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巖錄

벽암록(碧巖錄) 제58칙 조주(趙州)의 분소불하(分踈不下)

碧雲 2023. 12. 16. 12:25

 제57, 58, 59칙은 모두 「至道無難唯嫌揀擇」에 관한 공안이다. 
전칙이 揀擇을 여의려거든 天上天下에 唯我獨尊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본칙은 이 일은 語言을 여읜 일이니 分疏를 기대하지 말고 몸소 체득하라는 것이다. 

 

 【五八】舉。  【제58칙】 조주가 5년에도 설명하지 못한 일
   僧問趙州。
   至道無難唯嫌揀擇。
 是時人窠窟否
   (兩重公案。也是疑人處。
   踏著秤鎚硬似鐵。
   猶有這箇在。莫以己妨人)
   州云。曾有人問我。
   直得五年分疏不下
   (面赤不如語直。
 胡孫喫毛蟲。
   蚊子咬鐵牛)。
   중이 조주에게 물어 
   "「至道無難唯嫌揀擇」이라니 
 이것이 그 사람의 과굴(窠窟*) 아닙니까?" 하자,
   (거듭된 公案이지만 그래도 사람을 의혹케 하는 곳이다.
   저울추를 밟기가 무쇠처럼 단단하거늘 
   아직 이런 자가 있다니 자기로 사람을 방애치 말라.)
   조주가 "일찍이 누가 내게 물었었는데 
   곧장 5년을 분소(分疏*)하지 못했다" 하였다. 
   (얼굴 붉어지느니 바로 말하는 것이 낫다. 
 원숭이 송충이 먹기[胡孫喫毛蟲*]이고, 
   모기 쇠소 씹기[蚊子咬鐵牛*]이다)

*窠窟; 動物이 棲身하는 곳. 자기만의 소굴. 자기만의 관념. 
자기의 사업이나 처신하는 영역, 이룬 실적, 경험의 정도에 비유하는 말.
*兩重公案; 하나의 公案에 대해 재해석(再解釋)해 내놓은 공안. 
*踏著秤鎚硬似鐵; 저울추를 밟기가 무쇠처럼 단단하다. 
「壁立千仞의 高危에 이르기 어려움, 또는 佛法을 傳播하기 어려움」에 비유하여 쓴다. 
[五燈全書卷第41] 袁州楊歧方會禪師(石霜圓法嗣)章에
「上堂하여 "踏著秤鎚하기가 硬似鐵이다. 벙어리가 누구에게 말하는 꿈을 꾸니, 
수미산 꼭대기에 물결이 닿기요, 바다 밑바닥에 태양열이 닿기다. 
(上堂。踏著秤鎚硬似鐵。啞子得夢向誰說。須彌頂上浪滔天。大洋海底遭火爇。)」
*分疏; ①자기변명하다. ②하나하나 명백히 밝히다. ③소원(疏遠)해지다.
*胡孫喫毛蟲; 원숭이 송충이 먹기란 입안에 넣어줘도 삼키지 못한다는 것. 
胡孫은 원숭이[猢猻]. 毛蟲은 송충이 같은 털이 난 벌레. 
*蚊子咬鐵牛; 모기 쇠소 씹기란 불가능하다는 것. 

 

