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般涅槃經卷第十五 |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제15권 |
北涼天竺三藏曇無讖譯 | 북량(北涼)국 천축삼장 담무참(曇無讖) 역 |
◎梵行品第八之一 | 8-1. 범행품(梵行品) |
「善男子!云何菩薩摩訶薩梵行? 善男子!菩薩摩訶薩住於大乘大般涅槃, 住七善法,得具梵行。 何等為七? 一者知法,二者知義, 三者知時,四者知足, 五者自知,六者知眾, 七者知尊卑。 |
「선남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범행(梵行)인가?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대승대반열반에 의지하고 일곱 가지 선법(善法)에 의지하여 구족한 범행을 얻거니와, 어떤 것들이 그 일곱 가지[七知]인가 하면, 첫째는 법을 아는 것[知法], 둘째는 뜻을 아는 것[知義], 셋째는 때를 아는 것[知時], 넷째는 만족을 아는 것[知足], 다섯째는 자신을 아는 것[自知], 여섯째는 대중을 아는 것[知眾], 일곱째는 존귀하고 비천함을 아는 것[知尊卑]이니라. |
善男子!云何菩薩摩訶薩知法? 善男子!是菩薩摩訶薩知十二部經, 謂修多羅、祇夜、授記、伽陀、 優陀那、尼陀那、阿波陀那、 伊帝曰多伽、闍陀伽、毘佛略、 阿浮陀達摩、優波提舍。 |
선남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이 법을 아는 것인가?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십이부경(十二部經)을 아나니, 소위 수다라(修多羅), 기야(祇夜), 수기(授記), 가타(伽陀), 우다나(優陀那), 니다나(尼陀那), 아파다나(阿波陀那), 이제왈다가(伊帝曰多伽), 사타가(闍陀伽), 비불략(毘佛略), 아부타달마(阿浮陀達摩), 우파제사(優波提舍)이니라. |
「善男子!何等名為修多羅經? 從如是我聞乃至歡喜奉行, 如是一切名修多羅。 |
「선남자야! 어떤 것을 수다라경(修多羅經)이라 하는가? '여시아문(如是我聞*)'에서 '환희봉행(歡喜奉行*)'까지의 이러한 모든 것을 수다라라고 하느니라. |
*모든 佛說經은 如是我聞으로 시작하여 歡喜奉行으로 끝맺는 構成이니, 經典의 모든 말씀이 修多羅 즉 契經이다. 契經이라 한 것은 經文이 사람들의 근기와 이치에 계합한다는 의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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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等名為祇夜經? 佛告諸比丘, 昔我與汝愚無智慧, 不能如實見四真諦, 是故流轉久處生死, 沒大苦海。 何等為四?苦、集、滅、道。 如佛昔日為諸比丘說契經竟, 爾時復有利根眾生,為聽法故, 後至佛所,即便問人: 『如來向者為說何事?』 佛時知已,即因本經, 以偈頌曰: |
「어떤 것을 기야경(祇夜經*)이라 하는가?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고하시되, 지난날 나와 너희가 어리석고 지혜가 없어서 4진제(真諦)를 여실히 볼 수 없었기에 그래서 오래토록 생사에 처하고 큰 고해(苦海)에 빠져서 유전(流轉)하였거니와, 무엇이 그 넷인가?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이니라. 부처님께서 옛날 비구들에게 계경(契經*) 설하기를 마치셨는데, 이때 예리한 근기의 어떤 중생이 법을 듣고자 뒤늦게 부처님께로 와서 사람들에게 묻기를, 『여래께서 지난번[向者]에 어떤 것을 말씀하셨소?』 하였느니라. 부처님깨서 마침 아시고 곧 근본경[本經]에 의지하시어 게송으로 말씀하신 |
「 『我昔與汝等, 不見四真諦, 是故久流轉, 生死大苦海。 若能見四諦, 則得斷生死, 生有既已盡, 更不受諸有。』 |
「 『옛날 나와 그대들은 4진제(真諦)를 몰랐기에 오랜동안 생사의 고해를 유전(流轉)했거니와 만일 4제(四諦)를 알게 되면 곧 생사가 끊어지리니, 생유(生有*)가 기왕 다하여 다시는 제유(諸有*)를 받지 않으리라.』 |
「是名祇夜經。 | 「이런 것들을 기야경(祇夜經)이라 하느니라. |
*祇夜(Geya,重頌); 法을 說하신 다음 그 뜻을 거듭[重] 밝혀주기 위해 읊는 송[頌]이니 重頌이라 한다. *生有; 四有의 하나. 四有는 生有, 本有, 死有, 中有를 이르며, 欲界, 色界의 모든 有情이 四有를 이룬다. 生有는 諸趣에서 生이 이루어지는 一剎那. 本有는 生有를 제외한 것의 一剎那. 死有는 最後의 一剎那. 中有는 死有와 生有 사이의 살아있는 身心. *諸有; 有를 三有, 四有, 七有, 九有, 二十五有 등으로 나누는데, 그것을 總稱하여 諸有라 한다. *契經(修多羅,Sūtra); 理와 機에 契合한다 하여 契經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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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等名為授記經? 如有經律,如來說時, 為諸大人,受佛記別: 『汝阿逸多,未來有王,名曰蠰佉, 當於是世,而成佛道,號曰彌勒。』 是名授記經。 |
「어떤 것을 수기경(授記經)이라 하는가? 어떤 경(經)이나 율(律)을 여래가 설하실 때 대보살이 부처님의 기별(記別)을 받되, 『그대 아일다(阿逸多*)는 미래에 상가(蠰佉*)라는 왕이 있을 그 세상이 되면 불도를 이루어 호를 미륵이라 하리라.』 하는 이것을 수기경(授記經)이라 하느니라. |
*記別; 記莂, 부처님께서 법문을 설하시는 것과 별개[別]로 제자가 성불하는 일에 대해 劫數, 國土, 佛名, 壽命 등을 암시[記]해 주시는 것을 말한다. 이 記別을 받는 일을 수기(受記), 주는 입장에서는 수기(授記)라 한다. *阿逸多(Ajita); 無能勝, 最勝이라는 뜻으로 今生의 彌勒菩薩의 字이다. *蠰佉(Sajkha); 佉(거,구,가)가 이름에 쓰일 경우 '가'로 읽는다. 根本說一切有部毗奈耶藥事에 과거 寶光如來 계시던 때에 摩娑婆王에게 授記하시되, 「너는 오는 세상 사람 수명이 팔만 세일 때, 그 세상에서 전륜왕이 되어 호를 상가(餉佉)라 하리라.」 하셨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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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等名為伽陀經? 除修多羅及諸戒律, 其餘有說四句之偈,所謂: |
「어떤 것을 가타(伽陀*)경이라 하는가? 경전(修多羅)과 율장(律藏)을 제외한 나머지의 사구게(四句偈)를 설하신 것들이니, 소위, |
「 『諸惡莫作, 諸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教。』 |
「 『어떤 악한 일도 짓지 말고 온갖 선(善)을 봉행(奉行)하여 스스로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것이 제불의 가르침이니라.』 |
「是名伽陀經。 | 「이런 것을 가타경이라 하느니라. |
*伽陀(Agada); 祇夜는 뜻을 거듭[重] 밝히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반면, 伽陀는 그런 배경이 없이 읊으신 四句偈인지라 句頌, 孤起頌, 不重頌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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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等名為優陀那經? 如佛晡時入於禪定, 為諸天眾廣說法要。 時諸比丘各作是念: 『如來今者為何所作?』 如來明旦從禪定起,無有人問, 以他心智即自說言: 『比丘當知,一切諸天壽命極長。 汝諸比丘!善哉為他, 不求己利。 善哉少欲,善哉知足, 善哉寂靜。』 如是諸經無問自說, 是名優陀那經。 |
「어떤 것을 우다나(優陀那)경이라 하는가? 부처님께서 해질무렵 선정(禪定)에 드시어 천중(天眾)들에게 법요(法要)를 두루 설하시거든 그때의 비구들은 저마다 생각하되, 『여래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 하려니와, 여래는 다음날 해뜰무렵 선정에서 일어나 (물은)사람이 없지만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로써 (아시고)스스로 말씀하시되, 『비구들아! 제천(諸天)의 수명이 지극히 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희 비구들아! 선(善)을 비롯하여 남을 위하고,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말며, 선에 기초하여 욕심을 줄이고, 선에 기초하여 만족할 줄 알며, 선에 기초하여 적정(寂靜)해야 하느니라.』 하셨거니와, 이와 같은 경들은 물음 없이 스스로 설하신 것이니, 이런 것들을 우다나경이라 하느니라. |
*優陀那(Udana); 自說, 무문자설(無問自說). | |
「何等名為尼陀那經? 如諸經偈,所因根本,為他演說。 如舍衛國,有一丈夫,羅網捕鳥, 得已籠繫,隨與水穀而復還放。 世尊知其本末因緣,而說偈言: |
「어떤 것을 니다나(尼陀那)경이라 하는가? 경이나 게송에 인(因)한 바 근본을 남에게 설한 것이니, 마치 사위국의 한 장부가 그물로 새를 잡아서 새장에 넣어두고 물과 모이를 주고서 다시 놓아주었는데, 세존께서 그 본말(本末)과 인연을 아시고, 게송으로 설하시되, |
「 『莫輕小罪, 以為無殃。 水渧雖微, 漸盈大器。』 |
「 『작은 죄는 재앙이 없을 것으로 가벼이 여기지 말라. 불방울은 비록 작으나 차츰 큰 그릇을 채우느니라.』 |
「是名尼陀那經。 | 하신 것과 같은 이러한 것을 니다나경이라 하느니라. |
