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巖錄

벽암록 제16칙 줄탁동시(啐啄同時)

碧雲 2020. 3. 7. 23:24

 

   
垂示云。 수시(垂示)*하여 말했다. 
道無橫徑。 "도(道)에는 지름길이 없고, 
立者孤危。 그 길에 서있는 자는 홀로 외롭다.
法非見聞。 법은 보고 듣는 것이 아니며, 
言思迥絕。 언어와 생각이 아득히 끊어진 것이다.
若能透過荊棘林。 만약 가시덩쿨 숲을 뚫고 지나가   
解開佛祖縛。 부처와 조사라는 속박을 풀어버리고  
得箇穩密田地。 어떤 은밀한 경지를 얻으면, 
諸天捧花無路。 천신들이 꽃을 바치려 하나 길이 없고,
外道潛窺無門。 외도가 엿보려 해도 구멍이 없고,  
終日行而未嘗行。 종일 행하나 행한 적이 없고, 
終日說而未嘗說。 종일 설해도 설한 적이 없이,    
便可以自由自在。展啐啄之機。 문득 자유자재하게 줄탁(啐啄)의 솜씨를 펴고,
用殺活之劍。 죽이고 살리는 검을 쓸 수 있게 된다.
直饒恁麼更須知有建化門中 그렇다 치더라도 교화의 문중을 세워서    
一手抬一手搦。 한 손은 치껴 세우고 한 손으로는 억눌러줄 줄 알아야,
猶較些子。 조금이나마 비슷하다 하겠다.  
若是本分事上。且得沒交涉。 이것이 본분사(本分事)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作麼生是本分事。 어떤 것이 본분사이겠는가?
試舉看。 예를들어 살펴보자." 
*垂示 ; 가르침을 내려 대중에게 보이는 것[垂敎示眾],
법요(法要)를 설하기 전에 먼저 간명한 어구로 설하고자 하는 요체(要諦)를
대중에게 밝혀 주는 것으로서 시중(示衆)이라고도 한다.   
   
【一六】舉 들추는 예 [16] 
僧問鏡清。 어떤 스님이 경청(鏡淸)스님에게 물었다. 
學人啐。  "배우는 사람이 줄(啐)*하려 하니, 
請師啄 스승님께서 탁(啄)*하여 주십시요."
(無風起浪。作什麼。 *(바람이 없는데 풍랑을 일으켜서 뭐하나? 
爾用許多見解。作什麼)。 알음알이만 많아서 그것으로 뭐하게?)
清云。還得活也無  "그렇게 해서 살 수 있겠느냐?"
(剳。買帽相頭。 (앗불사, 모자 사고서 머리 모양 보고, 
將錯就錯。 잘못을 가지고 잘못으로 나아가니.
不可總恁麼) 다 그래서는 안될텐데.)*
僧云。若不活遭人怪笑  "살아나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겠지요"
(相帶累。撐天拄地。 (서로 대루(帶累)*하면서 하늘이 버티니 땅도 버티는군. 
檐板漢)。 널판지 지고갈 놈!)
清云。也是草裏漢  "초리한(草裏漢)*이로다."
(果然。自領出去。放過即不可)。 (그렇다면 스스로 나가게 하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줄(啐),*탁(啄) ; 달걀이 부화하려 할 때, 새끼가 알 속에서 긁는 소리를 내는 것을 줄(啐)이라 하고,
그때 어미닭이 새끼가 나오도록 껍질을 쪼아 주는 것을 탁(啄)이라 한다.
학인(學人)이 선사(禪師)의 계발(啟發)을 구하는 것을 줄에 비유하고,
선사가 학인을 계발하는 것을 탁에 비유한다.
*(괄호)안은 원오스님의 생각이다.
*'혹시 탁(啄)을 회피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
*대루(帶累) : 자기가 옳다 주장하며 상대방 때리기를 이어가는 것.
*초리한(草裏漢) : 산야를 떠도는 무리, 양민을 해치는 자.
   
鏡清承嗣雪峰。 경청(鏡清)*설봉(雪峰)*의 법을 이어받았으니, 
與本仁玄沙疏山太原孚輩同時。 나[圓悟]*, 현사(玄沙)*, 소산(疏山)*, 태원부(太原浮)* 
  같은 시대 사람이다. 
