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巖錄

벽암록(碧巖錄) 제1칙 : 성제제일의(聖諦第一義)

碧雲 2021. 3. 2. 00:06

벽암록(碧巖錄) 제 1칙 성제제일의(聖諦第一義) _거룩한 진리의 으뜸가는 이치

 이 공안은 「달마확연(達磨廓然)」,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고도 한다. 

진여(眞如)의 체(體)는 확연(廓然;넓고 텅 빈 모양)하여

범성(凡聖) 따위의 모든 상(相)과 유무(有無), 시비(是非), 장단(長短) 따위의

양변(兩邊)을 여의었거늘 무슨 성제(聖諦)가 있고 제일의(第一義)가 있으리오.

 

[垂示]
隔山見煙。早知是火。隔牆見角。便知是牛。
舉一明三。目機銖兩。是衲僧家尋常茶飯。至於截斷眾流。東湧西沒。逆順縱橫。
與奪自在。正當恁麼時。且道。是什麼人行履處。
看取雪竇葛藤。

 

수시(垂示)하여 이르되,
산 너머 연기가 보이면 일찌감치 불인 줄 알고,
담 너머 뿔이 보이면 곧 이것이 소인 줄을 알며,
하나를 들추면 셋을 알고, 한 눈에 상대의 기량(機兩)을 알아챈다.
이런 것들은 납승가(衲僧家)에게는 심상다반(尋常茶飯*)이거니와,
절단중류(截斷眾流*)하고 동용서몰(東湧西沒*), 역순종횡(逆順縱橫*),
여탈자재(與奪自在*)하기에 이른다.
정히 그러할 때는 말해보라. 이것이 누구의 행리처(行履處*)인가?
설두스님의 갈등(葛藤*)을 취해 살펴보자.

 

*目機銖兩; 禪林用語. 目測으로 끼[機]의 무게[兩]를 저울질[銖]한다는 뜻이니,
한 눈에 상대의 기량을 알아보는 안목을 말한다.
*尋常茶飯; 日常茶飯. '평상시 차 마시고 밥 먹는 일'이니 '항상 있는 일'이란 뜻이다.
*截斷眾流; '말 한 마디 또는 한 글자로 묻는 자의 생각을 截斷하여
마음을 쓰지 못하게 하고 곧바로 깨달아 들어가게 하는' 雲門宗의 교육법.
[五燈會元卷第十五] 雲門宗편 雲門偃禪師法嗣 鼎州德山緣密圓明禪師가
 「我有三句語示汝諸人。一句函葢乾坤。一句截斷眾流。一句隨波逐浪。」라 하였다.
*東湧西沒; 동에서 솟아 서로 지다.
*逆順縱橫; '거꾸로 바로 가로로 세로로' 즉 '자유자재함'
*與奪自在; '주고 빼앗기를 자유로히 하다.'
*行履處; 밟아온 길.
*葛藤; '칡넝쿨', ①번뇌, ②법문을 번거롭다고 배척하는 것, ③禪家의 일상의 말.
 禪林에서는 문자나 어구가 생각을 칡넝쿨 얽히고 섥히듯 오가게 하는 것, 즉
공안 중의 난해한 어구, 또는 난해한 어구를 해석하고 설명한 말들을 갈등이라 한다.
공부할 가치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어구를 '한가한 갈등[閒葛藤]'이라 하고,
문자와 언어에 집착하므로써 真義를 얻지 못하는 禪을 文字禪 또는 葛藤禪이라 한다.  

 

【一】 舉
   梁武帝問達磨大師   (說這不唧溜漢)
   如何是聖諦第一義   (是甚繫驢橛)
   磨云。廓然無聖   (將謂多少奇特。箭過新羅。可殺明白)
   帝曰。對朕者誰   (滿面慚惶。強惺惺果然。摸索不著)
   磨云。不識   (咄。再來不直半文錢)
   帝不契   (可惜許。卻較些子)
   達磨遂渡江至魏   (這野狐精。不免一場懡㦬。從西過東。從東過西)

   帝後舉問志公   (貧兒思舊債。傍人有眼)
   志公云。陛下還識此人否   (和志公趕出國始得。好與三十棒。達磨來也)
   帝云。不識   (卻是武帝承當得達磨公案)
   志公云。此是觀音大士。傳佛心印   (胡亂指注。臂膊不向外曲)
   帝悔。遂遣使去請   (果然把不住。向道不唧溜)
   志公云。莫道陛下發使去取   (東家人死。西家人助哀。也好一時趕出國)
   闔國人去。他亦不回   (志公也好與三十棒。不知腳跟下放大光明)。

 

【본칙 제 1칙】 성제제일의(聖諦第一義)

  양무제(梁武帝)가 달마조사(達磨大師)에게 물었다.
   ("이 둔한 놈아!"라고 말하겠다.) ~ 《本則著語》
   "어떤 것이 성제(聖諦)의 제일의(第一義)입니까?"
   (몹시 하찮은 놈<繫驢橛*>이로구나.)
   "확연(廓然)하여 성(聖)일 것이 없습니다."
   (다만 다소 기특하다 하겠다. 
   전과신라(箭過新羅*)했음이 심히 명백하다.)
   "짐(朕)을 대하고 있는 것은 누굽니까?"
   (부끄럽고 황공한 마음 가득히 억지로 깨달은 척 해보았지만
    알고 보면 그런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모르겠습니다."
   (쯧! 다시 해봐도 다만 반 푼 어치도 안 된다.)
   양무제는 알아듣지 못하였다.
   (가히 애석하다 할 것이 조금은 있다.)
   달마조사는 결국 강건너 위(魏)나라로 가셨는데,
   (이 여우 같은 놈(野狐精*)이 한 바탕 서먹서먹함을 면치 못하고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하는구나.)

