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 2칙 조주지도무난(趙州至道無難)
垂示云。乾坤窄。日月星辰一時黑。
直饒棒如雨點。喝似雷奔。也未當得向上宗乘中事。
設使三世諸佛。只可自知。歷代祖師全提不起。一大藏教詮注不及。明眼衲僧自救不了。
到這裏。作麼生請益。道箇佛字。拖泥帶水。道箇禪字。滿面慚惶。
久參上士不待言之。後學初機直須究取。
수시(垂示)하여 가로대,
천지(天地;乾坤)가 비좁고, 일월성신(日月星辰)이 한꺼번에 어두워지거든,
가사 방(棒)을 비 쏟아지듯 퍼붓고, 할(喝)을 천둥소리 흩어지듯 하더라도
향상종승(向上宗乘) 속의 일을 얻어내지 못하고,
설사 삼세제불(三世諸佛)일지라도 다만 자신들만 알고 계실 뿐,
역대 조사도 온전히 제기(提起)하지 못하고,
일대장교(一大藏敎)로도 설명이 미치지 못하며,
눈 밝은 납승이다 하더라도 제 스스로도 구제하지 못한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청익(請益)해야 하겠는가?
부처[佛]를 두고 말하자니 진흙탕에 물을 더하는 격이요,
참선[禪]을 두고 논하기는 얼굴 가득히 부끄럽고 황송한 것이다.
오래 참구한 상근기의 사람들은 말하기를 기다릴 것 없겠지만
후학으로서 처음 배우는 사람은 다만 모쪼록 참구하여 취하거라.
*直饒; 猶縱使, 即使.
*雨點; 雨滴
*向上宗乘; 宗乘은 宗家에서 표방하는 宗義와 教典을 말하니,
宗家에서 표방하는 極悟의 至極한 宗旨를 向上宗乘이라 한다.
*全提; 完全提起
*拖泥帶水; 和泥合水, 入泥入水, 진흙탕에 물을 더하기,
禪門에서 말로써는 갈등에 갈등을 더할 뿐이라 하여 口頭禪을 얕잡아 하는 말이다.
*慚惶; 慚愧惶恐.
*初機; 初學인 사람.
*上士; ①菩薩의 異稱, 大士. ②上根의 人,
【二】舉
趙州示眾云.
(這老漢作什麼。莫打這葛藤)
至道無難
(非難非易)
唯嫌揀擇
(眼前是什麼。三祖猶在)
纔有語言。是揀擇是明白
(兩頭三面。少賣弄。魚行水濁。鳥飛落毛)
老僧不在明白裏
(賊身已露。這老漢向什麼處去)
是汝還護惜也無
(敗也。也有一箇半箇)
時有僧問。既不在明白裏。護惜箇什麼
(也好與一拶。舌拄上齶)
州云。我亦不知
(拶殺這老漢。倒退三千)
僧云。和尚既不知。為什麼卻道不在明白裏
(看走向什麼處去。逐教上樹去)
州云。問事即得。禮拜了退
(賴有這一著。這老賊)。
【제 2칙】 조주지도무난(趙州至道無難)
조주(趙州)선사가 시중하여 이르되,
(이 늙은이가 무슨 짓을 하려는가? 갈등(葛藤*)짓지 말라.)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고,
(어려운 것도 어니고 쉬운 것도 아니다.)
다만 간택을 꺼릴 뿐이다.
(눈 앞에 이 자가 누구인가, 삼조(三祖)가 계시는가?)
잠깐 언어가 있기만 하면 이것이 간택이요, 이것이 명백인 것이다.
(복잡하게 이끌어가면서 제 자랑[賣弄]에 빠졌구나[少].
물고기가 지나가면 물이 흐려지고, 새가 날면 깃털이 떨어진다.)
나는 명백(明白) 속에 있지 않거늘,
(도적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는데, 이 늙은이가 어디로 가려는가?)
이것을 너희는 도리어 아끼고 있지 않느냐?