*경청(鏡清) ; 경청도부선사(鏡清道怤禪師;868~937) ;
항주(杭州) 용책사(龍冊寺) 도부순덕대사(道怤順德大師)는 영가(永嘉) 사람으로 속성은 진(陳)씨이다.
어려서부터 고기와 비린 것을 싫어하여 사람들이 억지로 마른 생선을 먹이면 곧 꽥꽥대며 토했다.
후에 출가하여 항주 개원사(開元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제방으로 다니다가 복건 민천(閩川)에 이르러
설봉(雪峰)선사를 찾아 뵈었더니, 설봉이 물었다.
 "어디 사람인가?"
 "온주(溫州)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일숙각(一宿覺;永嘉玄覺禪師)과 같은 고향 사람이구나."
 "그렇다면 일숙각은 어디 사람입니까?" 
 "호된 몽둥이 한 대 맞았으면 좋겠으나, 그만 두겠다."
하루는 경청스님이 물었다.
 "고덕(古德)들이야 어찌 이심전심(以心傳心)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문자와 어구도 세우지 않았느니라."
 "문자와 어구를 세우지 않는다면 스님은 어찌 전하시렵니까?"
설봉선사가 한참을 묵묵히 있으니, (그 가르침에) 스님은 절하며 감사드렸다.  
 "내게 또 한 바탕 묻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큰스님께 한 바탕 화두를 여쭙기 청합니다."
 "그렇다면, 특별히 논할 것이 있겠구나."
 "큰스님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 화두가 무엇이냐?"
 "살인을 저버리는 것[孤負殺人]입니다." (전등록 18권 중에서)
*雪峰義存禪師 ; 복주(福州) 설봉 의존선사는 천주(泉州) 남안(南安) 사람으로 성은 증(曾)씨이다.
집안 대대로 불교를 신봉(信奉)하였기에 대사는 나서부터 고기와 생선을 싫어하였고, 
강보 속에서 범종 소리를 듣거나 번(幡), 꽃, 불상을 보면 꼭 동용(動容)하곤 하였다.
나이 12세에 그의 부친을 따라 포전(莆田) 옥간사(玉澗寺)에 갔다가
경현율사(慶玄律師)를 보자마자 절하면서  “제 스승님이시군요.” 하고 머물러 시봉하였다.
17세에 머리 깎고 부용산(芙蓉山) 상조(常照)대사를 뵈니, 상조스님이 어루만지며 법기로 여겼다.
뒤에 유주(幽州) 보찰사(寶剎寺)로 가서 구족계 받고 한동안 지계(持戒)하며 참선을 하다가
덕산(德山)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당나라 함통(咸通) 때 민중(閩中;福建)으로 돌아와서 상골산(象骨山) 설봉(雪峰)에 선원을 세우니,
종도(從徒)와 도반(道伴)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의종(懿宗)이 진각(真覺)대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자줏빛 가사를 하사하였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조사의 뜻[祖意]과 교법의 뜻[敎意]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우레 소리가 천지를 흔들어도 방 안에서는 듣지 못한다.
 그대는 무슨 일로 행각(行腳)을 하는가?”
 “저의 눈이 본래 바른데 스승 때문에 잘못 되었을 때에는 어찌합니까?”
 “달마를 잘못 만난 것이다.”
 “저의 눈은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스승을 따르지 말아라.”
 “머리 깎고 가사 입고 부처님께 귀의했는데, 어찌 부처님을 인정치 말라 하십니까?”
 “좋은 일도 없는 것만 못하다[好事不如無].”
(조의(祖意)나 교의(敎意)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佛果圓悟克勤禪師 ; (1063~1135)) 북송대(北宋代) 임제종(臨濟宗) 선승(禪僧).
사천(四川) 숭녕(崇寧)사람으로, 속성은 락(駱), 이름은 극근(克勤). 자(字)는 무착(無著)이다.
원오극근(圜悟克勤) 또는 불과원오(佛果圜悟)라 불렀다.  
유년시절에 묘적원(妙寂院)에서 스스로 출가를 결심하고 구족계를 받은 다음,
성도(成都)에서 원명(圓明)스님에게 경론(經論)을 배웠고, 
그 뒤에 오조산(五祖山) 법연(法演)선사를 찾아 뵙고 그의 인증(印證)을 받았다.
