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巖錄

벽암록(碧巖錄) 제76칙 밥은 먹었느냐[丹霞喫飯也未]

碧雲 2020. 3. 29. 16:21

 

제76칙 단하끽반야미(丹霞喫飯也未)
                                      (단하선사의 '밥은 먹었느냐?')
垂示云。 수시(垂示)하여 가로되, 
細如米末。冷似冰霜。 미세하기 쌀가루 같고, 차갑기는 얼음 같으며,  
塞乾坤。離明暗。 절박함이 천지에 가득하고, 밝음도 어둠도 끊겼는데, 
低低處觀之有餘。 바닥을 내려다 보기에는 여유가 있으나 
高高處平之不足。 저 꼭대기에 다다르기에는 부족하다. 
把住放行。總在這裏許 파주방행(把住放行*)이 모두 그 안에 있는데    
還有出身處也無。 몸을 빼 나갈 수 있겠는가?   
看 (拍逼切滿也)。 예를 들어 살펴보자.    (가득할 부; 절박으로 가득함)
*把住放行 ; 선문의 학인 지도방법. 파방(把放), 파정방행(把定放行),
일수일방(一收一放)이라고도 한다.
파주(把住)는 학인이 망견을 일으키지 않도록 붙들어 매주는 것,
방행(放行)은 학인이 자유롭게 깨달아가도록 맡겨두는 것을 말한다.
파주 때는 일체가 정지되어 無一物하며, 방행 때는 만상이 뚜렷히 드러나 낱낱이 활약한다. 
   
 【七六】舉。 【76】 들추는 예[舉] ; 단하의 '밥은 먹었느나'
   
   丹霞問僧。甚處來 단하(丹霞)선사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正是不可總沒來處也。要知來處也不難)
   (온 곳을 철저히 숨기지 못할 것이라면 알아내기 어렵지 않다.) 
 '어디서 왔는가?'는 상대의 안목을 점검해보려는 질문으로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곳,
또는 아무개의 문하, 어느 가람에서 왔는지 등의 복합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僧云。山下來 그 스님 ; "산 아래서 왔습니다." 
   (著草鞋入爾肚裏過也。只是不會。言中有響諳含來。知他是黃是綠)
    (짚신 신고 들어가 니 뱃속을 지나가 보았으나, 모르겠다.   
     말 속에 여운을 품고 있긴 한데 상대의 누르고 푸름을 알고 말한 것인지.)
아무개 문하에서 왔다거나, 어느 가람에서 왔노라 답하지 않고,
그렇다고 곧대로 어느 지명을 대지도 않은 '산 아래서 왔다'라고 답하니,
약간의 선기(禪機)가 곁들인 듯하여 더 물어볼 수 밖에.  
   霞云。喫飯了也未 단하선사 ; "밥은 먹었는가?" 
선가의 '밥먹는 일[喫飯之事]'은 선열식(禪悅食)을 말하니, 수행인의 불법대사(佛法大事)이다. 
   (第一杓惡水澆。何必定盤星。要知端的)
   (첫 자루에 나쁜 물을 부었다. 하필 정반성(定盤星)*인가? 단적(端的)으로 알아내야 했다.)
*定盤星 ; 저울눈의 시작점, 즉 좌우에 치우치지 않은 자유분방한 균형의 중심점. 
첫 질문 '어디서 왔는가?'가 실수였다. 왜 자유분방하게 답하도록 물어야 했는가?
처음부터 단적으로 물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서  '밥은 먹었느냐' 또 묻게 된 것이다. 
   僧云。喫飯了 그 스님 ; "먹었습니다."
먹은 자도 먹었다 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먹을 것이 없기[無所得] 때문이건만…
   (果然撞著箇露柱。卻被旁人穿卻鼻孔。元來是箇無孔鐵鎚)
   (과연, 노주露柱*로 돌진하는구나.
    옆 사람에게 콧구멍[鼻孔]* 뚫림을 당했으나 원래 구멍없는 철추[無孔鐵鎚]*였다.)
*露柱 ; 불전 밖 정면의 두 기둥. 선문에서는 무정(無情), 비정(非情)의 뜻으로 쓴다.
*鼻孔 ; 수행인의 가장 소중한 것. 불도의 근본.
*無孔鐵鎚 ; 구멍 없는 철추란 손을 댈 데가 없다는 것. 
과연 아무런 선기가 없음을 드러내는구나.
단하스님에게 속을 들여다 보였지만, 원래 볼 것도 없었다.  
   霞云。將飯來與汝喫底人。還具眼麼 "그대에게 밥 먹여 준 사람은 눈이 있던가?
너는 안목 없는 스승에게 배우고 있구나. 
   (雖然是倚勢欺人。也是據款結案。當時好掀倒禪床。無端作什麼)
 (비록 그리 한 것은 기세로 사람을 떠본 것이고, 조목조목 들어서 따진 것이긴 하지만
   당시에 선상(禪床)을 번쩍 들어 뒤엎어버렸어야 했다. 공연히 무슨 짓인가?.)
   僧無語 그 스님은 대답을 못했다. 
   (果然走不得。這僧若是作家。向他道。與和尚眼一般)
   (과연 달아나지 못하는군.
   저 중이 작가(作家)였다면 ‘화상의 눈과 매일반입니다.’라고 했을 텐데.)
*作家 ; 큰 기용(機用)을 지닌 선승(禪僧). 
 단하선사의 안목이나 그의 안목이나 실로 안목이라 할 것이 없으니 매일반이다.
저 중은 물음의 저의를 모르니 대답할 수가 없다. 
  (이 대화를 두고) 
   長慶問保福。 장경(長慶)스님이 보복(保福)스님에게 물었다.
   將飯與人喫。 "밥을 먹여 주었으면 
   報恩有分。不具眼 보은(報恩) 받을 몫이 있을텐데 왜 눈이 불구인가?" 
위의 대화를 들어 장경이 보복을 거량한 것이다. 어떻게 답하나 보자 하고.
   (也只道得一半。通身是遍身是。一刀兩段。一手抬一手搦)
   (한 쪽 절반만 말했지만 온몸에 눈[眼]투성이다.
   단칼에 두 동강이 냈고, 한 손으로는 치켜 세우고 한 손으로는 짓눌러버렸다.)
밥 먹여준 쪽만을 들어 물었지만 온통 예리한 안목이 드러나 있고,
파주방행(把住放行)이 그 안에 있다. 
 
