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巖錄

벽암록(碧巖錄) 제5칙 _설봉속립(雪峯粟粒) _설봉선사의 좁쌀 알맹이

碧雲 2021. 5. 14. 21:45

垂示云。
大凡扶豎宗教。須是英靈底漢。有殺人不眨眼底手腳。方可立地成佛。
所以照用同時卷舒齊唱。理事不二。權實並行。
放過一著。建立第二義門。直下截斷葛藤。後學初機難為湊泊。
昨日恁麼。事不獲已。今日又恁麼。罪過彌天。
若是明眼漢。一點謾他不得。其或未然。虎口裏橫身。不免喪身失命。
試舉看。

 

수시(垂示)하여 가로대,
대체적으로 가르침의 근본 취지를 붙들어 세우는 데는 모름지기 영특한 놈이라야 하고,
사람을 죽이고 눈 깜빡하지 않는 수완이 있어야 비로소 그 자리에서 성불할 수 있을 것이라
그래서 조용동시(照用同時*)하고 권서제창(卷舒齊唱*)하기도 하고,
이사불이(理事不二*)케 하고, 권실병행(權實並行*)하기도 하며,
방과일착(放過一著*)하고서 제2의문(第二義門*)을 세우기도 하여
직하(直下)에 갈등(葛藤*)을 절단해버리는데,
처음 배우는 후학(後學)의 근기(根機)가 다가서기는 어렵다.
어제에 그랬던 것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오늘에도 그러하다면 죄의 허물이 하늘에 가득하다.
눈 밝은 놈이라면 절대 당하지 않겠지만
혹 그렇지 못하다면 호랑이 입 속에 빨려들어가 목숨 잃기를 면치 못한다.
예를 들어 살펴보자. 

 

*照用同時; 照는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가를 살피는 것이요,
用은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대한 대응이니, 이 두가지를 동시에 행하는 것을 말한다.
*卷舒齊唱; 쥔다[卷]는 것은 把住요, 편다[舒]는 것은 放行을 말하니, 스승이 파주와 방행의
두 가지 기법을 동시에 운용하여 학인을 이끄는 것을 권서제창(卷舒齊唱)이라 한다.
*理事不二; 이치와 현상이 둘이 아니게 하다.
예를 들어 손발이 움직이는 것은 일(事)이요,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이치(理)인데,
발이 움직이기를 마음이 원하여 발을 내딛었을 때, 마음(理)과 발(事)은 다르지만
따로 움직일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하여 이사불이(理事不二)라고 한다.
*權實並行; 權은 한때 필요에 따라 마련한 방편 즉 권모(權謀)이니 잠시 쓰고 버리는 것이요,
實은 구경불변의 이치이니, 일시적인 방편과 진실한 이치를 병행하는 것을 말한다.
*放過一著; 一著은 바둑에서의 '한 수'.  放過는 '봐주다, 접어주다, 지나치다'
 '한 수 봐준다' 함은 자신이 처한 높은 경계를 상대에 맞춰 낮쳐주는 것을 말한다.
*第二義門; 向下門. 大悟의 境界에서 전환하여 학인의 迷惑한 경계에 순응하면서
妙用을 자재히 나타내 지도하는 방편문.
*葛藤; '칡넝쿨', ①번뇌, ②법문을 번거롭다고 배척하는 것, ③禪家의 일상의 말.
禪林에서는 문자나 어구가 칡넝쿨 얽히고 섥히듯 생각을 오가게 하는 것, 즉
공안 중의 난해한 어구, 또는 난해한 어구를 해석하고 설명한 말들을 갈등이라 한다.