불감혜근(佛鑑慧懃), 불안청원(佛眼清遠)과 더불어 「연문2근1원(演門二勤一遠)」, 
「총림3걸(叢林三傑)」이라 불리우는 영예를 얻었다. 정화(政和) 초년에는 형주(荊州)로 가서
당시 명사인 장무진(張無盡)을 만나 그와 화엄요지(華嚴要旨)와 선문종취(禪門宗趣)를 담론하였으며,
예주(澧州) 자사(刺史)의 청으로 협산(夾山) 영천선원(靈泉禪院)에 머물고 있을 때는 
추밀(樞密) 등자상(鄧子常)이 주청(奏請)하여 칙명으로 자줏빛 가사와
불과선사(佛果禪師)라는 호를 받았다.
정화 말년에는 부름을 받들어 금릉(金陵) 장산(蔣山)으로 이주하여 종품(宗風)을 크게 진작시켰다.
그 뒤 금산(金山)에 머물렀는데, 고종(高宗)이 양주(揚州)에 행차했을 때
그를 불러서 원오(圜悟)라는 호를 내리니, 세간에서 원오극근(圜悟克勤)이라 불렀다.
후에 성도(成都) 소각사(昭覺寺)로 돌아와 소흥(紹興) 5년에 입적하였으니, 세수(世壽) 73세 였다.
시호(諡號)는 「진각선사(真覺禪師)」, 제자로는 대혜종고(大慧宗杲), 호구소륭(虎丘紹隆) 같은 
선문용상(禪門龍象)들을 두었고, 일찍이 협산(夾山)의 벽암(碧巖)에서 설두중현(雪竇重顯) 스님의
송고백칙(頌古百則)을 모아 벽암록(碧巖錄) 10권을 편성(編成)하니, 세간에서 선문제일의 책이라 하였다.
책 원본은 모두 제자 종고가 비전불수(祕傳不授)의 책이라 하여 불에 태워버렸으나
후세에 중간(重刊)하였다.
그 외에 원오불과선사어록(圓悟佛果禪師語錄) 20권이 있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원오선사가 답했다. "입이 화근[禍門]이다." (언어와 문자를 떠난 것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 대화가 「원오화문(圓悟禍門)」이라는 공안(公案)이 되었다. 
*玄沙師備禪師(835~908) ; 복주 현사산(玄沙山) 종일(宗一)선사는 속성이 사(謝), 이름은 사비(師備)이다. ,
어려서는 고기를 잡다가 나이 30에 홀연히 출가하여 부용영훈(芙蓉靈訓)선사로부터 삭발 구족계를 받고,
설봉의존선사의 계오현지(契悟玄旨)에 심취(尋就)하였다.
처음에는 보응원(普應院)에 머물다가 뒤에 현사산으로 옮기니, 민주(閩主)가 스승으로 모셨다.
학도(學徒)가 800여에 달했으며, 양(梁) 태조 개평(開平) 2년에 입적하니, 세수 75세였다. 
*疏山 ; 무주(撫州) 소산(疏山) 광인선사(光仁禪師)는
키가 작고 못 생겼으나 뛰어난 말솜씨는 무리의 으뜸이었다.
동산(洞山)의 문하(門下)에 있을 때 날쌘 솜씨로 심오한 이치를 선양하니, 
모두가 인자하기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라 하였다.
제방(諸方)의 삼매(三昧) 닦는 이들이 난쟁이 사숙에게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어느 스님이 "어떤 것이 제불(諸佛)의 스승입니까?" 하고 여쭈니, 
선사가 답했다. "왜 소산(疏山) 늙은이에게 묻지 않는 것이냐?"
그 스님은 아무 말을 못했다. 
선사가 손에 나무 뱀[木蛇]을 들고 있었는데,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손에 드신 것이 무엇입니까?" 中是什麼。師提起曰。
선사가 세워 보이면서 "조(曹)씨 집안 딸이다[曹家女]." 하였다. (曹溪家의 傳統物) -略-
*태원부 상좌(太原孚上座) : 설봉(雪峰)선사의 법제자로 부공요두(孚公搖頭)
『큰스님 머리를 흔드시니, 제가 꼬리를 쳤습니다(和尚搖頭,某甲擺尾)』라는 공안(公案)의 주인공이다.
「하루는 설봉선사가 스님을 보자 손가락으로 해를 가리켜 보이셨는데,
스님은 손을 흔들면서 나가버렸다.  
