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14칙 운문일대시교(雲門一代時教) _운문선사의 「대일설(對一說)」 |
【一四】舉 僧問雲門。 如何是一代時教 (直至如今不了。座主不會。 葛藤窠裏) 雲門云。對一說 (無孔鐵鎚。七花八裂。 老鼠咬生薑)。 |
【제14칙】 운문선사의 「대일설(對一說)」 어느 스님이 운문(雲門)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일대시교(一代時教)입니까?" (오늘날까지 마치지 못하고 좌주<座主>도 모르는 갈등<葛藤>이 가득한 속이다.) 운문은 "「대일설(對一說*)」이니라." 하였다. (무공철추<無孔鐵鎚*>요, 칠화팔렬<七花八裂*>이다. 늙은 쥐에게 생강을 물리는구나.)。 |
*對一說; 釋尊께서 49년 동안 說하신 一代教說을 어찌 一時에 述說하리오?
雲門은 「對一說」이라고 다만 이 세 글자로 답했다.
〈金剛經宗通〉에서는 「對一說」은 곧 「一切法」이다고 하였고,
雪竇는 '對一說。大孤絕。無孔鐵鎚重下楔。閻浮樹下笑呵呵。
昨夜驪龍拗角折。別別。韶陽老人得一橛。'이라 頌했다.
또 운문에게 어느 스님이 "목전의 기(機)도 아니고, 목전의 일도 아닐 때는 어찌합니까?" 물으니,
운문은 "도일설(倒一說)이다"고 답했는데, 이 말은 '일체법이 아니다'는 뜻이다 하였고,
雪竇는 倒一說。分一節。同死同生為君訣。八萬四千非鳳毛。
三十三人入虎穴。別別。擾擾怱怱水裏月。라고 頌했다.
*無孔鐵鎚; '구멍없는 철추'란 손으로 잡아 볼 데가 없다는 것이니,
어디로 구를지 모르도록 자유분방하여 어찌해 볼 수 없음을 뜻한다.
*七花八裂; 산산히 부숴져서 흩어지는 모양새를 말하니, 自在하고 通達無礙함을 찬탄하는 말이다.
*老鼠咬生薑; '늙은 쥐에게 생강을 물렸다'는 것은 '생소한 맛을 대하게 하였다'는 뜻.
禪家流。欲知佛性義。 當觀時節因緣。 謂之教外別傳。單傳心印。 直指人心。見性成佛。 |
선가류(禪家流*)가 불성(佛性)의 뜻을 알려거든 마땅히 시절인연(時節因緣*)을 살펴야 하는데, 이것을 교외별전(教外別傳*)이다 단전심인(單傳心印*),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하는 것이다. |
*禪家流; 禪宗 一家(禪家)의 물줄기(流;類), 즉 參禪하는 모든 사람을 뜻한다.
*時節因緣; 때맞은 인연.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느 때 불쑥 찾아오는 인연.
*教外別傳; '가르침(敎法) 외에 별도로 전함', *單傳心印; '단순히 찍어 전하는 마음도장(心印)',
*直指人心;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켜 보임', *見性成佛; '자성(自性)을 보아 부처를 이룸'.
참선하는 사람은 일대장교와 별개로 문득 다가오는 이런 네 가지 인연을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釋迦老子。四十九年住世。 三百六十會。 開談頓漸權實。 謂之一代時教。 這僧拈來問云。 如何是一代時教。 雲門何不與他紛紛解說。 卻向他道箇對一說。 |
석가노자(釋迦老子)가 49년을 주세(住世)하시면서 360번의 집회를 통해 돈점(頓漸*), 권실(權實*)을 말씀하신 것을 일대시교(一代時教)라 하는데, 저 스님이 가져다가 묻기를, "어떤 것이 일대시교입니까?" 하였는데, 운문(雲門)은 왜 그에게 분분(紛紛)히 해설해 주지 않고 도리어 '대일설(對一說)'이라고만 했을까? |
*頓漸二教; 순서를 따르지 않고 깨달음에 몰록 도달하게 하는 교법(教法)을 돈교(頓教)라 하고,
순서에 따라 점진(漸進)하여 오랜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교법을 점교(漸教)라 한다.