*尼陀那(Nidāna); 因緣, 緣起. 즉 緣起에 관한 모든 부처님 말씀이 니다나(尼陀那)이다. | |
「何等名為阿波陀那經? 如戒律中所說譬喻, 是名阿波陀那經。 |
「어떤 것을 아파다나(阿波陀那)경이라 하는가? 계율 (설하시는)중에 비유를 들어 하신 말씀을 아파다나라 하느니라. |
*阿波陀那(梵Avadāna,巴Apadāna); 譬喻. 이해를 돕고자 세간의 일에 비유하여 하신 말씀을 아파다나라 한다. | |
「何等名為伊帝曰(他本云目)多伽經? 如佛所說,比丘當知, 我出世時,所可說者,名曰戒經。 鳩留秦佛出世之時,名甘露鼓。 拘那含牟尼佛時,名曰法鏡。 迦葉佛時,名分別空。 是名伊帝曰多伽經。 |
「어떤 것을 이제왈다가(伊帝曰多伽*)경이라 하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비구여, 마땅히 알라. 내가 세상에 나와 설했다 할 것을 계경(戒經)이라 하거니와, 구류진불(鳩留秦佛) 때에는 감로 북[甘露鼓]이라 하였고, 구나함모니불 때에는 법 거울[法鏡]이라 하였으며, 가섭불 때에는 공을 분별함[分別空]이라 하였느니라." 하신 이런 것들을 니제목다가경이라 하느니라. |
*伊帝曰多伽(itivrttaka); 本事. 본생담(本生譚)이 아닌 부처님과 제자들의 전생의 행의(行誼)를 담은 경전.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佛如是說)」로 시작되는 경도 이에 속한다. 南本에 '目'으로 되어 있다 하면서도 '曰'로 표현하였고, 또 梵語 原音으로 보아도 目보다는 曰이 옳을 듯하다. 실례로 尼陀那目得迦(梵 Nidānamātrkā)에서 mā를 目자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尼陀那目得迦는 「根本說一切有部尼陀那目得迦(Mūlasarvāstivādanidānamātṛka)」의 약칭으로서 尼陀那는 因緣, 目得迦는 本事의 뜻이며, 전반부에는 因緣經(니다나)이 후반부에는 本事經(이제왈다가)이 실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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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等名為闍陀伽經? 如佛世尊,本為菩薩,修諸苦行。 所謂比丘當知,我於過去作鹿、 作羆、作麞、作兔, 作粟散王、轉輪聖王、龍、金翅鳥, 諸如是等,行菩薩道時所可受身, 是名闍陀伽。 |
「어떤 것을 사타가(闍陀伽)경이라 하는가? 불세존께서 본래 보살이 되시어 고행(苦行)하신 일이니, 소위 "비구여, 마땅히 알라. 나는 과거에 사슴이 되고, 곰이 되고, 노루, 토끼가 되거나, 속산왕(粟散王; 小王), 전륜성왕, 용, 금시조(金翅鳥)가 되었었는데, 이러한 모든 것들이 보살도를 행할 때 받는 몸이니라."와 같은 이러한 것을 사타가라 하느니라. |
*闍陀伽(jātaka); 석가모니불께서 前生에 修行하신 여러가지 大悲行을 수록한 경전. | |
「何等名為毘佛略經? 所謂大乘方等經典,其義廣大猶如虛空, 是名毘佛略。 |
「어떤 것을 비불략(毘佛略)경이라 하는가? 대승 방등경전은 그 뜻이 광대기 허공과 같다고 하는 바 이것을 비불략(毘佛略; 方廣)이라 하느니라. |
*毘佛略(vaipulya); 方廣. 광대하고 심오한 教義를 담은 대승방등경전. | |
「何等名為未曾有經? 如彼菩薩,初出生時, 無人扶持,即行七步, 放大光明,遍觀十方。 亦如獼猴手捧蜜器,以獻如來。 如白項狗,佛邊聽法。 如魔波旬變為青牛,行瓦鉢間, 令諸瓦鉢互相橖觸,無所傷損。 如佛初生,入天廟時, 令彼天像,起下禮敬。 如是等經,名未曾有經。 |
「어떤 것을 미증유(未曾有)경이라 하는가? 마치 저 보살은 태어나자마자 부축하는 사람 없이 일곱 걸음을 걷고, 대광명을 놓아 시방세계를 두루 관찰하였다거나, 또 원숭이가 손에 꿀단지를 받쳐들어서 여래께 드렸다거나, 목덜미가 하얀 개가 부처님 곁에서 법문을 들었다거나, 마왕 파순이 푸른 소로 변해 옹기그릇 사이로 다니면서 옹기그릇을 기둥에 부딪치게 해도 깨지지 않았다거나, 부처님이 처음 나시어 천묘(天廟)에 들어가셨을 때 그 안의 천상(天像)들이 일어나 예경하였다는 것과 같은 이러한 경을 미증유경이라 하느니라. |
*未曾有經; 希法. 아부타달마(阿浮陀達摩,adbhuta-dharma). 諸佛과 諸菩薩 및 弟子들 주변의 希有한 일에 대한 말씀. | |
「何等名為優波提舍經? 如佛世尊所說諸經, 若作議論,分別廣說, 辯其相貌,是名優波提舍經。 菩薩若能如是了知十二部經, 名為知法。 |
「어떤 것을 우파제사(優波提舍)경이라 하는가? 불세존께서 설하신 경전들을 논의(論議)하거나 분별하고 자세히 설명하거나 그 상모(相貌)를 변별(辨別)한 것이 우파제사경이니라.. 보살이 이와 같은 십이부경을 능히 요지하면 법을 안다[知法]고 하느니라. |
*優波提舍(upadeśa); 論議. | |
「◎云何菩薩摩訶薩知義? 菩薩摩訶薩若於一切文字、語言, 廣知其義,是名知義。 |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이 뜻을 아는 것[知義]인가? 보살마하살이 일체의 문자와 언어에서 그 뜻을 널리 안다면 이것을 지의(知義)라 하느니라. |
云何菩薩摩訶薩知時? 善男子!菩薩善知,如是時中任修寂靜, 如是時中任修精進, 如是時中任修捨定, 如是時中任供養佛, 如是時中任供養師, 如是時中任修布施、持戒、忍辱、 精進、禪定,具足般若波羅蜜, 是名知時。 |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이 때를 아는 것[知時]인가? 선남자야! 보살이 이러한 때는 적정(寂靜)을 닦을만 하고, 이러한 때는 정진(精進)을 닦을만 하고, 이러한 때는 사정(捨定;禪定)을 닦을만 하고, 어느 때 부처님께 공양올릴만 하며, 어느 때 스승께 공양할만 하며, 어떤 때에 보시, 지계, 인욕과 정진, 선정을 닦아 반야바라밀을 구족할만 한지를 잘 알면, 이것을 때를 안다고 하느니라. |
云何菩薩摩訶薩知足? 善男子!菩薩摩訶薩知足, 所謂食飲衣藥、行住坐臥、 睡寤語默, 是名知足。 |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이 만족을 아는 것인가?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소위 밥 먹고, 옷 입고, 약 먹고, 행주좌와(行住坐臥)하고, 자고 깨고, 말하고 침묵하는 일로 족한 줄 아는 이것을 지족(知足)이라 하느니라. |
善男子!云何菩薩摩訶薩自知? 是菩薩自知,我有如是信、 如是戒、如是多聞、如是捨、 如是慧、如是去來、如是正念、 如是善行,如是問、如是答, 是名自知。 |
선남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이 스스로를 아는 것인가? 이 보살이 스스로 나에게는 이러한 믿음[信]과, 이러한 계(戒), 이러한 다문(多聞), 이러한 버림[捨], 이러한 지혜[慧], 이러한 거래(去來*), 이러한 정념(正念), 이러한 선행(善行), 이러한 질문, 이러한 답이 있음을 알면 이것을 스스로를 안다[自知]고 하느니라. |
云何菩薩摩訶薩知眾? 善男子!是菩薩知如是等, 是剎利眾、婆羅門眾、居士眾、沙門眾, 應於是眾如是行來、如是坐起、 如是說法、如是問答, 是名知眾。 |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이 대중을 아는 것인가? 선남자야! 이 보살이 어떤 사람들이 찰리 대중이고, 바라문 대중이고, 거사 대중이고, 사문 대중인지를 알고, 이 대중에게는 어떻게 오가고, 어떻게 앉고 일어나며, 어떻게 설법하고, 어떻게 문답해야 할지를 알면 이것을 대중을 안다[知眾]고 하느니라. |
善男子!云何菩薩摩訶薩 知人中尊卑? 善男子!人有二種: 一者信,二者不信。 菩薩當知信者是善, 其不信者不名為善。 復次信有二種: 一者常往僧坊, 二者不往菩薩。 當知其往者善, 其不往者不名為善。 |
선남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이 사람의 존귀하고 비천함을 아는 것인가? 선남자야! 사람은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믿음[信], 둘째는 믿지 않음[不信]이다. 보살은 믿는 것이 선(善)이요, 믿지 않는 것은 선이 아님을 알아야 하느니라. 또 믿음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늘 승방(僧坊)에 가는 것, 둘째는 보살에게 가지 않는 것이다. 가는 것이 선(善)이요, 가지 않으면 선이 아님을 알아야 하느니라. |
往僧坊者復有二種: 一者禮拜,二不禮拜。 菩薩當知禮拜者善, 不禮拜者不名為善。 其禮拜者復有二種: 一者聽法,二者不聽法。 菩薩當知聽法者善, 不聽法者不名為善。 其聽法者復有二種: 一至心聽,二不至心。 菩薩當知至心聽者是則名善, 不至心者不名為善。 |
승방(僧坊)에 머문다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예배(禮拜)하는 것, 둘째는 예배하지 않는 것이다. 보살은 예배하는 것이 선(善)이요, 예배하지 않는 것은 선이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 예배한다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을 듣는 것, 둘째는 법을 듣지 않는 것이다. 보살은 법을 듣는 것이 선이요, 법을 듣지 않는 것은 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 법을 듣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지극한 마음으로 듣는 것, 둘은 지극한 마음이 아닌 것이다. 보살은 지극한 마음으로 듣는 것이 선이요, 지극한 마음 아닌 것은 선이 아님을 알아야 하느니라. |
至心聽法復有二種: 一者思義,二不思義。 菩薩當知思義者善, 不思義者不名為善。 其思義者復有二種: 一如說行,二不如說行。 如說行者是則為善, 不如說行不名為善。 如說行者復有二種: 一求聲聞, 不能利安饒益一切苦惱眾生; 二者迴向無上大乘, 利益多人令得安樂。 |