(실패다. 그런 사람 거의 없다.)
그때 어떤 스님이 물었다.
"기왕 명백한 속에 계시지 않다면 아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한 번 잘 내질러 주었다. 정신 바짝 차리도록.)
조주선사가 말했다. “나도 모른다.”
(이 늙은이를 한 번 내질러주니 삼천리 밖으로 물러서는구나.)
그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 기왕 모르신데,
무엇 때문에 ‘명백 속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까?"
(어디로 도망가는지 살피고, 쫓아서 나무 위로 올라도록 해라.)
조주선사가 말했다. “묻기를 다 했거든 절이나 하고 물러가거라."
(마침 이 한 수가 있었구먼. 이 늙은 도적이.)。
*葛藤; 煩惱, 法門의 번잡함을 지탄하는표현, 언어 또는 선가 일상의 말,
공안 중의 난해한 어구에 대해 문답을 주고 받는 일 등 여러 의미로 쓰인다.
갈등 속에 있으면 진정한 의미의 선을 얻을 수 없다 하여 이런 것들을 葛藤禪이라 한다.
*至道; 至極한 大道, 佛祖의 大道.
*唯嫌揀擇; 禪宗三祖 僧璨대사의 信心銘 중 「至道無難,唯嫌揀擇」이라는 구절은
佛祖의 大道는 本來平等하고 階級도 差別도 없이 自由自在하건만
다만 眾生의 揀擇으로 인하여 憎愛과 難易의 差別이 생기는 것이니,
만약 取捨도 憎愛도 없다면 十方이 通暢하고 八面이 玲瓏하리라는 것이다. [佛光大辭典]
至極한 大道는 일체의 상(相)을 여읜 것이라서 '眾生의 생각이나 말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는 뜻이니, 금강경의 '若見諸相非相 即見如來'가 바로 이것이다.
*明白; 信心銘의 뒷 구절 但莫憎愛 洞然明白(다만 憎과 愛 따위로 분별하지 않으면
막힘 없이 뻥 뚫려[洞然] 명명백백[明白]하다는 데서 온 말이니,
명백은 애증 따위의 분별이 없는 경지를 말한다.
*兩頭三面; 생각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얽히고 섥혀 어찌하지 못하는 모양새.
*賣弄; 自誇(스스로 자랑하다).
*一箇半箇; 한 개나 반 개, 즉 매우 적다, 거의 없다.
*舌拄上齶; 혀를 입천장에 붙인 다는 것은 정신을 집중하기 위한 하나의 참선방편이다.
*倒退三千; 退倒三千. 전쟁에 패배하여 삼천리를 도망친다는 것에 비유하여
선림에서는 상대의 예리한 機鋒을 감당치 못하고 두려워 물러선다는 의미로 쓰인다.
趙州和尚。尋常舉此話頭。只是唯嫌揀擇。
此是三祖信心銘云。至道無難。唯嫌揀擇。但莫憎愛。洞然明白。
纔有是非。是揀擇。是明白。纔恁麼會。蹉過了也。鉸釘膠粘。堪作何用。
州云。是揀擇。是明白。如今參禪問道。不在揀擇中。便坐在明白裏。
老僧不在明白裏。汝等還護惜也無。汝諸人既不在明白裏。
且道。趙州在什麼處。為什麼卻教人護惜。
五祖先師當說道。垂手來似過爾。爾作麼生會。
且道。作麼生是垂手處。識取鉤頭意。莫認定盤星。
조주화상은 평소 이 화두를 들어 다만 이것이 간택을 꺼릴 뿐이다고 하였다.
이는 바로 3조(三祖)께서 「신심명(信心銘)」에서 말씀하신
「지극한 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至道無難) 다만 간택을 꺼릴 뿐이니(唯嫌揀擇)
단지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但莫憎愛) 통연하여 명백하니라(洞然明白).」 이 말을
'잠깐 옳다 그르다 하기만 하면 간택이거나 명백인 것이다'고 안다면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가져다 붙여대기 좋아해서야 무엇에 쓰겠는가?
