妄無可憑據。
어떤 것이 함께 나타나는 것이겠느냐?
부루나야, 마치 한 물 속에
해 그림자가 나타나거든
두 사람이 함께 물속의 해를 보다가
동쪽과 서쪽으로 제각기 가면
곧 각각에 해가 있어
두 사람을 쫓아
하나는 동으로 가고 하나는 서로 가니
먼저 아무 기준 없이 곤란히 물어서는 안 되나니,
 '이 해는 하나인데 어째서 각각 가는 것이며
각각 가는 해가 기왕에 둘이라면
왜 하나로 나타나는가'는
완전히 허망으로 굴러 증명할 근거가 없다. 
富樓那汝以色空。
相傾相奪於如來藏。
而如來藏隨為色空
周遍法界。
是故於中
風動空澄日明雲暗。

眾生迷悶背覺合塵。

故發塵勞有世間相。

부루나야, 네가 이 색(色)과 공(空)으로
여래장을 서로 타투고 빼앗으니
여래장이 따라서 색과 공이 되어
법계에 두루하는 것인지라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
바람은 움직이고, 허공은 맑으며,
해는 밝고, 구름은 어둡거니와,
중생들은 미민(迷悶)하여
깨달음을 등지고 망진(妄塵)을 쫓으니
고로 진로(塵勞)를 발하여
세간의 상(相)들이 있는 것이니라. 
我以妙明不滅不生
合如來藏。
而如來藏唯妙覺明
圓照法界。
是故於中
一為無量無量為一
小中現大大中現小。

不動道場遍十方界。
身含十方無盡虛空。
於一毛端現寶王剎。
坐微塵裏轉大法輪。
滅塵合覺
故發真如妙覺明性。
나는 묘명(妙明)의 불생불멸함으로
저 여래장에 부합하니
여래장이 오로지 오묘히 각명(覺明)하여
법계를 원만히 비추는지라
그래서 그 가운데서
하나가 무량이 되고 무량이 하나가 되며,
작은 가운데 큰 것을 나타내고,
큰 가운데 작은 것을 나타내며,
꿈적하지 않고 도량에서 시방세계에 두루하고,
몸으로 시방의 끝없는 허공을 머금으며,
한 터럭 끝에 보왕찰(寶王刹)을 나타내며,
미진 속에 앉아 대법륜(大法輪)을 굴리므로써
망진을 멸해 각(覺)에 부합하니
고로 진여의 묘각명성(妙覺明性)을 발하느니라. 
而如來藏本妙圓心。
非心非空。
非地非水非風非火。
非眼非耳鼻舌身意。
非色非聲香味觸法。
非眼識界如是乃至非意識界。

非明無明明無明盡。

如是乃至非老非死
非老死盡。
非苦非集非滅非道。
非智非得
그러나 여래장 본래의 묘원심(妙圓心)은
마음(心)도 아니요 허공(空)도 아니며,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大)도 아니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6근(根)도 아니며,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6경(境)도 아니며,
안식계(眼識界)에서 의식계(意識界)까지의
6식계(識界;心界)도 아니며,
명(明)도 무명(無明)도
명과 무명이 다한 것[明無明盡]도 아니며,
이와 같이 노(老)도 사(死)도 아니요
노사(老死)가 다한 것도 아니며,
고(苦), 집(集), 멸(滅), 도(道)도 아니며,
지혜[智]도 얻음[得]도 아니며,
非檀那非尸羅。
非毘梨耶非羼提非禪那。

非缽剌若非波羅蜜多。

如是乃至非怛闥阿竭。
非阿羅訶三耶三菩。
非大涅槃
非常非樂非我非淨。
단나(檀那;보시)도 시라(尸羅;지계)도
비리야(毗梨耶;정진), 찬제(羼提;인욕),
선나(禪那;선정)도
발나야(缽剌若;반야)도
바라밀다(波羅密多;到彼岸行)도 아니며,
이와 같이 나아가 달달아갈(怛闥阿竭*)도 아니고,
아라하(阿羅訶*), 삼야삼보(三耶三菩*)도 아니며,
대열반(大涅槃)도 아니며,
상(常) 낙(樂) 아(我) 정(淨)도 아니니라[涅槃四德]. 
*怛闥阿竭; 多陀阿伽度(Tathāgata). 「如實來格之人」 즉 여래(如來).
*阿羅訶(arahā); 阿羅漢. 譯하여 응공(應供:應受供養).
*三耶三菩(Samyaksaṁbodhi); 三藐三菩提. 正等正覺. 정변지(正徧知).
以是俱非世出世故。
即如來藏元明心妙。
即心即空。
即地即水即風即火。
即眼即耳鼻舌身意。
即色即聲香味觸法。
即眼識界如是乃至即意識界。
即明無明明無明盡。
如是乃至即老即死即老死盡。
即苦即集即滅即道。
即智即得即檀那即尸羅。
即毘梨耶即羼提即禪那。
即缽剌若即波羅蜜多。
如是乃至即怛闥阿竭。
即阿羅訶三耶三菩。
即大涅槃即常即樂即我即淨。
이로써 모두 세간도 출세간도 아니므로
곧 여래장의 원래 밝은 마음의 미묘함이
곧 마음이요 공(空)이며,
지수화풍(地,水.火,風)이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며,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며,
안식계(眼識界)요 이렇게 의식계(意識界)까지이며,
명(明)과 무명(無明)이요, 명과 무명의 다함[盡]이며,
이렇게 노(老)와 사(死), 노사의 다함까지이며,
고집멸도(苦,集,滅,道)이며,
지(智)요 득(得)이며,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바라밀다이며,
이렇게 나아가 곧 여래요,
응공이며, 정변지며,
대열반이며, 곧 상락아정(常,樂,我,淨)이니라.
以是即俱世出世故。
即如來藏妙明心元。
離即離非是即非即。

如何世間三有眾生。
及出世間聲聞緣覺。
以所知心測度如來無上菩提。

用世語言入佛知見。
이로써 모두가 곧 세간 출세간의 법인지라
곧 여래장 묘명심(妙明心)의 근원은
긍정[卽]을 떠나고 부정[非]도 떠났으되,
또한 즉(卽)이기도 하고 즉이 아니기도 하거늘
어찌 세간의 삼유(三有)중생과
출세간의 성문연각(聲聞緣覺)들이
그들의 아는 마음으로
여래의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측량하여
세간의 언어로 불지견(佛知見)에 들어가겠느냐? 
譬如琴瑟箜篌琵琶
雖有妙音。
若無妙指終不能發。
汝與眾生亦復如是。
寶覺真心各各圓滿。
如我按指海印發光。
汝暫舉心塵勞先起。
由不勤求無上覺道
愛念小乘得少為足。
비유컨대 마치 거문고, 공후, 비파가
비록 묘음(妙音)을 지녔다 하나
만약 묘지(妙指)가 아니면 결코 발할 수 없듯이
너와 중생들도 그와 같아서
보각진심(寶覺眞心*)이 저마다 원만하건만
내가 손가락으로 누르면 해인(海印*)이 빛을 발하고
너는 잠시만 마음을 두어도 번뇌가 먼저 일어나니,
위없는 깨달음의 길을 힘써 구하지 않고
소승(小乘)을 좋아하여
적은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니라. 
*寶覺眞心; 보배로이 깨어있는 본래의 참 마음.
*海印; 佛이 얻으신 三昧의 이름. 「大海 속에 一切의 事物이 印象되듯이
佛의 智海에 一切의 法이 있는 그대로 찍혀 드러난다」 하여 해인(海印)이라 한다.
   
富樓那言
我與如來寶覺圓明。
真妙淨心無二圓滿。
而我昔遭無始妄想
久在輪迴。
今得聖乘猶未究竟。

世尊諸妄一切圓滅
獨妙真常。
敢問如來一切眾生
何因有妄。
自蔽妙明受此淪溺。

부루나가 말했다.
“저나 여래나 보각(寶覺)이 원명(圓明)하여
참된 묘정심(妙淨心)은 둘도 없이 원만하건만
저는 옛부터 무시(無始)의 망상을 만나
오랫동안 윤회(輪廻) 속에 있었기에
지금 성승(聖乘)을 얻음이
오히려 구경(究竟)치 못하거니와
세존께서는 모든 망상이 다 원만히 소멸하여
홀로 오묘히 참되고 항상되시니
감히 여래께 여쭙건대, 일체중생은
무슨 원인으로 망념(妄念)이 있어서
스스로 묘명(妙明)을 가리우고,
이 윤회에 빠짐을 받나이까?” 
   
