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94칙 능엄불견(楞嚴不見)_능엄경의 '보지 못하는 것' |
垂示云。 聲前一句。千聖不傳。面前一絲。長時無間。 淨裸裸赤灑灑。露地白牛。眼卓朔耳卓朔。金毛獅子。則且置。且道。作麼生是露地白牛。 |
수시(垂示)하여 이르되, 성전일구(聲前一句*)는 일천 성인도 전하지 못하거니와 면전일사(面前一絲*)는 오래토록 간단(間斷)하는 일이 없는 정나라적쇄쇄(淨裸裸赤灑灑*)한 노지백우(露地白牛*)이다. 눈이 오똑하고 귀는 쫑긋한 금모사자(金毛獅子*)는 미루어 두더라도 말해보라, 무엇이 노지백우인가? |
*聲前一句; 언어 밖의 묘음(妙音). *面前一絲; 눈앞의 일경일물(一景一物). *淨裸裸赤灑灑; 실오라기 하나 없이 천진무구(天眞無垢)하여 깨끗한 모습을 지칭하는 형용사. *露地白牛; 법화경(法華經) 비유품에서는 '문밖 노지(露地)에 서 있는 큰 흰소가 끄는 수레'라는 표현으로써 대승법(大乘法)에 비유하였다. 露地는 문밖의 빈 터, 즉 평안무사한 장소에 비유하고, 白牛는 청정한 소라는 뜻으로 섬호(纖毫)의 번뇌에도 물들지 않은 청정한 경지에 비유한 것이다. *金毛獅子; 문수(文殊)보살이 오색구름 속에서 타고 왔다는 황금빛 사자. 즉 지혜가 출중한 사람에의 비유. |
【九四】舉。 楞嚴經云。吾不見時。何不見吾不見之處 (好箇消息。用見作什麼。釋迦老子漏逗不少) 若見不見。自然非彼不見之相 (咄。有甚閑工夫。不可教山僧作兩頭三面去也) 若不見吾不見之地 (向什麼處去也。釘鐵橛相似。咄) 自然非物 (按牛頭喫草。更說什麼口頭聲色) 云何非汝 (說爾說我總沒交涉。打云。還見釋迦老子麼。爭奈古人不肯承當。 打云。腳跟下自家看取。還會麼)。 |
능엄경(楞嚴經)」에 이르되, “내가 보지 않을 때는 어찌하여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보지 못하느냐? (좋은 소식이지만 견(見)을 써서 무엇하겠는가? 석가 늙은이의 소홀함[漏逗]이 적지 않다.) 만약 보지 않는 곳을 본다면 자연히 그것은 보지 않는 상(相)이 아니려니와, (쯧쯧! 그런 심히 한가한 공부로 산승의 심기를 어지럽히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일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보지 못한다면 (어디로 갔느냐? 쇠말뚝 박아버린 것 같도다. 쯧쯧!) 자연히 물상(物相)이 아니리니, (소머리를 짓눌러 풀을 먹이고서 다시 구두로 무슨 소식을 말하려는가?) 이것이 어찌 네가 아니겠느냐?" (너라 해도 좋고 나라 해도 좋다. <탁 치면서 말했다.>석가노인을 보느냐? 옛사람이 수긍하려 들지 않는데 어찌하랴. <다시 탁 치면서 말했다.> 발 뒤꿈치* 아래 내집을 살펴 취하라. 알았느냐?) |
*견(見)이 볼 수 있는 물질이라 하고 내가 A를 볼 때는 나의 견이 A에 있다고 가정하여 네가 나와 동시에 A를 볼 때 네가 '나의 견(실체)을 보았다'고 한다면, 내가 아무것도 보지 않을 때는 왜 나의 견(실체)을 보지 못하느냐? 그래도 본다고 우긴다면 네가 본다는 상(相)은 자연히 내가 보지 않는 그 상(相)이 아닌 것이요, 너도 보지 못한다면 내 견의 실체가 물상(物相)이 아니기 때문이요, 내 견이 물상이 아니면 너의 견도 물상이 아니니, 그것이 어찌 네 자성이 아니겠느냐? *漏逗; ①소홀(疏忽), 疏漏(하는 일이니 생각 등이 찬찬하지 못하여 거칠고 엉성함) ②間闊(사이가 툭 트임) *兩頭三面; 심기(心機)가 깊이 가라앉아 복잡하고 수시로 변하는 데에 비유한 표현이다. *腳跟; 발 뒤꿈치 즉 근저(根底). 本來自我. 선림에서는 발 뒤꿈치가 땅에 닿으면 흔들림 없이 견고하다 하여 本來의 自我에 비유한다. |