지심(至心)으로 청법하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뜻을 헤아리는 것[思義],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보살은 사의(思義)하는 것이 선이요, 사의하지 않는 것은 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 사의한다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설하신대로 행함이요, 둘은 여설(如說)히 행하지 않음이다. 여설히 행함이 선이요, 여설히 행하지 못함은 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여설히 행함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성문을 구하기에 고뇌(苦惱)하는 일체중생을 이안요익(利安饒益)하지 못함이요, 둘째는 위없는 대승에 회향(迴向)하여 많은 사람을 이익하여 안락을 얻게 함이다. |
菩薩應知能利多人得安樂者, 最上最善。 善男子!如諸寶中, 如意寶珠最為勝妙, 如諸味中甘露最上, 如是菩薩於人天中最勝最上, 不可譬喻。善男子! 是名菩薩摩訶薩住於大乘大涅槃經, 住七善法。 菩薩住是七善法已,得具梵行。 |
보살은 많은 사람을 이익하여 안락을 얻게 함이 최상 최선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마치 모든 보배 가운데 여의보주(如意寶珠)가 가장 승묘(勝妙)하고, 모든 맛 중에는 감로가 최상이듯이, 그렇듯 보살은 인천(人天) 중에 최승최상(最勝最上)이라 비유할 수 없느니라. 선남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대승대열반경에 의지하고, 일곱 가지 선법[七善法]에 의지한다 하거니와, 보살이 이 칠선법에 의지 하고난 뒤에야 범행이 구족해지느니라. |
「復次善男子!復有梵行, 謂慈、悲、喜、捨。」 |
「또 선남자야! 또 다른 범행이 있으니, 소위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이니라.」 |
迦葉菩薩白佛言:「世尊! 若多修慈,能斷瞋恚, 修悲心者亦斷瞋恚, 云何而言四無量心? 推義而言,則應有三。 世尊!慈有三緣: 一緣眾生,二緣於法,三則無緣。 悲、喜、捨心亦復如是。 若從是義,唯應有三,不應有四。 |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자(慈)를 많이 닦으면 진에(瞋恚)를 끊을 수 있고, 비심(悲心)을 닦아도 진에를 끊을 수 있는데, 어째서 네 가지 무량한 마음[無量心]이라 하시나이까? 뜻을 헤아려 말씀드리자면 셋이라야 할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자(慈)에는 세 가지 연(緣)이 있어서 하나는 중생연(眾生緣), 둘은 법연(法緣), 셋은 무연(無緣)이듯이, 비(悲), 희(喜), 사(捨)의 마음도 그러하니, 이런 이치에서 세 가지만 있고, 넷이어서는 않될 것이옵니다. |
眾生緣者,緣於五陰 願與其樂,是名眾生緣。 法緣者,緣諸眾生 所須之物而施與之,是名法緣。 無緣者,緣於如來,是名無緣。 |
중생연(眾生緣)이란 오음(五陰)을 연(緣)하여 낙(樂)을 바라는 것이면 이것을 중생연이라 하옵고, 법연(法緣)은 모든 중생을 연하여 필요한 물건을 베풀어주는 것이면, 이것을 법연이라 하오며, 무연(無緣)은 여래를 연한 것이면 이것이 무연일 것이옵니다. |
慈者多緣貧窮眾生, 如來大師永離貧窮受第一樂, 若緣眾生,則不緣佛,法亦如是。 以是義故,緣如來者,名曰無緣。 |
자(慈)란 대개가 빈궁한 중생을 연한 것이기에 여래나 대보살은 길이 빈궁을 여의고 제일가는 낙을 얻거니와, 만일 중생을 연한 것이면 불연(佛緣)이 아니요, 법연도 아니니, 이런 의미에서 여래를 연한 것이라야 무연이라 하겠나이다. |
世尊!慈之所緣一切眾生, 如緣父母、妻子親屬, 以是義故,名曰眾生緣。 法緣者,不見父母、妻子親屬, 見一切法皆從緣生,是名法緣。 無緣者,不住法相及眾生相, 是名無緣。 悲、喜、捨心亦復如是, 是故應三,不應有四。 |
세존이시여! 자(慈)의 소연(所緣)은 일체중생을 부모나 처자 권속처럼 연(緣)하는 것이니, 이런 의미에서 중생연(眾生緣)이라 하옵고, 법연(法緣)은 부모나 처자 권속처럼 보지 않고 일체법이 다 연(緣)에서 생긴다고 보는 이것이 법연이오며, 무연(無緣)이란 법상(法相)과 중생상(眾生相)에 머물지 않는 이것을 연함이 없다[無緣]고 하듯이, 비(悲), 희(喜), 사(捨)의 마음도 그와 같기에 그러므로 셋이어야 하고, 넷이어서는 안 될 것이옵니다. |
世尊!人有二種: 一者見行,二者愛行。 見行之人多修慈悲, 愛行之人多修喜捨。 是故應二,不應有四。 世尊!夫無量者,名曰無邊, 邊不可得,故名無量。 若無量者,則應是一,不應言四。 若言四者,何得無量? 是故應一,不應四也。」 |
세존이시여! 사람은 두 가지[二行*]가 있어서 첫째는 견행(見行*), 둘째는 애행(愛行*)이옵니다. 견행하는 사람은 대개 자비(慈悲)를 닦고, 애행하는 사람은 흔히 희사(喜捨)를 닦으니, 따라서 둘이지 넷이어서는 안 될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대저 무량(無量)이란 무변(無邊)이라 하여 변(邊)을 얻을 수 없으니 무량이라 하옵는데, 만일 무량인 즉 하나라야 하고 넷을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만약 넷을 말한다면 어찌 무량이 되겠나이까? 그러므로 하나라야지 넷일 수는 없겠나이다.」 |
*[二行] ①見行; 我見, 邪見과 같은 迷理의 惑, 즉 見, 修 二惑 중 見惑을 닦는 일. ②愛行; 貪欲, 瞋恚와 같은 迷事의 惑 가운데 愛惑을 중시한 표현이나, 기실은 일체의 修惑을 닦는 일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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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告迦葉:「善男子! 諸佛如來為諸眾生所宣法要, 其言祕密,難可了知。 或為眾生說一因緣。 如說何等為一因緣? 所謂一切有為之法。 善男子!或說二種:因之與果。 或說三種:煩惱、業,苦。 或說四種,無明、諸行、生與老死。 或說五種,所謂受、愛、取、有及生。 或說六種,三世因果。 或說七種,謂識、名、色、六入、 觸、受及以愛取。 或說八種,除無明、行及生老死, 其餘八事; 或說九種,如城經中, 除無明、行、識,其餘九事。 或說十一,如為薩遮尼犍子說, 除生一法,其餘十一。 或時具說十二因緣, 如王舍城,為迦葉等, 具說十二無明乃至生老病死。 |
부처님이 가섭에게 고하셨다. 「선남자야! 제불여래는 중생들을 위해 법요(法要)를 펼치시는 바 그 말씀은 비밀하여 요지하기 어렵느니라. 어느 때는 중생을 위해 인연(因緣) 한 가지를 설하는데, 어떤 것들을 설하는 것이 하나의 인연이 되는가? 소위 일체 유위의 법[有為法]이니라. 선남자야! 어느 때는 두 가지를 설하니, 인(因)과 과(果)요, 혹시에는 세 가지를 설하니, 번뇌, 업(業), 고(苦)요[惑業苦 三輪], 혹 무명(無明), 제행(諸行), 생(生), 노사(老死)의 넷을 설하거나, 혹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의 다섯을 설하며, 혹 여섯 가지를 설하니, 삼세의 인(因)과 과(果)이며(3x2), 혹 일곱 가지를 설하니, 식(識), 명(名), 색(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취(愛取)이고, 혹 무명과 행, 생, 노사를 제외한 그 밖의 여덟 가지를 설하기도 하고, 혹 아홉 가지를 설하니, 성을 지나던 중에 설했던 무명과 행(行), 식(識)을 제외한 그밖의 아홉가지이며, 혹 열하나를 설하니, 살차니건자(薩遮尼犍子*)에게 설했던 생(生) 한 법을 제외한 그 밖의 열한 가지이며, 어느 때는 십이인연을 구족히 설하니, 마치 왕사성(王舍城)에서 가섭 등에게 무명에서 생노병사까지의 열두 가지를 다 설한 것과 같으니라. |
*四種~十一; 六種을 제외한 모두가 12연기(十二緣起), 즉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名), 색(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취(愛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중의 넷에서 열하나까지를 말한다. *薩遮尼犍子; 살차라는 외도의 아들. 尼犍은 외도, 薩遮는 그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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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男子!如一因緣,為眾生故, 種種分別,無量心法亦復如是。 善男子!以是義故,於諸如來深祕行處, 不應生疑。 |
선남자야! 한 가지 인연을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갖가지로 분별하거니와, 무량한 심법(心法)도 그와 같기에 선남자야! 이런 의미에서 제불여래의 깊고 비밀한 행처(行處)에 의심을 내서는 아니 되느니라. |
善男子!如來世尊,有大方便, 無常說常,常說無常; 說樂為苦,說苦為樂; 不淨說淨,淨說不淨; 我說無我,無我說我; 於非眾生說為眾生, 於實眾生說非眾生; 非物說物,物說非物; 非實說實,實說非實; 非境說境,境說非境; 非生說生,生說非生; 乃至無明說明、明說無明; 色說非色,非色說色; 非道說道,道說非道。 善男子!如來以是無量方便, 為調眾生,豈虛妄耶? |