佛告富樓那
汝雖除疑餘惑未盡。

吾以世間現前諸事。
今復問汝汝豈不聞。

室羅城中演若達多。
忽於晨朝以鏡照面。
愛鏡中頭眉目可見。
瞋責己頭不見面目。
以為魑魅無狀狂走。
於意云何。
此人何因無故狂走。

부처님이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의심은 제거하였으나
나머지 의혹이 다하지 못했구나.
내가 세간에 현재하는 여러가지 일로
이제 다시 네게 묻겠거니와
너는 어찌 듣지 못하였느냐?
실라벌성의 연야달다(演若達多*)가
새벽에 홀연히 거울로 얼굴을 비추어 보다가
거울 속의 머리에서는 눈썹과 눈이 보이는데
자기 머리에서는 얼굴, 눈이 안보이느냐 화를 내고
형상없는 도깨비라며 미친듯 달아났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은 무슨 이유로
까닭없이 광주(狂走)했겠느냐?”
*演若達多(Yajñadatta); 延若達多, 耶若達多.
「사수(祠授)」라 譯하니 提婆達多(天授;하늘이 정해준 사람)에 반하여
하늘에 제사를 올려 구하고 얻으려는 사람을 말한다. 
   
富樓那言
是人心狂更無他故。

부루나가 말했다.
“그 사람은 마음이 미친 것이옵고
다른 까닭은 없겠나이다.”
   
佛言妙覺明圓本圓明妙。

既稱為妄云何有因。

若有所因云何名妄。
自諸妄想展轉相因。
從迷積迷以歷塵劫。
雖佛發明猶不能返。

如是迷因因迷自有。

識迷無因妄無所依。
尚無有生欲何為滅。

得菩提者如寤時人。
說夢中事心縱精明。
欲何因緣取夢中物。
況復無因本無所有。
부처님이 말했다. “묘각(妙覺)은 명원(明圓)하여
본래 뚜렷하고 명묘(明妙)하거늘
기왕에 허망한 것이라고 일컬었는데
무슨 원인(因)이 있을 것이며,
만일 인한 바가 있다면 어찌 망(妄)이라 하겠느냐?
스스로의 모든 망상이 서로 인이 되어가고
미혹에서 미혹을 쌓아 겁을 다해왔으니,
비록 부처가 밝혀준다 해도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미혹의 인은
미혹으로 인해 스스로 있는 것이니,
미혹에 인이 없음을 알면 망념이 의지할 데가 없고
더욱이 생기지도 않을 터인데
무엇을 멸(滅)하려 하겠느냐?
보리를 얻는 것은 마치 잠을 깬 사람이
꿈속의 일이 마음에 뚜렷하다고 말하지만
무슨 인연을 바라고 꿈속의 물건을 취할 것이며,
하물며 인(因)이 없고 본래 있지 않은 것이겠느냐? 
如彼城中演若達多。
豈有因緣自怖頭走。

忽然狂歇頭非外得。

縱未歇狂亦何遺失。
마치 저 실라벌성의 연야달다와 같나니
어찌 인연이 있어서
스스로 머리를 무서워하여 달아나겠느냐?
홀연히 광증이 그치더라도
머리가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광증이 그치지 않았다 해서 어찌 잃어지겠느냐? 
富樓那妄性如是
因何為在。
汝但不隨分別世間。
業果眾生三種相續。

三緣斷故三因不生。

則汝心中演若達多。
狂性自歇。
歇即菩提。
勝淨明心本周法界。

不從人得
何藉劬勞肯綮修證。
부루나야, 망(妄)의 성품이 이와 같은데
인(因)이 어디에 있겠느냐?
네가 다만 세간(世間)과
업과(業果), 중생의 세 가지 지속되는 것들을
쫓아 분별하지만 않는다면
삼연(三緣)이 끊어지기 때문에
삼인(三因)도 생기지 않아서
곧 네 마음 속의 연야달다 같은
미친 성품이 저절로 그칠 것이며,
그치면 곧 보리(菩提)의
수승히 맑고 깨끗한 마음[勝淨明心]이
본래 법계에 두루할 것이요
사람으로부터 얻을 것이 아니거늘
어찌 애써 뼈를 깎는 수고하여 닦고 증득하겠느냐? 
譬如有人於自衣中。
繫如意珠不自覺知。
窮露他方乞食馳走。
雖實貧窮珠不曾失。

忽有智者指示其珠。
所願從心致大饒富。
方悟神珠非從外得。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의 옷 속에
여의주가 들어 있는데도 알지 못하고
가난하게 타향에서 걸식하며 돌아 다니는데,
비록 실로 가난하기는 하나
여의주를 잃어버린 적이 없기 때문에
홀연히 어떤 지혜로운 이가 그 여의주를 알려주면
원하는 마음대로 큰 부자가 되고
비로소 그 신통한 구슬이 밖에서 얻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으니라."
   
即時阿難在大眾中。
頂禮佛足起立白佛。
世尊現說殺盜婬業。
三緣斷故三因不生。
心中達多狂性自歇。
歇即菩提不從人得。

斯則因緣皎然明白。
云何如來頓棄因緣。
我從因緣心得開悟。
그 때 아난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 지금 말씀하시되, '살도음(殺盜淫) 업의
세 연이 끊어짐으로써 삼인(三因)이 생기지 않고
마음에 연야달다의 미친 성품이 자연히 그치고
그치면 곧 보리인 것이라
사람에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셨는데
이것이 인연(因緣)임이 확연히 명백한데,
어찌하여 여래는 갑자기 인연을 버리시나이까?
저도 인연을 쫓아 마음이 열려 깨달음을 얻었나이다.
世尊此義
何獨我等年少有學聲聞。

今此會中大目犍連。
及舍利弗須菩提等。
從老梵志聞佛因緣。
發心開悟得成無漏。
今說菩提不從因緣。
則王舍城拘舍梨等。
所說自然成第一義。
惟垂大悲開發迷悶。
세존이시여! 이 이치가
어찌 유독 저희 나이 어리고
배워야 할 성문들 뿐이오리까!
지금 이 자리의 대목건련(大目犍連)과
사리불(舍利弗), 수보리(須菩提) 등도
늙은 범지(梵志)였다가 부처님의 인연법을 듣고서
발심하고 개오(開悟)하여 무루(無漏)를 이루었건만
이제와서 ‘보리가 인연을 좇지 않는다' 하시면
곧 왕사성의 구사리(拘舍離) 등이
말하는 바 자연(自然)이 제일의(第一義)가 될 것이오니
바라옵건대 대비를 베푸시어
저희들의 미민(迷悶)을 열어주소서!” 
   
佛告阿難
即如城中演若達多。
狂性因緣若得滅除。
則不狂性自然而出。
因緣自然理窮於是。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마치 저 성중 연야달다의
미친 성품의 인연이 소멸하면
곧 미치지 않은 본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듯이
인연이다 자연이다 하는 이론이
여기에서 끝날 것이니라. 
阿難演若達多頭本自然
本自其然無然非自。

何因緣故怖頭狂走。
若自然頭因緣故狂。
何不自然因緣故失。

本頭不失狂怖妄出。

曾無變易何藉因緣。

本狂自然本有狂怖。

未狂之際狂何所潛。

不狂自然頭本無妄

何為狂走。
아난아! 연약달다의 머리가 본래 자연이라면
본래 그 스스로 그러한 것이어서
그러함도 없고 스스로도 아닐 터인데,
무슨 인연으로 머리가 무서워 미쳐 달아났겠으며,
만약 자연인 머리가 인연 때문에 미쳤다면
어찌하여 자연인 머리가 인연 때문에
잃어지지는 않았느냐?
본래 머리는 잃어버리지 않았는데
광포(狂怖)가 허망하게 생겼다면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으니
어찌 인연을 쫓았다 하겠느냐?
본래 미친 것이 자연이라면
본래 광포가 있다는 것이니
아직 미치지 않았을 때에는
그 광포는 어디에 숨어 있었느냐?
미치지 않은 것이 자연이라면
머리가 본래 잘못된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미쳐 달아나게 되었느냐? 
若悟本頭識知狂走。

因緣自然俱為戲論。
是故我言三緣斷故
即菩提心。
菩提心生生滅心滅。
此但生滅。
滅生俱盡無功用道。
若有自然。
如是則明自然心生。
生滅心滅此亦生滅。
無生滅者名為自然。
猶如世間諸相雜和。
成一體者名和合性。
非和合者稱本然性。