楞嚴經云。吾不見時。何不見吾不見之處。若見不見。自然非彼不見之相。 若不見吾不見之地。自然非物。云何非汝。 雪竇到此。引經文不盡。全引則可見。 經云。若見是物。則汝亦可見吾之見。若同見者。名為見吾。吾不見時。何不見吾不見之處。 若見不見。自然非彼不見之相。若不見吾不見之地。自然非物。云何非汝。辭多不錄。 阿難意道。世界燈籠露柱。皆可有名。亦要世尊指出此妙精元明。喚作什麼物。教我見佛意。 |
「능엄경」에 이르기를, “내가 보지 않을 때는 어찌하여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보지 못하느냐? 만약 보지 않는 곳을 본다면 자연히 그것은 내가 보지 않는 상(相)이 아니려니와, 만약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보지 못한다면 자연히 물상(物相)이 아니리니, 이것이 어찌 네가 아니겠느냐?”고 하였다. 설두스님은 여기에서 경문(經文)을 모두 인용하지 않았는데, 전부를 인용했더라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능엄경」에서는 “만약 견(見)이 물질이라면 너 또한 나의 견(見)을 보아야 하리라. 만약 함께 보는 것으로 나의 견(見)을 보는 것으로 여긴다면 내가 보지 않을 때는 어찌하여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보지 못하느냐? 만약 보지 않는 곳을 본다면 자연히 그것은 내가 보지 않는 상(相)이 아니려니와, 만약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보지 못한다면 자연히 물상(物相)이 아니리니, 이것이 어찌 네가 아니겠느냐?”라고 하였다. 말씀이 길어서 다 말하지 않겠으나, 아난이 말한 뜻은 세계의 등롱(燈籠)과 노주(露柱)는 다 이름 붙일 수 있거니와, 세존께서도 이 묘정원명(妙精元明)을 무슨 물건이라고 해야 할지 꼭찝어 밝히시어 제가 부처님 뜻을 알도록 가르쳐 주십사 한 것이었다. |
世尊云。我見香臺。阿難云。我亦見香臺。即是佛見。 世尊云。我見香臺則可知。我若不見香臺時。爾作麼生見。 阿難云。我不見香臺時。即是見佛。 佛云。我云不見。自是我知。汝云不見。自是汝知。他人不見處。爾如何得知。 古人云。到這裏。只可自知。與人說不得。 只如世尊道。吾不見時。何不見吾不見之處。若見不見。自然非彼不見之相。 若不見吾不見之地。自然非物。云何非汝。 |
세존께서 “나는 향대(香臺)를 보느니라”고 하셨을 때, 아난이 “저도 향대를 보고 있사오니,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견(見)이겠나이다.” 하거든, 세존께서 “내가 향대를 볼 때는 안다지만 내가 향대를 보지 않을 때는 너는 무엇을 보느냐?” 아난이 “제가 향대를 보지 않을 때는 부처님을 보나이다.”하고 답했다면, 부처님께서 “내가 보지 않는다고 한 것은 내 스스로가 아는 것이요, 네가 보지 않는다고 한 것은 네가 스스로 아는 것이니,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것을 네가 어찌 알아지겠느냐?” 하신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되, “여기에 이르러서는 다만 스스로 아는 것이지 남이 말해주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으니, 세존의 “내가 보지 않을 때는 어찌하여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보지 못하느냐? 만약 보지 않는 곳을 본다면 자연히 그것은 내가 보지 않는 상(相)이 아니려니와, 만약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보지 못한다면 자연히 물상(物相)이 아니리니, 이것이 어찌 네가 아니겠느냐?”라는 말씀과 같다. |