조주는 '간택이고 명백이다' 하였으나, 지금의 참선하며 가르침을 구하는 이들은
간택 속에 있지 않고, 쉽사리 명백 속에 앉아 있으니,
'나는 명백 속에 있지 않는데, 너희는 도리어 명백을 아끼고 있지 않느냐?' 하였다.
그대들이 기왕 명백 속에 있지 않다면, 말해보라, 조주는 어디에 있으며,
사람들에게 무엇을 아끼라 하였는가?
오조(五祖) 스승님께서는 “(조주화상이) 네게 지나치도록[似過] 손을 내밀어 주셨거늘,
너는 어찌 알고 있느냐?” 하셨는데, 말해보라, 어떤 것이 손 내밀어 주신 곳인지.
구두(鉤頭;진실*)의 뜻을 알아 취하고, 정반성(定盤星;표현*)을 인정하지 말라.
*鉸釘; 두 금속을 연접하는데 쓰는 구리나 철로 만든 짧은 핀. 대갈못(rivet)
*膠粘; 아교로 붙임. *問道; 求教
*鉤頭; 대저울의 갈고리, 實物. *定盤星; 저울 눈금, 指標.
這僧出來。也不妨奇特。捉趙州空處。便去拶他。既不在明白裏。護惜箇什麼。
趙州更不行棒行喝。只道。我亦不知。若不是這老漢。被他拶著。往往忘前失後。
賴是這老漢。有轉身自在處。所以如此答他。
如今禪和子。問著也道。我亦不知不會。爭奈同途不同轍。
這僧有奇特處。方始會問。和尚既不知。為什麼卻道不在明白裏。更好一拶。
若是別人。往往分疏不下。趙州是作家。只向他道。問事即得。禮拜了退。
這僧依舊無奈這老漢何。只得飲氣吞聲。
此是大手宗師。不與爾論玄論妙。論機論境。
一向以本分事接人。所以道。相罵饒爾接嘴。
相唾饒爾潑水。殊不知。這老漢。
平生不以棒喝接人。只以平常言語。只是天下人不奈何。
蓋為他平生無許多計較。所以橫拈倒用。
逆行順行。得大自在。如今人不理會得。只管道。
趙州不答話。不為人說。殊不知。當面蹉過。
이 스님이 나선 일은 기특하여 마지않다.
조주의 빈틈을 엿보아 문득 내질러 가기를,
“기왕 명백 속에 계시지 않다면 아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니,
조주스님은 방(棒)도 할(喝)도 행하지 못하고, 다만 “나도 모른다”고 하였는데,
만일 이 늙은이가 아니었다면 그가 내질렀을 때 번번히 앞뒤를 분간하지 못했겠지만
다행히 이 늙은이는 몸을 굴림에 자재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답한 것이다.
지금의 선화자(禪和子*)들이 질문을 받으면 “나 역시 알지 못하고
깨달아 얻지도 못했다.”고 하지만 길은 같아도 행적(行跡)이 다른걸 어쩌겠는가?
그 스님은 기특한 데가 있어서 바야흐로 알아차리고 “화상께서 기왕 모르신데,
무엇 때문에 ‘명백 속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까?” 하고 다시 한 번 내질렀으니,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대개 제 스스로 자세히 밝혀 답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조주는 작가인지라 다만 그에게 “묻기를 다 했거든 절이나 하고 물러가거라.” 하니,
이 스님도 여전히 이 늙은이를 어찌하지 못하여 분하지만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禪和子; 참선하는 사람에 대한 친근한 칭호
*同轍; 思想이나 行爲가 일치하는 것.
*分疏; 제 스스로 자세히 밝혀 설명함.
*飲氣吞聲; '기를 마시고 소리를 삼킨다'는 것은 '분하지만 표현할 방법이 없음'을 말한다.