本然非然和合非合。

合然俱離離合俱非。

此句方名無戲論法。
만약 본래의 머리를 깨달아
미쳐서 달아났던 일을 인식하게 되면
인연이니 자연이니가 다 희론이 될 것인지라
그래서 내가 삼연(三緣)이 끊긴 것이
곧 보리심(菩提心)이다 말한 것이니라.
보리심이 생기면 생멸심이 소멸하는
이것도 다만 생멸일 뿐이요
멸과 생이 모두 다하면 공용(功用)의 길이 없는데
만약 자연(自然)이 있다면
이런 것은 곧 분명히 자연심(自然心)이 생기고
생멸심이 멸한 것이니 이 또한 생멸인 것이며,
생멸이 없는 것을 자연이라 한다면
마치 세간에서 모든 것들이 잡다하게 섞여
일체(一體)를 이룬 것을 화합성(和合性)이라 하고
화합하지 않은 것을
본연성(本然性)이라 하는 것과 같거니와,
본연이다, 본연이 아니다,
화합이다, 화합이 아니다거나
화합이나 본연을 다 떠났다거나
떠났다, 안 떠났다도 다 아니다는
이 구절이라야 비로소 희론 없는 법이라 할 것이니라. 
菩提涅槃尚在遙遠。
非汝歷劫辛勤修證。
雖復憶持十方如來。
十二部經清淨妙理。
如恒河沙秖益戲論。
보리와 열반은 오히려 아주 먼 데 있어서
네가 여러 겁에 걸쳐 힘써 닦아 증득할 것이 아니며
비록 다시 시방여래
12부경의 청정한 묘리(妙理)를 기억해 지니기를
항하사와 같이 하더라도 희론만 더할 뿐이니라.
汝雖談說因緣自然決定明了。
人間稱汝多聞第一。
以此積劫多聞熏習。
不能免離摩登伽難。
何因待我佛頂神咒。
摩登伽心婬火頓歇
得阿那含。
於我法中成精進林。
愛河乾枯令汝解脫。
是故阿難汝雖歷劫。
憶持如來祕密妙嚴。
不如一日修無漏業。
遠離世間憎愛二苦。

네가 비록 인연과 자연을 설함이 결정하고 명료하여
사람들이 너를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하지만
이렇게 여러 겁 동안 다문하여 익힌 보람으로도
마등가(摩登伽)의 수난을 면치 못했거니와,
무슨 인(因)이 불정신주(佛頂神呪;楞嚴呪)에 의지하여
마등가 마음 속의 음탕한 불길이 단박에 그치고,
아나함(阿那含) 과(果)를 얻어
나의 법 안에서 정진림(精進林)을 이루었으며,
애욕의 강이 말라붙어 너로 하여금 해탈케 한 것이냐?
그러므로 아난아, 네가 비록 여러 겁 동안
여래의 비밀하고 미묘한 장엄을 기억하여 지녔더라도
하룻 동안 무루업(無漏業)을 닦아서
세간의 증(憎)과 애(愛) 두 고통을
멀리 여의니만 못하느니라. 
如摩登伽宿為婬女。
由神咒力鎖其愛欲。
法中今名性比丘尼。
與羅睺羅母
耶輸陀羅同悟宿因。
知歷世因貪愛為苦。

一念薰修無漏善故。
或得出纏或蒙授記。

如何自欺尚留觀聽
마등가는 숙세(宿世)의 음녀였지만
신주(神呪)의 힘으로 애욕이 소멸되어
나의 법 안에서 이제 성비구니(性比丘尼*)라 하거니와,
라후라(羅睺羅)의 모친인
야수다라(耶輸陀羅)와 함께 숙인(宿因)을 깨달아
역세(歷世)의 원인이 탐애(貪愛)가
고(苦)가 되었음을 알고
일념으로 무루선(無漏善)을 닦아 익힌 연고로
혹 얽매임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혹은 수기(授記)를 입기도 하였거늘
너는 어째서 자탄만 하며
아직 보고 들음에만 머물러 있느냐?"
*性比丘尼; 志性比丘尼. 本性比丘尼. 心性比丘尼. 
   
阿難及諸大眾聞佛示誨。
疑惑銷除心悟實相。
身意輕安得未曾有。
重復悲淚頂禮佛足。

長跪合掌而白佛言。
아난과 대중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의혹이 소멸하고 마음으로 실상(實相)을 깨달아
몸과 마음이 경안(輕安)하여 미증유(未曾有)를 얻고서
거듭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의 발에 정례(頂禮)하고
무릅 꿇고 합장하여 부처님께 아뢰었다. 
無上大悲清淨寶王
善開我心。
能以如是種種因緣方便提獎。

引諸沈冥出於苦海。

“위없는 대비의 청정 보배왕께서
저의 마음을 잘 열어 주시고,
이러한 갖가지 인연과 방편으로
제발(提拔)하고 장려(奬勵)하시며,
깊은 어둠 속에서 인도하여
고해(苦海)를 벗어나게 하시나이다. 
世尊我今雖承如是法音

知如來藏。
妙覺明心遍十方界。
含育如來十方國土。
清淨寶嚴妙覺王剎。

如來復責
多聞無功不逮修習。

我今猶如旅泊之人。
忽蒙天王賜以華屋。
雖獲大宅要因門入。

唯願如來不捨大悲。
示我在會諸蒙暗者。
捐捨小乘必獲如來。
無餘涅槃本發心路。
令有學者從何攝伏疇昔攀緣。

得陀羅尼入佛知見。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에야 비록
이러한 법음(法音)을 이어받고서
여래장(如來藏)의
묘각명심(妙覺明心)이 시방세계에 두루하여
여래 시방국토의
청정하고 보배로이 장엄한 묘각왕찰(妙覺王刹;佛刹)을
품어 길러냄을 알았사온데,
여래께서 다시 꾸짖으시어
 '다문(多聞) 별 도움이 못되서
닦아 익힘만 못하다' 하시니
저는 지금 마치 떠돌던 사람이
홀연히 천왕의 화려한 집 하사를 받은 듯 하오이다.
비록 큰 집을 얻었다 하나
문으로 들어갈 이유[因]가 필요하오니
바라옵건대 여래께서는 대비를 버리지 마시고
저희 회중에 있는 어둠에 덮인 이들이
소승(小乘)을 버리고 반드시 여래께서
무여열반으로의 본래 발심했던 길을 얻어
배우는 이들이 어떻게 과거의 반연을
섭수하고 극복하여야[修行門]
다라니를 얻고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가는지 열어보여 주소서."
作是語已五體投地。
在會一心佇佛慈旨。

이렇게 말하고 오체투지하여
회중에서 일심으로
부처님의 자비하신 말씀을 기다렸다.
   
爾時世尊哀愍會中緣覺聲聞。
於菩提心未自在者。
及為當來佛滅度後。
末法眾生發菩薩心。
開無上乘妙修行路。

宣示阿難及諸大眾。
이때 세존께서 회중의 성문 연각들로서
보리심에 아직 자재하지 못한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또 닥쳐올 부처님 멸도(滅度*) 후
보살심(菩薩心)을 낸 말법시대의 중생을 위하시어
무상승(無上乘;佛乘)으로 향하는
오묘한 수행의 길을 여시어
아난과 대중들에게 펼쳐 보이셨다.
*滅度(Nirvāna); 涅槃, 寂滅, 入滅과 同義. 滅障度苦(장애가 사라져 고해를 넘다).
汝等決定發菩提心。
於佛如來妙三摩提不生疲惓。

應當先明發覺初心二決定義。

云何初心二義決定。
"너희가 결정코 보리심을 내서
부처님 여래의 미묘한 삼마제(三摩提)에
싫증을 느끼지 않으려면
먼저 발각(發覺;始覺)한 초심(初心)에
결정한 뜻 두가지를 밝혀야 하거니와,
무엇이 그 초심의 두 가지 뜻의 결정함이겠느냐?
【先明發覺初心 二決定義】
(1)불생불멸(不生不滅)의 불승(佛乘)에 오르려거든
생멸없는 마음[無生滅心]으로 수행(修行)의 인지(因地)를 삼아야 한다. 
阿難第一義者
汝等若欲捐捨聲聞。
修菩薩乘入佛知見。

應當審觀因地發心。
與果地覺為同為異。

阿難若於因地。
以生滅心為本修因。
而求佛乘不生不滅。
無有是處。
以是義故汝當照明諸器世間。

可作之法皆從變滅。

阿難汝觀世間。
可作之法誰為不壞。
然終不聞爛壞虛空。

何以故空非可作。
由是始終無壞滅故。
아난아, 제일의(第一義)란
너희가 만일 성문(聲聞)을 버리고
보살승(菩薩乘)을 닦아
부처의 지견에 들어가려거든
응당 인지(因地)의 발심(發心)이
과지(果地)의 깨달음과 동일한지 다른지를
자세히 살펴야 하거니와,
아난아, 만일 인지(因地)에서
생멸심으로 근본 수행의 인(因)을 삼아
불승(佛乘)의 불생불멸을 구하려 한다면
이는 옳지 못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너는 마땅히
기세간(器世間*)을 조명(照明)해야 하나니
가작(可作;지을 수 있는)의 법은
다 변멸(變滅;변하여 소멸함)을 따르느니라.
아난아, 네가 세간을 보건대
지을 수 있는 법에 어느 것이 무너지지 않더냐?
그러나 결코 허공이 허물어졌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리니,
왜냐하면 허공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시종(始終) 괴멸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器世間(bhājana-loka); 有情世間. 國土世間. 住處世間. 일체중생이 살아가는 국토세계. 
則汝身中堅相為地
潤濕為水。
煖觸為火動搖為風。