*이 구절은 원오스님이 본칙에 대한 예를 들어 설명하신 것이다. |
若道認見為有物。未能拂跡。吾不見時。如羚羊掛角。聲響蹤跡。氣息都絕。 爾向什麼處摸索。經意初縱破。後奪破。 雪竇出教眼頌。亦不頌物。亦不頌見與不見。直只頌見佛也。 |
만일 견(見)을 어떤 물상(物相)이라 여기어 말한다면 종적을 쓸어버리지 못한 것이다. 내가 보지 못할 때는 영양괘각(羚羊掛角*)과 같아서 소리도 반향(反響)도 종적도 호흡도 모두 끊기거늘, 그대는 어디에서 찾으려는가? 능엄경의 뜻은 처음은 종파(縱破*)요, 나중은 탈파(奪破*)이다. 설두스님은 가르침에 벗어난 안목으로 송(頌)을 했으나 물상(物相)을 송하지도 않고, 견(見)과 불견(不見)을 송하지도 않아서 곧바로 다만 부처를 보라고 송한 것이다. |
*羚羊掛角; 羚羊挂角. 대오(大悟)한 사람은 미혹과 집착의 종적이 끊어져 멸한 것이 마치 영양(羚羊)이 잠을 잘 때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 땅에 발을 붙이지 않아서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 것이니, 곧 종적이 사라져 걸림이 없는 경지를 뜻한다. *縱破; 執著한 곳을 철저히 파(破)하는 것. *奪破; 執著하는 病을 철저히 파하는 것. |
全象全牛瞖不殊 (半邊瞎漢。半開半合。扶籬摸壁作什麼。一刀兩段) 從來作者共名模 (西天四七唐土二三。天下老和尚。如麻似粟。猶自少在) 如今要見黃頭老 (咄。這老胡。瞎漢。在爾腳跟下) 剎剎塵塵在半途 (腳跟下蹉過了也。更教山僧說什麼。驢年還曾夢見麼) |
전상(全象*) 전우(全牛*)를 안다 해도 눈에 백태(白苔) 낀 것*과 다르지 않고 ('반은 열리고 반은 닫힌 반쪽 눈먼 놈이 담벼락은 더듬어서 무얼 하려느냐?' 하고 단칼에 두 동강을 내었다.) 종래(從來)의 작자(作者;作家)들도 다 같은 명색(名色;名模*,名貌)이거늘 (서천의 28 조사와 중국의 여섯 조사, 천하의 노화상이 참깨 같고 좁쌀 같이 많아도 오히려 스스로에게는 부족함이 있다.) 지금에 황두노(黃頭老;佛)를 보려 하는가? (쯧쯧! 이 늙은 오랑캐 눈먼 놈이 너의 발뒤꿈치 아래에 있건만.) 찰찰진진(刹刹塵塵*)이라도 도중(途中;半途)에만 있으리라. (발 뒤꿈치 아래에서 빗나가버렸거늘, 다시 산승더러 무슨 말을 하라는 것인가? 기약할 수 없는 날에 꿈에서나 보려나.) |
아무리 예리한 칼과 능수능란한 솜씨를 지녔다 해도 코끼리 더듬는 맹인들과 같아서 불성(佛性)을 견(見)으로 보지 못하기는 지금까지 내려온 조사들일지라도 마찬가지건만 부처를 보려고만 하느냐? 그래서야 아무리 아무리 가봐도 나아가지 못하고 중간에만 있을 뿐이다. (원오스님은 刹刹塵塵을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티끌을 한 티끌 위에서 보는 경지로 해석하셨다.) *全象全牛; 열반경 맹인 코끼리 더듬기와 장자 포정의 소잡기를 함께 들춰 얘기한 것이니, 맹인이 온전한 소를 알 지경에 이르고, 포정이 한 눈에 소 전체를 알아본다는 것은 능수능란한 솜씨에 비유한 표현이다. *눈에 백태가 끼었다는 것은 제이월(第二月)을 볼지언정 진월(眞月)은 보지 못함을 뜻한다. *名模; 이름과 모양새 *刹刹塵塵; 세계 세계를 부수고 부수어 만들어진 티끌 티끌이니 한량없는 수를 뜻한다. 