此是大手宗師。不與爾論玄論妙。論機論境。一向以本分事接人。
所以道。相罵饒爾接嘴。相唾饒爾潑水。
殊不知。這老漢。平生不以棒喝接人。只以平常言語。只是天下人不奈何。
蓋為他平生無許多計較。所以橫拈倒用。逆行順行。得大自在。
如今人不理會得。只管道。趙州不答話。不為人說。殊不知。當面蹉過。
이것이 바로 수단 좋은 종사(宗師)인 것이라
현(玄)도 묘(妙)도 논하지 않고 기(機)와 경(境)도 논하지 않아서,
오로지 본분사(本分事)로써 사람을 대했기에, 그래서 말하기를,
“서로 간에 욕설이 난무하는데 주둥이를 이어주고[相罵饒爾接嘴],
침 튀기며 논쟁하는데 침이 마를까 물을 뿌려준다[相唾饒爾潑水*]."고 하였다.
이 늙은이가 평생 방할(棒喝)이 아닌 평상시 쓰는 말로써 사람을 대했다는 것을
별로 알지 못하는데, 다만 이것이 세상 사람인 것이라 어쩔 수 없다.
평생을 거의 남을 염두에 두고 헤아려보지 않았기에 그래서
횡념도용(橫拈倒用*)하고 역행순행(逆行順行)하는 대자재(大自在)를 얻은 것인데,
요즘 사람들은 이치를 회득(會得)하지 못하고,
으례 "조주는 대답도 잘 안해주고, 사람을 위하지도 않았다"고 하는데,
코 앞에서 빗겨 지나간 것이지만 별로 알지 못한다.
*相罵饒爾接嘴; 相唾饒爾潑水와 같이 禪林에서는
「자유자재하여 어떤 국면에 구속받지 않는 경지」에 비유하는 말로 자주 쓰인다.
*橫拈倒用; =橫拈豎放. 염제(拈提)와 평석(評釋)이 자유자재함.
至道無難
(三重公案。滿口含霜。道什麼)
言端語端
(魚行水濁。七花八裂。搽胡也)
一有多種
(分開好。只一般。有什麼了期)
二無兩般
(何堪。四五六七。打葛藤作什麼)
天際日上月下
(覿面相呈。頭上漫漫。腳下漫漫。切忌昂頭低頭)
檻前山深水寒
(一死更不再活。還覺寒毛卓豎麼)
髑髏識盡喜何立
(棺木裏瞠眼。盧行者是它同參)
枯木龍吟銷未乾
(咄。枯木再生花。達磨遊東土)
難難
(邪法難扶。倒一說。這裏是什麼所在。說難說易)
揀擇明白君自看
(瞎。將謂由別人。賴值自看。不干山僧事)。
지극한 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삼중공안<三重公案*>이다. 입 가득히 서리를 머금고[含霜*] 무슨 말을 하려는가?)
언어의 한계일 뿐이로다.
(물고기가 지나가면 물이 흐려진다. 칠화팔렬(七花八裂*)하며 뽐내는구나[搽胡].)
하나에 여러가지가 있고[一有多種*]
(잘 나누어보아도 한 가지일 뿐인데, 어느 때 마쳐지겠는가?)
둘에는 두 가지가 없다[二無兩般*].
(4, 5, 6, 7은 어찌 감당하려는 것이며, 갈등은 때려 무엇하겠느냐?)
하늘 끝에 해 뜨고 달은 지건만
(면전에 드러나 있다. 머리 위에 가득하고 발 밑에도 가득하니,
절대 머리를 쳐들거나 숙이지 말라.)
문지방 너머 산은 깊고 물은 차기만 하니,
(한 번 죽으면 다시 되살아나지 못할 터인데, 솜털이 우뚝 솟는 것을 느끼는가?)
해골의 식(識)이 다하면 기쁨은 어디에 서겠는가?
(관 속에서 눈을 부릅뜬다면 육조<六祖>가 그와 동학<同學;同參>이다.)
고목의 용 울음[枯木龍吟*] 쓰기에는 아직 덜 되었구나.