   무제가 후에 이 일을 들춰 지공(志公)화상에게 물으니,
   (가난한 집 애들이 옛날 빚까지 걱정하는데, 제3자가 더 잘 안다.)
   지공이 "폐하께서는 그 사람을 모르셨습니까?" 하자,
   (지공도 함께 쫓아냈어야 했고, 족히 30방은 먹여야 달마가 올 것이다. )
   "몰랐소."
   (도리어 이것이 무제가 달마의 공안을 그대로 쓴 것이다.)
   "그 분이 바로 관음대사(觀音大士)시라,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하십니다."
   (구차하게[胡亂*] 설명하는구나. 팔이 밖으로 굽지 않는 법이지.)
   무제는 후회하고서, 사신을 보내 모셔오게 하니,
   (알고보면 붙들어도 머물지 않을 것이라, 둔한 놈이라 하는 것이다.)
   지공스님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사신을 출발하지 말라 하소서.
   (동쪽 집 사람이 죽었는데, 서쪽 집 사람이 슬퍼[이래라 저래라]하니,
    그야말로 한꺼번에 나라 밖으로 내쫓아야 했다.)
   온 나랏 사람이 가도 그 분은 돌아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지공이야말로 30방을 먹여도 발뒤꿈치 아래서 대광명이 난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不唧溜漢; 唧溜는 민첩하다, 날렵하다는 뜻이니, 不唧溜漢은 '둔한 놈'이다.
*繫驢橛; 길 가에 세워진 나귀나 말을 매는 말뚝. 하찮은 것에의 비유.

*箭過新羅; '화살이 신라를 지나갔다' 함은
 '너무 멀리 떠나 있으니 어디에 떨어질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慚惶; 慚愧惶恐. 부끄럽고 황공하여.  *惺惺; 聰明하고 영리함. 또는 꿰어맞추려는 태도.
*野狐精; 원래 여우의 혼은 허깨비를 만들어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것을 지칭하지만
선림에서는 자칭 견성오도(見性悟道)했노라 하면서 남을 기만하는 자를 뜻한다.
때로는 변화무쌍한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胡亂; '오랑캐 난'이라는 뜻이지만 선림에서는 '구차(苟且)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本則平唱]

達磨遙觀此土有大乘根器。遂泛海得得而來。
單傳心印。開示迷塗。不立文字。直指人心。見性成佛。
若恁麼見得。便有自由分。
不隨一切語言轉。脫體現成。便能於後頭。
與武帝對譚。并二祖安心處。自然見得。

 

달마(達磨)조사께서는 멀리서 이 땅에 대승근기(大乘根器)가 있음을 보시고,
마침내 바다를 건너 득득(得得*) 오시어,
단전심인(單傳心印*)하여 미도(迷塗*)를 열어 보이시고,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직지인심(直指人心*)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라 하셨으니,
만일 그렇게 견득(見得)하면 자유로울 분수(分數;資格)가 있다 하겠거니와,
일체의 언어로 전해진 바를 쫓지 않고 탈체현성(脫體現成*)한다면
문득 후두(後頭*)에 이르러 무제(武帝)와의 대담과
2조의 안심처(二祖安心處*)를 자연히 보게 될 것이다.

 

*得得; 特地. 특별히, 일부러, 각별히.
*單傳心印; 心印은 禪의 본 뜻이 문자를 세우거나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 데 있으니,
마음대마음으로 印可하는 것을 心印이라 한다. 心은 佛心, 印은 印可 또는 印定의 뜻.
單傳은 單獨相傳 즉 혼자에게만 일대일로 직접 전하는것이니,
단전심인은 '禪家의 宗旨를 경론(經論)의 문구나 언어에 의하지 않고
心印을 통해 일대일로 전한다'는 뜻이다.
*迷塗; 迷途, 미혹의 경계, 즉 眾生이 輪迴하는 三界六道.
*不立文字; 문자를 세우지 않고, 즉 '문자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直指人心; 스승의 마음으로 제자의 마음에 직접. 以心傳心.
*見性成佛; 分析하거나 思慮하는 일이 없이 自身이 갖추고 있는 佛性을
투철히 깨달아 아는 것. 즉 부처의 경계에 도달하는 것.
*脫體現成; 여기서의 脫體는 '脫離身體'이니,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벗어나 그 자리에서 곧바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또 탈체는 全身이라는 의미도 있어서 '온몸으로 이룬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리라.

*後頭; ①인체나 물체의 뒷면, ②이후, 장래. 여기서는 '꿰뚫고 통과하여 건너편에 이르러.'

*二祖安心處; [五燈會元卷第一] 東土祖師 初祖菩提達磨大師章에
「달마조사께서 그가 법기(法器)임을 아시고 이내 이르시되,
"제불(諸佛)은 처음 구도(求道)하시면서 법(法)을 위해 형상[形]을 잊으셨으니,
너는 이제 내 앞에서 팔을 절단하여 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시니,
2조께서 결국 기꺼이 따라주셨기에 이름을 혜가(慧可)라 하였다.
혜가스님이 "제불의 법인(法印)을 들어서 얻을 수 있습니까?" 하고 여쭙자,
달마조사는 "제불의 법인은 사람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셨다.
"제 마음이 편안치 못하니, 스승님께서 편안케 해 주십시요."
"그 마음을 가져오너라. 네게 편안함을 주리라." 혜가스님이 한참이 지나서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하니,
달마조사는 "내가 네게 안심의 경계를 주었노라." 하셨다.」
2조의 안심처는 이 대화 중 '안심의 경계'를 말한다.

 

無計較情塵。一刀截斷。洒洒落落。何必更分是分非。辨得辨失。
雖然恁麼。能有幾人。
武帝嘗披袈裟。自講放光般若經。感得天花亂墜地變黃金。
辨道奉佛。誥詔天下。起寺度僧。依教修行。人謂之佛心天子。

 

정진(情塵*)을 견주어 헤아림이 없이 단칼에 세세락락[洒洒落落*]히 절단해버린다면
다시 무슨 분시분비(分是分非*) 판득판실(辨得辨失*)할 필요가 있겠는가?
비록 그렇다 하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무제(武帝)가 과거에 가사(袈裟)를 걸치고 스스로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을 강설하니,
감득(感得)하여 천화(天花)가 어지러이 내리고 땅이 황금으로 변했다 하며,
도(道)에 힘써 부처를 신봉하였기에 천하에 칙령을 내려 기사도승(起寺度僧*)하고,
교법에 의해 수행하였으니, 사람들이 그를 '불심천자(佛心天子)'라 하였다.