由此四纏
分汝湛圓妙覺明心。
為視為聽為覺為察。
從始入終五疊渾濁。
이러한 즉 네 몸의 단단한 것은 흙,
축축한 것은 물로 되고,
따뜻한 느낌은 불,
움직이는 것은 바람으로 되어
이 4대(大)의 얽힘으로 말미암아
너의 맑고 둥근 묘각명심(妙覺明心)이 나뉘어
보고 듣고 깨닫고 성찰(省察)하는 것인지라
처음부터 끝까지가
다섯 겹으로 혼탁한 것이거니와,
*器世間이 五疊으로 渾濁하다는 것은 4大가 서로 얽혀 돌아감을 쫓아
네 마음이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고 하여 지어내는 것이요,
근본 네 묘명각심(妙覺明心)은 담원(湛圓)한 그대로인 것이다. 
云何為濁。
阿難譬如清水清潔本然。

即彼塵土灰沙之倫。
本質留礙
二體法爾性不相循。

有世間人取彼土塵
投於淨水。
土失留礙水亡清潔。
容貌汩然明之為濁。
汝濁五重亦復如是。
어떤 것을 혼탁이라 하겠느냐?
아난아, 비유컨대 마치 맑은 물은
청결함이 본래 모습이고
저 진토(塵土)나 회사(灰沙) 따위는
본질이 유애(留礙*)하여
두 가지가 법이 그러하니
성품이 서로 같지 아니한데
어떤 사람이 그 진토를 취해
맑은 물에 던지면
흙은 유지력(留止力)을 잃고 물은 청결함을 잃어서
모양이 흐리터분해지면 맑음이 탁(濁)해지듯이
네 탁함의 다섯 무거움[五濁*]도 그와 같으니라.
*留礙; 현상을 유지(留止)하려는 성질. 유지력. 
阿難汝見虛空遍十方界
空見不分。
有空無體有見無覺

相織妄成。
是第一重名為劫濁。
아난아, 네가 시방계에 두루한 허공을 보되
허공과 견(見)을 구분하지 못하거니와,
허공은 있으나 체(體)가 없고
견(見)은 있으이 각(覺)이 없는데
서로 어울려 허망한 것을 이루나니,
이것이 제1중(一重)으로서 겁탁(劫濁)이라 한다.
汝身現摶四大為體。
見聞覺知壅令留礙。
水火風土旋令覺知
相織妄成。
是第二重名為見濁。
너의 몸은 지금 사대가 뭉쳐 체(體)가 되어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막아 유애(留碍)케 하고
수화풍토(水火風土)가 돌아 각지(覺知)케 하면서
서로 어울려 허망한 것을 이루나니,
이것이 제 2중(二重)으로서 견탁(見濁)이라 한다. 
又汝心中憶識誦習。

性發知見容現六塵。

離塵無相離覺無性

相織妄成。
是第三重名煩惱濁。
또 너의 마음 속에
기억하고 인식하고 외우고 익혀서
성품으로는 지견(知見)을 발하고
모양으로는 육진(六塵)을 나타내거니와,
진(塵)을 여의면 상(相)이 없고
각(覺)을 떠나서는 성품이 없건만
서로 어울려 허망한 것을 이루나니,
이것이 제 3중(三重)으로서 번뇌탁(煩惱濁)이라 한다.
又汝朝夕生滅不停。
知見每欲留於世間。
業運每常遷於國土。
相織妄成
是第四重名眾生濁。
또 네가 조석(朝夕)으로 생멸이 멈추지 아니하여
지견(知見)은 늘 세간에 머물려 하고
업(業)의 흐름은 늘 국토를 떠돌려 하면서
서로 어울려 허망한 것을 이루나니,
이것이 제 4중(四重)으로서 중생탁(衆生濁)이라 한다. 
汝等見聞元無異性。
眾塵隔越無狀異生。

性中相知用中相背。

同異失準相織妄成。

是第五重名為命濁。
너희의 견(見)과 문(聞)은 원래 다른 성품이 없건만
온갖 번뇌가 가로막아
까닭이 없이 다른 성품이 생기는 것이며
성품 가운데서는 서로 가깝지만
작용에서는 서로 등져서
같고 다름의 표준이 없는데
서로 어울려 허망한 것을 이루나니,
이것이 제 5중(五重)으로서 명탁(命濁)이라 한다. 
阿難汝今欲令見聞覺知。
遠契如來常樂我淨。
應當先擇死生根本。
依不生滅圓湛性成。

以湛旋其虛妄滅生。
伏還元覺得元明覺。

無生滅性為因地心。
然後圓成果地修證。

아난아, 네가 이제 견문각지(見聞覺知)로 하여금
여래의 상락아정(常樂我淨)에 계합(契合)코자 하거든
응당 먼저 생사의 근본을 택해야 하거니와
불생멸(不生滅)을 의지하여
원담(圓湛)한 성품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담연히 그것을 돌아봄으로써 허망한 생멸이
원각(元覺)으로 되돌아와
원래의 명각(明覺)을 얻는 것인지라
생멸없는 성품을 인지(因地)의 마음을 삼고서
연후에 과지(果地)의 수증(修證)을
원만히 성취해야 하느니라. 
如澄濁水貯於淨器。
靜深不動
沙土自沈清水現前。

名為初伏客塵煩惱。
去泥純水
名為永斷根本無明。
明相精純
一切變現不為煩惱。
皆合涅槃清淨妙德。
마치 흐린 물을 맑힐 때 깨끗한 그릇에 담아
고요함이 깊어지고 흔들림이 없거든
모래와 흙이 저절로 가라앉아서
맑은 물이 앞에 드러남과 같은 것을
「객진번뇌(客塵煩惱)를 처음 굴복시켰다」 하고,
진흙이 가라앉고 깨끗한 물이 됨과 같은 것을
「근본무명(根本無明)을 영원히 끊었다」고 하나니,
상(相)을 관(觀)하여 밝힘(明)이 정순(靜純)해지면
모든 것이 변해 나타나도 번뇌가 되지 않고
다 열반의 청정한 묘덕(妙德)에 부합할 것이니라. 
   
(2)보리(菩提)를 닦으려거든 먼저 번뇌(煩惱)의 근본부터 살펴야 한다. 
第二義者。
汝等必欲發菩提心。
於菩薩乘生大勇猛。
決定棄捐諸有為相。
應當審詳煩惱根本。
此無始來發業潤生
誰作誰受。
阿難汝修菩提。
若不審觀煩惱根本。
則不能知虛妄根塵。
何處顛倒處尚不知。

云何降伏取如來位。
제2의(第二義)란
너희가 반드시 보리심을 발하고
보살승(菩薩乘)에 큰 용맹심을 내서
결정코 모든 유위상(有爲相)을 버리고자 하거든
응당 번뇌의 근본에 대하여
이것이 무시이래로 업을 일으키고 무성히 자라는데
누가 짓고 누가 받는 것인지를 잘 살펴야 하거니와,
아난아! 네가 보리를 닦으면서
만약 번뇌의 근본을 자세히 살피지 않는다면
허망한 근진(根塵)이
어디에서 전도되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라
전도된 곳이 어디인 줄을 모르는데
어떻게 항복받고 여래지위를 취하겠느냐? 
阿難汝觀世間解結之人。
不見所結云何知解。
不聞虛空被汝墮裂。

何以故空無相形無結解故。

則汝現前眼耳鼻舌及與身心。
六為賊媒自劫家寶。

由此無始眾生世界生纏縛故。

於器世間不能超越。
아난아! 너는 세간의 매듭 푸는 사람을 보아라.
맺힌 곳을 보지 못하고서 어찌 풀 줄을 알겠느냐?
허공이 너에게 깨뜨림을 입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거니와,
왜냐하면 허공은 형상이 없어서
맺고 풀 것이 없기 때문이니,
곧 네 앞에서 안이비설(眼,耳,鼻,舌)과 신심(身,心)이란
여섯이 도적이 되고 모의하여
스스로 가보(家寶)를 겁탈하니
이로 말미암아 무시이래의 중생세계가
전박(纏縛*)을 내는 연고로
기세간(器世間)에서 벗어지 못하는 것이니라.
*纏縛; 一切의 煩惱. 煩惱가 能히 眾生을 三界六道 속에 얽어 맨다[纏縛].
阿難云何名為眾生世界。
世為遷流界為方位。