설봉선사가 "네가 나를 무시하느냐?" 하시니,
"큰스님께서 머리를 흔드시기에 제가 꼬리쳤는데, 무엇이 무시한 것입니까?" 하였다.
설봉선사가 이르셨다. "가는 곳마다 아무쪼록 숨기거라."」

初見雪峰。得旨後。 처음 설봉을 만나 종지를 얻은 뒤, 
常以啐啄之機。開示後學。 항상 줄탁(啐啄)의 기틀로써 후학에게 열어 보이고,    
善能應機說法。 근기에 알맞게 설법을 잘했다. 
   
示眾云。 대중 앞에서[示眾] 말했다. 
大凡行腳人。  “무릇 행각인(行腳人;수행인)이라면 
須具啐啄同時眼。 모름지기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안목을 갖추고 
有啐啄同時用。方稱衲僧。 어떤 줄탁동시를 썼을 때 비로소 납승(衲僧)이라 할 것이니,   
如母欲啄。而子不得不啐。 마치 어미닭이 쪼려 하면 새끼가 소리내지 않을 수 없고, 
子欲啐。而母不得不啄。 새끼가 소리내려 하면 어미가 쪼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有僧便出問。 어떤 스님이 나서서 물었다.
母啄子啐。  “어미닭이 쪼고 새끼가 소리내면 
於和尚分上。成得箇什麼邊事。 큰스님의 입장에서는 어떤 일이 됩니까?”
清云。好箇消息。 “좋은 소식일 따름이다.”
僧云。子啐母啄。 “새끼가 소리내고 어미닭이 쪼면 
於學人分上。成得箇什麼邊事。 학인의 입장에서는 어떤 일이 됩니까?”
清云。露箇面目。 면목(面目)이 드러날 뿐이다.*
*16칙 본문에서 학인이 경청스님께 탁을 청하는 것이 바로 면목을 드러낸 것이다.
줄(啐)은 학인이 지향할 본분일 뿐 밖으로 표할 것이 아니라서 밖으로 표한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면목을 드러낸 것이니, 줄((啐)은 미리 알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所以鏡清門下。有啐啄之機。 이 때문에 경청스님 문하에는 줄탁의 기틀이 있다. 
這僧亦是他門下客。 그 스님 또한 다른 문하의 손님인지라  
會他家裏事。所以如此問。 다른 집안 사정을 알고자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學人啐請師啄。 “학인이 줄(啐)할 터이니 스님께서 탁(啄)을 해주십시요”
此問洞下謂之借事明機。 이 문제를 동산(洞山) 문하에서는 
   '어떤 일을 빌려서 기틀을 밝힌다[借事明機]'고 하는데,  
那裏如此。子啐而母啄。 그러나 어찌 이러한 새끼가 긁고 어미닭이 쪼는 일이  
自然恰好同時。 자연스럽게 동시에 잘 맞아떨어지겠는가? 
鏡清也好。 경청스님의 대처가 좋아서  
可謂拳踢相應。 가히 주먹질과 발길질이 서로 맞고, 
心眼相照。 마음과 눈이 서로를 비췄다 하겠다. 
便答道。還得活也無。  “살아날 수 있겠느냐?” 하고 물었으니.   
其僧也好。亦知機變。 그 스님의 대응도 훌륭했고, 또 기변(機變)*할 줄 알았다.   
一句下有賓有主。 그 한 마디에 객(客;賓)과 주(主)가 있고, 
有照有用。有殺有活。 조(照)와 용(用), 살(殺)과 활(活)이 있어서 
僧云。若不活遭人怪笑。 그 스님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비웃음을 받을 것입니다.” 하였다. 
清云。也是草裏漢。 경청스님은 “초리한(草裏漢)이로다.”고 하여 
一等是入泥入水。 하나같이 진흙 속으로 들어가고 물속으로 들어갔으니, 
鏡清不妨惡腳手。 경청스님이 사나운 손발길질을 방해하지 않은 것이다.  
這僧既會恁麼問。 이 스님이 그러한 질문을 한다는 것을 기왕 알면서도 
為什麼卻道。也是草裏漢。 어째서 “초리한이로다”고 한 것인가?  