 

 【五】舉
   雪峰示眾云
   (一盲引眾盲。不為分外)
   盡大地撮來如粟米粒大
   (是什麼手段。山僧從來不弄鬼眼睛)
   拋向面前
   (只恐拋不下有什麼伎倆)
   漆桶不會
   (倚勢欺人。自領出去。莫謾大眾好)
   打鼓普請看
   (瞎。打鼓為三軍)。

 

 【제 5칙】 설봉속립(雪峯粟粒) _설봉선사의 좁쌀 알맹이
   설봉(雪峰)선사가 대중들에게 말했다.
   (한 맹인이 여러 맹인을 이끄는 격이지만 분수에 벗어나지 않는다.)
   온 대지를 움켜쥐어보니 좁쌀 알맹이만 한데[盡大地撮來如粟米粒大*]
   (이것은 무슨 수단인가? 나는 여지껏 귀안정<鬼眼晴*>을 굴려본 적이 없다.)
   면전(面前)에 던져주어도
   (다만 던져서 떨어지지 않을까 염려한다면 기량<伎倆>일 것이 무엇이리오?)
   칠통(漆桶*)들이 알아듣지 못하니,
   (세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겼으니 자진출두<自領出去*>하라.
   대중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
   북을 두드려 널리 보기를 청하노라.
   (눈먼 놈이 북치는 것으로 삼군<三軍*>을 삼는구나.)。

 

*盡大地撮來如粟米粒大; 이 공안의 주제이다.
無門開和尚은 "내가 법에 자재한 법왕이 되면 온 대지가 해탈문이요, 온 대지가 自己며,
온 대지를 움켜쥐면 좁쌀만 하다[盡大地撮來如粟米粒]"고 하였고,
(我為法王於法自在。盡大地是解脫門。盡大地是自己。盡大地撮來如粟米粒。
盡大地是沙門一隻眼。無三界可出。無涅槃可證。上無攀仰。下絕己躬。
亦無人亦無佛。大千沙界海中漚。一切聖賢如電拂。<無門開和尚語錄卷下>)
또 平江府虎丘紹隆禪師는 어느 중이 "古人이 온 천지를 움켜쥐어보니 좁쌀알만 하여
사람들의 면전에 던져 주었으나 칠통이라 알지 못하니,
북을 쳐서 널리 보기를 청한다고 하였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열 발짝 안[一畝之地]의 농작물을 해치는 많은 것들[三蛇九鼠]이
스승의 뜻을 모르겠다고 하면서 스승께 다시 지도해주기를 청하는데,
아무리 큰 입[海口]일지라도 설명하기 어렵거니와, 온 대지가 기왕 좁쌀알만 한데,
삼라만상, 인축(人畜), 초개(草芥)가 어디에 있겠느냐?[一法無可得]" 하였다.
*鬼眼睛; 禪林用語. 요괴(妖怪)의 눈동자.
바르지 못하거나 추호의 가치가 없는 견해에 비유한다.
*漆桶; 먹물 담는 통이니, '無明에 가려 깜깜한 형세'를 뜻한다.
*自領出去; 「自領出頭」 중국 법정용어로 스스로 법정에 나가 죄상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三軍; 옛날의 左, 中, 右 三軍, 즉 全軍. 오늘날에는 陸, 海, 空軍.

 

長慶問雲門。雪峰與麼道。還有出頭不得處麼。
門云。有。慶云。作麼生。門云。不可總作野狐精見解。
雪峰云。匹上不足。匹下有餘。我更與爾打葛藤。
拈拄杖云。還見雪峰麼。咄。王令稍嚴。不許攙奪行市。
大溈哲云。我更為諸人。土上加泥。拈拄杖云。看看。
雪峰向諸人面前放屙。咄。為什麼屎臭也不知。

 

장경(長慶;854~932)이 운문(雲門;864~949)에게 물었다.
"설봉(雪峰)의 이와 같은 말에 출두(出頭*)해서는 안될 곳이 있는가?"
운문이 말했다. "있습니다." 장경이 "무엇인가?" 하니,
운문은 "절대 야호정(野狐精*) 견해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설봉은 말하기를, "위로 견주기에는 부족하고 아래에 비하면 여유가 있지만
나는 도리어 그대들과 더불어 갈등(葛藤)을 타파하겠다." 하고서,
주장자를 들더니, "설봉이 보이느냐? 쯧! 왕령(王令)이 지엄하니
행시(行市*)를 강탈해서는 안 된다." 하였고,
대위철(大溈哲*)선사는 "내가 다시 여러분을 위해 토상가니(土上加泥*)하겠다." 하고,
주장자를 들더니, "살피고 살피거라. 설봉이 여러분 면전에다 똥을 누었거늘,
쯧쯧! 왜 똥 냄새를 못 맡느냐?" 하였다. 