(쯧쯧! 고목에서 다시 꽃이 피면, 달마가 동토를 다닐 것이다.)
어렵고 어렵더라도
(사법<邪法>이 오히려 부지하기 어려운데, 꺼꾸로 말하는구나.
그 속에 무엇이 있길래 어렵다 쉽다를 말하는가?)
간택(揀擇)인지 명백(明白)인지 그대 스스로 살필지어다.
(허튼소리!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마침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면
'내가 간여할 일이 아니다'고 할테지.)。
*三重公案; 세 번 거듭된 공안, 즉 3조(僧璨)와 조주, 설두에 의해 반복된 공안.
*含霜; 쓸쓸하고 비참한 기분.
*言端語端; 언어의 한계,
즉 언어로는 至道의 妙理를 직접 드러낼 여지가 없다는 의미의 선림용어이다.
*一有多種 二無兩般; 一은 절대적이고 평등한 이치요, 多는 차별한 여러 상(相)이며,
二 또한 차별, 두 가지가 없다[無兩般]는 것은 평등을 말하니,
곧 「平等[一]이 곧 差別[多]이요, 차별[二]이 곧 평등[無兩般]이다」는 뜻이다.
*七花八裂; 禪林用語. 지리멸렬(支離滅裂), 산산히 부숴져서 흩어 없어짐.
그러나 때로는 자재하여 통달무애함을 찬탄하는 말이기도 하다.
*覿面; 목전, 면전.
*搽胡; 수염을 쓰다듬다. 뽐내다.
*髑髏; 해골(骸骨)
*枯木龍吟; 일체의 妄念과 妄想을 끊어 없애는 큰 죽음을 통해 새로이 얻은 大自在.
枯木龍吟銷未乾는 髑髏識盡喜何立에 대한 답으로서
'대자재[龍吟]를 쓰기에는[銷] 아직 덜 되었다[未乾]'는 말이다.
*盧行者; 六祖慧能의 姓이 盧氏인데서 연유한 지칭이다.
*棺木裏瞠眼; =髑髏裏眼睛. 관 속에서 눈을 부릅뜨다. 즉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다.
雪竇知他落處。所以如此頌。至道無難。便隨後道。言端語端。舉一隅不以三隅反。
雪竇道。一有多種。二無兩般。似三隅反一。
爾且道。什麼處是言端語端處。為什麼一卻有多種。
二卻無兩般。若不具眼。向什麼處摸索。
若透得這兩句。所以古人道。打成一片。依舊見。
山是山。水是水。長是長。短是短。天是天。
地是地。有時喚天作地。有時喚地作天。
有時喚山不是山。喚水不是水。畢竟怎生得平穩去。
風來樹動。浪起船高。春生夏長。秋收冬藏。
一種平懷。泯然自盡。則此四句頌頓絕了也。
설두(雪竇)스님은 그의 낙처(落處*)를 알았기에 이렇게 송(頌)했는데,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 하고 뒤따라 "언어의 한계다" 한 것은
한 면을 들춤으로써 나머지 세 면은 유추하지 않은 것이요[舉一隅不以三隅反*],
또 설두스님이 "하나에 여러 가지가 있고, 둘에 두 가지가 없다"라고 한 것은
세 면으로 한 면을 유추한 것과 같다[似三隅反一*].
그대들은 말해보라. 어떤 것이 언어의 한계점이고,
어째서 하나에 도리어 여러가지가 있는 것이며,
둘에는 또 두 가지가 없는 것인가?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면 어떻게 모색해 갈 것인가?
만약 이 두 구절을 투득(透得)한다면 그 때문에 고인이 말한
"타성일편[打成一片*]하면 예대로 산은 산, 물은 물,
장(長)은 장(長), 단(短)은 단(短), 하늘은 하늘, 땅은 땅임"을 볼 것이지만,
어느 때는 하늘을 땅 만들어 부르다가, 어느 때는 땅을 하늘이라 부르고,
어느 때는 산이 산이 아니라 하고, 물이 물이 아니라 해서야
필경에 어찌 평온을 얻겠는가?