所以作家眼目。須是恁麼。 작가(作家)*의 안목은 모름지기 이와 같이         
如擊石火似閃電光。 전광(電光)이 번쩍이고 석화(石火)가 튀듯 해야 하려니와  
構得構不得。 얻음에 매이거나 얻지 못함에 매이면  
未免喪身失命。 신명(身命) 상실을 면치 못할 것이니,   
若恁麼。便見鏡清道草裏漢。 만약 이와 같다면 곧 경청스님이
  초리한이라 말한 뜻을 알게 될 것이다.
*기변(機變) ; 임기응변(臨機應變)을 줄인 말.
*작가(作家) ; 큰 기틀의 사용능력[機用]을 지닌 선사(禪師). 예; 作家宗師, 趙州是作家
所以南院示眾云。 그래서 남원(南院)스님이 대중 법문에서
諸方只具啐啄同時眼。  “제방(諸方)이 줄탁동시를 보는 눈만 있고 
不具啐啄同時用。 줄탁동시의 용(用)은 갖추지 못했다.”고 하였는데, 
有僧出問。 어떤 스님이 나서서 물었다. 
如何是啐啄同時用。 “무엇이 줄탁동시의 용(用)입니까?”  
南院云。作家不啐啄。 “작가라면 줄탁하지 않는다. 
啐啄同時失。 줄탁을 하는 동시에 잃는다.”
僧云。猶是學人疑處。 “오히려 그것이 저의 의문점입니다.”
南院云。作麼生是爾疑處。 “어떤 것이 네 의문점이라는 것이냐?”
僧云。失。 “잃는다는 것입니다.”  
南院便打。 이에 남원스님이 갑자기 몽둥이로 쳤으나 
其僧不肯。院便趕出。 그 스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니 그를 쫓아내버렸다. 
僧後到雲門會裏舉前話。 그 스님이 뒤에 운문스님의 회하에 이르러 
  앞서의 대화를 들춰 말하자, 
有一僧云。 한 스님이 말했다.
南院棒折那。 “남원스님의 몽둥이가 부러졌겠네요.”
其僧豁然有省。 이에 그 스님은 활연한 성찰이 있었다. 
且道意在什麼處。 말해보라, 그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其僧卻回見南院。 그 스님이 되돌아와 남원스님을 뵈려 했으나 
院適已遷化。 남원스님은 이미 입적하시고 안계시는지라   
卻見風穴。 물러나 풍혈(風穴;896~973)스님을 뵙고 
纔禮拜。穴云。 예배만 하려 했는데 풍혈스님이 말했다.
莫是當時問先師啄同時底僧 당시에 스승님께 줄탁동시를 물었던 스님이 아닌가?”

   
僧云。是。 "그렇습니다." 
穴云。爾當時作麼生會。 "그대는 당시에 알아차렸었는가?”
僧云。某甲當初時。 "제가 당초에는 
如燈影裏行相似。 등잔 그림자 속을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穴云。爾會也。 "그대가 알았구나."
且道是箇什麼道理。 말해보라,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這僧都來只道某甲當初時。 이 스님은 단지 '당초에는 등잔 그림자 속을 
如燈影裏行相似。 다니는 것 같았다”고 한 것이 전부인데, 
因甚麼風穴便向他道爾會也。 무엇으로 인해 풍혈스님은 그에게
   '그대가 알았구나'라고 말했겠는가?
後來翠巖拈云。 훗날 취암(翠巖)스님이 염(拈)*하기를, 
南院雖然運籌帷幄。  “남원이 그렇게 운주유악(運籌帷幄)*하더라도  
爭柰土曠人稀。 땅은 넓으나 사람은 귀해서 
知音者少。 알아듣는 사람이 적은 것을 어찌하랴” 하였고, 
風穴拈云。南院當時。 풍혈스님은 “남원은 당시에 
待他開口。 그가 입 열기를 기다렸다가 
劈脊便打。 등이 쪼개지도록 후려치고서 
看他作麼生。 그가 어찌 하는지 살펴야 했다”고 하였다. 
若見此公案。 이 공안을 알아차린다면 
便見這僧與鏡清相見處。 그 스님과 경청이 서로 본 곳[相見處]을 알게 될 것이다. 
諸人作麼生。免得他道草裏漢。 여러분은 어찌 하면 그가 말한 '초리한'을 면하겠는가? 
所以雪竇愛他道草裏漢。 이 때문에 설두스님은 그 '초리한'을 좋아하여 
便頌出。 송(頌)을 읊었다.