 

*與麼; 禪林用語. 宋代의 俗語로서, '恁麽' 지금의 '如此'와 같은 말이다.
*出頭處; '머리를 내밀 곳'이라는 것은 '답답함을 느껴 나서서 해소하고싶은 것'을 말한다.
*野狐精; 禪林用語. 들여우의 혼령이 환영으로 변해 사람을 속인다는 것으로서
자칭 見性悟道했노라 하며 타인을 기만하는 사람에 비유하는 용어이다.
*行市; ①가격, 물가, 시세, 좋은 시기 ②意思
*大溈哲; 潭州大溈慕哲真如禪師. 名慕喆, 臨川聞氏.
建昌永安圓覺律師로부터 具戒하고, 翠巖真禪師의 법을 이었다.
*土上加泥; 흙 위에 진흙을 더하다. 문자와 언어로 형상화 하였으니 이미 흙과 다름 없는데,
거기에다 다시 문자와 언어를 써 덧붙인다는 뜻이다.
설봉이 똥을 누었다는 것에도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雪峰示眾云。盡大地撮來如粟米粒大。古人接物利生。有奇特處。只是不妨辛懃。
三上投子。九到洞山。置漆桶木杓。到處作飯頭。也只為透脫此事。及至洞山作飯頭。
一日洞山問雪峰。作什麼。峰云。淘米。山云。淘沙去米。淘米去沙。
峰云。沙米一齊去。山云。大眾喫箇什麼。峰便覆盆。
山云。子緣在德山。指令見之。纔到便問。從上宗乘中事。學人還有分也無。
德山打一棒云。道什麼。因此有省。

 

설봉(雪峰)은 대중에게 "온 대지를 움켜쥐면 좁쌀과 같다."고 하였다.
옛사람의 접물이생(接物利生*)은 기이하고 특별한 데가 있어서
다만 이것이 모진 고난이 되더라도 무방한 것이라
투자(投子)를 세 번 찾아가고, 동산(洞山)에게 아홉 차례 갔으나
칠통(漆桶)과 목표(木杓*)는 그대로였고, 가는 데마다 반두(飯頭*)생활만 하다가
다만 그런 일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산(洞山)을 찾아가 반두(飯頭)가 되었는데,
하루는 동산(洞山)이 설봉에게 물었다. "무엇 하느냐?"
설봉이 "쌀을 일고 있습니다." 하자,
동산이 "모래를 일궈서 쌀을 보내느냐, 쌀을 일궈서 모래를 보내느냐?" 물으니,
설봉은 "모래와 쌀을 한꺼번에 보냅니다." 하는지라,
동산이 "대중들은 우엇을 먹으라고!" 하자, 설봉이 갑자기 쌀 씻던 대야를 엎어버리니,
동산이 "너의 인연은 덕산(德山)에게 있다." 하며 찾아뵈라 하였다.
마침내 덕산에 이르러 "위로부터 내려온 종승(宗乘*) 중의 일에 저에게도 어떤 지분이
있겠습니까?" 하고 여쭙자, 덕산이 한 방(棒)을 후려치며 "무슨 말이냐?" 하니,
이로 인해 깨달은 바가 있었다. 