   福云。 보복스님이 말했다. 
   施者受者二俱瞎漢 "준 놈이나 받은 놈이나 다 장님[瞎漢]*이다."
*瞎漢은 종지(宗旨)에 밝지 못한 사람.
   (據令而行。一句道盡。罕遇其人)
    (영에 따라 거행하여 말 한 구절로 끝을 내버렸으니, 이런 사람 보기 드물다.
   長慶云。盡其機來。還成瞎否 장경 ; "그 기틀을 다해봐도 장님인가?" 
   (識甚好惡。猶自未肯。討什麼碗)
    (나쁜 짓 좋아하는 줄 알 것이지, 되려 스스로 수긍하지 못하고 무슨 밥그릇 타령인가?)
한 번 거량해 보았으면 알아차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 일이지, 무엇을 더 내세워보려 하느냐. 
   福云。道我瞎得麼 보복 ; "내가 장님이라는 말인가?" 
내가 장님인 줄 알고 그렇게 묻는 것인가?  
   (兩箇俱是草裏漢。龍頭蛇尾。當時待他道盡其機來。還成瞎否。
    只向他道瞎。也只道得一半。一等是作家。為什麼前不搆村。後不迭店)。
    (두 사람 다 초리한(草裏漢)*이요, 용머리에 뱀 꼬리[龍頭蛇尾]였다.
    '그 기틀을 다해봐도 장님인가?'라고 말하자마자, ‘이 장님아!’라고 말해 주었어야 했으나
    그도 한 쪽 절반일 뿐이다. 하나같이 작가이건만
    왜 전불구촌 후불질점(前不搆村 後不迭店)*했을까?)
*草裏漢 ; 산야를 떠도는 무리, 양민을 해치는 자.
*前不搆村 後不迭店 ; 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어정쩡한 모습을 가리키는 선림구(禪林句).  
당시에는 두 사람 다 절밥 축내는 도둑에 불과하여 시작은 그럴듯 하나 끝내버릴 줄 몰랐다.
만일 그 때 한 쪽이라도 작가였다면 속내가 들여다보이는 질문에 전불구촌 후불질점하지 않고
곧바로 '이 장님아!' 하고 끝내버렸어야 했는데 왜 그랬겠는가?
원오스님은 수시에서 두 사람의 이런 모습을 '低低處觀之有餘 高高處平之不足'이라 하였다.
   