汝今當知東西南北。
東南西南東北西北上下為界。
過去未來現在為世。
位方有十流數有三。
一切眾生織妄相成。
身中貿遷世界相涉。

而此界性。
設雖十方定位可明。

世間秖目東西南北。
上下無位中無定方。

四數必明與世相涉。

三四四三宛轉十二。
流變三疊一十百千。

總括始終六根之中。
各各功德有千二百。
아난아! 무엇을 중생세계라 하느냐?
세(世)는 천류(遷流;변천하는 흐름)이요
계(界)는 방위(方位)이거니와,
너는 마땅히 알라. 동서남북(東西南北)과
동남 서남 동북 서북과 상, 하가 계(界)이고
과거 미래 현재가 세(世)이니,
방위에는 열[十]이 있고 천류(遷流)에는 셋이 있다.
일체 중생은 허망한 상(相)으로 짜여져
몸 안에서 주고받고 떠돌면서[貿遷]
세계와 서로 교섭하는데,
이 계(界)의 (공간적)성품을
비록 시방(十方)이라고 설정했지만
일정한 방위로서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은
세간에서는 동서남북만을 지목할 뿐이다.
상하는 정한 위치가 없고
중간도 일정한 방위가 없지만
동서남북 4방은 필경 분명하여
세(世;시간적)와 더불어 상섭(相涉)하되
삼사사삼(三四四三*)하면 완연히 12(3x4)가 되거니와,
흘러 변하기를 세 번 거듭하여
일십백천(一十百千*)하나니,
처음과 끝을 통틀어 보건대, 육근(六根) 안에는
각각 공덕이 1,200이 있느니라. 
*三四四三; 3世가 4方으로 4方이 3세에 걸쳐서.
三은 過現未 3세(世), 四는 東西南北 4방(方)을 의미함.
*流變三疊 一十百千; 一進十, 十進百, 百進千, 즉 十進을 거듭한다[三疊]는 뜻.
12→120→1200. 
阿難汝復於中克定優劣。
如眼觀見後暗前明。
前方全明後方全暗。
左右傍觀三分之二。
統論所作功德不全。
三分言功一分無德。

當知眼唯八百功德。
아난아! 네가 다시 그 중에 우열을 정해 보아라.
눈으로 보는 견(見)은 뒤는 어둡고 앞은 밝은데,
전방은 온전히 밝고 후방은 온전히 어두우며,
좌우의 곁 시야는 3분의 2가 되나니
통털어 지은 바를 논하자면 공덕이 온전치 못하고,
삼분(三分)하여 공덕을 말하자면
일분(一分)은 공덕이 없는지라
눈은 오직 800의 공덕 뿐임을 알리라. 
如耳周聽十方無遺。
動若邇遙諍無邊際。

當知耳根圓滿一千二百功德。
귀는 시방으로 두루 빠짐없이 듣는데
동(動)으로 가깝고 먼 것이 있는 듯 하나
정(靜)에는 한계가 없으니
귀는 1,200의 공덕이 원만함을 알리라.
如鼻嗅聞通出入息。
有出有入而闕中交。

驗於耳根三分闕一。
當知鼻唯八百功德。
코의 냄새 맡기는 출입식(出入息)을 통하는데
출식(出息)과 입식(入息)은 있으나
중간에 교체되는 동안에는 끊어지니
귀[耳根]에 증험해 볼 때 3분의 1이 비는지라
코는 오직 800의 공덕뿐임을 알리라. 
如舌宣揚盡諸世間出世間智。

言有方分理無窮盡。
當知舌根圓滿一千二百功德。
혀로 선양(宣揚)하기로는
온 세간 출세간의 지혜를 다하거니와
말에는 방법과 배분이 있으나 이치는 다함이 없으니
혀는 1,200의 공덕이 원만함을 알아야 한다. 
如身覺觸識於違順。

合時能覺離中不知。
離一合雙。
驗於舌根三分闕一。
當知身唯八百功德。
몸의 접촉 깨닫기[覺觸]는
나쁘고 좋음[違順]을 인식하되
합할 때는 느끼고[覺], 떨어지면 알지 못하여[不知]
떨어지면 하나요, 합하면 한 쌍이니,
혀[舌根]에 증험해 볼 때 3분의 1이 비는지라
몸은 오직 800의 공덕뿐임을 알리라. 
如意默容十方三世。
一切世間出世間法。
惟聖與凡無不苞容
盡其涯際。
當知意根圓滿一千二百功德。
뜻은 시방삼세(十方三世)의
일체 세간 출세간 법을 묵묵히 용납하되,
성인 범부를 가리지 않고 포용치 못함이 없이
그 끝까지를 다하니
뜻은 1,200의 공덕이 원만함을 마땅히 알리라.
阿難汝今欲逆生死欲流。
返窮流根至不生滅。

當驗此等六受用根。
誰合誰離誰深誰淺。

誰為圓通誰不圓滿。

若能於此悟圓通根。
逆彼無始織妄業流。

得循圓通與不圓根
日劫相倍。
아난아! 네가 이제 생사욕류(生死欲流*)를 거슬러
흐름의 근원을 궁극으로 되돌려
불생멸(不生滅)에 이르고자 한다면
이러한 여섯 수용하는 근(根)이
어느 것은 합하고, 어느 것은 떨어지며,
어느 것은 깊고, 어느 것은 얕으며,
어느 것은 원통(圓通)하고, 원만치 못한 지를
마땅히 검증해야 하거니와,
만약 여기에서 능히 원통의 뿌리를 깨닫고,
저 무시이래의 허망(虛妄)으로 짜여진
업류(業流)를 거스를 수 있다면
원통(圓通)과 원만치 못한 근(根)을 좇아 얻음이
하루와 겁(劫)차이로 배가(倍加)하리라. 
*生死欲流; 나고 죽는 욕계(欲界)의 흐름. 
我今備顯六湛圓明。
本所功德數量如是。
隨汝詳擇其可入者。
吾當發明令汝增進。
十方如來於十八界。
一一修行皆得圓滿無上菩提。
於其中間亦無優劣。
但汝下劣未能於中圓自在慧。

故我宣揚。
令汝但於一門深入。
入一無妄。
彼六知根一時清淨。
내가 이제 여섯 맑고 원명(圓明)한 성품이
본래 지닌 공덕의 수량을 이와 같이 나타냈으니
네가 마음대로 들어갈 만한 것을 선택하거라.
내 마땅히 밝혀 너로 하여금 증진(增進)케 하리라.
시방의 여래는 18계(界)에서
낱낱이 수행하고 다 원만한 무상보리를 얻으신지라
그 중간에 우열(優劣)이 없지만
다만 너는 하열(下劣)하여
그 중에서 아직 원만 자재한 지혜를 얻지 못했으니
고로 내가 선양(宣揚)하여
너로 하여금 다만 일문(一門*)에 깊이 들게 하거니와
하나의 문(門)에 들어가 허망함이 없어지면
저 여섯이 근본을 알아 일시에 청정해지리라."
*一門; 一乘의 가르침. 生死를 벗어나는 길. 단 하나의 出要路.
涅槃으로 들어가는 門. 
   
阿難白佛言世尊。
云何逆流深入一門。
能令六根一時清淨。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찌 하면 흐름을 거슬러 일문(一門)에 깊이 들어서고
육근(六根)이 일시에 청정해지겠나이까?"
   
佛告阿難汝今已得須陀洹果。

已滅三界眾生世間見所斷惑。

然猶未知根中積生無始虛習。

彼習要因修所斷得。

何況此中生住異滅分劑頭數。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이미 수다원과를 얻어
이왕 삼계 중생세간의 견도위(見道位)에서
끊을 바 의혹은 소멸하였으나
아직 육근 속에 오랫동안 쌓여온
무시이래의 허습(虛習)은 알지 못하고
그 습기의 요인(要因)은
수도위(修道位)에서라야 끊어지려니와,
하물며 어찌 그 중에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분제두수(分劑頭數*)겠느냐? 
*見所斷惑; 眞諦를 보아 끊은 惑, 즉 88使를 말한다(孤山). 초과(初果)를 얻음을 의미.
(88使; 三界見惑의 總數. 欲界四諦의 見惑에 32種 見惑(苦諦 10, 集諦 7, 滅諦 7, 道諦 8),
色界, 無色界의 四諦에는 瞋恚가 없으므로 色界의 28種, 無色界의 28種 見惑이 있어
三界의 見惑은 總 88種이라 한다.)
*修所斷得; 修道하여 끊을 바 惑, 즉 81思이다. 2과,3과를 닦는 과정.
(81思; 닦아서 끊어야 할 思惑의 總數. 欲界 五趣의 1地, 色界 四禪天의 4地,
無色界 四空天의 4地, 도합 9地에 매 地마다 9品이 있어 總81品이 있다 한다.)
*生住異滅; 同體無明. 真如 자체의 迷惑. 無始無明.
*分劑頭數; 初住이상 妙覺까지의 42品, 즉 初住로부터 十住, 十行, 十迴向, 十地, 等覺,
妙覺에 이르기까지 많은 단계에서 끊어야 할 미혹의 수(數).
今汝且觀現前六根為一為六。
阿難若言一者。
耳何不見目何不聞。
頭奚不履足奚無語。
若此六根決定成六。
如我今會與汝宣揚微妙法門。
汝之六根誰來領受。
너는 또 현재의 육근이 하나인지 여섯인지 보아라.
아난아, 만약 하나라면
귀로는 왜 보지 못하고, 눈으로는 왜 듣지 못하며,
머리로는 왜 밟지 못하고, 발은 왜 말하지 못하느냐?
만약 육근이 결정코 여섯이라면
내가 지금의 회중에서 네게 미묘한 법문을 설해주면
너의 육근 중에 어느 것이 받아들이느냐?”
   