 

*情塵; 舊譯으로는 六根을 六情이라 하였으니, 情은 六根, 塵은 六塵을 말한다.
*洒洒落落; 시원시원함. 灑灑落落.
*分是分非 辨得辨失; 시비를 가리고 득실을 따지다.
*放光般若經(Pañcavijśatisāhasrikā-prajñāpāramitā); 放光般若波羅蜜多經
*起寺度僧; '절을 세우고 승려 출가제도를 만들다'
출가제도[度僧]란 불교가 성행하자 사사로이 출가하는 승려들이 많아 무질서하였기에
 '梁末時에 帝가 敕天下하여 僧尼들을 入京城케 하고서 승려자격시험을 치루게 한
「試經度僧」의 제도'를 말한다.

 

達磨初見武帝。帝問。朕起寺度僧。有何功德。
磨云。無功德。早是惡水驀頭澆。
若透得這箇無功德話。許爾親見達磨。
且道。起寺度僧。為什麼都無功德。此意在什麼處。
帝與婁約法師傅大士昭明太子。持論真俗二諦。
據教中說。真諦以明非有。俗諦以明非無。真俗不二。
即是聖諦第一義。此是教家極妙窮玄處。
帝便拈此極則處。問達磨。如何是聖諦第一義。
磨云。廓然無聖。天下衲僧跳不出。達磨與他一刀截斷。
如今人多少錯會。卻去弄精魂。瞠眼睛云。廓然無聖。且喜沒交涉。

 

달마조사께서 처음 무제를 만났을 때, 무제가 묻기를,
"짐(朕)이 절을 세우고 승려 출가제도를 만들었는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하자,
달마대사는 "공덕일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니,
일찌감치 이것이 똥물벼락 뒤집어쓴 것이었다(惡手를 둔 것이었다).
만일 그 공덕 없다는 말을 투득(透得)했다면 그대가 달마조사를 친견했다 하리라.
말해보라. 기사도승(起寺度僧)이 왜 아무런 공덕이 없는가? 이 뜻은 어디에 있는가?
무제는 누약(婁約*)법사와, 부대사(傅大士*), 소명태자(昭明太子)와 더불어
진속이제(真俗二諦)에 관해 가르침[肇論*] 중의 "진제(真諦)는 비유(非有)를 밝히고,
속제(俗諦)는 비무(非無)를 밝힌다[真諦以明非有, 俗諦以明非無]"는 말을 들춰
 '진속(真俗)이 둘이 아니요, 곧 성제제일의(聖諦第一義)이며,
성제제일의는 교가(教家;座主)의 극묘(極妙)한 궁현처(窮玄處*)다'고 논한 바 있기에,
무제가 이 극즉처(極則處*)를 끄집어내 달마대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성제 제일의입니까?' 한 것인데, 달마조사는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고 답했으니, 천하의 납승들이 뛰어본들 벗어날 수 없다.
달마조사가 그를 단칼에 절단[一刀截斷]해 주신 것인데도
지금의 사람들은 대개가 그릇되게 심사(心思)를 소비하고서 눈을 부릅뜨고
 "확연무성(廓然無聖)이다"고 말하지만 잠깐 웃어 줄 뿐 무슨 연관성이 있겠는가?

 

*婁約; 梁武帝 때의 國師였던 慧约(452~535)의 俗姓이 婁씨였으니
婁約法師라 한 듯하나, 慧约法師라 했어야 옳다.
당시에 世間에서 梁武帝를 婁約法師라 하였다 하기 때문이다.
*傅大士; [五燈會元卷第二] 西天東土應化聖賢 중의 善慧大士를 말한다.
婺州 義烏縣 사람으로 南齊 建武4年에 雙林鄉의 傅宣慈 집안에 내려와 태어났으니,
姓은 傅, 名은 翕, 字는 玄風이다. 16세에 劉氏女 妙光과 결혼하여
普建, 普成의 두 아들을 두었으며, 성을 딴 傅大士, 외에 有髮道士, 東陽大士,
또 自稱 善慧大士라 하였다. 「心王銘」을 쓰신 분이다.
*真諦以明非有, 俗諦以明非無; 東晉僧 僧肇(384~414)대사가
宗本義, 物不遷, 不真空, 般若無知, 涅槃無名論 등을 담아 저술한 「肇論」의 말이다.
그는 不真空論에서 "《放光般若經》에 「第一真諦는 無成無得이요, 世俗諦이기 때문에
有成有得이다.」 하였는데, 有得은 곧 無得의 거짓이름이요, 無得은 곧 有得의 참이름이니,
真名이기에 비록 真이지만 非有요, 거짓이름이기에 비록 거짓이나 非無인 것이다.
이는 真으로 말하자면 있지 않고, 偽로 말하자면 없지 않으니,
두 말은 애초에 하나가 아니지만 두 이치는 다르지 않다. 그래서 경에 이르되,
「'真諦와 俗諦가 다름이 있느냐?' 묻자, 答하여 '다름이 없다'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 經은 真諦以明非有, 俗諦以明非無을 直辯한 것이거늘,
어찌 諦가 두 가지일 것이며, 그 두 가지가 物像이리요?(이하 생략)"라 하였다.

*窮玄處; 窮究해야 할 심오한 이치.
*極則處; 극에 달한 곳.
*弄精魂; 精神心思를 耗費하여.
*瞠眼睛; 눈을 부릅뜨고.

 

五祖先師嘗說。只這廓然無聖。若人透得。歸家穩坐。
一等是打葛藤。不妨與他打破漆桶。達磨就中奇特。
所以道。參得一句透。千句萬句一時透。自然坐得斷把得定。
古人道。粉骨碎身未足酬。一句了然超百億。

 

스승이신 오조(五祖*)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다만 이 확연무성(廓然無聖)을 투득(透得)하면 귀가은좌(歸家穩坐*)할 것이다.
하나로 같은 말을 던져 거침없이 그[武帝]의 칠통(漆桶*)을 타파해 주었으니,
달마조사의 취중(就中*)이 기특하다. 그래서 말하는데,
한 구 참득(參得)하기를 투철히 하여 천 구 만 구가 일시에 투철해지면
자연히 앉아서 끊어내고[坐斷*], 붇들어서 정(定)을 얻게 된다[把定*]"고 하셨고,
옛사람은 '분골쇄신(粉骨碎身)해도 은혜를 다 갚지 못하나니[粉骨碎身未足酬],
한 구에 요연(了然)히 백억 법문을 뛰어 넘도다[一句了然超百億*]' 하였다.