鄧州丹霞天然禪師。 등주(鄧州) 단하 천연(丹霞天然)선사는 
不知何許人。 어디 사람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初習儒學。 처음에는 유학(儒學)을 익히고 
將入長安應舉。 장안(長安)으로 과거보러 가서 
方宿於逆旅。 객사[逆旅]에서 잠을 자는데, 
忽夢白光滿室。 꿈에 홀연히 하얀 빛이 방안에 가득하더니, 
占者曰。解空之祥。 한 점쟁이가 '공(空)을 터득할 상서다'고 하였다.  
偶一禪客問曰。 우연히 한 선객(禪客)이 물었다. 
仁者何往。 "인자는 어디 가시오?"
曰。選官去。 "과거보러 갑니다" 
禪客曰。選官何如選佛。 "과거보다 부처에 뽑히는 것이 어떻겠소." 
霞云。選佛當往何所。 "부처에 뽑히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禪客曰。今江西馬大師出世。 "지금 강서(江西)에 마대사(馬大師))가 세상에 나왔소.  
是選佛之場。仁者可往。 거기가 선불장(選佛場)이니, 인자가 가보시오."
遂直造江西。才見馬大師。 이에 곧바로 강서로 가서 마대사를 뵙자마자 
以兩手托 두 손으로 복두건(幞頭巾)을 풀려는데, 
馬師顧視云。 마대사가 돌아보며 말하기를, 
吾非汝師。 “나는 그대의 스승이 아니니,  
南嶽石頭處去。 남악(南嶽) 석두(石頭)선사에게 가보라.” 하는지라 
遽抵南嶽。還以前意投之。 곧 발길을 남악으로 돌려 앞서의 뜻을 여쭈니, 
石頭云。著槽廠去。 석두선사는 “마굿간[槽廠; 馬房]에 가 있거라.” 하였다.
師禮謝。入行者堂。 스님은 감사의 절을 올리고 행자실로 들어가 
隨眾作務。凡三年。 대중스님들을 쫓아 일하며 3년을 지냈다.    
石頭一日告眾云。 석두선사가 하루는 대중들에게  
來日鏟佛殿前草。 “내일은 불전 앞 풀을 베자.”고 하여, 
至來日。大眾各備鍬鋤鏟草。 이튿날 대중들이 각자 가래나 호미로 풀을 베는데, 
丹霞獨以盆盛水淨頭。 단하스님 혼자만 독에 물 부어 머리를 감고 
於師前跪膝。 선사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石頭見而笑之。便與剃髮。 석두선사가 보고 웃으면서 머리를 깎아주고   
又為說戒。 다시 계(戒)를 설하려는데, 
丹霞掩耳而出。 단하스님은 귀를 막고 나가버렸다. 
便往江西。再謁馬祖。 곧 강서로 다시 마조대사를 찾아가서 
未參禮。便去僧堂內。 참례도 하지 않고 갑자기 승당으로 가더니  
騎聖僧頸而坐。 당상에 모신 성승(聖僧)의 목에 올라타고 앉는지라  
時大眾驚愕。急報馬祖。 이에 대중들이 경악하여 마조대사께 급히 아뢰니, 
祖躬入堂。視之曰。 대사가 몸소 승당으로 가서 보고 말했다.
我子天然。 “내 아들 그대로구나[天然].”
霞便下禮拜曰。 단하스님이 곧 내려와 절을 올리며 
謝師賜法號。 “법호를 내려주시니 스님께 감사드립니다.” 하였다.  
因名天然他古人天然。 이로 인해 그 옛날 천연(天然)이라는 사람과 
  같은 이름의 천연이 되었다.
   
如此穎脫。 이렇듯 재능이 뛰어났으니, 
所謂選官不如選佛也。  '관리로 뽑히는 것이 
  부처에 뽑히느니만 못하다' 한 것이며,   
傳燈錄中載其語句。 전등록(傳燈錄)에는 '그의 어구(語句)는 
直是壁立千仞。 바로 천 길 암벽이 우뚝선 기세요,  
句句有與人抽釘拔楔底手腳。 구구절절이 사람에게 못 빼고 쐐기 뽑아주는 
  수완이 깃들여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似問這僧道。什處來。 저 스님에게 “어디서 왔는가?” 하고 묻자, 
僧云。山下來。 “산 아래서 왔습니다.”라고 하였듯이,
這僧卻不通來處。 그 스님이 온 곳[來處]의 숨은 뜻을 알지 못했으니, 
一如具眼倒去勘主家相似。 다같이 달린 눈이 꺼꾸로 자기 주인 속을 
  들여다 본 것과 같아서  
當時若不是丹霞。也難為收拾。 당시에 단하스님이 아니었다면 수습하기 어려웠으리라. 
   
