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巖錄

벽암록(碧巖錄) 제 9칙 조주사문(趙州四門) _조주(趙州)스님의 네 문(門)

碧雲 2020. 12. 6. 15:21
벽암록(碧巖錄) 제 9칙 조주사문(趙州四門) _조주(趙州)스님의 네 문(門)
垂示云。
明鏡當臺。妍醜自辨。鏌鎁在手。殺活臨時。
漢去胡來。胡來漢去。死中得活。活中得死。且道到這裏。又作麼生。
若無透關底眼轉身處。到這裏灼然不柰何。
且道如何是透關底眼。轉身處。試舉看。
수시(垂示)
맑은 거울을 대에 걸면 곱고 추함이 자연히 드러나고,
막야검(鏌鎁劍*)을 손에 쥐면 죽이고 살리기를 때 맞춰 할 수 있거니와,
한(漢)나라가 가면 오랑캐가 오고, 오랑캐가 오면 한나라가 가며,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고, 산 가운데서 죽는다.
말해보라. 여기에 이르러서는 또 어떻게 하겠는가?
관문을 뚫어낼 안목도 몸 굴릴 데도 없다면 여기에 이르러서는 분명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말해보라. 무엇이 관문을 뚫어내는 안목이며, 몸 굴릴 곳인가?
예를 들어 살펴보자.
*鏌鎁劍; 莫邪劍. 고대의 명검. '막사(莫邪)'는 오나라의 저명한 주검장(鑄劍匠)인 간장(干將)의 아내이다.
지아비와 아내 두 사람이 오(吳)왕 합려(闔閭)를 도왔는데, 음양(陰陽)으로 주조된 두 검은
양검을 간장(干將),음검을 막사(莫邪)라 했다 전한다.
선림(禪林)에서는 자신이 본래 구비하고 있는 지혜, 또는 스승과 막힘없이 대화 할 수 있는 학인의 지견(智見)에 비유한다. [佛光大辭典]
 【九】舉
僧問趙州。如何是趙州
(河北河南。總說不著。爛泥裏有刺。不在河南。正在河北)
州云。東門西門南門北門
(開也。相罵饒爾接嘴。相唾饒爾潑水。見成公案。還見麼。便打)。
 【9칙】 조주사문(趙州四門)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조주(趙州)입니까?"
(하북<河北>이든 하남<河南>이든 어떤 말로도 닿지 못할 터인데, 고운 진흙 속에 가시가 있구나.
하남에는 없고 바로 하북에 있다.)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 북문(北門)이니라."
(열어주었다. 서로 욕설을 퍼붓는데 오히려 새 부리를 이어주고, 논쟁하느라 침이 마를 지경인데 물을 뿌려주니,
견성공안<見成公案>이로다. 보았느냐? 갑자기 후려치다.)。
*相唾饒爾潑水(相罵饒爾接嘴); 쌍방이 서로 첨예하게 맞서 입에서 침을 튀기며 논쟁할 때,
침이 마를 지경인데 오히려 물을 뿌려 그 기세를 도와준다(욕설을 퍼붓는데 새 부리를 이어준다)는 뜻으로,
선림(禪林)에서 흔히 어떤 상황이나 국면에도 제한 받지 않는 자유자재한 경지를 가리켜 비유하는 말이다.
*見成公案; 現成公案. 조작(造作)을 빌리지 않고 현상 그대로에서 이루어지는 공안(公案), 즉 여실(如實)한 공안.
大凡參禪問道。明究自己。切忌揀擇言句。何故不見趙州舉道。至道無難。唯嫌揀擇。
又不見雲門道。如今禪和子。三箇五箇聚頭口喃喃地。便道。這箇是上才語句。那箇是就身處打出語。
不知古人方便門中。為初機後學。未明心地。未見本性。不得已而立箇方便語句。
如祖師西來。單傳心印。直指人心。見性成佛。那裏如此葛藤。
須是斬斷語言。格外見諦。透脫得去。可謂如龍得水。似虎靠山。
대체로 참선(參禪)하며 도를 묻는 일은 자기를 밝혀 탐구하는 것이라
절대 언구(言句)를 간택(揀擇)해서는 안 되는데, 무엇 때문이겠는가,
보지 못했는가? 조주스님은 신심명(信心銘)을 들춰 "지극한 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간택(揀擇)을 꺼릴 뿐이다."고 하였고,
또 운문스님은 "요즘의 선화상(禪和尙)들은 삼삼오오 무리지어 입으로만 나불대면서
'이것은 상급 재능의 어구(語句)이고, 저것은 몸에 관해 내뱉은 말이다'고 한다." 하였다.