*염(拈) ; 즉, 염고(拈古), 옛 사람의 일사(逸事)를 끄집어내어 해석(解釋)하고 비평(批評)하는 일.
*운주유악(運籌帷幄) ; 장막(帳幕) 안에서 산가지(算--)를 놀린다는 뜻으로,  
가만히 들어앉아 계책(計策)을 꾸미는 것을 말한다. 
 古佛有家風 옛 부처에게는 가풍이 있어서 
 對揚遭貶剝 대량(對揚)*하다가는 폄박(貶剝)*을 만난다.
 子母不相知 새끼와 어미가 서로를 모르는데  
   是誰同啐啄 뉘라서 줄탁을 같이 하리오?
   啄覺 猶在殼 탁(啄)하면 각(覺)해야 하련만 껍질 속에만 들어 앉아서
   重遭撲 거듭된 후려침을 당하니,  
   天下衲僧徒名邈 천하의 납승 무리는 이름과는 거리가 멀다
*대량(對揚) ; 응대하여 거량(擧揚)하는 것.
*폄박(貶剝) ; 면목이 드러나 폄하(貶下)되는 것. 
古佛有家風(言猶在耳。千古榜樣。莫謗釋迦老子好)
___(이 말이 귀에 남아 있다. 예부터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니 석가 늙은이를 비방해서는 안된다.) 
對揚遭貶剝(鼻孔為什麼。卻在山僧手裏。八棒對十三。爾作麼生。放過一著。便打)
___('콧구멍이 어째서 산승의 손아귀에 있느냐? 열세 방(棒)을 여덟 방으로 대신하겠다.'
또 '너는 어찌 하겠느냐? 한 대는 봐주겠다.' 하고 후려치겠다.) 
*鼻孔 ; 禪林用語. 수행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 불도의 근본, 정문(頂門)이나 안정(眼睛)과 유사한 용어이다.
子母不相知(既不相知。為什麼卻有啐啄。天然) 
___(기왕 서로를 모르는데 어찌 줄탁이 있으리오? 하늘의 이치가 그렇다.)
是誰同啐啄(百雜碎。老婆心切。且莫錯認) 
___(산산히 부셔질까 노파심이 간절하지만 오인하지는 말라.)
啄覺(道什麼。落在第二頭)
___(말이 왜 제2두(第二頭)*로 떨어지지?)
*제2두(第二頭) ; 더 높은 평등처(平等處)를 향해 교법(敎法)의 차별문(差別門)으로 되돌아 내려가는 것,
제2의문(第二義門), 제2기(第二機)라고도 한다.
진실한 깨달음의 경지적인 불도(佛道) 구경의 종지(宗旨)를 지향하거나  
세간에 연을 둔 상구보리(上求菩提)의 수행도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제1의문(第一義門;向上門)이라 하고,;
반대로 방편으로 이름과 말을 빌려 교의법문(教義法門)을 세우거나, 
혹은 세간에 수순하여 교화중생하는 보살행을 제2의문(第二義門;向下門)이라 한다.  
猶在殼(何不出頭來) 
___(왜 머리 내밀고 나오지 않느냐?)
重遭撲(錯。便打。兩重公案*。三重四重了也)
___(저런! 후려치면서 공안을 재차 설명하고 해석해 주건만 세번 네번 거듭해야 알겠느냐?)
*兩重公案 ; 한 공안에 대해 거듭하여 설명하고 해석해 주는것. 
天下衲僧徒名邈(放過了也。不須起。還有名邈得底
若名邈得。也是草裏漢。千古萬古黑漫漫。
溝塞壑無人會)
그냥 봐 주었지만 꼭 들춰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명모라도 지닌 자가 있었던가?
명모라도 지녔다면 초리한이라 하겠으나. 천고만고에 새까맣게 널려있어서
도랑을 메우고 골짜기를 막을 지경이어도 아는 사람은 없다. 

古佛有家風。  '옛 부처에게는 가풍이 있다.' 
雪竇一句頌了也。 설두스님은 이 한 마디 송으로 다해버렸다. 
凡是出頭來。直是近傍不得。 머리를 내밀어 보려는 자마다 근방에도 못 오지만,  
若近傍著。則萬里崖州。 가까이 붙었다는 것이 만리애주(萬里崖州)*이다.  
