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스크랩] 희양산 봉암사 (曦陽山 鳳巖寺) 순례기

碧雲 2015. 6. 8. 20:20

     봉암사 대웅보전 처마 너머 위용을 드러내는 희양산 암봉정상(998m)

 

일년에 딱 하루 부처님 오신 날에만 산문을 열고 일반대중을 맞아들인다는 禪房 청정도량,

봉암사(경북 문경시 가은읍 소재) 구경 한 번 해보고 싶어서 새벽부터 서둘러 길을 나섰더니

가은읍에 들어서자 끝없이 십여리 줄지어 선 차량행렬 앞에 입이 딱 벌어졌다.

 

차타고 왔다고 바로 절까지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고 삼거리에서 줄서서 반 시간 넘게 기다린 후

사찰 셔틀버스로 다시 십리를 가고 거기서부터 비포장 산길을 1km 더 걸어야 일주문 지나

용곡천 건너 비로소 사찰경내에 들어서게 된다.

 

가뭄  끝이라지만 백두대간 단전에 자리한 깊은 산 속에서 흘러내리는

맑고 시원한 계곡물이 이끼낀 바위를 때리고 들이 쉬는 숨이 폐부에 가득 찬다.

 

 

일주문 명을 鳳凰門이라 했다.

열두판 연꽃봉오리가 벌어지는 가운데서 봉황이 나래를 펴고 나르는

형국의 지세라는데 오색단청 곱게 입은 門의 자태부터가 예사롭지않구나.

 

나라 안에 유일한 고승들의 수련처, 학문의 세계로 말하자면 포스트 닥post-doc.

과정쯤에 해당한다고 너스레 좀 쳤더니 한 번 가보겠다고 두 말없이 따라나선

저 여인은 무엇을 기대하고 있길래 힘든 기색없이 걸어올라가고 있을까.

 

'용추동천 침류교'라 해탈교를 건너 경내로 들어선다

 

이게 또 웬 줄이란 말이냐, 아하 점심 공양 차례 기다리는 줄이 500m는 넘게 늘어섰구나.

모처럼 성스러운 날 부처님 전 참배드리러 팔도강산 경향각지에서 신심 장한 불자들이

구름같이 몰려왔으니 그 장관을 숫자로 풀어 설명해보자면,

 

읍내에 늘어선 차량행렬이 4km에 셔틀버스 이동 거리가 또 4km, 거기에서부터

걷는 거리 1km가 끝나야 3천평 드넓은 사찰경내를 산보할 수 있고

깊은 산속 백운대 마애석불까지 참배할 량이면 1km를 더 들어가야 하니

 

11시 반 현재 차량행렬 마지막 꽁무니에 댄 사람이 셔틀버스 못타고 걷는다면

사찰경내 보행거리를 빼더라도 왕복 총 20km 오십 리 길 걷고나자 해저물겠네.

오늘 하루 참배객 3만 명에 그 반 수만 공양한다치더라도 밥그릇, 국그릇 어찌 다 당해낼꼬.

 

가로 30m는 됨직한 2층 집'남훈루' 누각을 통과해서 '대웅보전' 앞뜰에 이른다 

 

 

가족이름 단정히 적어 연등 하나 달아모신다.

참선하는 마음에는 살아있는 세계나 죽어 건너는 세계나 모두다

하나라는 뜻으로 연등이 흰색 일색이라 보는 눈 정갈하고 위엄있구나.

 

우측 동쪽 편 '산신각'부터 차례로 둘러본다. 단칸 맞배지붕 기와집.

 

봉암사는 하대신라 헌강왕 5년(879년) 도헌 지증국사道憲 智證國師(824-882)께서 창건하셨다.

九山禪門 중 유일하게 당唐나라 유학을 하지않은 순수 국내파 스님께서 희양산파를 창시했고

뒤이어 긍양 정진대사兢讓 靜眞大師(879-956)께서 중창하시니 라말 려초에는 국가원찰이었었다.

 

 

지증대사께서 이르기를,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내린 게 아니겠는가. 수행승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獲是此地 庸非天乎. 不爲靑衲之居 其作黃巾之窟"

워낙 기가 센 터인지라 과거 천여 년간 수없이 불타고 중창을 거듭했으니,

 

창건 후 곧 이어 후삼국시대 전쟁 통에 견훤의 습격을 받아 황폐화했고

(마침 가은 땅이 후백제 견훤의 출생지이다)

하대 고려조의 몽고병란,조선왕조 때의 임진왜란, 구한말의 의병활동, 일제치하의 훼불소란에

 

6.25동란까지 국가사회가 혼란할 때 마다 어김없이 그 진앙지 격이었는데 심지어 1980년 10월에는

신군부에 의한 법난까지 당하였단다. 그래서 창건역사에 비추어 고건물이 남아있지 못하였으니

18세기 후반 건축물로 추정되는 '극락전'(보물 제1574호)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셈이다.