阿難言我用耳聞。 아난이 말했다. “제가 귀로 듣나이다.” 
   
佛言汝耳自聞
何關身口。
口來問義身起欽承。
是故應知
非一終六非六終一。

終不汝根元一元六。
부처님이 말했다. “네 귀가 스스로 듣는데
무슨 연관이 있길래 몸과 입이
입으로는 뜻을 묻고 몸은 일어나 공경히 받드느냐?
그러므로 응당 알아야 하나니,
「하나가 아님이 결국 여섯이요
여섯이 아님이 결국 하나인지라
결국 네 육근은 원래 하나도 여섯도 아니니라. 
阿難當知是根非一非六。

由無始來顛倒淪替。
故於圓湛一六義生。

汝須陀洹
雖得六銷猶未亡一。

아난아, 마땅히 알라.
이 근은 하나도 여섯도 아니지만,
무시이래로 전도(顚倒)에 빠져있음으로 말미암아
원담(圓湛)한 데서 하나와 여섯이라는
의미가 생긴 것이거니와,
너라는 수다원(首陀洹)은
비록 여섯[六結]의 쇠멸(銷滅)은 얻었으나
아직 하나를 없애지 못한 것이니라. 
*雖得六銷 猶未亡一; 初果에 올라 六塵을 취하지 아니하니 六銷는 얻었다 하겠으나
六塵을 취하는 根의 體에 집착하는 마음(혹은 等覺, 涅槃에의 집착)을 끊지 못했다는 뜻.
如太虛空參合群器。
由器形異名之異空。
除器觀空說空為一。

彼太虛空云何為汝
成同不同。
何況更名是一非一。

則汝了知六受用根亦復如是。

마치 태허공(太虛空)을 여러 그릇에 담아 놓으면
그릇 모양이 다르면 다른 허공이다 하고,
그릇을 없애고 허공을 보면
허공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거니와
저 태허공이 어찌 너를 위해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겠으며,
하물며 어찌 하나이거나
하나가 아니거나 하겠느냐?
네가 요지한 여섯 수용근[六受用根]도
이와 같으니라. 
由明暗等二種相形。
於妙圓中粘湛發見。
見精映色結色成根。

根元目為清淨四大。
因名眼體如蒲萄朵。
浮根四塵流逸奔色。

명(明),암(暗) 등의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져
묘원(妙圓)한 가운데 붙어 잠겨서 견(見)을 발하거든
견(見)의 정수(精髓)가 색(色)을 반영(反映)하고
색이 결합하여 근(根)을 이루니,
근(根) 원래의 목(目)은 청정사대(淸淨四大*)이지만
그로 인해 안체(眼體)가 포도알맹이 같다 하거니와
부근(浮根*)과 4진(四塵*)이
빠르게 흘러 색(色)으로 치닫느니라. 
*淸淨四大; 眼耳鼻舌身 5根의 實體는 勝義根이다는 뜻.
*浮根; 扶塵根. 5관(官;根)을 境을 취하고 識을 발하는 역할을 하는 내적 기관과
눈꺼풀, 귓바퀴 등의 외형적 기관으로 나누어 볼 때,
내적 기관을 승의근(勝義根), 외적 기관을 부진근(扶塵根;浮根)이라 한다.
*四塵; 色, 香, 味, 觸을 통칭한 표현.
*流逸奔色; 곧 바로 外境에 攀緣하여 바쁘게 치닫는 형상.
由動靜等二種相擊。
於妙圓中粘湛發聽。
聽精映聲卷聲成根。

根元目為清淨四大。
因名耳體如新卷葉。

浮根四塵流逸奔聲。

동(動),정(靜)의 두 가지가 서로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묘원(妙圓)한 가운데 붙어 잠겨서 들음[聽]을 발하거든
청(聽)의 정수가 소리[聲]을 반영하고
소리가 말려 근(根)을 이루는데,
근(根) 원래의 목은 청정한 사대(四大)이지만
그로 인해 이체(耳體)를
말려나오는 새 잎과 같다[나선형 귓속] 하거니와
부근(浮根)과 4진(四塵)이
빠르게 흘러 소리[聲]로 치닫느니라. 
由通塞等二種相發。
於妙圓中粘湛發嗅。
嗅精映香納香成根。

根元目為清淨四大。
因名鼻體如雙垂爪。

浮根四塵流逸奔香。

통(通)과 색(塞)의 두 가지가 서로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묘원(妙圓)한 가운데 붙어 잠겨 냄새[嗅]가 일어나거든
후정(嗅精)이 향(香)을 반영하고
그 향을 받아들여 근(根)을 이루는데,
근원(根元)의 목(目)은 청정한 사대(四大)이지만
그로 인해 비체(鼻體)를
쌍손톱[雙垂爪]과 같다[콧구멍 생김새] 하거니와
부근(浮根)과 4진(四塵)이
빠르게 흘러 향(香)으로 치닫느니라. 
由恬變等二種相參。

於妙圓中粘湛發嘗。

嘗精映味絞味成根。

根元目為清淨四大。
因名舌體如初偃月。

浮根四塵流逸奔味。

념(恬;평온)과 변(變;변화) 등의
두 가지가 서로 마주침으로 말미암아
묘원(妙圓)한 가운데
붙어 잠겨서 상(嘗)이 일어나거든
상정(嘗精)이 미(味)를 반영하고
미각을 엮어 근(根)을 이루는데,
근원(根元)의 목(目)은 청정한 사대(四大)이지만
그로 인해 설체(舌體)가
누은 초승달[初偃月]과 같다[혀 모양새] 하거니와
부근(浮根)과 4진四塵)이
빠르게 흘러 미(味)로 치닫느니라. 
由離合等二種相摩。
於妙圓中粘湛發覺。
覺精映觸搏觸成根。

根元目為清淨四大。
因名身體如腰鼓顙。

浮根四塵流逸奔觸。

이(離)와 함(合)의 두 가지가 서로 마찰함으로 말미암아
묘원(妙圓)한 가운데 붙어 잠겨서 각(覺)이 일어나거든
각정(覺精)이 촉(觸)를 반영하고
촉을 잡아 근(根)을 이루는데,
근원(根元)의 목(目)은 청정한 사대(四大)이지만
그로 인해 신체(身體)가
요고상(腰鼓顙*)과 같다 하거니와
이 부근(浮根)과 4진(四塵)이
빠르게 흘러 촉(觸)으로 치닫느니라. 
*腰鼓顙; 요고(腰鼓)는 허리춤에 매고 치는 북. 상(顙)은 팽팽한 면, 이마.
요고의 이마 같다함은 팽팽한 긴장상태로서 건드리기만 하면 곧 반응함을 뜻한다. 
由生滅等二種相續。
於妙圓中粘湛發知。
知精映法覽法成根。

根元目為清淨四大。
因名意思如幽室見。

浮根四塵流逸奔法。

생(生), 멸(滅) 등 두 가지가 상속하여
묘원한 가운데 붙어 잠겨서 지(知)를 발하거든
지정(知精)이 법을 반영하고
법을 받아들여서 근을 이루는데,
근원의 목은 청정한 사대이지만
그로 인해 의사(意思)를
어두운 방에서 보는 것과 같다고 하거니와
이 부근과 4진이
빠르게 흘러 법(法)으로 치닫느니라. 
阿難如是六根。
由彼覺明有明明覺。
失彼精了粘妄發光。


아난아! 이와 같이 6근(根)이란
저 각명(覺明*)에 명명각(明明覺*)이 있음으로 인해
저 정료(精了)를 상실하고
허망한 것에 붙어서 빛을 발하는 것이니라. 
*覺明; 性覺의 真明.
*有明明覺; 그 真明한 覺에서 홀연히 생긴 밝히고자 하는 의지(妄覺,妄想).
性覺은 본디 真明한데 그 真明에서 어떤 알고자 하는 妄覺이 홀연히 일어나면
그로 인해 真覺이 精了(真照性)를 상실하고 妄覺을 쫓아 빛을 발하게 된다는 뜻.
是以汝今
離暗離明無有見體。
離動離靜元無聽質。
無通無塞嗅性不生。
非變非恬嘗無所出。
不離不合覺觸本無。

無滅無生了知安寄。

汝但不循動靜合離
恬變通塞生滅暗明。
如是十二諸有為相。
이로써 너는 이제
명(明) 암(暗)을 여의어서는 볼 물체가 없고
동(動) 정(靜)을 떠나서는 들을 물질이 없고,
통(通) 색(塞)이 없이는 맡을 성품이 생기지 않고,
변(變) 염(恬)이 아니면 맛볼 성품이 나지 않고,
이(離) 합(合)을 하지 않으면
각촉(覺觸)이 본래 없으려니와,
멸(滅) 생(生)이 없다면
요지(了知)함이 어디에[安] 기탁(寄託)하겠느냐?
너는 다만 동(動)정(靜), 합(合)이(離),
염(恬)변(變), 통(通)색(塞), 생(生)멸(滅), 암(暗)명(明)의
이러한 12 유위상(有爲相)을 쫓지 말지니라. 
塵境(六境:有爲相)을 떠나서는 根識(六根)도 없는 것이니,
다만 12유위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
隨拔一根脫粘內伏。