纔出頭來。便是落草。 머리를 내밀었다 하면 벌써 떨어진 풀잎[落草*]이라서  
直饒七縱八橫。不消一捏。 동분서주한들 반죽 한덩어리 소화시키지 못한다.  
*만리애주(萬里崖州) ; 선(禪)과 의(義)가 서로 현격히 멀다는 뜻으로
애주(崖州)는 지명(地名), 지금의 해남성(海南省) 남쪽해안 애현(崖縣) 일대이다.
운문광록(雲門廣錄) 중에
운문스님이 물었다. "자기 일이 밝혀져야 비로소 저 공양이 소화된다. 무엇이 네가 밝혀야 할 일이냐?"
또 "하나를 들어 셋을 밝혀 주어도 만리애주(萬里崖州)다." 하고는,
대신 답하여 "모두가 화상 탓이다." 하고, 앞의 말에 대해서는 "배부르다."고 하였다.   
(雲門廣錄中 師或云 己事若明 始消他供養 作麽生是爾明底事
又云 擧一明三 萬里崖州 代云 一切由和尙 代前語云飽)
*落草 ; 하천(下賤한 신분지위로 떨어진 사람을 지칭하는 선림용어(禪林用語).  
雪竇道。古佛有家風。 설두스님이 말한 '고불에게 가풍이 있다'는 것은  
不是如今恁麼也。 지금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釋迦老子。初生下來。 석가 늙은이가 처음 탄생하여
一手指天。一手指地。 한 손으로는 하늘을, 또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고, 
目顧四方云。 눈으로는 사방을 돌아보면서 
天上天下。唯我獨尊。 “천상천하에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고 하셨다.   
雲門道。 이를 두고 운문(雲門)스님은 말하기를, 
我當時若見。一棒打殺。 “내가 당시에 보았더라면 한 방망이로 때려 죽이고 
與狗子喫卻。 개가 먹도록 던져 주어서 
貴要天下太平。 천하태평을 귀하게 여겼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如此方酬得恰好。 이래야 비로소 비슷하게나마 응수했다 할 것이라 
所以啄之機。皆是古佛家風。 그래서 줄탁의 기틀이 다 고불(古佛)의 가풍인 것이다. 
若達此道者。 이 정도에 달하면 
便可一拳拳倒黃鶴樓。 가히 한 주먹에 황학루(黃鶴樓)*를 넘어뜨리고 
一踢踢翻鸚鵡洲。 한 발길질로 앵무주(鸚鵡洲)*를 날려버릴 것이니,   
如大火聚。近之則燎卻面門。 마치 큰 불덩이와 같아서 가까이 하면 얼굴을 데이고,
如太阿劍。 태아검(太阿劍)*과도 같아서 
擬之則喪身失命。 시험해보다가는 신명을 잃을 것이다. 
此箇唯是透脫得大解脫者。 이는 오직 철저히 벗어나 큰 해탈을 얻어야만 
方能如此。 이와 같을 수 있을 것이며,  
苟或迷源滯句。 혹시 근원을 미혹하여 언구가 막혔다면 
決定搆這般說話不得。 결정코 그런 설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黃鶴樓 ; 호북성(湖北省) 무창현(武昌縣) 장강대교(長江大橋)에 접해있는 사산(蛇山) 정상의 누각.
相傳비문위(費文褘)가 선인이 되어 황학 날개를 타고 쉬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악양루(岳陽樓), 등왕각(滕王閣)과 더불어 강남의 3대 명루라 한다.
*鸚鵡洲 ; 장강(長江) 중간의 모래섬.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한양현(漢陽縣) 서남부.
동한(東漢) 이형(禰衡)이 일찍이 이곳에서 앵무부(鸚鵡賦)를 지었다 햐여 붙여진 이름라 전해진다.
*太阿劍 ; 오(吳國)에서 장수에게 주조해준 보검. 
對揚遭貶剝。  '대량(對揚)하다가 폄박 당한다'는 것은 
則是一賓一主。一問一答。 한 손님[賓]과 한 주인[主]이 일문일답을 하다가  
於問答處。便有貶剝。 문답하는 곳에서 폄박이 있는 것을  
謂之對揚遭貶剝。 일러 '대량하다 폄박 당했다'고 한다. 
雪竇深知此事。 설두스님은 이 일을 깊이 알았기에 
所以只向兩句下。頌了。 그 아래 두 구절로 송을 마쳤다.