 

*接物利生; 중생을 접인(接引)하고 화도(化導)하여 그 근기에 맞게 이익을 주는 것.
*木杓; '나무로 만든 자루'이니, 새는 그릇 즉 유루(有漏)를 뜻한다.
*飯頭; 절에서 대중의 식사를 담당하는 직책.
*宗乘; 각 禪門과 淨土門에서 표방하는 宗義와 教典

 

後在鰲山阻雪。謂嵓頭云。我當時在德山棒下。如桶底脫相似。
嵓頭喝云。爾不見道。從門入者。不是家珍。
須是自己胸中流出。蓋天蓋地。方有少分相應。
雪峰忽然大悟。禮拜云。師兄今日始是鰲山成道。

 

훗날 오산(鰲山)에서 폭설에 갇혀 있을 때 암두(巖頭;828~887)에게 말하기를,
"제가 덕산의 방(棒) 아래 있을 당시에는 칠통 밑바닥이 떨어져나간 것 같았습니다." 하니,
암두가 할(喝)을 하고서 "그대는 듣지 못했는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이미 이것이 내집[自家]의 진보(珍寶)가 아니다'는 말을.
모름지기 자기 흉중(胸中)에서 흘러나와 하늘을 가리고 땅을 덮어야만이
비로소 조금이나마 상응(相應)할 것이네." 하였다.
설봉은 홀연히 대오하여 절하며 말했다.
"사형! 오늘이 오산(鰲山)에서 도를 이루는 기점(起點)이겠습니다."

 

*桶底脫; 明白, 覺悟에의 비유.
*從門入者 不是家珍; 禪林用語. 진정한 진보(珍寶)는 제집[自家] 안에 있다는 것이니,
개오(開悟)의 가장 중요한 관건은 각자가 본래 구비하고 있는 불성(佛性)을
밝혀 알지 못하고 거꾸로 밖을 향해 추구해 가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는 뜻으로,
[五燈會元卷第七 福州雪峰義存禪師 章]에 나오는 말이다. 

 

如今人只管道。古人特地做作。教後人依規矩。
若恁麼。正是謗他古人。謂之出佛身血。
古人不似如今人苟且。豈以一言半句。以當平生。
若扶豎宗教。續佛壽命。所以吐一言半句。
自然坐斷天下人舌頭。無爾著意路作情解。涉道理處。
看他此箇示眾。蓋為他曾見作家來。
所以有作家鉗鎚。凡出一言半句。不是心機意識思量鬼窟裏作活計。直是超群拔萃。
坐斷古今。不容擬議。他家用處。盡是如此。

 

요즘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옛사람들은 격외[格外;特地]의 일을 만들어내서
후세 사람들을 법도(法度;規矩)에 따르도록 가르친다."고들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이야말로 옛사람을 비방하는 것이니,
부처님 몸에서 피흘리게 하는 것이다 하리라.
옛사람들은 요즘 사람처럼 구차(苟且)하지 않았거늘
어찌 일언반구(一言半句*)로 살았겠는가?
 '만약 가르침의 근본 취지를 붙들어 세우고 부처의 수명을 이어가고자 하여
그래서 일언반구(一言半句)를 토한다면, 자연히 천하인의 혀끝을 좌단(坐斷)할 것이며,
그대들이 뜻을 알려는 데[意路*]만 집착하여 정해(情解*)를 짓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할지 방도를 찾게 될 것이다'는 이러한 그의 시중(示眾)을 살피건대,
대충 그가 일찍이 작가(作家)의 길을 걸어왔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작가의 겸추(鉗鎚*)에서 내뱉는 대개의 일언반구는
심기(心機)나 의식(意識)으로 귀신굴 속에서 살아가려는 헤아림이 아니요,
바로 발군(拔群)의 출중(出衆)함인 것이라
예와 지금[古今]을 좌단(坐斷)해버리고, 의의(擬議*)하기를 용납치 않았으니,
그 가문에서 사용하는 것들이 다 이와 같았다.

 

*一言半句; 一言半字. 한 마디 말과 반 구절이니, '지극히 적은 말'이라는 뜻.
여기서는 '문자와 언어에 의지하는 것'을 뜻한다.
*意路; 뜻으로 통하는 길.
*情解; 흔히 '알음알이'라고 하나, 엄밀히 情은 당시에 근(根)을 情이라 하였다 하니,
 '감관으로 이해하다', 즉 진리에 곧바로 깨달아 들어가지 못하고
마음에 형상을 지어 그로써 이해하려는 것을 말한다.
*鉗鎚; 鉗은 쇠 부젓가락, 鎚는 철추, 둘 다 금속을 단련하는데 쓰이는 도구.
선림에서는 '스승의 엄격한 지도법'에 비유한다.
*擬議; 일의 시비곡직(是非曲直)을 헤아려 그 가부를 의논(議論)하는 일.