바람이 불어오니 나무가 흔들리고(風來樹動),
풍랑이 일어나매 배가 높이 떠오르며(浪起船高),
봄에 싹이 나 여름에 자라나면(春生夏長),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는 갈무리하거니와(秋收冬藏), ~<史記序> 大經, 大順
한가지로 평등히 지니면(一種平懷*)
종적없이 저절로 사라지리라(泯然自盡). ~<信心銘>
(나머지는 생략하고) 이 네 구의 송(頌)으로 마치겠다.
*落處; 解答, 歸着, 歸結點, 要旨.
*三隅反一; 論語에 「한 면을 들춰주는 것으로써 나머지 세 면을 유추하지 못하면
(본래의 지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다(舉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하였다.
여기서 反은 類推의 뜻. 隅는 모서리, 귀퉁이, 구석, 면, 방향.
*三隅反一; 세 면으로 한 면을 유추한다함은 1,2,3,4면 가릴 것 없이
언어와 문자를 여의는 단 한 면만으로 몰고갔다는 뜻이다.
*打成一片; 禪林用語로 融合一體의 뜻.
一切의 情量計較를 제거하여 천차만별한 사물을 한 덩어리로 융합시키는 것.
打는 별다른 뜻이 없고, 의하지 않는 어떤 일을 打라 한다.
*一種平懷; 3조 신심명에서의 그 윗 구절인 '유연(有緣)을 쫓지도 말고,
공인(空忍)에 머물지도 말아서[莫逐有緣 勿住空忍]'의
'有緣과 空忍을 한 가지로 똑같이 여겨 지닌다면' 이런 말이다.
雪竇有餘才。所以分開結裹算來也。只是頭上安頭道。
至道無難。言端語端。一有多種。二無兩般。雖無許多事。
天際日上時月便下。檻前山深時水便寒。到這裏。言也端。語也端。
頭頭是道。物物全真。豈不是心境俱忘。打成一片處。
설두스님은 다른 재주도 있었기에 분개(分開*)도 하고 결과(結裹*)도 하고
산래(算來*)도 하였으나, 다만 이것들은 머리 위에 머리를 얹는 말일 뿐이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이니 언단어단(言端語端), 일유다종(一有多種),
이무양반(二無兩般)이니 하는 것들이 비록 흔치 않은 일이라 하더라도
하늘 끝에서 해가 솟아오를 때면 달은 곧 지고,
문지방 너머 산은 깊을 때 물이 또 차갑다면,
이 때에 이르러서는 언(言)의 한계인가, 어(語)의 한계인가?
낱낱이 모두 도(道)요, 온전한 진실[全真]이거늘,
어찌 이것이 마음과 경계를 한꺼번에 없애고 한 덩어리로 융합해야 할 곳이 아니겠는가?
*分開; 分別開示, *結裹; 꾸러미를 싸서 동여매는 것, *算來; 헤아려[추측해] 보다.
*天際日上時月便下 檻前山深時水便寒;
'해가 뜨면 달이 진다'는 '알만 해지면 죽을 날이 닥친다'는 것이요,
'산은 먼데 물이 차갑다'는 '갈길은 먼데 여건이 좋지 못하다' 즉 '깨달음의 길은
멀기만 한데, 인도해 줄 선지식이 없다'이다. 이것도 언어의 한계냐? 이런 말이다.
개개가 다 道요 낱낱이 全真인 것이니, 부디 心境俱忘하여 打成一片하라는 가르침이다.
圓悟錄에 「圓悟克勤禪師는 어느 스님이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여쭙자,
"입이 화문(禍門;화를 불러들이는 문)이다" 하셨다.」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스님들이
이 「言端語端」으로 말장난을 하는 것을 질타하신 것으로 「圓悟禍門」이라 한다.