고인의 방편문 중에는 아직 심지(心地)를 밝히지 못하고 본성(本性)을 보지 못한
초기(初機)의 후학(後學)들을 알지 못하니, 부득이 그런 방편의 어구(語句)를 세우기도 한다.
조사(祖師)께서 서래(西來)하시어 단전심인(單傳心印)하신
직지인심(直指人心)하고 견성성불(見性成佛)함에 어찌 그 속이 이런 갈등(葛藤)과 같겠는가?
모름지기 언어를 베어 끊어버리고 격외(格外)에서 참 이치를 보아
꿰뚫고 벗어나 갈 수 있어야 가히 용이 물을 얻고 범이 산을 의지함 같다 하리라.
久參先德。有見而未透。透而未明。謂之請益。
若是見得透請益。卻要語句上周旋。無有凝滯。
久參請益。與賊過梯。其實此事不在言句上。
所以雲門道。此事若在言句上。三乘十二分教。豈是無言句。何須達磨西來。
汾陽十八問中。此問謂之驗主問。亦謂之探拔問。
오래 참구한 선덕(先德)에게 견(見)이 있으나 뚫지 못한 것, 뚫었으나 밝히지 못한 것을
여쭙는 것이 청익(請益)인데, 만약 이 견(見)을 꿰뚫고서 청익하거든
어구상(語句上)으로 주고 받음에 응체(凝滯)가 없어야 한다.
구참(久參)에게 청익함은 도적에게 넘어갈 사다리를 주는 것이라,
사실 이 일은 언구상(言句上)에 있지 않다.
그래서 운문(雲門)선사는 "이 일이 만약 언구상에 있는 것이라면,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教)는 어찌 언구가 없을 것이며,
왜 꼭 달마(達磨)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셔야 했겠는가?" 하였다.
분양(汾陽)스님의 열여덟 물음 중 이 질문을 험주문(驗主問*) 또는 탐발문(探拔問)이라 한다.
*驗主問; 汾陽十八問 중 하나로 探拔問, 心行問이라고도 한다.
주(主)는 스승을 말하니, 제자가 질문을 통해 스승의 기략(機略)의 깊고 얕음을 시험한다 하여 험주문이라 한다.
[汾陽十八問] 請益問, 呈解問, 察辨問, 投機問, 偏僻問, 心行問, 探拔問, 警擔問, 置問問, 故問問, 借事問, 實問問,
假問問, 審問問, 徵問問, 明問問, 默問問.
這僧致箇問頭。也不妨奇特。若不是趙州。也難抵對他。
這僧問如何是趙州。趙州是本分作家。便向道。東門西門南門北門。
僧云。某甲不問這箇趙州。州云。爾問那箇趙州。後人喚作無事禪。賺人不少。
何故他問趙州。州答云。東門西門南門北門。所以只答他趙州。
爾若恁麼會。三家村裏漢。更是會佛法去。只這便是破滅佛法。
如將魚目比況明珠。似則似是則不是。
이 스님이 그런 질문을 한 것이야말로 기특하여 마지 않다.
조주(趙州)선사가 아니었다면 대처하기 어려웠으리라.
이 스님이 “어떤 것이 조주입니까?”하고 물었는데,
조주선사는 본분작가(本分作家)인지라 곧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다”고 하니,
그 스님이 “저는 그런 조주를 묻지 않았습니다.”고 하자,
조주선사는 “너는 어떤 조주를 물었느냐?”고 하였다.
후인들은 이를 “할 일 없는 선[無事禪]이 사람을 적지 않게 속인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그가 조주에게 물었을 때 조주선사는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라고
다만 엉뚱한 조주로 답한 것인가?' 그대들이 이렇게 안다면 세 집 밖에 안 사는 시골놈이요,
다시 이것이 불법(佛法)을 알러 간다지만 다만 이것이 다름 아닌 불법(佛法)을 파멸(破滅)시키는 것이라
생선 눈깔을 가져다 명주(明珠)에 비하는 것과 같아서
비슷하다면 비슷하겠으나 이것이다 한다면 아닌 것이다.