 

 

 

한편 석조유물로는 국내 금석학의 최고봉으로 치는 국보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부도가 있고

보물인 정진대사 부도와 탑비가 건재하며 삼충석탑과 마애보살좌상이 천 년의 세월을 이기고

찾는 이에게 보람과 감동을 주고 이 소중한 겨레의 보물을 잘 지켜야겠다는 다짐을 하게한다.

 

1947년 어느날 누더기를 걸친 납자 넷이 참선수행의 보금자리인 이곳에 들어온다.

30대 청년 성철性徹스님(1912-1993)을 비롯하여 자운, 우봉 그리고 연장자로 청담스님이니

그들은 뒤따라 들어온 20여 명과 結社하기를 '모든 걸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하고

 

추상같은 共住規約을 선포 실행, "하루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않겠다. 一日不作 一日不食"며

주야로 농사 짓고 독경하고 참선하며 용맹정진하기를 전쟁발발로 해체될 때까지 계속하였으니

이 나라 불교계에 혁신의 바람을 일으켰고  봉암사가 다시  불문의 중추로 우뚝 서게 하였다.

 

'鐵樹開花 火中生蓮  쇠로 된 나무에서 꽃을 피워내고 불 속에서 연꽃을 피어나게 하겠다.'

연면히 흐르는 수행정진의 기풍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바 조계종 종단에서는 1982년

봉암사를 종단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하여 도량처로 성역화하고 일반인 출입을 막았다.

 

 

 

 

 

지증, 정진, 보우, 나옹으로 이어지는 봉암사 주석 큰 스님들의 전통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되리라 믿는다. 위 결사에 참여하였던 스님들 중에서 이미 청담, 성철, 혜암, 법전

스님이 종단의 宗正을 지내셨고 또 총무원장 일곱 분이 나셨으니 가히 명문이라 하지않겠는가.

 

 

팔작다포지붕의 전각인 '조사전' 삼면 벽에는 태고 보우太古 普愚 스님을 비롯한 봉암사 지킴이

역대 조사들의 영정이 모셔져있는데 근래의 조사로는 향곡, 서암 스님의 모습이 보인다. 

가슴 뭉클한 禪詩를 써 걸어놓은 외벽의 주련을 읽어 보자.

 

此 外 更 無 別 物          이 밖에 또 어떤 특별한 물건 있으리

有 人 間 我 家 風          내게 가풍이 무어냐 묻는 사람 있다면

閃 電 光 中 作 窟          순간에 번쩍이는 빛으로 굴을 빚어서

打 破 虛 空 出 骨          허공을 깨뜨려 없애고 뼈를 내보내리

 

井 底 泥 牛 吼 月          우물밑 진흙소가 달을 보고 포효하고

雲 間 木 馬 斯 風          구름 사이 목마가 바람 향해 울부짖네

把 斷 乾 坤 世 界          하늘과 땅 그 모든 세계를 잡아 끊나니

誰 分 南 北 西 東          누가 있어 남과 북 서와 동을 나누는가

 

龍 吟 枯 木 猶 生 喜          용은 고사목을 오히려 살아있는 듯 기쁘게 읊으며

觸 褸 生 光 識 轉 幽          해골에서는 그윽한 알음알이의 빛이 뿜어나오누나

磊 落 一 聲 空 粉 碎          돌무더기 떨어지는 한 소리가 하늘을 부스러뜨리고

月 波 千 里 放 孤 舟          달빛 어린 물결은 외로운 배 천리 멀리 띄워보내네

 

 

 

좌측 서쪽 편 널다랗게 자리한 태고선원의 문 이름이 妙有門이구나.

들어가거든 사체 팔정도를 깨우치라는 뜻이겠다.

여름, 겨울 안거철에는 항상 80여 명의 납자들이 100일 한하고 정진수행하신단다.

 

 

 

한바퀴 돌아서 반대쪽 문은 '진공문'이다."入 此 門 內   莫 存 知 解"라 하였으니

여기 이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알량한 알음알이 일랑은 벗어놓으라는 꾸지람? 

 

 

고귀한 생을 얻으신 아기 붓다를 청정수로 목욕시켜드리는 관불의식에 참여

 

 

 

'金色殿'은 어떤 곳일까. 금색인을 모신 곳, 즉 부처 님 계시는 곳이겠네.

법당 내에는 통견차림에 지권인을 하신 화엄경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뒷편 처마에 '大雄殿' 편액이 걸린 걸 보니 바로 여기가 지증국사께서 처음 자리잡은 곳이겠다.

 

 

 

 

 

      

       보물 제169호 삼층석탑의 수려한 자태가 바라보는 눈을 황홀하게 한다.

       창건 때 함께 세워졌을 것으로 보는데 그 오랜 세월 동안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도 기단에서 

       탑신, 머리장식 상륜부까지 당초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유물이다. 

 

      '梵鍾閣'에는 범종, 대고, 목어, 운판의 사물이 의젓이 자리잡고 있는데 저녁 예불에 참석해볼

        여유가 없어서 아쉽구나. 한바퀴 주련을 눈으로 훑으고 지나가기 바쁘다.