선남자야! 여래세존께는 큰 방편이 있으신지라 무상(無常)을 상(常)이라 설하고, 상(常)을 무상(無常)이라 설하며, 낙(樂)을 고(苦)라 설하고, 고를 낙이라 설하며, 부정(不淨)을 정(淨), 정(淨)을 부정(不淨)이라 설하고, 아(我)를 무아(無我), 무아(無我)를 아(我)라 설하며, 중생 아닌 것을 중생이라 설하고, 실로 중생인 것을 중생 아니라 설하며, 사물 아닌 것을 사물로, 사물을 사물 아닌 것으로 설하고, 진실 아닌 것을 진실로, 진실을 진실 아닌 것으로 설하며, 경계 아닌 것을 경계로, 경계를 경계 아닌 것으로, 생(生) 아닌 것을 생으로, 생을 생 아닌 것으로 설하고, 나아가 무명(無明)을 명(明)으로, 명을 무명으로 설하며, 색(色)을 색 아닌 것으로, 색 아닌 것을 색으로, 도(道) 아닌 것을 도로, 도를 도 아닌 것으로 설하느니라. 선남자야! 여래는 이 무량한 방편으로 중생을 조복코자 하는데 어찌 허망한 일이겠느냐? |
善男子!或有眾生貪於財貨, 我於其人自化其身作轉輪王, 於無量歲,隨其所須種種供給, 然後教化,令其安住阿耨多羅三藐三菩提。 若有眾生貪著五欲, 於無量歲,以妙五欲充足其願, 然後勸化,令其安住阿耨多羅三藐三菩提。 若有眾生榮豪自貴, 我於其人無量歲中為作僕使, 趍走給侍,得其心已,即復勸化 令其安住阿耨多羅三藐三菩提。 若有眾生性悷自是, 須人呵諫, 我於無量百千歲中,教訶敦喻, 令其心調,然後復勸, 令其安住阿耨多羅三藐三菩提。 |
선남자야! 혹 어떤 중생이 재보를 탐하거든 나는 그 사람을 스스로가 전륜왕이 되게 하여 무량한 세월 동안 필요한 여러가지를 따라 공급하고, 그런 뒤에 교화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안주케 하느니라. 만일 어떤 중생이 오욕(五欲)에 탐착(貪著)하거든 무량한 세월 동안 오묘한 오욕으로 그 소원을 채워주고 그런 뒤에 교화하고 권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안주케 하느니라. 만일 어떤 중생이 영예로운 우두머리로서 귀해지고자 하거든 나는 무량한 세월 동안 그의 종이 되어 따라다니며 시중들며서 그의 마음을 얻고서 곧 권하고 교화하여 그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안주케 하느니라. 만일 어떤 중생의 성품이 안쓰럽게도 자기의 생각만 옳다고 하여 남의 질타와 충고가 필요하거든 나는 무량 백천 년을 가르치고 꾸짖고 북돋아 깨우치게 하여 그의 마음을 조복시키고 그런 뒤에 다시 권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안주케 하느니라. |
善男子!如來如是, 於無量歲,以種種方便, 令諸眾生安住阿耨多羅三藐三菩提, 豈虛妄耶? 諸佛如來,雖處眾惡, 無所染污,猶如蓮花。 |
선남자야! 여래는 그와 같이 무량한 세월 동안 갖가지 방편으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안주케 하거늘, 어찌 허망한 일이겠느냐? 제불여래는 온갖 악한 일을 당해도 마치 연꽃처럼 물들지 않으시느니라. |
善男子!應如是知四無量義。 「善男子!是無量心,體性有四, 若有修行,生大梵處。 善男子!如是無量, 伴侶有四,是故名四。 夫修慈者能斷貪欲, 修悲心者能斷瞋恚, 修喜心者能斷不樂, 修捨心者能斷貪欲瞋恚眾生。 善男子!以是義故,得名為四, 非一、二、三。 |
선남자야! 이와 같이 사무량(四無量)의 의미를 알아야 하나니, 「선남자야! 이 무량심의 네 가지 체성(體性)을 닦아 행한다면 대범천에 날 것이니라. 선남자야! 이러한 무량심은 짝이 넷이라 사(四)라 하는 것이니, 대체로 자(慈)를 닦으면 탐욕을 끊을 수 있고, 비심(悲心)을 닦으면 진에를 끊을 수 있고, 희심(喜心)을 닦으면 즐겁지 못한 일을 끊을 수 있으며, 사심(捨心)을 닦으면 탐욕과 진에와 중생을 끊을 수 있는 것이라 선남자야! 이런 의미에서 넷이 되는 것이니, 하나나, 둘, 셋이 아니니라. |
善男子!如汝所言,慈能斷瞋, 悲亦如是,應說三者, 汝今不應作如是難。何以故? 善男子,恚有二種: 一能奪命,二能鞭撻。 修慈則能斷彼奪命, 修悲能除彼鞭撻者。 善男子!以是義故,豈非四耶? |
선남자야! 네 말 대로 자(慈)는 진(瞋)을 끊을 수 있고, 비(悲) 또한 그러하니, 셋이라 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너는 그렇게 논란(論難)해서는 안 되느니라. 왜냐하면, 선남자야, 에(恚)에는 두 가지가 있어서 하나는 능히 목숨을 빼앗는 것이요, 둘은 채찍질하는 것인데, 자(慈)를 닦은 즉 그 목숨 빼앗는 일이 끊기고, 비(悲)를 닦으면 그 채찍질할 일이 없어지리니, 선남자야! 이런 의미로 보아 어찌 넷이 아니겠느냐? |
*瞋恚; 瞋과 恚를 구분하여 설명하셨는데 瞋은 단순히 노여워서 성내는 일, 恚는 원한 따위로 분노하는 일을 말한다. | |
復次瞋有二種: 一瞋眾生,二瞋非眾生。 修慈心者斷瞋眾生, 修悲心者斷非眾生。 復次瞋有二種: 一有因緣,二無因緣。 修慈心者斷有因緣, 修悲心者斷無因緣。 復次瞋有二種: 一者久於過去修習, 二者於今現在修習。 修慈心者能斷過去, 修悲心者斷於現在。 復次瞋有二種: 一瞋聖人,二瞋凡夫。 修慈心者斷瞋聖人, 修悲心者斷瞋凡夫。 復次瞋有二種: 一上、二中。 修慈斷上,修悲斷中。 |
또 진(瞋)에도 두 가지가 있어서 하나는 중생에게 성내는 것, 둘은 중생아닌 데에 성내는 것인데, 자심(慈心)을 닦으면 중생에게 성냄을 끊을 수 있고, 비심(悲心)을 닦으면 중생 아닌 데에도 끊을 수 있느니라. 또 진(瞋)에 두 가지가 있어서 하나는 인연이 있는 것이요, 둘은 인연이 없는 것인데, 자심(慈心)을 닦으면 있는 인연을 끊을 수 있고, 비심(悲心)을 닦으면 없는 인연을 끊을 수 있느니라. 또 진(瞋)에 두 가지가 있어서 첫째는 과거부터 오래 닦아 익혀온 것, 둘째는 지금 현재 닦아 익히는 것인데, 자심(慈心)을 닦으면 과거를 끊을 수 있고, 비심(悲心)을 닦으면 현재를 끊을 수 있느니라. 또 진(瞋)에 두 가지가 있어서 성인에게 성내는 것, 둘은 범부에게 성내는 것인데, 자심(慈心)을 닦으면 성인에게 성내는 것을 끊을 수 있고, 비심(悲心)을 닦으면 범부에게 성내는 것을 끊을 수 있느니라. 또 진(瞋)에 두 가지가 있어서 하나는 상(上)급, 다른 하나는 중(中)급인데, 자(慈)를 닦아 상급을 끊고, 비(悲)를 닦아 중급을 끊느니라. |
善男子!以是義故,則名為四, 何得難言應三非四? 是故迦葉!是無量心, 伴侶相對,分別為四。 復以器故,應名為四。 器若有慈, 則不得有悲、喜、捨心。 以是義故,應四無減。 善男子!以行分別,故應有四, 若行慈時,無悲、喜、捨, 是故有四。 |
선남자야! 이런 뜻에서 넷이라 하였건만 어찌 넷이 아니라 셋이라고 알지 못할 말을 하느냐? 그러므로 가섭아! 이 무량심은 짝을 상대로 분별하자면 넷이 되고, 또 그릇 때문에라도 넷이 되어야 한다. 그릇에 자(慈)가 있을 때는 곧 비(悲), 희(喜), 사(捨)의 마음을 담지 못할 것이라 이런 이치로 보아 덜함이 없는 넷이어야 하며, 선남자야! 행(行)으로 분별하더라도 넷이어야 하나니, 자(慈)를 행할 때는 비(悲), 희(喜), 사(捨)가 없어야 할 것이라 그런 때문에 넷이 있는 것이니라. |
「善男子!以無量故,亦得名四。 夫無量者則有四種, 有無量心,有緣、非自在; 有無量心,自在、非緣; 有無量心,亦緣、亦自在; 有無量心,非緣、非自在。 |
「선남자야! 무량하다는 것으로써 또한 넷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대저 무량에는 네 가지가 있어서 어떤 무량심은 소연(所緣)은 있되 자재하지 못하고, 어떤 무량심은 자재하되, 연(緣)이 아니고, 어떤 무량심은 소연도 있고, 또 자재하며, 어떤 무량심은 소연도 없고, 자재하지도 못하느니라. |
何等無量,有緣、非自在? 緣於無量無邊眾生,而不能得自在三昧, 雖得不定,或得或失。 何等無量,自在、非緣? 如緣父母、兄弟姊妹, 欲令安樂,非無量緣。 何等無量,亦緣、亦自在? 謂諸佛菩薩。 何等無量,非緣、非自在? 聲聞緣覺,不能廣緣無量眾生, 亦非自在。 |
어떤 무량심이 소연(所緣)은 있되 자재하지 못한 것인가? 무량무변한 중생을 연(緣)하였지만 자재한 삼매를 얻지 못하거나, 비록 얻었으되 일정치 못하여 얻은 듯 못얻은 듯함을 말한다. 어떤 무량이 자재하되 연(緣)이 아닌 것인가? 부모나 형제 자매를 연하여 안락하게 하려 한다면 무량의 연(緣)이 아닌 것이다. 어떤 무량이 연(緣)도 자재함도 있는 것인가? 모든 불보살의 무량을 이르는 것이다. 어떤 무량이 연(緣)도 자재함도 아닌 것인가? 성문 연각은 무량중생을 널리 연하지도 못하고, 자재한 것도 아니니, |
善男子!以是義故,名四無量, 非諸聲聞緣覺所知, 乃是諸佛如來境界。 善男子!如是四事, 聲聞緣覺雖名無量,少不足言。 諸佛菩薩,則得名為無量無邊。」 |
선남자야! 이런 뜻으로 사무량(四無量)이라 하거니와 성문 연각들이 아는 바가 아니라 결국 이것은 제불여래의 경계인 것이며, 선남자야! 이와 같은 네 가지 일은 성문 연각들이 무량하다고 하지만 말하기에도 부족한 것이요, 제불보살이 곧 무량무변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니라.」 |
迦葉菩薩白佛言: 「世尊!如是,如是, 實如聖教,諸佛如來所有境界, 非諸聲聞緣覺所及。 世尊!頗有菩薩住於大乘大般涅槃, 得慈悲心,非是大慈大悲心不?」 |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그렇고 그러하옵니다. 실로 거룩하신 가르침과 같이 제불여래의 경계는 성문 연각들이 미칠 바가 아니겠나이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보살이 대승대반열반에 의지하여 자비심을 얻어도 대자대비심이 아니옵니까?」 |
佛言有:「善男子! 菩薩若於諸眾生中,三品分別: 一者親人,二者怨憎, 三者中人。 於親人中,復作三品,謂上,中,下; 怨憎亦爾。 是菩薩摩訶薩於上親中與增上樂, 於中下親亦復平等與增上樂, 於上怨中與少分樂, 於中怨所與中品樂, 於下怨中與增上樂。 菩薩如是轉復修習, 於上怨中與中品樂, 於中下怨等與增上樂。 轉復修習, 於上中下等與上樂, 若上怨中與上樂者, 爾時得名慈心成就。 菩薩爾時於父母所及上怨中, 得平等心,無有差別。 善男子!是名得慈,非大慈也。」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보살이 만약 모든 중생을 세 품[三品]으로 첫째 친한 사람, 둘째 증오하는 사람, 셋째 그 중간의 사람으로 나누고, 친한 사람을 다시 상, 중, 하의 삼품으로 나누며, 증오하는 사람도 그렇게 구분해 두고서, 이 보살마하살이 상품 친한 이에게는 증상락을 주고, 중,하품 친한 이에게도 똑같이 증상락을 주며, 상품 원수에게는 적은 낙을 주고, 중품 원수에게는 중품 낙을 주고, 하품 원수에게는 보다 좋은 낙을 주더니, 보살이 이렇게 또 닦아 익혀가서 상품 원수에게 중품 낙을 주고, 중하품 원수에게는 다같이 증상락을 주게 되고, 또 점차 수습(修習)을 더하여 상중하를 똑같이 상락(上樂)을 주다가, 만약 상품 원수에게도 상락(上樂)을 준다면 그때 자심(慈心)을 성취했다 하려니와, 보살은 그때 부모에서 상품 원수까지 사이에 차별없는 평등심(平等心)은 얻었으니, 선남자야! 이는 자(慈)는 얻었을지언정 대자(大慈)는 아니니라.」 |