山僧道。不在河南。正在河北。且道是有事是無事。也須是子細始得。
遠錄公云。末後一句。始到牢關。指南之旨不在言詮。
十日一風。五日一雨。安邦樂業。鼓腹謳歌。謂之太平時節。謂之無事。不是拍盲便道無事。
須是透過關捩子。出得荊棘林。淨裸裸赤灑灑。依前似平常人。
由爾有事也得。無事也得。七縱八橫。終不執無定有。
有般底人道。本來無一星事。但只遇茶喫茶。遇飯喫飯。此是大妄語。
내[山僧]가 “하남(河南)에는 없고, 바로 하북(河北)에 있다.”고 하였는데,
말해보라, 이것이 할 일 있는 것[有事]인가, 할 일 없는 것[無事]인가?
모름지기 자세(仔細)히 해야 하리라.
원록공(遠錄公*)이 말하기를, "말후일구(末後一句*)가 바야흐로 뇌관(牢關*)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하남을 가리킨(없다고 한) 취지는 말로 헤아릴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열흘에 한 번 바람불고, 닷새에 한 번 비내리며, 평안한 나라에서 생업을 즐기면서
배 두드리고 노래하는 것을 태평시절이라 하고, 무사(無事)하다고 하거니와,
맹인이 무사(無事)를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모름지기 관문의 빗장을 뚫고 자나서 형극(荊棘)의 숲을 벗어나면
정라라적쇄쇄(淨裸裸赤灑灑*)하여 예전의 평상인(平常人)과 같을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유사(有事)라도 좋고, 무사(無事)여도 좋게 칠종팔횡(七縱八橫)한다면
결국 무(無)에 집착하지도 유(有)에 정착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본래 한 눈금 만큼의 일도 없으니, 다만 차를 만나면 차마시고,
밥을 만나면 밥먹는다.'고 하지만 이는 크게 허망한 말이다.
*遠錄公; 宋代禪僧 浮山法遠(991~1067). 九帶禪 창시자.
*末後一句; 末後句. 철저한 대오(大悟)의 극에 달하여 내뱉는 지극한 말.
*牢關; 미혹과 깨달음[迷悟] 사이의 단단한 관문(關門)을 말한다.
*淨裸裸赤灑灑;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모양새.
謂之未得謂得。未證謂證。元來不曾參得透。見人說心說性說玄說妙。
便道只是狂言。本來無事。可謂一盲引眾盲。殊不知。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 하고, 증(證)하지 못하고서 증했다 하는데,
원래 참구하여 꿰뚫은 적도 없으면서 사람들에게 심성(心性)을 말하고,
현묘(玄妙)를 말하는 것을 보면, 다만 미친소리라 할 것이요,
본래가 무사(無事)이거늘 가히 한 맹인이 여러 맹인을 인도하되, 별로 알지 못한다 하리라.
祖師未來時。那裏喚天作地。喚山作水。來為什麼祖師更西來。
諸方陞堂入室。說箇什麼。盡是情識計較。
若是情識計較。情盡方見得透。若見得透。依舊天是天。地是地。山是山。水是水。
조사께서 오시지 않았을 때인들 어찌 하늘을 땅이라 하고, 산을 물이라 했겠으며,
무엇을 위해 조사께서는 또 서쪽에서 오셨겠는가?
제방(諸方)은 승당입실(陞堂入室)하여 무엇을 설하는가?
모두가 정(情)과 식(識)으로 계교(計較)함이다.
만약 정식(情識)의 계교라면 정(情)이 다하여 마침내 견(見)이 뚤리면
예전대로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 산은 산, 물은 물이리라.
古人道。心是根。法是塵。兩種猶如鏡上痕。到這箇田地。自然淨裸裸赤灑灑。
若極則理論。也未是安穩處在。到這裏。人多錯會。打在無事界裏。
佛也不禮。香也不燒。似則也似。爭奈脫體不是。
纔問著。卻是極則相似纔拶著。七花八裂。
坐在空腹高心處。及到臘月三十日。換手搥胸。已是遲了也。
고인(古人;永嘉의 證道歌)이 이르되, '마음은 근(根;六根)이요, 법은 진(塵;六境)이라,
두 가지가 마치 거울 위의 흔적과 같다.' 하였으니,
이러한 전지(田地)에 이르면 자연히 정라라적쇄쇄하리라.
만일 극한 논리로 안은처(安穩處)에 있지 못하기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잘못 알고 무사한 경계에 빠져 부처님께 예배하지 않고, 향도 사르지 않는다면,
비슷하다면 비슷하겠으나 실체를 벗어나 옳지 않음을 어찌 하겠는가?