雪竇頭上太孤峻生。末後也漏逗不少。
若參得透見得徹。自然如醍醐上味相似。
若是情解未忘。便見七花八裂。決定不能會如此說話。
髑髏識盡喜何立。枯木龍吟銷未乾。
只這便是交加處。這僧恁麼問。趙州恁麼答。
州云。至道無難。唯嫌揀擇。纔有語言。是揀擇是明白。
老僧不在明白裏。是汝還護惜也無。
時有僧便問。既不在明白裏。又護惜箇什麼。
州云。我亦不知。僧云。和尚既不知。為什麼卻道不在明白裏。
州云。問事即得。禮拜了退。
此是古人問道底公案。雪竇拽來一串穿卻。用頌至道無難。唯嫌揀擇。
如今人不會古人意。只管咬言嚼句。有甚了期。
若是通方作者。始能辨得這般說話。
설두스님은 머리 위에 외로이 우뚝 선 분[太孤峻生*]이지만
끝 부분에서는 느슨함[漏逗*]이 적지 않았다.
만약 참득(參得)하고 꿰뚫어 보아서 철저히 얻는다면,
저절로 제호(醍醐)의 상미(上味)를 맛본 것과 같아지겠지만,
만약 정해(情解*)를 버리지 못하고 쉽게 지리멸렬(支離滅裂)해 보인다면
결정코 이와 같은 설화(說話)에 부합해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해골의 식(識)이 다하면 기쁨은 어디에 서겠습니까?
고목용음(枯木龍吟)을 녹이기(쓰기)에는 아직 덜 말랐다[未乾]' 하였는데,
다만 이것은 다만 바꿔 붙인 곳[交加處*]이니,
이 스님은 그렇듯 물었고, 조주는 그렇듯 답했다는 것이다.
*太孤峻生; 3칙의 太廉纖生도 太孤危生도 아닌 '외로이 우뚝 선 사람'이라는 뜻.
*漏逗; ①공안의 구성요소로서 상대에게 짐짓 허(虛)를 보이거나
진실과 다른 말을 하므로써 의심을 내게 하고 깨닫게 하는 방편을 말한다.
"나도 모른다" 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왜 모른다 했을까?
②소홀(疏忽), 疏漏(하는 일이니 생각 등이 찬찬하지 못하여 거칠고 엉성함).
*情解; 情으로 理解하기.
*交加處; 말을 바꾸어 덧붙인 곳.
즉 그 스님의 질문은 마치 '해골의 식(識)이 다하면 기쁨은 어디에 서겠는가?'와 같고,
조주의 답은 '크게 죽었다가 살아나 대자재를 얻어 쓰기에는 아직 덜 익었다.'와
같다는 것이다.
「조주스님은 말했다.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고, 다만 간택을 꺼릴 뿐이다.
잠깐이라도 언어가 있기만 하면 이것이 간택이요, 명백인 것이다.
노승(老僧)은 명백 속에도 있지 않거늘, 너희는 도리어 아끼고 있지 않느냐?"
그때 어느 스님이 물었다. "기왕 명백 속에 계시지 않는다면 무엇을 아끼십니까?"
조주가 "나도 모른다." 하니, 그 스님이 "화상께서 기왕 모르시면서
어째서 명백 속에 계시지 않는다 하셨습니까?" 하자,
조주는 "묻기를 마쳤거든 절이나 하고 물러가라." 하였다. 」
이것은 옛사람이 도(道)를 여쭌 공안(公案)인데, 설두스님이 한 꼬챙이에 꿰어다가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 송(頌)해 주었건만
요즘 사람들은 고인의 뜻에 부합하지 못하고,
오로지 언구(言句)만 씹고 또 씹으니, 마칠 날을 어찌 기약하겠는가?
이 방면에 통한 작자라면 이런 설화(說話)를 변별(辨別)해낼 수 있을 것이다.