「世尊!何緣菩薩得如是慈, 猶故不得名為大慈?」 |
「세존이시여! 어째서 보살이 그와 같은 자(慈)를 얻었으나 그래도 대자(大慈)라 하지는 못한다고 하시옵니까?」 |
「善男子!以難成故,不名大慈。 何以故?久於過去無量劫中, 多集煩惱,未修善法, 是故不能於一日中,調伏其心。 善男子!譬如剜豆, 乾時錐刺,終不可著。 煩惱堅硬,亦復如是,雖一日夜, 繫心不散,難可調伏。 又如家犬,不畏於人, 山林野鹿,見人怖走。 瞋恚難去,如守家狗; 慈心易失,如彼野鹿。 是故此心難可調伏, 以是義故,不名大慈。 |
「선남자야! 이루기 어렵다 해서 대자(大慈)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 무량 겁 동안 오래토록 많은 번뇌를 모으고 선법(善法)은 닦지 않았으니, 그래서 하루만에 마음이 조복되는 것이 아니니라. 선남자야! 마치 콩이 말랐을 때는 바늘로 찔러도 결코 들어가지 않듯이, 번뇌가 단단하기도 그와 같아서 비록 하루 밤낮을 마음 쏟더라도 흩어지지 않으니 조복키 어렵다. 또 집안의 개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산 속의 들사슴은 사람을 보면 무서워 도망가버리니, 진에(瞋恚) 떠나보내기는 집안 개 지키기처럼 어렵고, 자심(慈心) 쉽게 잃기는 저 들사슴과 같기에 그래서 이 마음이 조복키 어려운 것이라 이런 뜻으로 대자(大慈)라 하지 않는 것이니라. |
復次善男子!譬如畫石,其文常在。 畫水速滅,勢不久住。 瞋如畫石, 諸善根本如彼畫水, 是故此心難得調伏。 如大火聚,其明久住; 電光之明不得暫停。 瞋如火聚,慈如電明, 是故此心難得調伏, 以是義故,不名大慈。 |
또 선남자야! 마치 돌에 그린 그림은 무늬가 언제까지나 있으나 물에 그린 그림은 빨리 소멸하여 오래 머물지 못하거니와, 진(瞋)은 돌에 그린 그림 같고, 모든 선근(善根)은 본래 물에 그린 그림 같기에 그래서 마음이 조복키 어렵다는 것이요, 또 큰 불덩이는 그 밝음이 오래 머물지만 번갯불의 밝음은 잠깐 머물 수 밖에 없거니와, 진(瞋)은 큰 불덩이 같고, 자(慈)는 번갯불과 같기에 그래서 마음이 조복키 어렵다는 것이며, 이런 뜻으로 대자(大慈)라 하지 않느니라. |
「善男子!菩薩摩訶薩住於初地, 名曰大慈。何以故? 善男子!最極惡者名一闡提, 初住菩薩修大慈時, 於一闡提心無差別, 不見其過故不生瞋, 以是義故得名大慈。 |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초지(初地)에 머물면 대자(大慈)라 하는데, 어째서인가? 선남자야! 지극히 악한 자를 일천제 초주(初住)보살이 대자(大慈)를 닦을 때 일천제를 차별히 대하는 마음이 없고, 그의 허물을 보지 않기 때문에 진(瞋)을 내지 아니 하니, 이런 뜻에서 대자(大慈)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니라. |
善男子!為諸眾生除無利益, 是名大慈; 欲與眾生無量利樂, 是名大悲; 於諸眾生心生歡喜, 是名大喜; 無所擁護,名為大捨; 若不見我、法相、己身, 見一切法平等無二, 是名大捨; 自捨己樂,施與他人, 是名大捨。 善男子!唯四無量, 能令菩薩增長具足六波羅蜜, 其餘諸行不必能爾。 善男子!菩薩摩訶薩先得世間四無量心, 然後乃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次第方得出世間者。 善男子!因世無量,得出世無量, 以是義故,名大無量。」 |
선남자야! 모든 중생을 위해 무이익(無利益*)한 것을 제거하는 이것을 대자(大慈)라 하고, 중생에게 무량한 이익과 낙을 주고자 하면 이것을 대비(大悲)라 하고, 모든 중생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면 이것을 대희(大喜)라 하며, 옹호(擁護)하는 바가 없는 것을 대사(大捨)라 하고, 만약 나[我]와 법상(法相)과 자기 몸을 보지 않고, 일체법이 평등하여 둘이 없음을 보면 이것을 대사(大捨)라 하며, 스스로 버려서 자기의 낙을 남에게 베풀면 이것을 대사(大捨)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오직 사무량(四無量)만이 보살로 하여금 육바라밀을 증장시켜 구족케 하고, 그 밖의 모든 행은 필시 그렇지 못하느니라.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먼저 세간의 사무량심을 얻은 연후에라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게 되고, 차례로 마침내 출세간이라는 것을 얻거니와, 선남자야! 세간의 무량으로 인해 출세간의 무량을 얻는 것이라 이런 뜻에서 대(大)무량이라 하는 것이니라.」 |
*無利益; 부처님은 '고(苦)'의 의미로 말씀하셨으나, 가섭은 표현 그대로 '이익 없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무이익을 제한다 함은 '발고(拔苦)'를 말한다. 발고(拔苦)가 대자(大慈), 여락(與樂)이 대비(大悲)라고 분명히 밝히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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迦葉菩薩白佛言: 「世尊!除無利益, 與利樂者實無所為。 如是思惟,即是虛觀,無有實利。 世尊!譬如比丘,觀不淨時, 見所著衣,悉是皮相,而實非皮。 所可食噉,皆作虫相,而實非虫。 觀大豆羹,作下汁想,而實非糞。 觀所食酪,猶如髓腦,而實非腦。 觀骨碎末,猶如麨相,而實非麨。 四無量心亦復如是, 不能真實利益眾生,令其得樂。 雖口發言與眾生樂,而實不得, 如是之觀非虛妄耶? |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이익한 것을 제거하고 이락(利樂)을 준다면 실로 할 것이 없으리니, 이러한 사유는 허망한 관념이요, 실다운 이익이 없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마치 비구가 부정한 것을 볼 때, 입은 옷은 다 가죽의 모양으로 보지만 실은 가죽이 아니고, 먹는 것은 다 벌레의 모양으로 보지만 실은 벌레가 아니며, 콩국을 보고 똥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똥이 아니고, 먹는 낙(酪) 보기를 골수나 뇌 같이 하지만 실은 뇌가 아니며, 뼈가루를 보고 보릿가루처럼 여기지만 실은 보리가 아니듯이, 사무량심도 그와 같아서 진실로 중생을 이익하여 낙을 얻게 할 수는 없겠나이다. 비록 입으로 말해서 중생에게 낙을 주더라도 실로 얻지 못하면 이러한 관념은 허망한 것이 아니겠나이까? |
世尊!若非虛妄,實與樂者, 而諸眾生何故不以諸佛菩薩威德力故, 一切受樂? 若當真實,不得樂者,如佛所說: 『我念往昔,獨修慈心, 經此劫世七返成壞, 不來此生。世界成時,生梵天中。 世界壞時,生光音天。 若生梵天,力勢自在,無能摧伏, 於千梵中最勝最上,名大梵王。 有諸眾生,皆於我所,生最上想。 三十六返,作忉利天王釋提桓因, 無量百千,作轉輪王,獨修慈心, 乃得如是人天果報。』 若不實者,云何得與此義相應?」 |
세존이시여! 만약 허망한 것이 아니고 실로 낙을 주는 것이라면 중생들은 무엇 때문에 제불보살의 위덕력(威德力)으로 모두가 낙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옵니까? 만일 진실로 낙을 얻지 못한다면 부처님 말씀하신 바, 『내가 옛일을 회상컨대, 자심(慈心)만을 닦으며 이 겁(劫) 세계가 일곱 번 성괴(成壞)를 반복하는 동안 여기 와서 나지 않고, 세계가 이루어질 때는 범천 중에 나고, 세계가 무너질 때는 광음천에 났는데, 범천에 나거든 위세가 자재하여 꺾을 수 없고 일천의 범천 중 가장 높고 뛰어나니 대범왕이라 하여 모든 중생이 다 내가 가장 높다고 여겼으며, 서른여섯 번이나 도리천왕인 석제환인이 되고, 무량 백천 번을 전륜왕이 되었으니, 자심(慈心)만을 닦고서 결국 이러한 인천의 과보를 얻었다.』와 같으려니와, 진실치 못하다면 어떻게 이 뜻에 상응하겠나이까?」 |
佛言:「善哉,善哉! 善男子!汝真勇猛,無所畏懼。」 即為迦葉而說偈言: |
부처님께서 「참으로 장하도다! 선남자야! 너는 참으로 용맹하고 두려움이 없구나.」 하시고, 곧 가섭을 위해 게송을 설하셨다. |
「若於一眾生, 不生瞋恚心, 而願與彼樂, 是名為慈善。 一切眾生中, 若起於悲心, 是名聖種性, 得福報無量。 設使五通仙, 悉滿此大地, 有大自在天, 奉施其所安。 象馬種種物, 所得福報果, 不及修一慈, 十六分中一。 |
「한 중생에게라도 진에심(瞋恚心)을 내지 않고 그에게 낙을 주려 한다면 이것을 자선(慈善)이라 하나니, 일체중생 가운데 비심(悲心)을 일으키면 이는 성인의 종성(種性)이라 무량한 복보(福報)를 얻으려니와, 설사 대지에 충만한 오통선인[五通仙*]과 대자재천왕에게 안락하게 할 상마(象馬)와 같은 온갖 것으로 봉시(奉施)할지라도 얻는 복보의 과(果)는 한 번 자(慈)를 닦는 것에 십육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