여기서는 무수한 노력을 기울이는 공부. *扶籬摸壁; 깜깜히 어두워 담벼락을 붙들고 더듬어 찾는 모양새. 선림에서는 범부의 사려분별(思慮分別)로 부처의 경계를 억측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驢年; 12간지에 당나귀는 없으니 당나귀 해는 기약할 수 없는 날을 뜻한다. |
全象全牛瞖不殊。眾盲模象。各說異端。出涅槃經。 僧問仰山。和尚見人問禪問道。便作一圓相。於中書牛字。意在於何。 仰山云。這箇也是閑事。忽若會得。不從外來。忽若不會。決定不識。 |
'온전한 코끼리 온전한 소를 안다 해도 눈에 백태 낀 것과 다를 것 없다' 하였는데, 여러 맹인이 코끼리의 생김새를 제각기 다른 부분으로 말했다는 열반경에 나오는 말이다. 어떤 스님이 앙산스님에게 묻기를, “큰 스님께서는 뵙건대 사람들이 선(禪)을 묻고 도를 물으면 문득 일원상(一圓相*)을 그리시고 그 가운데 소 우(牛)자를 쓰시는데, 그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 앙산스님이 “그런 것은 한가한 일이다. 홀연히 알고 보면 밖에서 온 것이 아닐 것이요, 모른다면 결정코 알지 못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
*'一圓相을 그리고 안에 牛자를 쓴다는 것'은 동그라미는 원각(圓覺), 소는 불성(佛性)의 상징이니, 원명(圓明)한 각(覺) 안에 불성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앙산스님은 알고 보면 바로 내 안에 있지만 모르고서는 아무리 찾아도 얻을 수 없다고 하셨다. |
我且問爾。諸方老宿。於爾身上。指出那箇是爾佛性。 為復語底是。默底是。莫是不語不默底是。為復總是。為復總不是。 爾若認語底是。如盲人摸著象尾。若認默底是。如盲人摸著象耳。 若認不語不默底是。如盲人摸著象鼻。若道物物都是。如盲人摸著象四足。 若道總不是。拋本象落在空見。如是眾盲所見。只於象上名邈差別。 |
“내가 또 그대들에게 묻겠거니와, 제방(諸方)의 노숙(老宿)들이 그대들의 몸 어느 곳을 가리켜 불성(佛性)이라 하던가? 다시 말을 하는 것이 옳겠는가, 침묵하는 것이 옳겠는가? 아니면 말하지도 침묵하지도 않는 것이 옳겠는가? 또 다 옳겠는가, 다 옳지 못하겠는가? 그대가 말하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면 마치 맹인이 코끼리 꼬리를 더듬는 격이요, 침묵하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면 마치 맹인이 코끼리 귀를 더듬는 격이며, 말하지도 침묵하지도 않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면 맹인이 코끼리 코를 더듬는 격이고, 이것도 저것도 다 옳다고 말한다면 맹인이 코끼리 네 다리를 더듬는 격이며, 다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본래의 코끼리는 버려두고 공견(空見)에 빠진 것이니, 이와 같이 여러 맹인들이 코끼리를 보는 소견은 이름도 모양도[名貌] 다르다. |
*불성(佛性)은 言辭를 떠난 것이라 무어라 말해봐도 맹인 코끼리 더듬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말을 붙인 즉 보리(菩提)를 더럽힌 것이다. |