丹霞卻云。喫飯了也未。 단하스님이 “밥은 먹었느냐” 한 것은 
頭邊總未見得。 머리와 주변을 다 알 수 없었기에 
此是第二回勘他。  이는 두번째 답으로 헤아리려는 것이었는데, 
僧云。喫飯了也。 그 중이 “먹었습니다”고 하였으니, 
懵懂漢元來不會。 멍청한 놈이 원래부터 알지 못했던 터라 
霞云。將飯與汝喫底人。還具眼麼。 “너에게 밥 먹여준 사람은 눈이 있더냐?”는 물음에 
僧無語。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丹霞意道。與爾這般漢飯喫。 단하스님의 뜻은 '너 같은 놈을 밥 먹여서 
堪作什麼。 무엇에 쓰겠느냐'는 것이다. 
這僧若是箇漢。 저 중이 제법 하는 놈이었다면 
試與他一劄。 시험삼아 그를 한 번 찔러보고서 
看他如何。 그가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겠지만   
雖然如是。 비록 그렇게 해봐도 
丹霞也未放爾在。 단하스님이 그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  
這僧便眼眨眨地無語。 그 중이 눈만 껌벅껌벅하고 말을 못한 것이다.
   
保福長慶。同在雪峰會下。 보복스님과 장경스님은 다같이 설봉스님 회하에서  
常舉古人公案商量。 늘 옛사람의 공안을 들어 상량(商量)하였다. 
*商量 ; 선림에서는 학인이 참선수행할 때 서로 문답을 펼쳐 심사토의 하는 것. 
長慶問保福。 장경스님이 보복스님에게 
將飯與人喫。報恩有分。  '밥을 먹여 주었으면 보은 받을 분수가 있는데 
為什麼不具眼。 왜 눈이 불구인가?' 하고 물은 것은  
不必盡問公案中事。 공안 속의 일을 다 물어보지 않고   
大綱借此語作話頭。 대강 이 말로 대화의 머리[話頭]를 삼아서  
要驗他諦當處。 그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시험해보려 한 것이다. 
保福云。 보복스님이   
施者受者二俱瞎漢。  '준 놈이나 받은 놈이나 다 장님이다”고 한 말에는  
快哉到這裏。 쾌재(快哉)가 깃들여 있어서 
只論當機事。 기틀에 맞았는지 만을 논하자면 
家裏有出身之路。 살림살이에 몸 빠져나갈 길[出身之路]*이 있었다. 
*出身之路 ; 出身活路, 出路, 즉 생사에서 벗어난 몸, 미(迷)와 오(悟)의 양변에 걸림이 없음,
자유자재한 깨달음의 경계를 지칭한다. 
   
長慶云。盡其機來。還成瞎否。 장경스님이 '기틀을 다해봐도 장님인가?' 하고 묻자, 
保福云。道我瞎得麼。 보복스님이 '내가 장님이라는 말인가?'라고 하였는데,   
保福意謂。我恁具眼。 보복스님의 뜻은 '내가 그렇듯 갖춰진 안목으로  
與爾道了也。還道我瞎得 너에게 일러주었는데도 나를 장님 취급하느냐'는 것이다. 
雖然如是。半合半開。 그렇다 해도 이것은 반은 막히고 반은 열린 것이다.
當時若是山僧。 당시 산승이었다면
等他道盡其機來。還成瞎否。  '기틀을 다했더라도 장님이었을까?'라는 말과 동시에 
只向他道瞎。可惜許。 그에게 '이 장님아!'라고 했을텐데 애석하다. 
保福當時。若下得這箇瞎字。 보복스님이 당시에 ‘장님’이라 말해줄 수 있었다면 
免得雪竇許多葛藤。 설두스님의 허다한 잔소리를 면할 수 있었으리라.  
雪竇亦只用此意頌。 설두스님은 또 이런 의미에서 읊었다. 
   