*五通仙; 덕이 높은 외도의 대다수가 입산수도하니 선인(仙人)이라 하며, 수도의 과(果)로 오통(五通)을 얻은 선인을 오통선(五通仙)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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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男子!夫修慈者, 實非妄想,諦是真實。 若是聲聞緣覺之慈,是名虛妄。 諸佛菩薩真實不虛。 云何知耶?善男子! 菩薩摩訶薩修行如是大涅槃者, 觀土為金,觀金為土, 地作水相,水作地相, 水作火相,火作水相, 地作風相,風作地相, 隨意成就無有虛妄; 觀實眾生為非眾生, 觀非眾生為實眾生, 悉隨意成,無有虛妄。 善男子!當知菩薩四無量心, 是實思惟,非不真實。 復次善男子!云何名為真實思惟? 謂能斷除諸煩惱故。 善男子!夫修慈者能斷貪欲, 修悲心者能斷瞋恚, 修喜心者能斷不樂, 修捨心者能斷貪恚及眾生相, 以是故名真實思惟。 |
「선남자야! 자(慈)를 닦는다는 것은 실로 망상이 아니라 이치가 진실하느니라. 만약 이것이 성문 연각의 자(慈)라면 허망하다 하려니와 제불보살은 진실하여 허망치 않느니라. 어떻게 아는가?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대열반을 수행하면 흙[土]을 관하여 금(金) 되게 하고, 금을 관하여 흙 되게 하며, 땅으로 물 모양을 짓기도 하고, 물로 땅 모양을 짓기도 하며, 물로 불 모양을, 또 불로 물 모양을 짓기도 하며, 땅으로 바람 모양을, 또 바람으로 땅 모양을 짓기도 하여 허망함이 없이 뜻대로 성취하며, 실제의 중생을 관하여 중생 아니게 하고, 중생 아닌 것을 관하여 실제의 중생이게 하여 모두 뜻대로 이룸이 허망치 않느니라. 선남자야! 마땅히 알라. 보살의 사무량심은 진실한 사유(思惟)요, 진실치 못한 것이 아니니라. 또 선남자야! 어째서 진실한 사유[真實思惟]라 하는가? 모든 번뇌를 끊어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야! 자(慈)를 닦으면 탐욕을 끊을 수 있고, 비심(悲心)을 닦으면 진에(瞋恚)를 끊을 수 있고, 희심(喜心)을 닦으면 즐겁지 못함[不樂]을 끊을 수 있고, 사심(捨心)을 닦으면 탐욕, 진에, 중생상(相)을 끊을 수 있으니, 이런 까닭에 진실한 사유라 하느니라. |
「復次善男子!菩薩摩訶薩四無量心, 能為一切諸善根本。 善男子!菩薩摩訶薩 若不得見貧窮眾生,無緣生慈。 若不生慈, 則不能起惠施之心, 以施因緣,令諸眾生得安隱樂, 所謂食飲、車乘衣服、 花香床臥、舍宅燈明, 如是施時, 心無繫縛,不生貪著, 必定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 |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의 사무량심은 모든 선근의 근본이 되느니라.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빈궁한 중생을 보지 못하면 자(慈)를 낼 연(緣)이 없고, 자(慈)를 내지 못한 즉 은혜를 베푸는[惠施] 마음을 일으킬 수 없겠으나, 혜시를 하는 인연으로 모든 중생을 안은한 낙을 얻게 하나니, 소위 음식과 수레, 의복, 꽃향, 침상, 와구, 집, 등불 같은 것인데, 이러한 것을 베풀 때 마음이 얽매인 데가 없고 탐착하지도 않거니와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느니라. |
其心爾時,無所依止,妄想永斷, 不為怖畏、名稱利養, 不求人天所受快樂, 不生憍慢,不望返報, 不為誑他。 故行布施不求富貴, 凡行施時不見受者、 持戒、破戒、是田、非田, 此是知識、此非知識, 施時不見是器、非器, 不擇日時、是處、非處, 亦復不計飢饉、豐樂, 不見因果、此是眾生、此非眾生, 是福、非福, 雖復不見施者、受者、及以財物, 乃至不見斷及果報, 而常行施無有斷絕。 |
그때의 마음은 의지한 바가 없고 망상이 길이 끊겨서 두려움[怖畏]과 명예[名稱], 이양(利養)을 위하지 않고, 인천(人天)에서 누리는 쾌락을 구하지 않고, 교만을 내지 않고, 돌아 올 보답을 바라지 않고, 남을 속이려 하지도 않느니라. 보시를 행한 연고로 부귀를 구하지 않고, 무릇 보시를 행할 때, 받는 자가 지계(持戒)하는지 파계한지, 복전(福田)인지 아닌지, 선지식인지 선지식이 아닌지를 보지 않고, 또 그릇인지 그릇이 아닌지를 보지 않고, 좋은 날 나쁜 날을 가리지 않고, 또 굶주렸는지 풍요(豐樂)한지도 헤아리지 않고, 인과(因果)나 중생인지 중생이 아닌지, 복인지 복이 아닌지를 보지 않고, 비록 또 베푸는 자[施者], 받는 자[受者], 베푸는 재물도 보지 않고 나아가 (번뇌 따위의)단절이나 과보를 보지 않더라도 늘 끊임없이 보시를 행하느니라. |
善男子!菩薩若見持戒、破戒 乃至果報,終不能施。 若不布施,則不具足檀波羅蜜。 若不具足檀波羅蜜, 則不能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
선남자야! 보살이 만약 지계(持戒)인지 파계인지에서 나아가 과보까지를 본다면 결코 보시를 할 수 없으려니와, 보시하지 않은 즉 단(檀)바라밀을 구족하지 못하고, 단바라밀을 구족하지 못한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지 못할 것이니라. |
「善男子!譬如有人,身被毒箭。 其人眷屬,欲令安隱,為除毒故, 即命良醫而為拔箭。 彼人方言:『且待莫觸, 我今當觀,如是毒箭從何方來? 誰之所射? 為是剎利、婆羅門、毘舍、首陀?』 復更作念:『是何木耶?竹耶?柳耶? 其鏃鐵者,何冶所出?剛耶?柔耶? 其毛羽者,是何鳥翼?烏鵄鷲耶? 所有毒者,為從作生自然而有? 為是人毒?惡蛇毒耶?』 如是癡人,竟未能知,尋便命終。 善男子!菩薩亦爾,若行施時, 分別受者、持戒、破戒、 乃至果報,終不能施。 若不能施,則不具足檀波羅蜜。 若不具足檀波羅蜜, 則不能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
「선남자야!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거든 그 사람의 권속이 독을 제거하여 안은케 하고자 의원을 불러 화살을 뽑아내게 하였는데, 그 사람이 『손 대지 말고 기다리시오. 내가 이 독화살이 어느 쪽에서 왔고, 누가 쏜 것이며, 그가 찰리인지 바라문, 비사, 수타인지 살펴봐야 하겠소.』 하고서, 다시 생각하기를, 『이것이 나무인가, 대나무인가, 버드나무인가? 화살촉은 어디서 만들어졌으며, 강한가 부드러운가? 털깃은 무슨 새의 날개이며, 까마귀인가 부엉이인가 독수리인가? 발려진 독은 자연히 있는 것인가 사람의 독인가 나쁜 뱀의 독인가?』 한다면, 이런 어리석은 사람은 결국 알아내지도 못하고 죽게 되듯이, 선남자야! 보살도 그러하여, 만약 보시를 행할 때 받는 자가 지계(持戒)하는지 파계인지에서 나아가 과보까지를 분별하면 결코 보시할 수 없으려니와, 보시할 수 없다면 곧 단바라밀을 구족하지 못하고, 단바라밀을 구족하지 못하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지 못할 것이니라. |
「善男子!菩薩摩訶薩行布施時, 於諸眾生,慈心平等,猶如子想。 又行施時,於諸眾生,起悲愍心, 譬如父母瞻視病子。 行施之時,其心歡喜, 猶如父母,見子病愈。 既施之後,其心放捨, 猶如父母,見子長大,能自在活。 |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보시를 행할 때 모든 중생에게 자심(慈心)이 평등하여 마치 자식 같이 하고, 또 보시를 행할 때 모든 중생에게 비민심(悲愍心) 일으키기를 마치 부모가 병든 자식 돌보듯 하며, 보시를 행할 때 기뻐하기를 마치 부모가 병이 나은 자식 보듯이 하고, 기왕 보시한 뒤에는 마음을 놓기가 부모가 자식이 성장하여 자재히 살아가는 것을 보듯 하느니라. |
是菩薩摩訶薩,於慈心中, 布施食時,常作是願: 『我今所施,悉與一切眾生共之, 以是因緣,令諸眾生得大智食, 勤進迴向無上大乘。 願諸眾生得善智食, 不求聲聞緣覺之食。 願諸眾生得法喜食, 不求愛食。 願諸眾生悉得般若波羅蜜食, 皆令充滿,攝取無礙增上善根。 願諸眾生悟解空相, 得無礙身,猶如虛空。 願諸眾生常為受者, 憐愍一切,為眾福田。』 善男子!菩薩摩訶薩修慈心時, 凡所施食,應當堅發如是等願。 |
이 보살마하살은 자심(慈心) 가운데서 음식을 보시할 때 항상 원하기를, 『내가 지금 베푼 모든 것이 일체중생에게 다같이 주어져서 그 인연으로 모든 중생이 대지혜의 음식을 얻고 힘써 정진하여 위없는 대승(大乘)에 회향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좋은 지혜의 음식을 얻고 성문 연각의 음식은 구하지 말아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법희(法喜)의 음식을 얻고, 애욕의 음식을 구하지 말아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다 반야바라밀 음식을 얻고 충만케 하여 장애없고 더욱 높은 선근을 섭취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공한 모양[空相]을 깨달아 알고, 허공 같이 장애없는 몸을 얻어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늘 받는 자를 위하고, 모든 것을 연민하는 대중의 복전(福田)이 되어지이다.』 하나니,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자심(慈心)을 닦을 때는 음식을 베풀면서 이러한 원을 굳게 세워야 하느니라. |
「復次善男子!菩薩摩訶薩 於慈心中布施漿時,當作是願: 『我今所施,悉與一切眾生共之, 以是因緣,令諸眾生趣大乘河, 飲八味水, 速涉無上菩提之道。 離於聲聞緣覺枯竭, 渴仰求於無上佛乘。 斷煩惱渴,渴仰法味。 離生死愛,愛樂大乘大般涅槃, 具足法身,得諸三昧, 入於甚深智慧大海。 |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자심(慈心) 안에서 음료를 보시할 때는 이렇게 원해야 하느니라. 『내가 지금 베푸는 모든 것이 일체중생에게 다같이 주어져서 그 인연으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의 강에 나아가 팔미의 물[八味水*]을 마시고 위없는 보리도(菩提道)를 빨리 이루며, 성문 연각의 메마르고 텅빈 곳을 떠나 위없는 불승(佛乘)을 갈망하여 구하며, 번뇌의 갈증을 끊고 법미(法味)를 갈앙(渴仰)하며, 생사 좋아하기를 떠나 대승대반열반을 즐기고 사랑하여 법신(法身)을 구족하고 삼매를 얻어서 심오한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게 하여지이다. |