잠깐 물으면 극에 이른 모양새이다가 약간만 내질러도 산산히 부셔져버리니,
텅 빈 뱃속에 마음은 고고한 척 앉아 있다가 급기야 납월 삼십일(죽을 날)에 이르러
손으로 가슴을 쳐봐도 이미 늦은 것이다.
這僧恁麼問。趙州恁麼答。且道作麼生摸索。
恁麼也不得。不恁麼也不得。畢竟如何。這些子是難處。
所以雪竇拈出來。當面示人。
저 스님이 그렇게 묻고, 조주 선사가 그렇게 답했는데, 또 말해보라, 어떻게 모색(摸索)할 것인지.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이렇게 안 해도 안 되면 필경 어찌 할 것인가? 이것이 조금은 어려운 곳이다.
그래서 설두스님이 끌어다가 당면(當面)하여 보여준 것이다.
趙州一日坐次。侍者報云。大王來也。
趙州矍然云。大王萬福。侍者云。未到和尚。州云。又道來也。參到這裏。見到這裏。不妨奇特。
南禪師拈云。侍者只知報客。不知身在帝鄉。趙州入草求人。不覺渾身泥水。
這些子實處。諸人還知麼。看取雪竇頌。
조주 선사가 어느날 앉아 있는데, 시자가 “대왕께서 오십니다.” 하였다.
조주 선사는 두리번거리며 “대왕께서는 만복하소서!" 하자,
시자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큰 스님.”라고 하니, 선사가 “오신다고 또 말해보아라.” 하였다.
참구가 여기에 이르고, 견해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기특하여 마지 않다.
남선사(南禪師;黃龍慧南禪師)가 염(拈*)하여 말하기를, "시자가 다만 손님을 아뢸 줄만 알고,
제몸이 황제의 본향(本鄕)에 있음을 모르고 있으니, 조주스님이 풀 속에 들어가 사람을 찾느라
저도 모르게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 작으나마 진실한 곳을 여러분들은 아는가?
설두스님의 송을 살펴보아라.
*拈; 公案을 들고 평(評)을 곁들이는 설법의 형식.
  句裏呈機劈面來
(響。魚行水濁。莫謗趙州好)
  爍迦羅眼
纖埃
(撒沙撒土。莫帶累趙州。撈天摸地。作什麼)
  東西南北門相對
(開也。那裏有許多門。背卻趙州城。向什
麼處去)
  無限輪鎚擊不開
(自是爾輪鎚不到。開也)
  어귀 속에 기틀을 드러내 곧바로 치고 들어왔건만
(響。물고기가 지나가면 물이 흐려지니, 조주 비방하기 좋아하지 말라.)
  삭가라안(爍迦羅眼*)에는 실낱같은 티끌도 끊어졌는지라
(모래를 뿌리고 흙을 뿌리다니. 조주에게 누 끼치지 말라. 하늘을 붙들고 땅을 더듬어서 어찌 하려는가?)
  동서남북문을 상대하여
(열려 있다. 어디에 그리 많은 문이 있던가? 조주성(趙州城)을 등지고 어디로 갔는가?)
  무한윤추(無限輪鎚*)로 때려봐도 열리지 않네.
(애초부터 그대가 윤추를 대지 말아야 열린다.)
*無限輪鎚; 무한히 윤전(輪轉)하는 철추(鐵鎚).
趙州臨機。一似金剛王寶劍。擬議即截卻爾頭。往往更當面換卻爾眼睛。
這僧也敢捋虎鬚致箇問頭。大似無事生事。爭奈句中有機。
他既呈機來。趙州也不辜負他問頭。所以亦呈機答。不是他特地如此。
蓋為透底人自然合轍。一似安排來相似。
조주의 임기응변이 금강보검 같아서 시비곡직을 가리다 보면 곧 그대의 머리가 잘려나가고,
이따금은 다시 당면하여 그대들의 눈동자를 바꿔버린다.
이 스님이 감히 호랑이 수염을 만지면서 질문을 던졌으니,
무사(無事)에서 일을 냄과 거의 같지만 어귀 속에 기틀이 있음을 어찌 하겠는가?
그가 기왕 기틀을 드러내 오자 조주 선사가 저버리지 않고 그의 질문을 받아냈으니,
그래서 또한 기틀을 드러내 답한 것이요, 그와 특별한 처지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대개 꿰뚫은 사람들은 자연히 합철(合轍*)하여 편안히 다가오는 듯함이 서로 비슷하다.
*合轍; 두 바퀴가 짝을 이루고 구르는 모양을 지칭하는 것으로, 피차간에 사상과 언행이 합치함을 비유한 말이다.