伏歸元真發本明耀。
耀性發明。
諸餘五粘應拔圓脫。

不由前塵所起知見。
明不循根寄根明發。

由是六根互相為用。
하나의 근(一根)을 골라 쫓아서
붙은 것[粘]을 벗겨 안으로 굴복시키고
원래의 진여로 돌아가면 본래의 밝음이 빛을 발하고
비추는 성품이 밝아지려니와,
다른 오근(五根)에 붙은 것도 뽑혀서
원만히 해탈할 것이며,
전진(前塵)이 일으킨 지견(知見)을 말미암지 말아서
밝음(明)이 근(根)을 쫓지 않고
근(根)에 기탁하여 밝음이 일어난다면
이로 말미암아 6근(根)이 서로 작용하게 되리라.
매듭 하나를 골라 풀면 다른 다섯 매듭도 자연 풀리게 된다는 뜻.
阿難汝豈不知。
今此會中
阿那律陀無目而見。
跋難陀龍無耳而聽。
殑伽神女非鼻聞香。
驕梵缽提異舌知味。
舜若多神無身有觸。
如來光中映令暫現。
既為風質其體元無。
諸滅盡定得寂聲聞。
如此會中摩訶迦葉。
久滅意根
圓明了知不因心念。
아난아, 너는 어찌 모르느냐?
지금 이 회중에
아나율타(阿那律陀*)는 눈 없이 보고,
발란타용(跋難陀龍*)은 귀 없이 들으며,
긍가신녀(殑伽神女*)는 코 없이 냄새를 맡고,
교범바제(驕梵鉢提*)는 다른 혀로 맛을 알며,
순야다신(舜若多神*)은 몸 없는 감촉이 있으니
여래광(如來光) 안에서 영(映*)을 잠깐 나타내지만
기왕 바람의 성질이니 그 몸이 원래 없거니와,
멸진정(滅盡定*)으로 적정(寂靜)을 얻은 성문(聲聞)은
이 회중의 마하가섭(摩詞迦葉*) 같아서
의근(意根)이 소멸한지 오래이지만
심념(心念)을 인하지 않고도 원명히 요지하느니라. 
*阿那律陀(Aniruddha; 阿那律,阿泥盧豆); 甘露飯王의 子이니 佛의 堂弟이다.
佛이 成道後에 歸鄉하시니 阿那律과 阿難, 難陀, 優波離 등이
곧 그 때에 出家하여 佛의 弟子가 되었다.
阿那律은 修道精進에 模範的이었으나 佛說法中에 늘 졸았기에
佛로부터 꾸중을 듣고서 7일 동안 잠을 자지 않았다.
이로 인해 眼疾이 생겨 失明하게 되었지만 더욱 修行에 힘쓰니
心眼이 점차 열렸고 終局에는 佛弟子中 天眼第一이 되어
天上地下의 六道眾生을 다 볼 수 있었다.
★日種王(Sūryavajśa; 姓은 釋迦Śākya氏)의 後係 : 4男1女.
     淨飯王의 子:佛, 難陀。
     白飯王의 子:跋提, 提沙。
     斛飯王의 子:提婆達多, 阿難。
     甘露飯王의 子:摩訶男, 阿泥盧豆。
     甘露味女의 子 : 施婆羅.
*跋難陀(Upananda); 龍王名. 難陀龍王의 弟. 두 兄弟 龍이 늘 摩伽陀國에 비를 내려
나라에 飢饉이 없었는지라 缾沙王 때 報恩大會를 열고 두 용왕이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만 보고 비를 내린다고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難陀(善喜,賢喜)」라 불렀다. 佛의 제자가 되었으나 佛이 滅度하시자
이를 기뻐하며 이제부터 자기를 따르라고 하였다 한다.
*殑伽神女; 殑伽(恒伽,Gaṅgā)는 지금의 갠지스강이니, 이 강은 無熱惱池의 南쪽
은코끼리(銀象) 입으로부터 나온다 하여 '殑伽(天堂來)'라 神聖시 하며,
殑伽神女는 이 강의 主呵神이다. 
*驕梵鉢提(Gavājpati); 憍梵波提, 笈房鉢底. 「牛相」이라 譯. 本經5卷에
그는 過去世에 沙門을 輕弄한 口業으로 世世生生 우치병(牛呞病)을 앓았다 하였다.
*舜若多神(Śūnyatā); 舜若多는 「空」이라 譯하니 곧 「主空神」이다.
無色界天도 이 부류이고 그 주된 것 역시 無色質이니 눈으로 볼 수가 없는지라
원래 없다[元無]고 말한다. 그러나 佛力으로 잠깐 나타나기도 하니
정히 自在色이요 無業色이다 하겠다. 「無色界天 淚下如雨」가 바로 이 일과 같다.
*摩訶迦葉(Mahākāśyapa); 10大弟子 중 「頭陀第一의 제자」.
*滅盡定(Nirodhasamāpatti); 心과 心所(心의 作用)를 滅盡시켜 일어나지 않게 하는
無心定으로 無想定과 더불어 二無心定이라 한다.
摩訶迦葉은 이 滅盡定을 얻은지라 意根을 말미암지 않고서도
모든 것을 覺知한다는 것이니, 《維摩經》에 「不起滅定而現諸威儀」라 하였다. 
*映; 光影
阿難今汝諸根若圓拔已
內瑩發光。
如是浮塵及器世間。
諸變化相如湯銷冰。
應念化成無上知覺。
아난아! 이제 네가 6근(諸根)을 원만히 뽑아내서
안으로 환하게 빛을 발한다면
이와 같은 부진(浮塵)과 기세간(器世間)의
모든 변화하는 모습들이 끓는 물에 얼음 녹듯이
한 생각에 무상지각(無上知覺)으로 바뀔 것이니라.
阿難如彼世人聚見於眼。
若令急合暗相現前。
六根黯然頭足相類。

彼人以手循體外繞
彼雖不見。
頭足一辯知覺是同。

緣見因明暗成無見

不明自發。
則諸暗相永不能昏。
根塵既銷
云何覺明不成圓妙。
아난아, 어떤 사람이 견(見)을 눈에 모았는데
급하게 눈을 감아 눈 앞이 어두워지면
6근(根)이 캄캄하기가
머리나 발끝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그 사람이 손으로 몸을 두루 만지면
그가 보지는 못하더라도
머리와 발을 단번에 지각(知覺)하기는
(밝을 때와) 같듯이,
연진(緣塵)을 보는 것은 명(明)에 기인하니
어두우면 견(見)이 없게 되겠지만
밝지 않아도 스스로 지각(知覺)이 발한다면
곧 모든 어두움이 길이 깜깜하게 하지 못하리니
근(根)과 진(塵)을 기왕 소멸시켰다면
어찌 각명(覺明)이 원묘(圓妙)해지지 않겠느냐?"
   
阿難白佛言世尊。
如佛說言。
因地覺心欲求常住。
要與果位名目相應。
아난이 부처님께 말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 말씀처럼
인지(因地)의 깨달은 마음으로 상주(常住)하고자 하면
그 과위(果位)의 명목(名目)에 상응해야 하겠나이다. 
世尊如果位中菩提涅槃
真如佛性菴摩羅識
空如來藏大圓鏡智。
是七種名稱謂雖別。
清淨圓滿體性堅凝。
如金剛王常住不壞。
若此見聽離於暗明。
動靜通塞畢竟無體。

猶如念心離於前塵本無所有。

云何將此畢竟斷滅以為修因。
欲獲如來七常住果。
세존이시여, 과위 중에는 보리(菩提), 열반(涅槃),
진여(真如), 불성(佛性), 암마라식(菴摩羅識;第九清淨識),
공여래장(空如來藏), 대원경지(大圓鏡智)의
이 일곱 가지[七常住果]가 명칭은 비록 다르나
청정하고 원만하며 체성이 단단히 뭉친 것이어서
마치 금강왕처럼 항상 머물러 무너지지 않겠거니와,
만약 보고 듣는 것이 암명(暗明)과
동정(動靜),통색(通塞)을 여의어서는
필경 체(體)가 없다면
마치 생각하는 마음이 전진(前塵)을 여의고는
본래 아무 것도 없다는 것과 같사온데
어찌 필경 단멸(斷滅)할 것으로 수행의 인(因)을 삼아
여래의 일곱 상주과(七常住果)를 얻사오리까? 
世尊若離明暗見畢竟空。

如無前塵念自性滅。

進退循環微細推求。
本無我心及我心所。
將誰立因求無上覺。

如來先說湛精圓常。

違越誠言終成戲論。
云何如來真實語者。
惟垂大慈開我蒙吝。

세존이시여! 만약 명암(明暗)을 여의고는
견(見)이 필경 공(空)하다면
마치 전진(前塵)이 없으면
생각의 자성이 멸하는 것과 같겠거니와,
이리 저리 돌아보고 세밀하게 추구(推求)해봐도
본래 저의 마음(心)과 심소(心所)가 없는 것이라면
장차 무엇으로 인(因)을 삼아
무상각(無上覺)을 구하오리까?
여래께서 앞서 말씀하신
담정(湛精)이 원상(圓常)하다는 것은
성실한 말에 어긋나서 결국 희론(戱論)이 될 터인데
어찌 여래가 진실한 말씀을 하시는 분이겠나이까?
큰 자비를 내리시어 저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소서.”
   