 

*五祖; 南嶽下十三世 白雲端禪師法嗣 蘄州五祖法演禪師
*歸家穩坐; 禪林用語. '집으로 돌아가 안은히 앉는다'는 뜻이니,
 '미망(迷妄)에서 벗어나 自我의 本家로 돌아와 마음이 안은함'에 비유한 말이다.
*漆桶; 먹물 담는 통이니, '無明에 가려 깜깜한 형세'를 뜻한다.
*就中; ①其中, ②居中, 從中. 문맥상 여기서는 '취향하는 목표'가 옳을 듯 하다.
*坐斷; 坐禪의 힘으로 迷妄을 斷除함. *把定; 입정(入定)
*粉骨碎身未足酬~ ; 永嘉真覺大師 「證道歌」 중의 구절이다.

 

達磨劈頭與他一拶。多少漏逗了也。
帝不省。卻以人我見故。再問對朕者誰。
達磨慈悲忒殺。又向道不識。
直得武帝眼目定動不知落處。是何言說。
到這裏有事無事。拈來即不堪。

 

달마대사는 첫머리에서 그[무제]에게 일침을 가한 것이 다소 허술하였으나,
무제는 알아채지 못하고, 도리어 인견(人見)과 아견(我見) 때문에
재차 "짐을 대한 자는 누구요?" 하고 물으니,
달마대사는 자비가 지나쳐서[忒殺*] 또 "모릅니다." 해 주었건만
다만[直] 무제는 안목이 결정적으로 흔들려서 말의 핵심[落處*]을 알지 못하고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였으니,
이에 이르러서는 일이 있고 없고 간에 손을 써볼 수가 없다.

 

*達磨는 '空의 道理에는 萬法이 平等하여 凡聖의 分別相이 없으니,
聖諦라 할 것이 없다'는 의미로 '廓然無聖'이라 답해 준 것인데,
무제는 底邊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다만 言語文句에 붇들려
다시 "성인이 없다면 그대는 무엇이란 말이요?" 하고 물었으니,
달마는 거듭된 자비로 "모르겠소." 하고 답하여,
萬有가 오직 因緣生일 뿐 本空임을 밝혀 주었으나,
무제는 "이것이 무슨 소린가?" 하였다는 것이다.
*忒殺; 매우 심하게, 지나치게.  *落處; 歸結點, 解答.
*拈來; 손이나 손가락, 손바닥을 東西로 놀리다. 즉 '손을 쓰다'

 

端和尚有頌云。
一箭尋常落一鵰。更加一箭已相饒。
直歸少室峰前坐。梁主休言更去招。
復云。誰欲招。

 

단화상(端和尚*)은 게송으로
「화살 하나면 보통 수리 한 마리를 떨어뜨리는데
다시 한 번 더 쏘았으니 이미 충분했거늘…(쯧!)
슬그머니[直*] 소실봉(少室峰*) 아래로 돌아가 앉았으니,
양무제여! 다시 모셔오라 하지 마소.」 하시고서
다시 "누가 불려 오리요?" 하셨다.

 

*端和尚; 五祖法演禪師의 스승이신 舒州白雲守端禪師(1025~1072). [續傳燈錄卷十三]
*尋常; 평소. 대수롭지 않게, 예사(例事)로이.
*直; [副]①但, 只, 不過 ②居然(슬그머니) ③沒有間隔的
*少室峰; 禪宗故事에 二祖 慧可스님은 河南 登封縣 북쪽에 있는 崇高山 少室峰에서
達磨대사를 뵙고 눈을 맞으며 예리한 칼로 왼팔을 잘라 求法의 決心을 표하자,
達磨대사가 慧可의 견고한 意志을 살펴 제자로 거두었다 전하니,
後世人들이 이를 「斷臂慧可」, 「二祖斷臂」이라 한다.

 

帝不契。遂潛出國。這老漢只得懡㦬。渡江至魏。
時魏孝明帝當位。乃此北人種族姓拓跋氏。後來方名中國。
達磨至彼。亦不出見。直過少林。面壁九年。接得二祖。
彼方號為壁觀婆羅門。

 

무제가 계합(契合)하지 못하자, 마침내 몰래 출국(出國)하였으니,
이 늙은이가 다만 서먹서먹[懡㦬*]하여 강 건너 위(魏)나라로 간 것이다.
그때 위나라는 효명(孝明)왕이 재위에 있었는데,
그는 북방 종족[鮮卑族]의 성인 척발(拓跋)씨였다가
후에 와서야 비로소 중국이름을 가졌다.
달마대사는 그곳에 가서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곧바로 소림사로 가서
면벽(面壁*)하기 9년만에 2조(二祖)를 만나게 되었으니,
그 지방에서는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 불렀다.

 

*懡㦬; 慚愧라는 뜻의 梵語.
왕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거리감을 느꼈다는 뜻일 듯.
*面壁; 벽을 대면하다, 즉 坐禪.
*壁觀婆羅門; 벽만 들여다보는 바라문, 좌선만 하는 스님.

 

梁武帝後問志公。公云。陛下還識此人否。帝曰。不識。
且道與達磨道底。是同是別。似則也似。是則不是。
人多錯會道。前來達磨是答他禪。後來武帝是對他志公。乃相識之識。且得沒交涉。
當時志公恁麼問。且道作麼生祇對。何不一棒打殺。免見搽胡。
武帝卻供他款道不識。志公見機而作。便云。此是觀音大士。傳佛心印。
帝悔遂遣使去取。好不唧溜。
當時等他道此是觀音大士傳佛心印。亦好擯他出國。猶較些子。

 