不見有一外道。手握雀兒。來問世尊云。且道某甲手中雀兒。是死耶是活耶。
世尊遂騎門閫云。爾道我出耶入耶(一本云。世尊豎起拳頭云。開也合也)外道無語。遂禮拜。
此話便似這公案。古人自是血脈不斷。所以道。問在答處。答在問處。
雪竇如此見得透。便道句裏呈機劈面來。句裏有機。如帶兩意。又似問人。又似問境相似。
趙州不移易一絲毫。便向他道。東門西門南門北門。
모르는가? 어느 외도가 손에 참새 새끼를 쥐고서 세존께 여쭈어,
“말씀해 보십시오. 제 수중의 참새가 죽었겠습니까? 살았겠습니까?” 하니,
세존께서 문지방으로 나아가 올라서시어 말씀하셨다.
“그대는 말해보라. 내가 나가겠느냐, 들어오겠느냐?” (어떤 본<本>에는 세존께서
주먹 끝을 세워 일으키시면서 "손을 펴겠느냐, 쥐겠느냐?"고 하셨다고 되어 있다.)
외도는 대답을 못하고 마침내 예배하였다.
이 이야기는 이 공안과 흡사하다. 옛사람[佛] 스스로가 혈맥(血脈)을 계승하고 있기에
그래서 질문은 답에 있고, 답은 질문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설두(雪竇)스님은 이러한 견(見)이 뚫려 있는지라
'어귀 속에 기틀을 드러내 곧바로 치고 들어왔다.'고 하였는데,
'어귀 속에 기틀이 있다.' 한 것은 두 의미를 지닌 듯하여 (조주라는) 사람을 묻는 것 같기도 하고,
경계 비슷한 것을 묻는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이다.
조주 선사는 실오라기 하나도 끄떡하지 않고, 곧 그에게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다."고 답했다.
爍迦羅眼絕纖埃。此頌趙州人境俱奪。向句裏呈機與他答。此謂之有機有境。纔轉便照破他心膽。若不如此難塞他問頭(。)
爍迦羅眼者。是梵語。此云堅固眼。亦云金剛眼。照見無礙。不唯千里明察秋毫。亦乃定邪決正。辨得失。別機宜識休咎。
'삭가라안(爍迦羅眼)에는 실낱같은 티끌도 끊어졌다.' 하였는데,
이 송(頌)은 조주 선사가 사람과 경계를 동시에 빼앗아버린 채,
어귀 속에 기틀을 드러내 그에게 답해 주었다는 것이니, 이를 기(機*)가 있고, 경(境*)이 있다고 한다.
잠깐 굴려 언듯 비춰 보고서 그의 심지와 담력을 파악했기 망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질문의 뽀쪽한 끝을 막아내기 어려웠으리라.
삭가라안(爍迦羅眼)이란 범어로서, 이는 견고안(堅固眼), 또는 금강안(金剛眼)을 말하며,
비춰 봄이 무애(無礙)하여 천리 밖 추호(秋毫)를 환히 볼 뿐 아니라, 또 사(邪)와 정(正)을 결정하고,
득과 실을 판단하고, 기의(機宜*)를 분별하며, 휴구(休咎*)를 알아낸다.
*機와 境; 機는 내적 마음의 작용, 境은 외적 형상을 갖춘 사물.
예컨대, 세존의 염화(拈花)가 경(境)이라면, 가섭이 그 의미를 알고 파안미소(破顏微笑)한 것이 기(機)이다.
*機宜; 시기(時期)나 형편에 알맞음. 중생에게 선근이 있어 교화하기에 알맞음.
*休咎; 길(吉)한 것과 흉(凶)한 것. 복(福)과 화(禍).
雪竇云。東西南北門相對。無限輪鎚擊不開。既是無限輪鎚。何故擊不開。
自是雪竇見處如此。爾諸人又作麼生。得此門開去。
請參詳看。
설두스님은 '동서남북문을 상대하여 무한윤추로 때려봐도 열리지 않는다.' 하였는데,
기왕에 이것이 무한히 윤전하는 철추라면 어째서 때려도 열리지 않겠는가?
애초에 설두스님의 견처(見處)가 이러하거니와, 여러분들은 또 어떻게 이 문을 열어가겠는가?
바라건대, 자세히 참구하여 살펴보라.
*宏智禪師는 廣錄에서 趙州四門을 發心, 修行, 菩提, 涅槃의 四門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