 

 

 

      '鳳巖寺磨崖普薩坐像'이다. 경북 유형문화재 제121호. 불상 높이 4.0m, 폭 4.4m 정도의 크기.

      본찰 경내에서  북동쪽으로 1km 쯤 산속을 오르면 맑은 물 용곡천이 흐르는 백운대에 자리했다.

       고려 말기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화강암에 양각으로 새기기를 불두 주위를 깊게 파서

 

       감실처럼 조성하여 光背 효과를 겸하도록 처리하였고 왼손에 연꽃을 들고 결가부좌한 안온하고

       안정된 자세이다.  여기에서 산속으로 더 들어가면 참으로 목숨 내걸고 용맹정진하고 있는

       스님들의 암굴이 있다지만 스쳐가는 나그네가 감히 접근해볼 처지가 아니다.

   

 

 

 

다시 내려와 경내에 든 후 지증국사 적조탑을 찾느라 헤매다 보니 맛깔진 점심 공양에

여념없는 불자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오색 산채비빔밥에 미역국이 나눠주는데 그저

어디라도 앉을 곳만 있으면 처마밑이든 돌계단이든 '선열당' 실내이든 입추의 여지가 없더라.

 

 

 

       드디어 찾고 보니 안타깝게도 지증국사 부도와 탑비가 하필 보호각 개수공사망에 가리워져

       전혀 식별이 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귀가해서 매체 미디어가 보도한 사진을 전재해 올린다.

 

   

 

   국사께서 열반하시자 헌강왕은 智證이란 시호를 올리고 부도를 세우면서 그 명을 '寂照塔'이라 했다.

   높이 3.41m의 팔각원 당형으로 한쪽 머리돌이 깨어져나가 아쉽지만 기단부에는 각부장신조각이

   섬세, 수려하여 신라 석조예술의 높은 수준에 감탄케 한다.  보물 제137호.

  

 

봉암사 보물 중의 보물 하이라이트 '智證國師寂照塔碑'이다. 국보 제315호.

가로 1.64m, 높이 2.73m, 두께 0.23m로 귀부와 이수를 온전히 갖춘 향기 짙은 석비이다.

대문장가 최치원이 8년에 걸쳐 고심하여 작성한 비문을 노스님 혜강이 수 년간 각인하여 완성하였다.

 

내용은 봉암사의 유래와 신라선불교의 역사 및 지증국사의 일대기를 소상하고 감동적으로 그렸는데

수 년 전 지리산 하산길에 들려 감상해보았던  쌍계사의 진감국사탑비와 더불어 4대 탑비로 손 꼽힌다.

워낙 유려하고 현란한 문체인지라 대충 봐서는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잘 알려진 열반장면을 옮겨보면,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바다에 빠졌도다! 星廻上天 月落大海

종일 부는 바람이 골짜기에 진동하니 그 소리는 虎溪의 울부짖음과 같았고,

쌓인 눈이 소나무를 꺽으니 그 빛깔은 沙羅樹와 같았다."

 

이어지는 명銘에서는,

 

"다북쑥은 삼대에 의지하매 

능히 스스로 곧았으며

구슬을 옷 안에서 찾았으니

옆으로 구함이 없었다."

 

이는 국사께서 순수 국내파로서 선종 뿐만아니라 교종의 화엄사상까지 흡수하여 禪.敎를 통합하여

진리를 깨닫는 頓悟에 진리를 실천하는 漸修를 병행하셨음을 기리는 명문장이겠다. 

 

 

                여기는 서울, 경상도 까지 내려가 엄청난 순례를 하고도 해지기 전에 귀가한 사실이 신통해

                 두고두고 이 시간을 기념해볼 량으로 아파트 창문 너머로 북한산 실루엣을 잡아본다. 

            이는 오로지 하루종일 길에서 수고하신 경찰관, 자원봉사에 나서 길안내에 공양 설거지까지

            도맡으신 소년, 청년, 중년의 보살님들, 그리고 질서있게 동선 지킨 참배객의 문화수준 덕이다.

           

 

혹시 내년에라도 봉암사를 방문하고 싶은 분을 위하여;

사찰 방문은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 까지 12시간 동안 가능하답니다.

기왕 하루를 할애해야할테면 좀 일찍 서둘러 가은읍 삼거리 기준 위 시각을 풀로 활용함이 여유있지요.

 

오전과 오후의 답사계획을 잘 구성하고 공양은 오후 1시 이후로 맞추는 게 붐비지않아 좋습니다.

반바지나 초미니 스커트, 민소매 셔츠나 뒷굽 없는 슬리퍼 착용은 자제해야 하겠지요.

시간에 여유를 가지면 사찰입구 가은정 식당에서 산두릅부침게, 도토리묵밥, 토속막걸리 별미도 즐기죠. 

출처 : 광주서중일고41회
글쓴이 : 박봉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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