양무제가 후에 지공(志公)스님에게 물으니,
지공스님이 "폐하께서는 그 분을 모르셨습니까?" 하자,
무제는 "몰랐소." 하였는데,
말해보라. ('모른다'는 말이) 달마조사가 말한 것과 같은가, 다른가?
비슷하기야 비슷하겠으나 똑같다 한 즉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대개 잘못 알고 "앞의 달마가 한 말은 무제에게 답해준 선어(禪語)이고,
뒤에 무제가 한 말은 지공스님의 서로 아는 사이에 대한 답이다" 하지만,
이 또한 상관이 없다.
당시에 지공스님은 그렇게 물어왔을 때, 말해보라. 어떻게 대했어야만 하겠는가?
어째서 일방타살(一棒打殺*)하여 수염을 만지작거리는 꼴[搽胡*]을 보지 않았을까?
무제가 도리어 그에게 충심(衷心;衷款*)을 보여 "몰랐다"고 하니,
지공스님은 그런 기미(機微)가 있는 것을 보고 곧 말하기를,
"그는 관세음보살이시니,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하시는 분입니다." 하자,
무제가 후회하고 결국 사신을 보내 모셔오라 하였으니, 퍽이나 우둔하였다.
당시에 그에게도 똑같이 "관세음보살로서 부처의 심인을 전하는 놈이다" 하고서
그를 나라 밖으로 내쫓았더라도 조금은 모자랐다.

 

*沒交涉; 無交涉, 두 일이 서로 어긋나서 상응(相應)하지 않는 것.
*一棒打殺; '한 방망이에 때려 죽인다'는 뜻이지만
禪林에서는 제자를 이끌어주기 위해 스승이 엄격한 기봉(機鋒)을 휘두르는 것을 의미한다.
*搽胡; 수염을 가지런히 바르다. 계면쩍어 하는 모양새.
*供他款; 款은 項目, 精誠, 情意이지만, 여기서는 衷款(衷心). '그에게 衷心을 바쳐'.

 

人傳。志公天鑒十三年化去。達磨普通元年方來。
自隔七年。何故卻道同時相見。此必是謬傳。
據傳中所載。如今不論這事。只要知他大綱。

 

사람들이 전하기를, "지공스님은 천감(天鑒*) 13년(514)에 천화(遷化)하셨고,
달마대사는 보통(普通*) 원년(520)에 오셨으니, 7년의 차이가 있는데,
어째서 같은 때에 만났다고 말하는가? 이는 필시 잘못 전해진 것이다"고 하지만,
전기에 기재된 바에 의거하였으니, 여기서는 이 일을 논하지 않겠고,
다만 그 대강(大綱)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天鑒, 普通; 둘 다 양무제 재위시 사용한 년호이다.

 

且道達磨是觀音。志公是觀音。阿那箇是端的底觀音。
既是觀音。為什麼卻有兩箇。何止兩箇。成群作隊。
時後魏光統律師。菩提流支三藏。與師論議。師斥相指心。
而褊局之量。自不堪任。競起害心。數加毒藥。至第六度。
化緣已畢。傳法得人。遂不復救。端居而逝。葬於熊耳山定林寺。
後魏宋雲奉使。於蔥嶺遇師手攜隻履而往。
武帝追憶。自撰碑文云。
嗟夫。見之不見。逢之不逢。遇之不遇。今之古之。怨之恨之。
復讚云。心有也。曠劫而滯凡夫。心無也。剎那而登妙覺。
且道。達磨即今在什麼處。蹉過也不知。

 

말해보라. 달마가 관음(觀音)인가, 지공이 관음인가?
어느 쪽이 진정한 관음인가? 기왕 관음이라면 어째서 둘이 있으며,
왜 둘에 그치겠는가? 무리를 이루고 떼를 지을 것이다.
당시에 후위(後魏)의 광통율사(光統律師*)와 보리유지(菩提流支*) 삼장(三藏)이
달마대사와 더불어 논의하였는데,
대사께서 상(相)을 배척하고 마음만을 가리키니,
재능(才能)이 부족하여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매,
다투어 해치려는 마음으로 수 차례 독약 쓰기를 여섯 번째에 이르자,
교화의 인연도 마쳤고 법을 전할 사람도 얻었는지라 결국 거부하지 않고
단정히 앉아 돌아가시니, 웅이산(熊耳山*) 정림사(定林寺)에 장례를 모셨다.
후위(後魏)의 송운(宋雲*)이 사신으로 서역에 갔다 오다가
총령(蔥嶺*)에서 손에 외짝 신을 들고 가시는 대사를 만났다.
무제가 추모하여 스스로 비문(碑文)을 지어 이르되,
  「아아[嗟夫*]! 보고서도 알아뵙지 못하고[見之不見],
   마주치고서도 영접하지 못했으며[逢之不逢],
   만나서도 대접하지 못했으니[遇之不遇],
   예나 지금이나[今之古之] 원통하고 한스럽구나[怨之恨之].」 하고,
다시 찬탄을 하여,
  「마음이 있으면 오랜 겁[曠劫]을 범부에 머물고,
   마음이 없으면 찰나에 묘각(妙覺)에 오르리로다.」 하였다.
말해보라. 달마조사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옆으로 스쳐지나가도 알지 못한다.

 

*光統律師; 北齊 鄴城 大覺寺 慧光律師,
地論의 宗匠으로서  國統이라는 관직에 있었기에 光統이라 불렸다.
*菩提流支(Bodhiruci); 菩提留支. 北魏의 僧. 北天竺人.
大乘瑜伽系統의 학자로서 三藏과 咒術에 두루 通達하여
十地經論, 金剛般若經, 佛名經, 法集經, 深密解脫經, 大寶積經論, 法華經論, 無量壽經論 등
많은 經書를 번역하였다.
*熊耳山; 河南 洛寧縣 경계에 있는 산으로 두 봉우리가 곰의 귀를 닮았다 하여
웅이산이라 한다. 達磨대사의 塔이 있는 곳이다.
*宋雲; [景德傳燈錄 卷第三] 第二十八祖 菩提達磨章에
「그해 12월 28일, 웅이산(熊耳山)에 장사지내고 정림사(定林寺)에 탑을 세웠는데
3년 뒤에 위나라 송운(宋雲)이 사신으로 서역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총령(蔥嶺)에서
대사(達磨)를 만났는데, 손에 신 한 짝을 들고 홀로 훌훌 나부끼듯이 가시기에
송운이 "스님 어디 가십니까?"하고 여쭈었더니, "서천(西天)으로 간다네." 하시고,
다시 "그대의 군주는 이미 세상을 버리셨소." 하시니, 송운이 듣고 망연(茫然)하였다.
대사를 작별하고 동쪽으로 돌아가 복명(復命)하기에 이른 즉
효명제(孝明帝)는 이미 승하(昇遐;登遐)하고 효장제(孝莊帝)가 즉위하였기에
송운이 그런 사실을 자세히 상주(上奏)하니, 효장제가 묘구덩이[壙]를 파게 하였는데,
빈 관속에 가죽신 한 짝만 있었다. 」고 하였다.
*蔥嶺; 新疆省 西南方 疏勒, 蒲犁縣 등에 걸쳐있는 中國 각 山脈의 始發點.
즉 파미르고원을 말한다.
*嗟夫; 感嘆的語氣詞. 아아!