趙州平生不行棒喝。
用得過於棒喝。
這僧問得來。也甚奇怪。
若不是趙州。也難答伊。
蓋趙州是作家。只向伊道。
曾有人問我。
直得五年分疏不下。
問處壁立千仞。
答處亦不輕他。
只恁麼會直是當頭。
若不會。且莫作道理計較。
趙州는 평생 방할(棒喝)을 행하지 않았으나
씀[用]이 방할을 넘어섰다.
이 중의 질문해 옴이 몹시 기괴하여
만약 조주가 아니었다면 답하기 어려웠겠지만
趙州는 作家인지라 다만 그를 향해
"일찍이 누가 내게 물었었는데
곧장 5년을 分疏하지 못했었다."고 하였으니,
問處도 벽립천인(壁立千仞)이고
答處 또한 그를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이렇게만 알면 곧 코앞에 이른[當頭] 것이거니와
만일 모르더라도 다만 이치를 따져들지는 말라. 
不見投子宗道者。
在雪竇會下作書記。
雪竇令參至道無難唯嫌揀擇。
於此有省。
一日雪竇問他。
至道無難唯嫌揀擇。意作麼生。
宗云。畜生畜生。
보지 못했는가. 투자종도자(投子宗道者*)가
雪竇의 會下에서 書記로 있을 때
雪竇가 「至道無難唯嫌揀擇」를 참구하라고 하매
이에 성찰(省察)이 있었다.
하루는 雪竇가 그에게 물어
"「至道無難唯嫌揀擇」이라는데 뜻이 무엇이냐?" 하니,
종도가 "畜生이고 畜生입니다." 하였다. 
後隱居投子。凡去住持。
將袈裟裹草鞋與經文。
僧問。如何是道者家風。
宗云。袈裟裹草鞋。
僧云。未審意旨如何。
宗云。赤腳下桐城。
所以道。獻佛不在香多。

若透得脫去。
縱奪在我。
既是一問一答。歷歷現成。
為什麼趙州卻道。分疏不下。
且道是時人窠窟否。
趙州在窠窟裏答他。
在窠窟外答他。
須知此事不在言句上。
或有箇漢徹骨徹髓。信得及去。
如龍得水。似虎靠山。
후에 투자산(投子山)에 주지(住持)로 가서 은거할 때
가사(袈裟) 속에 짚신과 경문(經文)을 품고 지냈다.
어느 중이 "무엇이 道者의 가풍(家風)입니까?" 묻자,
종도는 "가사 속 짚신이다." 하니,
중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매,
종도는 "맨발로 동성(桐城*)에 내려간다." 하였다.
그래서 말하기를 '부처님께 바치는 일은
많은 향을 사르는 데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만약 투철히 벗어난다면
놓아주고 빼앗음이 자기 손에 달려있을 것이다.
기왕 이 일문일답이 역력히 이루어졌는데
어째서 趙州는 도리어 "分疏 못한다"고 했을까?
말해보라. 이것이 당시 사람의 窠窟인지.
또 趙州는 窠窟 속에서 답했는가,
窠窟 밖에서 답했는가?
이 일이 언구상에 있지 않음을 반드시 알아야 하거니와
혹 어떤 이가 骨髓에 사무치도록 믿고 얻어간다면
용이 물을 얻고 범이 산을 만난 것 같을 것이다. 

*投子宗道者; 舒州投子法宗禪師(당시에 道者라 칭했다). 雪竇重顯 法嗣. 青原下十世
*桐城; 옛 동성현(桐城縣)으로 投子山 아래에 있는 성읍이다. 지금의 安徽省 桐城市. 

 

頌云。 설두(雪竇)의 송(頌)
 象王嚬呻
   (富貴中之富貴。誰人不悚然。
   好箇消息)
  獅子哮吼
   (作家中作家。百獸腦裂。
   好箇入路)
 無味之談
   (相罵饒爾接嘴。
   鐵橛子相似。有什麼咬嚼處。
 分疏不下五年強。
   一葉舟中載大唐。
   渺渺兀然波浪起。
   誰知別有好思量)
  塞斷人口
   (相唾饒爾潑水。
   咦闍黎道甚麼)
 南北東西
   (有麼有麼。天上天下。
   蒼天蒼天)
  烏飛兔走
   (自古自今一時活埋)
 상왕빈신(象王嚬呻*)이요
   (富貴中의 富貴거늘 누가 悚然하지 않겠는가.
   좋은 소식이다.)
  사자효후(獅子哮吼*)로다.
   (作家中의 作家인지라 百獸의 腦가 파열한다.
   좋은 入路다.)
 무미지담(無味之談*)으로
   (서로 욕설이 난무하는데 너는 부리를 잇는구나.
   쇠말뚝과 비슷하거늘 무슨 씹을 곳이 있겠느냐.
 「分疏하지 못하기 5년 남짓[强;餘]이라니
   일엽편주(一葉片舟)에 大唐을 싣고
   까마득하기 그지 없는 波浪이 이는 속에서
   달리 좋은 思量이 있는 줄을 누가 알았으리오.」)
  사람의 입을 막으니
   (서로 침 튀기는데 너는 더하도록 부추기는구나.
   에이! 선생아, 무슨 말을 하느냐?)
 남북동서(南北東西)에
   (있더냐, 있더냐? 하늘 위 하늘 아래에?
   아이고, 아이고!)
  까마귀 날고 토끼 흩어지누나.
   (예나 지금이나 일시에 산채로 매장되어버린다.)