 

一日示眾云。南山有一條鱉鼻蛇。汝等諸人切須好看取。
時稜道者出眾云。恁麼則今日堂中大有人喪身失命去在。
又云。盡大地是沙門一隻眼。汝等諸人。向什麼處屙。
又云。望州亭與汝相見了也。烏石嶺與汝相見了也。僧堂前與汝相見了也。
時保福問鵝湖。僧堂前即且置。如何是望州亭。烏石嶺相見處。鵝湖驟步歸方丈。
他常舉這般語。示眾。

 

하루는 시중(示眾)하여 "남산(南山)에 별비사(鱉鼻蛇*) 한 마리가 있으니,
너희 모두는 모쪼록 잘 살피거라."고 하자,
이때 능도자(稜道者*)가 대중 앞에 나서서 말하기를,
"그렇다면 오늘 법당 안에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하고서,
또 "온 대지[盡大地]가 사문(沙門)의 일척안(一隻眼;頂門眼)이라면
여러분들은 어느 곳에다 똥을 누겠는가?" 하더니, 다시 말하기를,
"망주정이 그대와 더불어 서로 보고, 오석령이 그대와 서로 마주보며,
승당(僧堂) 앞이 그대와 더불어 마주보고 있다."고 하였다.
이때 보복(保福*)이 아호(鵝湖*)에게 물었다. "승당(僧堂) 앞은 그만 두더라도
망주정(望州亭*)과 오석령(烏石嶺*)을 마주보고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아호(鵝湖)는 방장실로 뛰어 돌아가버렸다.
그는 늘 이런 말로 시중하였다. 

 

*별비사(鱉鼻蛇); 뱀 앞머리에 거북등 무늬가 있는 독사.
雪峰의 鱉鼻蛇는 벽암록 22칙의 주제가 된 공안명이다.
雪峰語錄에 「玄沙는 "틀림없이 능(稜;長慶)형은 얻었구나. 비록 그렇더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어느 중이 "화상께서는 어쩌시렵니까?" 묻자,
현사는 "남산은 써서 무엇하겠느냐?" 하였고,
운문(雲門)은 주장자를 스승의 면전에 던지고서 무서워하는 형세를 취하며
입을 벌리고 혀를 내둘렀다.」 하였다.[雪峰義存禪師語錄]
*稜道者는 福州長慶慧稜禪師 *保福은 漳州保福院從展禪師 *鵝湖는 信州鵝湖智孚禪師이니,
雲門文偃, 玄沙師備, 鏡清道怤, 翠巖令參 등과 함께 다 雪峰義存의 제자들이다.
*望州亭은 河南省 風穴寺에 있는 정자.
*烏石嶺은 江西省과 湖南省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羅霄山脈의 고개인데,
 '승당 앞이라면 몰라도 저 멀리 있는 망주정 오석령을 마주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렇게 물은 보복이나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 아호, 그리고 자칭 독사라고 하는 스승에게
주장자를 던진 운문의 경계에 어떤 차이를 느끼는가? 

 

只如道盡大地撮來如粟米粒大。這箇時節。且道以情識卜度得麼。
須是打破羅籠。得失是非一時放下。洒洒落落。自然透得他圈繢。方見他用處。
且道。雪峰意在什麼處。人多作情解道。
心是萬法之主。盡大地一時在我手裏。且喜沒交涉。
到這裏。須是箇真實漢。聊聞舉著。徹骨徹髓見得透。且不落情思意想。
若是箇本色行腳衲子。見他恁麼。已是郎當為人了也。
看他雪竇頌云。

 