 

[頌]

 聖諦廓然   (箭過新羅。咦)
   何當辨的   (過也。有什麼難辨)
   對朕者誰   (再來不直半文錢。又恁麼去也)
   還云不識   (三個四個中也。咄)
   因茲暗渡江   (穿人鼻孔不得。卻被別人穿。蒼天蒼天。好不大丈夫)
   豈免生荊棘   (腳跟下已深數丈)
   闔國人追不再來   (兩重公案。用追作麼。在什麼處。大丈夫志氣何在)
   千古萬古空相憶   (換手槌胸。望空啟告)
   休相憶   (道什麼。向鬼窟裏作活計)
   清風匝地有何極   (果然。大小雪竇向草裏輥)
   師顧視左右云。這裏還有祖師麼   (爾待番款那。猶作這去就)。
   自云有   (塌薩阿勞)
   喚來與老僧洗腳   (更與三十棒趕出。也未為分外。作這去就。猶較些子)。

 

 성제(聖諦)는 확연(廓然)하다.
   (화살이 신라를 지나갔구나. 아!<경악의 의미>) ~ 《송(頌)著語》
   어찌 분별하여 적중(的中)하겠는가?
   (지나가버렸거늘 무슨 분별하기 어려움이 있겠는가?)
   "짐(朕)을 대한 자는 누구요?"
   (다시 해봐도 다만 반푼 어치도 안 되는데, 또 그 짓을 하는구나.)
   "모르겠소" 하여
   (세 개 아니면 네 개라니... 쯧쯧!)
   그로 인해 몰래 강을 건느셨으니,
   (사람들의 콧구멍*을 꿰지는 못하고 되려 남에게 꿰였으니,
    아이고, 아이고! 퍽이나 대장부가 못되는구나.)
   일어날 형극(荊棘)을 어찌 면하리요?
   (발꿈치 밑에 이미 깊이가 수십 자<尺>이다.)
   온 나라 사람이 불러도 다시 오지 않으니,
   (양중공안<兩重公案*>이로다. 불러서 무엇하랴?
    어디에 있는가? 대장부의 지기<志氣>는 어디로 갔는가?)
   천고만고(千古萬古)에 부질없이 서로 그리워하네.
   (손을 번갈아 가슴을 치면서 허공만 바라보며 하소연하네.)
   서로 그리워 말게나.
   (무슨 말을 하는가? 귀신굴 속*에서 살 궁리를 하는구나.)
   청풍(清風*)은 온 땅에 있거늘, 어찌 한도(限度;極)가 있으리요?
   (과연, 크고 작은 설두가 미혹의 길[草裏*;풀 속]로 내닫는구나.)

   선사(禪師;雪竇)가 좌우를 돌아보며 "이 안에 조사가 있느냐?" 하더니,
   (네가 죄목이 바뀌기를 기대하느냐? 태연히 그런 짓을 하다니.)。
   스스로 "있다" 하고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 하는구나.)
   "불러다가 노승이 발을 씻겨주겠다" 하였다.
   (다시 30방을 먹여 쫓아내도 분수에 넘치지 않겠으나,
    그렇게 하는 것이 조금은 낫겠다.)。

 

*咦; 비웃음[嘲笑] 소리. 숨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웃음이다.
*咄; ①큰 소리로 꾸짖음을 나타내는 말 ②애석함을 표시하는 말. 쯧쯧!
*鼻孔; 콧구멍. 佛道를 수행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것.
즉 佛道의 根本. 頂門, 眼睛과 같은 의미.
*兩重公案; 한 공안에 대해 거듭하여 설명하고 해석해 주는 것.
*鬼窟裏; 귀신굴 속. 깜깜한 곳, 즉 우매하고 소견이 없는 학인의 경계.
*塌薩阿勞; 塌薩은 '그 일에 관해 밝지 못하다'는 뜻이요,
阿勞의 阿는 '發한다'는 의미의 語助辭, 勞는 수고이니,
'그 일에 밝지 못하면서 헛수고(헛소리) 한다'는 뜻으로 비웃는 말이다.

*清風; ①청량한 바람 ②清新高潔한 風格, 品格이니, 뒤에 '조사가 있느냐?'에 비추어
 '신선한 機緣을 펼칠 수 있는 祖師급 禪僧'에 비유한 듯하다.
*草裏; 풀 속. 禪林에서 풀 속은 미혹의 길[迷路]에 비유한다.
*크고 작은 설두; 달마대사(큰 설두)와 설두스님(작은 설두).

*喚來與老僧洗腳; "불러다가 자상히 가르쳐주겠다."의 은유적 표현.
〔五燈會元卷十一〕 鎮州臨濟義玄禪師章에
「趙州스님이 游方하고 돌아와 뒷뜰 시렁에서 발을 씻고 있던 차에 臨濟선사가 물었다.
"如何是祖師西來意?" 조주가 "제가 마침 발 씻고[洗腳] 있습니다." 하니,
선사가 가까이 다가와 들으려는 시늉을 하자, 조주가 "아시려면 곧바로 아실 일이지,
쪼아대서 어쩌자는 것입니까[啗啄作什麼]?" 하는지라
선사는 재빨리 방장실로 가버렸다.」 하였다.
(趙州游方到院。在後架洗脚次。師便問。如何是祖師西來意。州曰。恰遇山僧洗脚。
師近前作聽勢。州曰。會即便會。啗啄作什麼。師便歸方丈。)
[禪苑蒙求 中卷]에서는 '啗啄作什麼' 구절이 '更要第二杓惡水潑在'라 되어 있는데,
"다시 똥물벼락 두 번째 바가지[第二杓]가 필요한 모양이구나"의 第二杓는
봐주지 않는 엄격하고 맹렬한 지도방법을 말하고, 第一杓는 섬세하고 자상한
지도방법을 말하니, 조주의 洗腳은 "묻지 마시고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요"이고,
설두의 洗腳은 도리어 "조사가 있다면, 불러다가 내가 자상히 가르쳐주겠다"는 뜻이다.
"내가 네 발까지 씻겨주었건만..."은 "내가 그다지도 자상히 일러주었건만..."이 아닌가?