남방(南方) 6조 혜능(慧能)이 돈오(頓悟)를 주장하였으니 세칭 「남돈(南頓)」이라 하고,
북방(北方) 신수(神秀)대사가 점오(漸悟)을 주장하였기에 「북점(北漸)」이라 하니,
이것이 곧 선종의 돈점2교(頓漸二教)이다.
*權實二教; 권(權)은 한때 필요에 따라 마련한 방편 즉 권모(權謀)이니 잠시 쓰고 버리는 것이요,
실(實)은 진실이니 구경불변의 이치를 말한다.
여래께서 처음에는 방편으로 삼승(三乘)의 가르침을 펼치셨으니 이를 권교(權教)라 하고,
후에 일승(一乘)의 이치를 가르치셨으니 이를 실교(實教)라 한다.
雲門尋常一句中。須具三句。 謂之函蓋乾坤句。隨波逐浪句。 截斷眾流句。 放去收來。自然奇特。 如斬釘截鐵。 教人義解卜度他底不得。 |
운문은 통상(通常;尋常) 1구 속에 꼭 3구를 갖추고 있으니, 말하자면 함개건곤구(函蓋乾坤句*), 수파축랑구(隨波逐浪句*), 절단중류구(截斷眾流句*)인데, 방거수래(放去收來*)가 자연하여 기특하기가 마치 참정절철(斬釘截鐵*)과 같은지라, 사람들로 하여금 뜻을 이해하고 복탁(卜度*)하지 못하게 한다. |
*雲門三句; 〈人天眼目〉 卷二 雲門宗部에
「운문이 示眾하여 이르되,
"상자[函]와 뚜껑[蓋], 하늘[乾]과 땅[坤]이 서로 상응하는 이치를
한 눈에 미세한 곳까지 알아차리되[目機銖兩],
(자유자재하여)삼라만상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면[不涉萬緣]
어떻게 해야 올라가겠느냐?" 하니,
대중들이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자기가 대신하여
"화살 한 촉으로 세 관문을 깨뜨려라[一鏃破三關]"고 하였는데,
그 뒤 덕산(德山) 원명밀(圓明密)선사에 와서는
그 말에서 떨어져 나와 '3구(三句)'가 되었으니,
함개건곤구(函蓋乾坤句), 절단중류구(截斷眾流句),
수파축랑구(隨波逐浪句)라 한다.
(圓悟는 말했다. "본진본공<本真本空>이요 일색일미<一色一味>로되,
묘체<妙體>가 없지 않고 모호한 데에 있지도 않아서
통연(洞然)히 명백한 즉 함개건곤(函蓋乾坤)이다" 하였고,
또 "본래 풀어서 알 것이 아니니, 물리치기를 거듭하여
한 글자도 소화시키려 말고, 만 가지 기틀을 몰록 쉬어버리면
곧 '모든 흐름을 끊는 것[截斷眾流]'이다." 하였으며,
또 "마치 그 사람을 만났을 때 묘목을 보면 땅을 알듯이,
말하는 것 보면 사람을 아는 것이
곧 '파도를 따르고 물결을 쫓는 것[隨波逐浪]'이다.")」라 하였다.
상자와 뚜껑[函蓋], 하늘과 땅[乾坤]은 상응관계여서 상자가 크면 뚜껑도 따라 크고,
상자가 작으면 뚜껑도 따라서 작아지는,
즉 法이 항상하므로 諸佛도 항상한 이치를 상징하는 말이다.
또 南康軍雲居文慶海印禪師(雲蓋志顒 法嗣)는 一字禪으로 답하기를,
函蓋乾坤句는 「合(합할 합)」, 隨波逐浪句는 「闊(넓을 활)」,
截斷眾流句는 「窄(좁을 착)」이라 하였다.