 '온 대지를 움켜쥐어 보니 좁쌀알 만하다'라는 말과 같아지기만 한다면,
말해보라, 이런 시절(時節*)이 정식(情識*)으로 헤아려 얻어지겠는가?
모름지기 나롱(羅籠*)을 때려 부수고, 득실과 시비(是非)을 한꺼번에 내려놓아서
세세락락(洒洒落落*)하면 저절로 그의 권궤(圈繢*)를 투득(透得)하여
마침내 그의 용처(用處;用途)를 보게 되리라.
말해보라. 설봉(雪峰)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은 대개 정해(情解)를 지어 말하기를, "마음이 만법(萬法)의 주인인지라
온 대지[盡大地]가 한꺼번에 내 손 안에 있는 것이다."고들 하지만,
잠깐 웃어줄 뿐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且喜沒交涉*].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름지기 진실한 놈이라야 귀띔만 해도 골수에 사무치도록 투득하고,
또 감정과 뜻과 생각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본색(本色*)의 행각납자(行腳衲子)가 그의 이러한 면모를 보았다면,
이미 넉넉한[郎當] 사람이 된 것이다. 
설두(雪竇)의 송(頌)을 살펴보자. 

 

*時節; ①季節 ②合時(부합되는 때)   *情識; 六根과 六識.
*羅籠; 여치집 모양의 그물로 엮여진 것. 나를 가두고 있는 無明이나 我執 등의 그물.
*洒洒落落; 灑灑落落. 시원하고 가뿐함.
*圈繢; 禪林用語. 원래 올무[圈套]나 일정한 격식을 뜻하지만, 禪林에서는
스승이 언어와 동작으로 학인을 시험하고 단련시켜서 이끌어주는 방편을 말한다.
*且喜沒交涉; 그러한 末後句는 아무리 큰 입을 가졌더라도 말하기 어려운 것이라,
情解로 밝혀 아는 체 해본들 다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本色; 本來面目. 眞面目.

 

 牛頭沒
   (閃電相似。蹉過了也)
   馬頭回
   (如擊石火)
 曹溪鏡裏絕塵埃
   (打破鏡來。與爾相見。須是打破始得)
 打鼓看來君不見
   (刺破爾眼睛。莫輕易好。漆桶有什麼難見處) 
   百花春至為誰開
   (法不相饒。一場狼籍。葛藤窟裏出頭來)

 

 소머리[牛頭]는 죽고
   (번쩍하는 전광<電光>처럼 지나가버렸다.)
   말머리[馬頭]가 돌아오니,
   (튕기는 석화<石火> 같다.)
 조계(曹溪)의 거울 속에는 티끌이 끊어졌다.
   (거울을 깨뜨려야 그대와 서로 볼 수 있으리니, 반드시 깨뜨려야 한다.)
 북을 두드려 살피도록 하였거늘,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눈동자가 찔려 터졌더라도 얕잡아 보지 말아야 하지만
    칠통에게 무슨 보기 어려운 것이 있겠는가?) 
   백화(百花)는 봄이 이르매 누구를 위해 피는가?
   (법에서 서로 양보하지 않고 한바탕 쑥대밭을 이루다가
    때가 이르면 갈등굴<葛藤窟> 속에서 빠져나온다.)

 

*牛頭沒 馬頭回 曹溪鏡裏絕塵埃; 焭絕老人天奇本瑞(無聞明聰)선사는
「이 구절을 깨달아 알면 영산회상(靈山)에서 소림사(少室山;少林寺)에 이르도록,
예로부터 지금까지 모두가 무루(無漏)이다.」 하였고,
*打皷看來君不見 百花春至為誰開는 「그의 정인(情因)을 다하게 했거늘, 왜 모르는가?
말해보라, 천차만별한 것은 필경 무엇인가?」 하고 주석하였다.