*八味水; 八功德水. 달고[甘], 시원하고[冷], 연(軟)하고, 가벼워지고[輕], 깨끗하고[清淨], 냄새 없고[無臭], 마셔도 목구멍이 상하지 않고, 마셔도 뱃속이 상하지 않는 8가지 특질을 가진 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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願諸眾生,得甘露味、菩提出世、 離欲寂靜如是諸味。 願諸眾生具足無量百千法味, 具法味已,得見佛性, 見佛性已,能雨法雨, 雨法雨已,佛性遍覆,猶如虛空, 復令其餘無量眾生得一法味, 所謂大乘,非諸聲聞辟支佛味。 願諸眾生得一甜味, 無有六種差別之味。 願諸眾生唯求法味, 無礙佛法所行之味, 不求餘味。』 善男子!菩薩摩訶薩於慈心中布施漿時, 應當堅發如是等願。 |
원컨대 모든 중생이 감로의 맛과 보리(菩提), 세간을 벗어나고, 탐욕을 여읜, 적정(寂靜)한 맛들을 얻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무량 백천의 법미(法味)를 구족하고, 법미를 갖춘 다음에는 불성(佛性)을 보고, 불성을 본 다음에는 법비[法雨]를 내리고, 법비를 내린 다음에는 허공처럼 불성으로 두루 덮이며, 다시 그 밖의 무량중생들로 하여금 하나의 법미, 소위 성문 벽지불의 맛이 아닌 대승의 맛을 얻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한가지로 단맛[甜味]만을 얻고, 여섯 가지로 차별한 맛이 없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오로지 법미와 걸림 없는 불법(佛法)을 행하는 맛만을 구하고, 다른 맛은 구하지 말아지이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자심(慈心) 안에서 음료를 보시할 때는 이와 같은 원을 굳게 세워야 하느니라. |
「復次善男子!菩薩摩訶薩 於慈心中施車乘時,應作是願: 『我今所施,悉與一切眾生共之, 以是因緣,普令眾生成於大乘、 得住大乘、不退於乘、 不動轉乘、金剛座乘, 不求聲聞辟支佛乘, 向於佛乘、無能伏乘、 無羸乏乘、不退沒乘、無上乘、 十力乘、大功德乘、未曾有乘、 希有乘、難得乘、 無邊乘、知一切乘。』 善男子!菩薩摩訶薩於慈心中施車乘時、 常應如是堅發誓願。 |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자심(慈心) 안에서 수레를 보시할 때는 서원하기를, 『내가 지금 베푸는 것이 일체중생에게 다같이 주어져서 그 인연으로 널리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大乘)을 이루게 하여 대승에 머물고, 대승에서 물러나지 않고, 대승에서 흔들림 없어서 금강처럼 굳게 대승에 앉아 성문 벽지불 승을 구하지 아니 하며, 불승(佛乘)을 향하고, 또 꺾을 자가 없는 승(乘), 모자람이 없는 승, 퇴몰(退沒)하지 않는 승, 위없는 승, 십력승(十力乘), 대공덕승(大功德乘), 미증유승(未曾有乘), 희유승(希有乘), 얻기 어려운 승[難得乘], 무변한 승(無邊乘), 일체를 아는 승을 향하여지이다.』 하나니,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자심(慈心) 안에서 수레를 보시할 때는 항상 이와 같은 서원을 굳게 세워야 하느니라. |
「復次善男子!菩薩摩訶薩 於慈心中布施衣時,當作是願: 『我今所施,悉與一切眾生共之, 以是因緣,令諸眾生得慚愧衣, 法界覆身,裂諸見衣, 衣服離身一尺六寸,得金色身, 所受諸觸柔軟無礙, 光色潤澤、皮膚細軟、 常光無量、無色離色, 願諸眾生皆悉普得無色之身, 過一切色,得入無色大般涅槃。』 善男子!菩薩摩訶薩布施衣時, 應當如是堅發誓願。 |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자심(慈心) 안에서 옷을 보시할 때 서원하되, 『내가 지금 베푸는 것이 일체중생에게 다같이 주어져서 그 인연으로 중생들로 하여금 참괴(慚愧)의 옷을 얻고 법계(法界)로 몸을 덮어 모든 소견의 옷을 찢어버리며, 의복을 여의고 1척6촌의 몸이 금빛 몸을 얻어 느끼는 모든 감촉이 유연하고 걸림이 없으며, 광채가 윤택하고, 피부는 곱고 부드러우며, 항상 무량히 빛나되, 색을 여의어 색이 없어지게 하여 원컨대 모든 중생이 두루 무색신(無色身)을 얻고 모든 색을 초과하여 무색(無色)의 대반열반에 들어가게 하여지이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옷을 보시할 때는 응당 이와 같은 서원을 굳게 세워야 하느니라. |
「復次善男子!菩薩摩訶薩於修慈中, 布施花香、塗香、末香、 諸雜香時,應作是願: 『我今所施,悉與一切眾生共之, 以是因緣,令諸眾生一切皆得佛花三昧, 七覺妙鬘繫其首頂。 願諸眾生形如滿月, 所見諸色微妙第一。 願諸眾生皆成一相,百福莊嚴。 願諸眾生隨意得見可意之色。 願諸眾生常遇善友, 得無礙香,離諸臭穢。 願諸眾生具諸善根無上珍寶。 願諸眾生相視和悅,無有憂苦, 眾善各備,不相憂念。 願諸眾生戒香具足。 願諸眾生持無礙戒, 香氣馚馥,充滿十方。 |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자(慈)를 닦는 동안 화향(花香), 도향(塗香), 말향(末香)과 여러가지 섞인 향을 보시할 때는이렇게 서원해야 하느니라. 『내가 지금 베푸는 것이 일체중생에게 다같이 주어져서 그 인연으로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가 불화(佛花)삼매를 얻고, 칠각(七覺;七覺分)의 미묘한 만(鬘)을 머리에 매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의 형상이 마치 보름달 같아서 보이는 모든 색이 미묘하기 제일가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한결같이 백가지 복으로 장엄되어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뜻대로 마음에 드는 색을 보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늘 선지식을 만나서 장애없는 향기를 얻고 더러운 냄새를 여의어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선근이라는 더없는 진보를 갖추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근심 없이 서로 화목하고 기쁘게 여기며, 온갖 선을 저마다 구비하여 서로 걱정하지 않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계향(戒香)을 구족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걸림없는 계(戒)를 지니고 향기를 피워서 시방에 충만하여지이다. |
願諸眾生得堅牢戒、 無悔之戒、一切智戒、離諸破戒, 悉得無戒、未曾有戒、 無師戒、無作戒、 無荒戒、無污染戒、 竟已戒、究竟戒, 得平等戒,於香塗身及以斫刺, 等無憎愛。 願諸眾生得無上戒、 大乘之戒非小乘戒。 |
원컨대 모든 중생이 단단하여 부서지지 않는 계(戒), 참회 없는 계, 일체지의 계, 파괴를 여읜 계를 얻고, 없는 계[無戒], 미증유계(未曾有戒), 스승없는 계[無師戒], 지음없는 계[無作戒], 허황됨이 없는 계[無荒戒], 오염이 없는 계[無污染戒], 끝이 난 계[竟已戒], 끝까지 하는 계[究竟戒]를 얻으며, 평등의 계[平等戒]를 얻어서 향을 몸에 바르거나 베고 잘라도 똑같이 증오도 사랑도 없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위없는 계(戒)와 소승의 계가 아닌 대승(大乘)의 계를 얻게 하여지이다. |
願諸眾生悉得具足尸波羅蜜, 猶如諸佛所成就戒。 願諸眾生悉為布施、持戒、忍辱、 精進、禪智之所薰修。 願諸眾生悉得成於大般涅槃微妙蓮花, 其花香氣充滿十方。 願諸眾生純食大乘大般涅槃無上香饌, 猶蜂採花但取香味。 願諸眾生悉得成就,無量功德所薰之身。』 善男子!菩薩摩訶薩於慈心中施花香時, 常當堅發如是誓願。 |
원컨대 모든 중생이 시(尸)바라밀을 구족하여 마치 제불이 성취하신 바와 같아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다 보시와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향그러이 닦아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대반열반의 미묘한 연꽃을 피워 그 꽃향기가 시방에 충만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순전히 대승대반열반의 더없이 향기로운 성찬 먹기를 벌이 꽃을 따되 향미(香味)만 취하듯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무량공덕으로 익은 몸을 성취하여지이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자심 안에서 화향(花香)을 보시할 때는 항상 이러한 서원을 굳게 세워야 하느니라.。 |
「復次善男子!菩薩摩訶薩 於慈心中施床敷時,應作是願: 『我今所施,悉與一切眾生共之, 以是因緣,令諸眾生得天中天所臥之床, 得大智慧,坐四禪處; 臥於菩薩所臥之床, 不臥聲聞、辟支佛床, 離臥惡床。 願諸眾生得安樂臥,離生死床, 成大涅槃師子臥床。 |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자심(慈心) 안에서 침상[床敷]을 보시할 때 서원하되, 『내가 지금 베푸는 것이 일체중생에게 다같이 주어져서 그 인연으로 중생들이 천중천(天中天)이 눞는 침상을 얻고, 대지혜를 얻어서 사선처(四禪處)에 앉게 하며, 보살이 눞는 침상에 눕고, 성문, 벽지불의 침상에 눕지 않아서 나쁜 침상에 눕지 말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생사의 침상을 떠나 안락한 곳에 누워 대열반의 사자(師子)가 눕는 침상을 성취케 하여지이다. |