*放去收來; 一放一收, 一擒一縱, 즉 놓아주고 잡아들이기, 把住放行의 뜻.
*斬釘截鐵; '못을 자르고 쇠를 끊는다' 함은
'말하거나 일을 판결함에 확고하고 과감한 결단이 있음'에 비유하는 말이다.
*卜度; 짐작으로 헤아림.
一大藏教。只消三箇字。 四方八面。無爾穿鑿處。 人多錯會。 卻道對一時機宜之事。故說。 又道森羅及萬象。皆是一法之所印。 謂之對一說。 更有道。只是說那箇一法。 有什麼交涉。 非唯不會。更入地獄如箭。 殊不知。古人意不如此。 所以道。粉骨碎身未足酬。 一句了然超百億。 不妨奇特。 如何是一代時教。 只消道箇對一說。 若當頭薦得。 便可歸家穩坐。 若薦不得。且伏聽處分。 |
일대장교(一大藏敎)를 다만 세 글자[對一說]로 소화했으니, 사방팔면에 저들이 후비고 들어갈[穿鑿] 곳이 없으련만 사람들은 흔히 잘못 알고서 '한 때 시의적절한 일을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고 말하거나, 또는 '삼라만상이 다 일법인(一法印*)이라서 대일설(對一說)이라 한 것이다'고 하기도 하고, 또 혹자는 '다만 어떤 한 법을 설한 것이다.'고 하는데, 무슨 연관이 있겠는가? 모르는 것만이 아니라 다시 쏜살같이 지옥으로 갈 일이다. 고인의 뜻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이라 그래서 「분골쇄신(粉骨碎身)해도 족히 갚지 못하나니, 한 구에 요연(了然)히 백억(百億)을 뛰어넘는다*」 하였으니, 기특하여 마지 않다. '어떤 것이 일대시교(一代時教)입니까?'에 다만 그 「對一說」이란 말로 소화하였는데, 만약 말머리에서 꽂혀진다면[薦;꽂을 진] 문득 귀가(歸家)하여 안은히 앉을 수 있으려니와, 꽂히지 않는다면 그저 엎드려 처분만 바랄 것이다. |
*一法印; 實相印, 一實相印. 小乘의 三法印(諸行無常, 諸法無我, 涅槃寂靜印)을 상대하여
大乘의 諸法實相印을 一法印이라 한다.
*粉骨碎身未足酬 一句了然超百億; 증도가 중의 구절이다.
對一說 (活鱍鱍。 言猶在耳。不妨孤峻) 太孤絕 (傍觀有分。 何止壁立千仞。 豈有恁麼事) 無孔鐵鎚重下楔 (錯會名言也。 雲門老漢。也是泥裏洗土塊。 雪竇也是粧飾) 閻浮樹下笑呵呵 (四州八縣。 不會見箇漢。同道者方知。 能有幾人知) |
대일설(對一說)이라니 (살아서 팔딱팔딱<鱍鱍> 뛴다. 말이 아직도 귓전에 남아 있으니, 고준하여 마지 않다.) 참으로 고절(孤絕*)하도다. (곁에서 지켜볼 자격이 있다. 어찌 벽립천인<壁立千仞> 뿐이겠으며,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무공철추(無孔鐵鎚)에 무겁게 말뚝이 박혀 (명언<名言>을 잘못 안 것이다. 운문 늙은이는 진흙 속에서 흙덩이를 씻었고, 설두는 거기에 겉치장을 하였다.) 염부수(閻浮樹) 아래서 깔깔 웃노라. (4주8현<四州八縣*>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같은 길 가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알 터인데, 알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
*孤絕; 격조(格調)나 기품(氣品)이 지극히 고고하여 비할 데가 없음.
*四州八縣; 실제 행정구역을 칭한 것이 아니라 四面八方과 같은 의미로 쓰인듯 하다.