 

雪竇自然見他古人。只消去他命脈上一劄。與他頌出。
牛頭沒馬頭回。且道說箇什麼。
見得透底。如早朝喫粥。齋時喫飯相似。只是尋常。
雪竇慈悲。當頭一鎚擊碎。一句截斷。只是不妨孤峻。
如擊石火似閃電光。不露鋒鋩無爾湊泊處。且道向意根下摸索得麼。
此兩句一時道盡了也。
雪竇第三句。卻通一線道。略露些風規。早是落草。
第四句。直下更是落草。若向言上生言。句上生句。意上生意。作解作會。
不唯帶累老僧。亦乃辜負雪竇。
古人句雖如此。意不如此。終不作道理繫縛人。
曹溪鏡裏絕塵埃。多少人道。靜心便是鏡。且喜沒交涉。只管作計較道理。有什麼了期。
這箇是本分說話。山僧不敢不依本分。
牛頭沒馬頭回。雪竇分明說了也。自是人不見。所以雪竇如此郎當頌道。
打鼓看來君不見。癡人還見麼。
更向爾道。百花春至為誰開。可謂豁開戶牖。與爾一時八字打開了也。
及乎春來。幽谷野澗。乃至無人處。百花競發。爾且道更為誰開。

 

설두(雪竇)는 자연히 저 고인(古人)을 보았기에
다만 명맥을 찌른 한 소식[一劄*]만을 소화(消化)하여 송출(頌出)하기를,
 '소머리[牛頭]는 죽고 말머리[馬頭]가 돌아왔다'고 하였는데,
말해보라, 무엇을 말한 것이냐?
투철히 견득(見得)하면 이른 아침에 죽 먹고, 점심 때 밥먹듯이 일상의 일일 뿐이다.
설두스님은 자비하여 직하(直下;當頭)에 한 철추에 쳐부수고,
한 구절로 절단해 주었으니, 고준(孤峻)하여 마지않을 따름이거니와,
튕기는 석화(石火)처럼, 번쩍이는 전광(電光)처럼 칼끝을 드러내지 않으니
다가설 곳이 없는데, 말해보라, 의근(意根)으로 모색(摸索)해지겠는가?
이 두 구절로 한꺼번에 다 말해버렸다. 

설두의 세번 째 구절은 한 가닥 길을 터놓고 약간의 풍규(風規*)를 슬쩍 드러냈으나
이미 이것은 낙초(落草*)인 것이며, 네번 째 구절도 곧장 더한 낙초이다.
만일 말 위에 말을 낳고, 구절 위에 구절을 낳고, 뜻 위에 뜻을 낳아 해석해 안다면
노승(老僧)에게 누를 끼칠 뿐만이 아니라 결국 설두의 기대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고인(古人)의 구(句)가 비록 이러하지만 뜻은 그렇지 않아서
결코 사람을 옭아매는 도리를 짓지 않는다.
 '조계(曹溪)의 거울 속에 티끌이 끊겼다(曹溪鏡裏絕塵埃)'에 대하여
대개의 사람들은 '고요한 마음이 곧 거울이다'고 하는데, 이 또한 무관한 말이다.
오로지 계교(計較)하는 도리(道理)만 지어서야 언제나 마칠 날을 기약하겠느냐?
이러한 것은 본분(本分)에 관한 설화(說話)이거니와,
산승(山僧)이 감히 본분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우두(牛頭)는 죽고 마두(馬頭)가 돌아왔다'고 설두가 분명히 말했건만
스스로 이 사람들이 보지 못하니, 그래서 설두는 이렇듯 넉넉히(郎當) 송하기를, 
"북을 두드려 살피도록 하였거늘, 그대들은 보지 못했는가?" 하였으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보았겠는가? 그래서 다시 그들에게 말하기를,
 '백화(百花)는 봄에 이르러 누구를 위해 피는가?' 하였으니,
가히 창문을 활짝 열고서 일시에 팔자타개(八字打開*)해 주었다 하겠다.
봄이 오기에 이르매 깊은 골짜기와 들판의 강이나 사람 없는 곳까지도
백화(百花)가 다투어 피어나는데, 그대는 말해보라. 누구를 위해 피는 것인가?

 

*一劄; 劄은 札과 같은 뜻으로 書信, 公文을 말한다.
*風規; 諷規. 풍습상(風習上)의 규정(規定)
*落草; 하천(下賤)한 신분지위로 떨어진 사람을 지칭하는 선림용어.
여기서는 '쓸데없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듯 하다.
*八字打開; 털끝만큼도 숨기거나 보류함이 없는 것에 비유한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