末後只是落草。 마지막 부분은 다만 낙초(落草)인   
為爾注破。 그대들을 위해 설파(說破)한 것이다. 
子母不相知。  '어미와 새끼가 서로 모르는데 
是誰同啐啄。 어느 누가 줄탁을 같이 하겠는가?' 한 것은  
母雖啄。 어미는 탁(啄)할 수는 있겠지만 
不能致子之啐。 새끼의 줄(啐)을 이끌어낼 수 없고, 
子雖啐。 새끼는 줄할 수는 있다 해도 
不能致母之啄。 어미의 탁은 이끌어내지 못하니, 
各不相知。當啐啄之時。 각각 서로를 모르고 줄탁을 할 때를 당해서는  
是誰同啐啄。 어느 누가 줄탁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인데,   
若恁麼會。 만일 이렇게 이해하여  
也出雪竇末後句。 설두스님의 말후구(末後句)*를 낼 수 있겠는가?
不得在。 있을 수 없다. 
何故。不見香嚴道。 왜냐하면, 듣지 못했는가? 향엄(香嚴)스님이  
子啐母啄。  '새끼가 줄하고 어미가 탁하면   
子覺無殼。 새끼는 껍질을 못 느낄 것이니, 
子母俱忘。 새끼와 어미라는 주객(主客)이 다 잊혀져야 
應緣不錯。 인연에 응함이 어긋나지 않는다. 
同道唱和。 같은 길 가는 사람끼리 노래는 어울려 부르지만 
妙玄獨腳。 현묘한 길은 홀로 걷는 것이디.'고 하였다. 
*말후구(末後句) ; 대오(大悟)가 철저히 극에 달한 곳에 도달하여 토하는 지극한 한마디 말.
雪竇不妨落草。 설두스님이 낙초되기를 마다하지 않고 
打葛藤道啄。 갈등(葛藤)*을 걷어치우고 '탁(啄)'을 말했는데,
此一字。頌鏡清答道還得活也無。 이 한 자는 경청스님이 답한
   '살아날 수 있겠느냐?'를 읊은 것이고, 
覺。頌這僧道若不活遭人怪笑。  '각(覺)'은 저 스님이 '살아나지 못하면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다” 한 것을 읊은 것이다. 
*갈등(葛藤) ; 문자와 언어가 칡과 등나무 얽히듯 번잡한 것을 가리키는 선림용어(禪林用語)이다. 
為什麼雪竇卻便道。猶在殼。 무엇 때문에 설두스님은
   '껍질 속에만 들어 앉았다'고 했겠는가? 
雪竇向石火光中別緇素。 설두스님이 석화(石火) 빛 튀는 사이에 흑백을 구별하고 
閃電機裏辨端倪。 전광 번쩍이는 순간에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鏡清道。也是草裏漢。 경청스님은 '초리한'이라 하고,  
雪竇道。重遭撲。 설두스님은 '거듭 후려쳐 준다.'고 했는데,  
者難處些子。 이것은 약간 난처하다.
是鏡清道也是草裏漢。 경청스님이 “초리한”이라 한 것으로    
喚作鏡換人眼睛得 경청이 사람의 눈동자를 바꾼다고 할 수 있겠는가? 
這句莫是猶在殼麼。 이 구절이 '껍질 속에 앉아 있지만 말라'는 것이겠는가? 
且得沒交涉。 전혀 상관이 없다.  
那裏如此。若會得。 어째서 속사정이 그러한지 만약 알아차린다면  
繞天下行腳。報恩有分。 천하를 두루 행각하며 은혜에 보답할만 하다 하겠다.  
山僧恁麼說話。也是草裏漢。 산승이 이렇게 얘기했으니, 이야말로 초리한이다.
天下衲僧徒名邈。  '천하의 납승들은 명모일 뿐이다.'고 하였는데, 
誰不是名邈者。 누군들 명모 뿐인 자가 아니겠는가?  
到這裏。雪竇自名邈不出。 여기에 이르러 설두스님은 자기 명모를 감췄으니, 
卻更累他天下衲僧。 더욱 천하 납승들에게 누를 끼쳤다.
且道鏡生是這僧處。 말해보라, 경청의 어떤 것이 그 스님을 위한 곳인가? 
天下衲僧跳不出。 천하의 납승들은 뛰어본들 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