昨夜驪龍拗角折 (非止驪龍拗折。 有誰見來。 還有證明麼。啞) 別別 (讚歎有分。須是雪竇始得。 有什麼別處) 韶陽老人得一橛 (在什麼處。更有一橛。分付阿誰。 德山臨濟也須退倒三千。 那一橛又作麼生。便打) |
어젯밤에 여룡(驪龍*)의 뿔이 부러졌으니 (여룡만 꺽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본 사람 있는가? 증명할 수 있는가? 아<啞*>!) 별의 별 일이다. (찬탄도 자격이 있어야 하는데, 설두라서 가능하다. 어떤 것이 유별한 곳인가?) 소양(韶陽;雲門)노인이 겨우 반절을 얻었구나[得一橛*]. (다른 반절은 어디에 있으며, 누구에게 나누어 주었는가? 덕산이나 임제도 패배하여 삼천리 밖으로 물러나리라. 그 반절을 또 무엇일꼬? 갑자기 후려치다.) |
*驪龍; 〈莊子 列禦寇〉의 「探驪得珠(흑룡 턱 밑에서 보주를 찾아 얻는다)」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
驪珠는 驪龍(흑룡) 턱 밑에 감춰진 寶珠라고 전해지는데, 驪龍은 九重深淵 속에 살기에
驪珠를 취하려면 반드시 深淵으로 潛入해서 驪龍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훔칠 기회를 노려야 한다고 한다. 「探珠驪頷」라고도 한다.
본래 '극히 진귀한 보물을 획득한다'는 뜻이었으나,
후에 '文章을 지음에 주제와 취지의 정수(精髓)를 깊이 있게 얻었음'을 인정하는 뜻으로 쓰인다.
*啞; 얻은 바를 표현할 길이 없거나, 어떤 불법의 진리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쓰는 선림용어.
*只得一橛; 禪林用語. 절반의 법을 증득한 것을 말한다.
궐(橛)은 문에 세워 문의 한계를 정하는 짧은 나무 봉을 지칭하는데, 통상 두 궐(橛)을 마주 세워야
비로소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一橛을 얻었다는 것은 겨우 반절만 얻었다는 뜻이다.
對一說。太孤絕。 雪竇讚之不及。 此語獨脫孤危。光前絕後。 如萬丈懸崖相似。 亦如百萬軍陣。無爾人處。 只是忒殺孤危。 古人道。欲得親切。 莫將問來問。 問在答處。 答在問端。 直是孤峻。 且道什麼處是孤峻處。 天下人奈何不得。 這僧也是箇作家。所以如此問。 雲門又恁麼答。 大似無孔鐵鎚重下楔相似。 |
'대일설(對一說)이여, 태고절(太孤絕)이로다' 하였으나, 설두의 찬탄으로도 미치지 못한다. 이 말은 독탈고위(獨脫孤危*)하고, 광전절후(光前絕後*)하여 마치 만 길 낭떠러지와 같고, 또 백만 군진(軍陣) 같아서 어찌해 볼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지극히[忒殺*] 고위(孤危)하기만 하다. 고인이 말하기를, "친절(親切)을 얻으려거든 질문을 가지고 질문하지 말라. 질문에 답처(答處)가 있고, 답에 물음의 단초(端初)가 있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고준(孤峻)함이다. 말해보라. 어떤 곳이 고준처(孤峻處)라서 천하인이 어찌해 볼 수 없는 곳인가? 저 스님이 작가인지라 그래서 이렇게 물었거니와, 운문이 또 그렇게 답한 것은 흡사 무공철추로 무겁게 쐐기 박은 것과 같다. |
*獨脫孤危; 홀로 초탈(超脫)하여 외로이 섰으니 아무도 짝을 이루볼 수 없음.
*光前絕後; 空前絕後. 워낙 특출하여 비교할 만한 것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음. 前無後無.
*忒殺; 매우 심하게. 지나치게.