爾要好。切莫摸象。莫道見覺是。亦莫道不是。 祖師云。菩提本無樹。明鏡亦無臺。本來無一物。爭得染塵埃。 又云。道本無形相。智慧即是道。作此見解者。是名真般若。 明眼人見象得其全體。如佛見性亦然。 全牛者出莊子。庖丁解牛。未嘗見其全牛。順理而解。游刃自在。更不須下手。 纔舉目時。頭角蹄肉。一時自解了。如是十九年。 其刀利如新發於硎。謂之全牛。 雖然如此奇特。雪竇道。縱使得如此。全象全牛與眼中瞖更不殊。 |
그대들은 절대 코끼리를 더듬지 말아야 하거니와, 보고 느낀 것으로 옳다 하거나, 옳지 않다고도 말하지 말라. 조사(六祖)께서는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대가 없도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찌 티끌 먼지에 더럽혀지리오.' 하시고, 또 '도란 본래 형상이 없으니, 지혜가 곧 도이다.'고 하셨으니, 이런 견해를 짓는다면 이를 참된 반야(般若)라 하리라. 눈 밝은 사람은 코끼리 그 전체를 보거니와, 부처의 성품을 보는 것도 그와 같다. '온전한 소[全牛]'란 장자(莊子)에서 나온 말이다. 포정(庖丁)이 소를 해체하기를 온전히 소를 보지도 않고 이치에 따라 해체하는데, 칼놀림이 자유자재하고 다시 손 댈 필요가 없었으며, 잠깐 눈으로 훑었을 때 머리와 뿔, 발굽, 고기를 일시에 알아버렸다. 이와 같은 19년 동안 그의 칼날은 숫돌에 갓 갈아낸듯이 예리하였으니, 이를 일러 전우(全牛)라 한 것이다. 비록 이처럼 기특하더라도 설두스님은 “설사 이와 같이 온전한 코끼리 온전한 소를 아는 솜씨일지라도 눈에 백태(白苔) 낀 맹인과 다를 것 없다.”고 하였다. |
從來作者共名摸。直是作家。也去裏頭摸索不著。 自從迦葉。乃至西天此土祖師。天下老和尚。皆只是名摸。 雪竇直截道。如今要見黃頭老。所以道。要見即便見。更要尋覓方見。則千里萬里也。 黃頭老。乃黃面老子也。爾如今要見。剎剎塵塵在半途。 尋常道。一塵一塵剎。一葉一釋迦。 盡三千大千世界。所有微塵。只向一塵中見。當恁麼時。猶在半途。 那邊更有半途在。且道在什麼處。 釋迦老子。尚自不知。教山僧作麼生說得 瞖(壹計切目疾)。 |
'종래(從來)의 작가들도 다같은 명모다.' 하였는데, 작가라 하여도 그 속으로 들어가 끝을 모색해볼 수 없다는 것이니. 가섭으로부터 서천(西天;천축)과 이 땅의 조사와 천하의 노화상에게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만 이런 이름과 모양새[名摸]라는 것이다. 설두스님은 딱 잘라 말하되, '지금에 부처를 보려 하느냐?”라고 하였거니와, 그래서 “보면 곧 알아채야 하지, 다시 찾고 찾아서 보려 하면 곧 천리만리다”고 하였다. 누런 머리의 노인[黃頭老]은 황면노자(黃面老子;佛]를 말하거니와, 그대들이 지금 보려고 하지만 '찰찰진진(刹刹塵塵)이라도 중간에 있을 뿐이다'고 하였다. 평소에 말하기를 “한 티끌이 한 티끌세계요, 한 잎이 한 석가이다”라고 하였는데, 삼천대천세계의 티끌을 한 티끌 위에서 보는 경지일지라도 오히려 도중에 있다는 것이다. 어느 변(邊)에 나머지 반도(半途;절반*)가 있겠는가? 말해보라, 어느 곳에 있는지. 석가 늙은이도 오히려 모를 터인데 산승더러 어떻게 말하라는 것이냐! |
*다른 절반[半途]는 어느 변에 있겠는가?는 어떻게 나아가야 眞我를 알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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