佛告阿難
汝學多聞未盡諸漏。

心中徒知顛倒所因。
真倒現前實未能識。

恐汝誠心猶未信伏。
吾今試將塵俗諸事
當除汝疑。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다문(多聞)만 배우고
아직 번뇌를 다하지 못하여
마음속에 다만 전도의 원인은 알면서도
참으로 전도가 앞에 있는 것은
실로 인식하지 못하는구나!
네가 아직도 진심으로 믿지 않는듯 하니
내가 이제 진속(塵俗)의 사실을 들어서
너의 의혹을 없애주리라."
即時如來敕羅睺羅
擊鍾一聲。
問阿難言汝今聞不。
阿難大眾俱言我聞。
즉시에 여래께서 라후라를 시켜
종을 한 번 치게 하시고,
아난에게 물으셨다. "네가 지금 듣느냐?"
아난과 대중이 다같이 말했다.
"저희가 듣나이다."
鍾歇無聲。
佛又問言汝今聞不。
阿難大眾俱言不聞。
종소리가 스러진 뒤에
부처님이 또 "네가 지금 듣느냐?" 물으시니,
아난과 대중이 함께 말했다.
"듣지 못하나이다."
時羅睺羅又擊一聲。
佛又問言汝今聞不。
阿難大眾又言俱聞。
이때 라후라가 다시 한 번 종을 쳤고
부처님께서 또 "네가 지금 듣느냐?" 하시니,
아난과 대중이 또 "모두 듣나이다." 하였다.
佛問阿難
汝云何聞云何不聞。

阿難大眾俱白佛言。
鍾聲若擊則我得聞。
擊久聲銷
音響雙絕則名無聞。
부처님이 아난에게 물으셨다.
"너는 무엇을 듣는다 하고
무엇을 듣지 못한다 하느냐?"
아난과 대중이 다같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종소리가 울리면 저희가 듣는다 하고
종을 친지 오래이고 소리가 약해져서
음향이 다 끊어지면 듣지 못한다 하나이다."
如來又敕羅睺擊鍾。
問阿難言爾今聲不。
阿難言聲。
여래께서 또 라후라를 시켜 종을 치게 하시고
아난에게 "너는 지금 소리가 나느냐?" 하시니
아난이 답했다. "소리가 나나이다."
少選聲銷佛又問言。
爾今聲不。
阿難大眾答言無聲。
조금 있다가 소리가 스러지자 부처님이 물으셨다.
"너는 지금 소리가 나느냐?"
아난과 대중이 답했다. "소리가 없나이다."
有頃羅睺更來撞鍾。
佛又問言爾今聲不。
阿難大眾俱言有聲。
잠깐 뒤에 라후라가 다시 종을 쳤고
부처님이 또 "너는 지금 소리가 나느냐?" 하시니
아난과 대중이 함께 "소리가 나나이다." 하였다.
佛問阿難
汝云何聲云何無聲。

阿難大眾俱白佛言。
鍾聲若擊則名有聲。
擊久聲銷
音響雙絕則名無聲。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너는 무엇을 소리난다 하고
무엇을 소리나지 않는다 하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종을 쳐서 소리가 나면 소리가 난다 하옵고
종을 친지 오래되어 소리가 약해져서
음향이 다 끊어지면 소리가 없다고 하나이다."
佛語阿難及諸大眾。
汝今云何自語矯亂。
大眾阿難俱時問佛。
我今云何名為矯亂。
부처님께서 아난과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지금 어째서 스스로 말을 교란하느냐?"
대중과 아난이 동시에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희가 어째서 교란한다 하시나이까?"
佛言
我問汝聞汝則言聞。
又問汝聲汝則言聲。
惟聞與聲報答無定。
如是云何不名矯亂。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듣느냐 물으면 너희는 듣는다 말하고,
또 소리가 나느냐 물으면 너희는 소리가 난다 하여
듣는다 소리가 난다 하며 대답이 일정치 못하니
이것이 어찌 교란한 것이 아니겠느냐?"
阿難聲銷無響汝說無聞。

若實無聞
聞性已滅同于枯木。
鍾聲更擊汝云何知。
知有知無自是聲塵。

或無或有
豈彼聞性為汝有無。

聞實云無誰知無者。

아난아, 소리가 스러지고 메아리가
없는 것을 네가 들음이 없다 하지만
진실로 들음이 없다면
듣는 성품이 멸하여 고목과 같을 터인데
다시 친 종 소리를 네가 어찌 알겠느냐?
있는 줄 알고 없는 줄 아는 것은
처음부터 소리가 다했거나
혹 없다가 있다가 하는 것이거늘
어찌 그 듣는 성품이
너를 위해 있거나 없거나 하겠느냐?
들음이 실로 없다고 말한다면
무엇이 없는 것을 알겠느냐?
是故阿難
聲於聞中自有生滅。

非為汝聞聲生聲滅。
令汝聞性為有為無。
汝尚顛倒惑聲為聞。

何怪昏迷以常為斷。

終不應言離諸動靜。
閉塞開通說聞無性。

그러므로 아난아!
소리가 들음[聞] 안에서
스스로 났다가 사라졌다 할지언정
네가 듣는 소리가 나고 소리가 없어지는 것이
네 듣는 성품을 있거나 없게 하는 것이 아니며,
네가 오히려 전도하여
소리를 미혹하여 듣게 된 것이니
항상된 것으로 단멸이라고 혼미하는 것을
어찌 이상하다 하겠느냐?
결코 동정(動靜)이나
폐색(閉塞),개통(開通)을 여의고서
듣는 성품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되느니라.
如重睡人眠熟床枕
其家有人於彼睡時
擣練舂米。
其人夢中聞舂擣聲。
別作他物。或為擊鼓。或復撞鍾。
即於夢時自怪其鍾為木石響。

於時忽寤遄知杵音。
自告家人我正夢時。
惑此舂音將為鼓響。
阿難是人夢中。
豈憶靜搖開閉通塞。
其形雖寐聞性不昏。

縱汝形銷命光遷謝。
此性云何為汝銷滅。
마치 깊이 잠든 사람이 침상에서 숙면을 취할 때
그 집에 있는 사람이 그가 자는 동안
다듬이질이나 방아를 찧으면
그 사람이 꿈결에 방망이와 절구소리를
다른 물건, 혹 북을 치거나 종치는 소린 줄 알고
꿈결에 종소리가 목석(木石)이 울리는 것 같다며
스스로 괴이하게 여겼다가
문득 깨어나서는 곧 절구소리인 줄을 알고
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꿈꾸었을 때
이 절구소리를 미혹하여 북소리인 줄 알았다.' 하거든
아난아, 이 사람이 꿈 속에서
어찌 정요(靜搖), 개폐(開閉), 통색(開塞)을 기억하리오만
몸은 비록 잠들었으나
듣는 성품은 혼미하지 않은 것이니
네 형상이 쇠퇴하여 목숨이 떠나간들
이 성품이 어찌 쇠멸하겠느냐?
以諸眾生從無始來。
循諸色聲逐念流轉。
曾不開悟性淨妙常。
不循所常逐諸生滅。
由是生生雜染流轉。

若棄生滅
守於真常常光現前。
塵根識心應時銷落。
모든 중생이 무시이래로
색(色), 성(聲)을 따르고 망념을 쫓아 유전하면서
일찍이 성품의 정묘(淨妙), 항상함을 깨닫지 못해
항상된 바를 따르지 않고 온갖 생멸을 쫒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세세생생
여러가지로 물들어 유전(流轉)하거니와
만일 생멸을 버리고
진실과 항상됨을 지킨다면 늘 광명이 현전하여
진(塵), 근(根), 식(識)의 마음이 때맞춰 쇠락하리라.
想相為塵識情為垢

二俱遠離。
則汝法眼應時清明。
云何不成無上知覺。
상상(想相)은 망진(妄塵)이요
식정(識情)은 구염(垢染)이니
둘 모두 다 멀리 여의면
곧 너의 법안(法眼)이 때 맞춰 청명해질 것이어늘
어찌 무상지각(無上知覺)을 이루지 못하리오?"
   
大佛頂萬行首楞嚴經卷第四 대불정만행 수능엄경 권 제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