雪竇使文言。用得甚巧。 閻浮樹下笑呵呵。 起世經中說。 須彌南畔吠琉璃樹。 映閻浮洲中皆青色。 此洲乃大樹為名。名閻浮提。 其樹縱廣七千由旬。 下有閻浮壇金聚。高二十由旬。 以金從樹下出生故。號閻浮樹。 所以雪竇自說。 他在閻浮樹下笑呵呵。 且道他笑箇什麼。 笑昨夜驪龍拗角折。 只得瞻之仰之。讚嘆雲門有分。 雲門道。對一說似箇什麼。 如拗折驪龍一角相似。 到這裏若無恁麼事。 焉能恁麼說話。 |
설두는 문언(文言)을 쓰는 데에 몹시 교묘함을 얻었다. '염부수 아래서 깔깔 웃는다[閻浮樹下笑呵呵]'는 《기세경(起世經)》에 말씀하시되, '수미산 남쪽의 폐유리(吠琉璃)나무가 염부주(閻浮洲) 안을 온통 청색으로 비추니, 그 큰 나무로 이름을 삼아 이 주(洲)를 염부제라고 하는데, 그 나무는 높이와 너비가 7천 유순이고, 그 밑에 20유순 높이의 염부단금(閻浮壇金) 무더기가 있어 나무에서 이 금이 나오므로 염부수(閻浮樹)라 부른다' 하였다. 그래서 설두가 스스로 말하되 그가 염부수 아래서 깔깔 웃었다고 한 것이다. 말해보라. 그가 무엇을 웃은 것인가? 어젯밤 여룡을 윽박질러 뿔을 꺽었음을 웃었으니, 다만 운문을 우러러 찬탄할만 한 자격을 얻은 것이다. 운문의 '대일설(對一說)'은 무엇과 같은가? 마치 여룡의 뿔 하나를 꺽어버린 것과 같거니와, 이에 이르러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얘기하였겠는가? |
雪竇一時頌了。末後卻道。 別別。韶陽老人得一橛。 何不道全得。 如何只得一橛。 且道那一橛。在什麼處。 直得穿過第二人。 |
설두는 일시에 송을 마치고, 말후(末後)에 말하기를, '별의 별 일이다. 소양노인이 겨우 일궐을 얻었구나' 했는데, 왜 다 얻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어찌 해야 다만 일궐(一橛)이라도 얻겠는가? 자, 말해보라. 다른 일궐은 어디에 있는가? 곧바로 제2인(第二人*) 자리에서 벗어나질 것이다. |
*第二人; 《大般涅槃經》卷第32에 「七種人(七眾溺水)」을 말씀하셨는데, 그 중 두번째 사람을 말한다.
즉 '물에 잠겼다가 헤어나더라도 다시 잠기는 사람'이니,
힘이 세서 헤어나기는 해도 뜨는 방법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가라앉는다고 하셨다.
제3인은 잠기거든 곧 헤어나서 다시는 잠기지 않는 사람을 말하니,
'제2인을 통과한다'는 것은 곧 제3인, 즉 '헤쳐 나아갈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佛言:「善哉,善哉!善男子!如恒河邊有七種人,若為洗浴、恐畏寇賊、或為採花,則入河中。
第一人者入水則沈。何以故?羸無勢力,不習浮故。
第二人者雖沒還出,出已復沒。何以故?身力大故則能還出,不習浮故出已還沒。
第三人者沒已即出,出更不沒。何以故?身重故沒,力大故出,先習浮故,出已即住。
第四人者入已便沒,沒已還出,出已即住,遍觀四方。
何以故?重故則沈,力大故還出,習浮則住,不知出處,故觀四方。
第五人者入已即沈,沈已便出,出已即住,住已觀方,觀已即去。何以故?為怖畏故。
第六人者入已即去,淺處則住。何以故?觀賊近遠故。
第七人者既至彼岸,登上大山,無復恐怖,離諸怨賊,受大快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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