*象王嚬呻; 象王[佛陀]의 嚬呻. 코끼리가 낮잠에서 깨어 배고픔을 느끼고 
 '이제 슬슬 먹잇감을 찾아볼까' 하며 기지개를 펴고 일어서는 형상. 
頻申은 奮迅과 같은 의미로 〈瑜伽師地論〉 89卷에서는 
「몸이 무겁고 마음은 부드럽지 못하니 몸을 세워 쭉 뻣는 것」이라 하였고, 
〈華嚴疏鈔〉 60卷에서는 
「頻申이나 奮迅은 모두 사지가 막힘없이 잘 통하도록 쭉 뻣는 행위」라 하였다. 
*師子哮吼; 사자의 표효. 사자후. 
《涅槃經》卷第27 사자후보살품(師子吼菩薩品)에 이르되, 
「마치 사자왕이 자기 힘을 믿고서 이빨과 발톱을 서슬같이 세우고 
네 다리로 웅크린 채 바위굴 속에서 꼬리를 흔들며 표효하듯이 
만일 누가 이러한 모습을 갖출 수 있다면 마땅히 이는 곧 사자후할 수 있음을 안다」 하였다. 
*無味之談; 맛없는 얘기. '문자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비유한 표현. 
洞山이 당초 通機를 가리켜 頌하되, 
  「洞山은 적막하여[寥索:萧索] 있을 것이 없으니   洞山寥索 一無可有 
  맛없는 얘기로 사람들 입을 틀어막는다.            無味之談 塞斷人口」 하였다.
*相罵饒爾接嘴; 서로 욕설이 난무하는데 너는 더하도록 부리를 이어주다. 
相唾饒爾潑水; 兩方이 爭論하면서 날카롭게 대립하여 침방울이 마구 튈 때, 
타액(唾液)이 부족할 지경인데 오히려 발수(潑水)하도록 그 세력을 도와주다. 
두 용어 모두 '한정되거나 집착된 견해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자재함'에 비유하여 쓴다. 

*分疏不下五年強~ 誰知別有好思量; 본칙에 대한 白雲守端禪師의 頌古이다.

 

趙州道。曾有人問我。
直得五年分疏不下。
似象王嚬呻獅子哮吼。
無味之談。塞斷人口。
南北東西。烏飛兔走。
雪竇若無末後句。
何處更有雪竇來。
既是烏飛兔走。
且道趙州雪竇山僧
畢竟落在什麼處。
趙州가 "일찍이 누가 내게 물었었는데
곧장 5년을 분소(分疏)하지 못했다" 한 것은
「象王이 嚬呻하고 獅子가 哮吼함」과 같았다.
「無味之談으로 人口를 塞斷하니
南北東西에 烏飛兔走로다」 하였는데,
雪竇에게 만일 末後句가 없었다면
어느 곳에 다시 雪竇가 올 수 있겠는가.
기왕 까마귀 날고 토끼 흩어지는 것이라면
말해보라. 趙州와 雪竇와 山僧은
畢竟 어느 곳에 떨어져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