不見僧問香嚴。如何是道。嚴云。枯木裏龍吟。
僧云。如何是道中人。嚴云。髑髏裏眼睛。
僧後問石霜。如何是枯木裏龍吟。霜云。猶帶喜在。
如何是髑髏裏眼睛。霜云。猶帶識在。
僧又問曹山。如何是枯木裏龍吟。山云。血脈不斷。
如何是髑髏裏眼睛。山云乾不盡。
什麼人得聞。山云。盡大地未有一箇不聞。
僧云未審龍吟是何章句。山云。不知是何章句。聞者皆喪。
復有頌云。
枯木龍吟真見道。髑髏無識眼初明。
喜識盡時消息盡。當人那辨濁中清。
雪竇可謂大有手腳。一時與爾交加頌出。然雖如是。都無兩般。
雪竇末後有為人處。更道難難。只這難難。也須透過始得。
何故。百丈道一切語言。山河大地。一一轉歸自己。
雪竇凡是一拈一掇。到末後須歸自己。
且道。什麼處是雪竇為人處。
揀擇明白君自看。既是打葛藤頌了。因何卻道。君自看。
好彩教爾自看。且道。意落在什麼處。
莫道諸人理會不得。設使山僧到這裏。也只是理會不得。
모르는가? 어느 스님이 향엄(香嚴)에 물었다. "무엇이 도(道)입니까?"
"고목 속 용 울음[枯木裏龍吟]이니라."
"어떤 것이 도(道) 안의 사람입니까?"
"해골(骸骨) 속 눈이니라[髑髏裏眼睛]."
이 스님이 훗날 석상(石霜)스님께 물었다. "어떤 것이 '고목 속 용 울음'입니까?"
"마치 기쁨을 휴대하고 있는 것과 같다."
"'해골 속의 눈'은 또 어떤 것입니까?"
"마치 식(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이 스님이 또 조산(曹山)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고목 속 용 울음'입니까?"
"혈맥(血脈; 자손,후손)이 끊기지 않는다.<고목 속에서 용 울음소리가 나면>"
"어떤 것이 '해골 속의 눈'입니까?"
"덜마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듣게 됩니까?"
"온 땅에 듣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용의 울음'이 어떤 장구(章句)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장구인지 모르겠지만 들으면 다 목숨을 잃는다." 하고서,
다시 게송으로 말했다.
고목의 용 울음소리는 진실하게 도(道)를 안 것이요[枯木龍吟真見道],
해골에 식(識)이 없어지면 눈이 비로소 밝아진다[髑髏無識眼初明].
기쁨의 식[喜識]이 다할 때 소식(消息)도 다할 터인데[喜識盡時消息盡],
그 사람이 탁한 중에 맑은 것을 어찌 분별하리오[當人那辨濁中清]?
설두스님은 가히 큰 수완을 지녔다 하리라.
한꺼번에 송(頌)으로 바꾸어 덧붙여 주었으니.
비록 그렇더라도 두 가지라고는 도무지 없다.
설두스님은 말후(末後)에 사람들을 위하는 데가 있어서
다시 "어렵고 여렵겠지만[難難*]"이라 하였으나,
다만 이 어렵고 어려움을 반드시 투과(透過)해야 한다.
왜냐? 백장(百丈)스님이 “일체의 언어와 산하대지가
낱낱이 굴러 자기에게 돌아온다" 하셨기 때문이다.
설두스님은 대체로 하나를 들추고 하나를 제기하다가
끝에 가서는 마침내 자기에게로 돌아갔는데,
말해보라. 어디가 설두스님이 사람을 위한 곳인가?
"간택(揀擇)인지 명백(明白)인지 그대 스스로 살피라" 하였는데,
기왕 갈등의 송(頌)을 하고서 무엇 때문에 도리어
"그대들 스스로 살피라" 하였겠는가? 운 좋게 그대들더러 스스로 살피라 하였으니,
말해보라. 뜻이 어디에 있겠는지.
여러분들은 이치에 회합하지 못하겠다고 말하지 말라.
설사 산승(山僧)일지라도 이에 이르러서는 이치에 회합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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