 盡機不成瞎 기틀을 다하면 장님이 되지 않는가? 
   (只道得一半。也要驗他過。言猶在耳)
   (한쪽 절반만 말했으니, 저쪽도 시험해야 한다. 그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히 남아 있다.)
 按牛頭喫草 어찌 소 머리를 억지로 눌러 풀을 먹이랴.
   (失錢遭罪。半河南半河北。殊不知傷鋒犯手) 
   (돈 잃고 죄인이 된 격이요, 이쪽은 하남, 저쪽은 하북에서 칼날도 상하고 손도 다칠 줄은 모른 것이다.  
   四七二三諸祖師 서천 28조 동토 6조의 모든 조사들이  
   (有條攀條。帶累先聖。不唯只帶累一人) 
   (가지가 있으니 가지를 따라 선대의 성인에게까지 누를 끼친 것이요, 한 사람에게만 누를 끼친 것이 아니다.)
   寶器持來成過咎 가져온 보배그릇을 망친 허물이 되었네.  
   (盡大地人換手搥胸。還我拄杖來。帶累山僧也出頭不得) 
   (온 세상 사람들이 두손으로 가슴을 친다. 내 주장자를 돌려달라.
산승에게도 누(累)가 미쳐 얼굴을 내밀지 못하겠다.)
   過咎深 허물은 깊고,  
   (可殺深。天下衲僧跳不出。且道深多少)
   (죽을 만큼 깊어서 천하의 납승들은 뛰어봐도 벗어나지 못한다.
    말해보라. 깊이가 어느 정도이겠는지.)
 無處尋 찾을 길은 없으니
   (在爾跟下。摸索不著) 
   (그대의 발꿈치 아래 있건만 찾지 못하고 있다.)
   天上人間同陸沈 천상과 인간이 다 땅속에 묻혀버렸구나. 
   (天下衲僧一坑埋卻。還有活底人。放過一著。蒼天蒼天) 
   (천상과 인간이 함께 땅속에 매몰되었다. 천하의 납승이 한 구덩이에 묻혀버렸는데,
그 속에서도 살아 남을 사람이 있을까? 한 수를 놓쳤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마구간에서 
   (齒兩切馬屋無壁也) 
   (이빨이 둘 다 빠져버렸지만 말우리에는 벽이 없어서.)  
   눈만 껌뻑껌뻑.
   (側洽切目動也)
   (좌우가 넉넉히 열려 있으니 눈을 돌려보라.)
   
盡機不成瞎。 기틀을 다하면 장님이 되지 않는다. 
長慶云。盡其機來。 장경스님이 '기틀을 다하여도 
還成瞎否。 장님이 되었을까?”라고 하자, 
保福云。道我瞎得麼。 보복스님이 '내가 장님이란 말인가?” 하였으니, 
一似按牛頭喫草。 흡사 소의 머리를 눌러 풀을 먹게 한 것인데, 
須是等他自喫始得。 그 스스로 먹게 했어야 했다.  
那裏按他頭教喫。 어떻게 그의 머리를 누르면서 먹게 하겠는가?
雪竇恁麼頌。 설두스님이 이렇게 읊었으니,  
自然見得丹霞意。 자연히 단하스님의 의도를 알리라.
四七二三諸祖師。 서천 28조 동토 6조의 모든 조사들이 
寶器持來成過咎。 가져온 보배로운그릇이 허물이 되었다는 것은
不唯只帶累長慶。 장경스님에게만 누(累)를 끼친 것이 아니라, 
乃至西天二十八祖。此土六祖。 서천 28조와 이 땅의 6조에 이르기까지를 
一時埋沒。 일시에 매몰시켜버렸다는 것이다.
釋迦老子。 석가모니불께서 
四十九年。說一大藏教。 49년간 일대장교(一大藏敎)를 설하신 끝에 
末後唯傳這箇寶器。 오로지 그 보배그릇만 전하신 것이라서   
永嘉道。 영가(永嘉)스님은  
不是標形虛事褫。 “그럴사 하게 허망한 일을 떠벌려 놓은 것이 아니라, 
如來寶杖親蹤跡。 여래가 친히 짚으신 보배 지팡이의 자국이다.” 하였는데, 
若作保福見解。 만일 보복스님과 같은 견해를 지으면 
寶器持來。都成過咎。 전해 온 보배그릇을 모두 무시한 허물이 된다는 것이다. 
過咎深無處尋。  "허물은 깊고, 찾을 길은 없다"고 하였는데, 
這箇與爾說不得。 이는 그대들에게 설명해 줄 수 없으니, 
但去靜坐。向他句中點檢看。 다만 고요히 앉아서 그 구절을 점검해 살펴보라. 
既是過咎深。因什麼卻無處尋。 기왕 허물은 깊다지만 어찌 찾을 길이 없겠는가? 
此非小過也。將祖師大事。 이는 작은 허물이 아니라 조사들의 대사(大事)를 
一齊於陸地上平沈卻。 몽땅 땅속에 묻어버리는 것이기에  
所以雪竇道。 그래서 설두스님이
天上人間同陸沈。 “천상과 인간이 다 땅속에 묻혀버렸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