'선원몽구'에는 임제스님이 "恰值老僧洗脚(마침 노승이 발을 씻어야겠다)"라 하였다고 

쓰여 있는데, 설두스님이 이를 인용하여 "喚來與老僧洗腳(불러서 노승이 발을 씻어 

주겠다<與>)" 한 것이다. '恰'은 '적당하다', '꼭 ~해야겠다'는 뜻이다.
*나쁜 물[惡水]은 禪家에서 이심전심을 중시하기에 언어와 문자를 惡水에 비유한 것.
*함탁(啗啄)은 ‘알이 깰 때에 어미 새가 밖에서 껍질을 쪼아 준다.’는 뜻으로,

스승이 학인(學人)을 망상(妄想)에서 벗어나도록 깨우쳐 주는 일을 비유적(比喩的)으로 이르는 말.
줄탁(啐啄)은 새끼가 알에서 나오도록 껍질을 쪼아주는 것이니, 같은 의미.

 

[송(頌)평창]

且據雪竇頌此公案。一似善舞太阿劍相似。
向虛空中盤礡。自然不犯鋒鋩。
若是無這般手段。纔拈著便見傷鋒犯手。
若是具眼者。看他一拈一掇。一褒一貶。只用四句。揩定一則公案。
大凡頌古只是繞路說禪。拈古大綱據款結案而已。

 

이 공안에 대한 설두스님의 송을 거론하자면,
흡사 태아검(太阿劍*)으로 능숙히 검무(劍舞)를 추는 것 같아서
허공을 향해 마음껏 휘둘러도[盤礡*] 그대로 칼끝에 손이 다치지 않으려니와,
만약 이러한 수단이 없다면 잠깐 칼 든 것만 보아도 칼날이 상하고 손이 다칠 것이다.
안목을 갖춘 자라면 그가 한 번 저울질[拈]했다가  한 번은 가려서 취하고[掇],
한 번 칭찬했다가 한 번은 폄하(貶下)해가면서
사구(四句)만을 써서 이 한 칙의 공안을 주물렀다[揩定*]는 것을 볼 것이다.
대개 송고(頌古)는 다만 선(禪)을 설명하는 우회로(迂廻路;繞路)이고,
염고(拈古)는 대강(大綱*)을 판사가 법조항[款]에 의거하여 판결[結案]을 내리듯 한 것이다.

 

*太阿劍; 오나라 간장(干將)이 주조한 보검. 막야검도 간장이 주조한 보검이다.
*盤礡; ①廣大, 雄偉. ②箕踞(두 다리를 뻗고 앉은), 양 넓적다리를 벌리고 앉은 모양.
*鋒鋩; 창, 칼 따위의 뾰쪽한 끝.
*拈; 물건을 손 위에 놓고 輕重을 저울질하는 것.  *掇; 拾取, 採摘, 擇取, 端
*揩定; 지우고 바로잡고. 즉 '이리하고 저리하였다', '마음대로 주물렀다'
*大綱; 根本要義, 法門의 大義.

 

雪竇與他一拶。劈頭便道。聖諦廓然。何當辨的。雪竇於他初句下。
著這一句。不妨奇特。且道。畢竟作麼生辨的。
直饒鐵眼銅睛。也摸索不著。到這裏。
以情識卜度得麼。所以雲門道。如擊石火。似閃電光。
這箇些子。不落心機意識情想。等爾開口。堪作什麼。
計較生時。鷂子過新羅。雪竇道。爾天下衲僧。何當辨的。

 

설두스님은 그에게 한 번 욱박질러 첫머리부터 문득
“성제(聖諦)는 확연(廓然)하다" 하고서, "어찌 헤아려 적중하겠는가?"하였는데,
설두스님이 그 첫구절에 밑에 이 한 구를 붙인 것은 기특하여 마지 않다.
말해보라, 필경 어떻게 분별하여 적중할 것인지.
비록 무쇠 눈에 구리 눈동자[鐵眼銅睛*]라도 모색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식(情識*)으로 점쳐 얻겠는가?
그래서 운문스님이 말하기를, “돌을 부딫쳐 나는 불꽃[石火] 같고,
번쩍하는 번갯불[電光]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렇게 순간적인 것은
심기(心機*) 의식(意識) 정상(情想)으로 알아지지 않거니와,
그대들처럼 입을 열어서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계교(計較)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는 매는 신라(新羅*)를 지나가버릴 것이라,
설두스님은 “너희 천하 납승들이 어찌 분별하여 적중하겠는가?” 한 것이다.

 

*鐵眼銅睛; 潭州大溈慕喆真如禪師의 표현으로서
根器가 靈敏하고 機鋒이 强硬한 禪僧을 形容. [태화당 선종천자문]
*情識; 六根과 六識. 根을 과거에는 情이라 번역하였다.
*心機; 마음의 발동, 심사(心思).
*如擊石火 似閃電光; 漳州保福院從展禪師가 쓴 표현인데, 운문으로 오인된 듯하다.
*鷂過新羅; '매가 멀리 신라를 지나 날아가버렸는데 어찌 화살을 적중시키겠느냐'.

 

對朕者誰。著箇還云不識。此是雪竇忒殺老婆。重重為人處。
且道。廓然與不識。是一般兩般。
若是了底人分上。不言而諭。若是未了底人。決定打作兩橛。
諸方尋常皆道。雪竇重拈一遍。殊不知。四句頌盡公案了。
後為慈悲之故。頌出事跡。因茲暗渡江。豈免生荊棘。
達磨本來茲土。與人解粘去縛。抽釘拔楔。鏟除荊棘。因何卻道生荊棘。
非止當時。諸人即今腳跟下。已深數丈。

 

“짐(朕)을 대한 자는 누구요?” 하고서, "도리어 '모른다’ 하였다."고 붙였는데,
이것은 설두스님이 노파심이 지나쳐서 거듭거듭 위해 준 곳이다.
말해보라. ‘텅 비었다[廓然]’와 ‘모른다’는 한 가지 말인가, 다른 말인가?
공부가 된 사람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깨닫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결정코 양단(兩端;兩橛*)을 지을 것이다.
제방(諸方)이 보통 말하기를, “설두가 본칙을 거듭 염고(拈古)한 것이다”고 하나,
사구(四句)의 송(頌)으로 공안을 다 마친 것임을 별로 알지 못한 것이다.
그 뒤에 자비심으로 사건의 배경(자초지종)에 대해 “그로 인해 몰래 강을 건느셨으니,
일어날 형극(荊棘*)을 어찌 면하리요?”하고 송(頌)하였다.
달마대사는 본래 이 땅에 오시어 사람들의 속박을 풀어 제거해주고,
못을 빼내고 쐐기를 뽑아주며, 가시덤불을 깎아 없애주었는데,
무엇 때문에 도리어 “가시덤불이 생겼다”고 말했을까?
이는 그 당시에 그친 것이 아니라, 당금(當今;即今)의 모든 사람들 발뒤꿈치[腳跟*] 아래에
이미 형극이 깊어서 여러 장(丈)이 된다는 것이다.

 

*兩橛; 궐(橛)은 대문 양쪽 끝에 세운 두 개의 막대기로서 문 폭을 알려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양궐은 이쪽 끝과 저쪽 끝 즉 양단을 의미하니, 중도를 증득하지 못한다는 뜻이요,
또 只得一橛(다만 한 궐만 얻었다)은 '겨우 절반의 법만을 얻었다'는 뜻이다.
*荊棘; 가시덩쿨, 번뇌, 紛亂, 困難, 근심걱정에 비유한 용어.
*腳跟; 발뒤꿈치, 禪林에서는 本來의 自我를 뜻한다. 발뒤꿈치 아래 형극이 수 장이라 함은
발 밑에 진흙창이 깊다, 즉 '본래면목에 번뇌의 深淵 즉 迷妄이 잔뜩 끼어 있다'는 뜻이다.

 

闔國人追不再來。千古萬古空相憶。可殺不丈夫。
且道。達磨在什麼處。若見達磨。便見雪竇末後為人處。
雪竇恐怕人逐情見。所以撥轉關捩子。出自己見解云。
休相憶。清風匝地有何極。既休相憶。爾腳跟下事。又作麼生。
雪竇道。即今箇裏匝地清風。天上天下有何所極。
雪竇拈千古萬古之事。拋向面前。
非止雪竇當時有何極。爾諸人分上亦有何極。

 

“온 나라 사람이 불러도[追] 다시 오지 않으시니,
천고만고에 부질없이 그리워하네” 하였는데, 몹시 장부답지 못했다 하겠다.
말해보라, 달마조사는 어디에 계시는가? 만일 달마대사를 보았다면
설두스님이 학인을 위한 궁극의 배려를 문득 알게 될 것이다.
설두스님은 사람들이 정견(情見)을 쫓을까 염려하여
그 때문에 관문의 빗장[關捩子*]을 제껴 자기의 견해를 밝혀 말하기를,
“서로 그리워 말라. 청풍이 온 땅에 두루하거늘, 어찌 한도가 있으리요?”하였는데,
기왕 서로 그리워하기를 그만 둔다면, 그대 발꿈치 밑의 일은 또 어찌 하겠는가?
설두스님이 “지금 이 땅에 청풍이 두루한데,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한 것은
설두스님이 천고만고의 일을 끄집어내서 면전을 향하여 던진 것이니,
설두 당시만의 '어찌 한량이 있겠느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본분 상에도 또한 '어찌 한량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關捩子; 관문의 빗장. 통상 '사물의 중요한 곳'에 비유하나,
여기서는 '가슴을 활짝 열고'가 적합할 것 같다. 

 

他又怕人執在這裏。再著方便高聲云。這裏還有祖師麼。自云有。
雪竇到這裏。不妨為人。赤心片片。
又自云。喚來與老僧洗腳。太殺減人威光。當時也好。與本分手腳。
且道。雪竇意在什麼處。到這裏。喚作驢則是。喚作馬則是。喚作祖師則是。
如何名邈。往往喚作雪竇使祖師去也。且喜沒交涉。
且道。畢竟作麼生。只許老胡知。不許老胡會。

 

그는 또 사람들이 여기에 집착할까 두려워 거듭 방편을 써서 큰 소리로
“이 안에 조사가 있느냐?” 하고, 스스로 “있다”고 하였는데,
설두스님은 여기에 이르러 학인을 위하는 구석구석 정성어린 마음을 어쩌지 못한 것이다.
또 스스로 “불러와서 노승이 발을 씻겨주겠다.” 하였으니,
사람의 위광(威光)을 지나치게 깍아내렸으나,
당시에 본분(本分)의 사명(使命;手腳*]을 잘 이행해 주겠다는 것이다.
말해보라, 설두스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 이르러서야 당나귀라 불러도 좋고, 말이라 해도 좋고, 조사라 해도 좋으니,
명모(名邈*)가 어떠하던가?
왕왕 '설두가 조사에게 (발 씻겨라고)시킨 것이다'고 하지만, 잠시 웃어줄 뿐 무슨 상관인가.
말해보라, 필경 어떤 것인가? 늙은 오랑캐(달마)가 불법(佛法)은 안다[知]고 하겠으나,
세간법에 잘 적응[會]했다고는 할 수 없겠다.

 

*赤心; 정성(精誠)스럽고 참된 마음.  *片片; 조각조각, 군데군데.
*手腳; 손과 발, 손놀림 발놀림이니, 통상 수완, 솜씨의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앞에 본분이 있으니 사명, 책임, 의무로 해석함이 옳을 듯하다.
*名邈; 名模, 모양새 *只許老胡知 不許老胡會; 禪林用語。'佛法은 참지혜로 잘 계합해 들어갔다 하겠으나,
세간의 지혜와 언변을 다 알고 이해했다고는 못하겠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