願諸眾生坐此床已, 復為其餘無量眾生, 示現神通師子遊戲。 願諸眾生住此大乘大宮殿中, 為諸眾生演說佛性。 願諸眾生坐無上床, 不為世法之所降伏。 願諸眾生得忍辱床, 離於生死飢饉凍餓。 願諸眾生得無畏床, 永離一切煩惱怨賊。 願諸眾生得清淨床, 專求無上正真之道。 願諸眾生得善法床, 常為善友之所擁護。 願諸眾生得右脇臥床, 依因諸佛所行之法。』 善男子!菩薩摩訶薩於慈心中, 施床敷時,應當堅發如是誓願。 |
원컨대 모든 중생이 이 침상에 앉아서 다른 무량한 중생들에게 신통한 사자의 유희(遊戲)를 시현하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이 대승(大乘)의 큰 궁전 안에 머물러 중생들에게 불성(佛性)을 연설하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위없는 침상에 앉아 세간의 법에 항복되지 말아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인욕의 침상을 얻어 생사의 기근과 춥고 베고픔에서 벗어나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무외(無畏)의 침상을 얻어 모든 번뇌의 원적(怨賊)을 길이 여의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청정한 침상을 얻어 오롯이 위없고 바르고 참된 도만을 구하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선법(善法)의 침상을 얻어 늘 선지식의 옹호를 받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우협(右脇)으로 눞는 침상을 얻어 제불이 행하신 법에 의지하게 하여지이다.』 하나니, 선남자야! 보살마하살 자심(慈心) 안에서 침상을 보시할 때는 이러한 서원을 굳게 세워야 하느니라.。 |
「復次善男子!菩薩摩訶薩於慈心中, 施舍宅時,常作是願: 『我今所施,悉與一切眾生共之, 以是因緣,令諸眾生處大乘舍, 修行善友所行之行、 修大悲行、六波羅蜜行、 大正覺行、一切菩薩所行道行、 無邊廣大如虛空行。 願諸眾生皆得正念, 遠離惡念。 願諸眾生悉得安住常樂我淨, 永離四倒。 願諸眾生悉皆受持出世文字。 願諸眾生必為無上一切智器。 願諸眾生悉得入於甘露屋宅。 願諸眾生初、中、後心, 常入大乘涅槃屋宅。 願諸眾生於未來世, 常處菩薩所居宮殿。』 善男子!菩薩摩訶薩於慈心中, 施舍宅時,常當堅發如是誓願。 |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 자심(慈心) 안에서 , 집을 보시할 때 항상 서원하되, 『내가 지금 베푸는 것이 일체중생에게 다같이 주어져서 그 인연으로 중생들로 하여금 대승(大乘)의 집에 처하여 선지식이 행한 행을 수행하고, 대비행(大悲行)과 육바라밀행(六波羅蜜行), 대정각행(大正覺行), 보살이 행한 일체의 도행(道行), 무변광대하기 허공 같은 행을 수행하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정념(正念)을 얻어 악념(惡念) 멀리 하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상락아정(常樂我淨)에 안주하여 사전도[四倒]를 길이 여의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출세간의 문자를 수지(受持)하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위없는 일체지의 그릇이 꼭 되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감로의 집에 들어가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의 처음과 중간, 나중의 마음이 항상 대승 열반의 집에 들어가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미래세에 늘 보살이 사는 궁전에 처하게 하여지이다.』 하나니, 선남자야! 보살마하살 자심(慈心) 안에서 , 집을 보시할 때는 항상 이러한 서원을 굳게 세워야 하느니라.。 |
「復次善男子!菩薩摩訶薩於慈心中, 施燈明時,常作是願: 『我今所施,悉與一切眾生共之, 以是因緣,令諸眾生光明無量, 安住佛法。 願諸眾生常得照明。 願諸眾生得色微妙,光澤第一。 願諸眾生其目清淨,無諸翳網。 願諸眾生得大智炬, 善解無我、無眾生相、 無人無命。 |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 자심(慈心) 안에서 , 등촉[燈燭;燈明]을 보시할 때마다 항상 서원하기를, 『내가 지금 베푸는 것이 일체중생에게 다같이 주어져서 그 인연으로 중생들로 하여금 광명이 무량하게 불법(佛法)에 안주케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항상 환희 비추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미묘한 빛을 얻어 광채가 제일가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의 눈이 아무런 티끌 없이 청정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대지혜의 횃불을 얻어 아상(我相)도 없고, 중생상도 없고, 인상도 수명상도 없음을 잘 알게 하여지이다. |
願諸眾生皆得覩見清淨佛性, 猶如虛空。 願諸眾生肉眼清淨, 徹見十方恒沙世界。 願諸眾生得佛光明, 普照十方。 願諸眾生得無礙明, 皆悉得見清淨佛性。 願諸眾生得大智明, 破一切闇及一闡提。 願諸眾生得無量光, 普照無量諸佛世界。 |
원컨대 모든 중생이 청정한 불성이 마치 허공 같음을 들여다 보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의 육안(肉眼)이 청정하여 시방의 항하사 세계를 꿰뚫어 보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부처님의 광명을 얻어 시방을 두루 비추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막힘 없는 밝음을 얻어 청정한 불성을 다 보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대지혜의 밝음을 얻어 일체의 어둠과 일천제를 쳐부수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무량한 광명을 얻어 무량한 제불세계를 두루 비추게 하여지이다. |
願諸眾生然大乘燈, 離二乘燈。 願諸眾生所得光明,滅無明闇, 過於千日普照之功。 願諸眾生得火珠明, 悉滅三千大千世界所有黑闇。 願諸眾生具足五眼, 悟諸法相,成無師覺。 願諸眾生無見無明。 願諸眾生悉得大乘大般涅槃微妙光明, 示悟眾生真實佛性。』 善男子!菩薩摩訶薩於慈心中施燈明時, 常應勤發如是誓願。 |
원컨대 모든 중생이 대승의 등을 사르고, 이승(二乘)의 등을 버리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얻은 광명으로 무명의 어둠을 멸하여 천 개의 해가 두루 비춤을 능가하는 공덕이 되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화주(火珠*)의 밝음을 얻어 삼천대천세계의 흑암(黑闇)을 다 멸하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오안(五眼*)을 구족하여 제법(諸法)의 모양을 깨닫고 스승없는 깨달음을 이루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무명(無明)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지이다. 원컨대 모든 중생이 대승대반열반의 미묘한 광명을 얻어 중생의 진실한 불성을 깨달아보여지이다.』 하나니, 선남자야! 보살마하살 자심(慈心) 안에서 등촉을 보시할 때는 늘 힘써 이와 같은 서원을 세워야 하느니라. |
*火珠; 탑 위에 장식된 밝은 보주(寶珠). *五眼; 1)肉眼(肉身의 눈), 2)天眼(色界天人의 눈), 3)慧眼(二乘人의 눈), 4)法眼(보살의 눈), 5)佛眼(부처의 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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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男子!一切聲聞、緣覺、菩薩、 諸佛如來,所有善根,慈為根本。 善男子!菩薩摩訶薩修習慈心, 能生如是無量善根, 所謂不淨、出息、入息、 無常、生滅, 四念處、七方便、三觀處、 十二因緣、無我等觀, 暖法、頂法、忍法、世第一法, 見道、修道、正勤、如意、諸根, 諸力、七菩提分、八聖道、四禪、 四無量心、八解脫、八勝處、 一切入、空、無相願、無諍三昧, 知他心智、及諸神通、 知本際智、聲聞智、緣覺智、 菩薩智、佛智。 善男子!如是等法,慈為根本。 善男子!以是義故, 慈是真實,非虛妄也。 若有人問:『誰是一切諸善根本?』 當言慈是。 以是義故,慈是真實,非虛妄也。 |
「선남자야! 모든 성문, 연각, 보살과 제불여래의 선근은 자(慈)가 근본이 되느니라.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자심(慈心)을 닦으면 이와 같은 무량한 선근이 생기나니, 소위 부정(不淨*), 날숨[出息] 들숨[入息], 무상(無常), 생멸(生滅)의 관(觀)과, 사념처(四念處), 칠방편(七方便), 삼관처(三觀處*), 12인연(十二因緣)과 무아(無我) 등의 관(觀)과 난법(暖法*), 정법(頂法), 인법(忍法), 세제일법(世第一法*)과 견도(見道*), 수도(修道*), 정근(正勤), 여의(如意), 제근(諸根)과 제력(諸力), 칠보리분(七菩提分), 팔성도(八聖道), 사선(四禪), 사무량심(四無量心), 팔해탈(八解脫), 팔승처(八勝處*), 일체의 입(入*),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 무쟁(無諍)삼매와 타심(他心)을 아는 지혜와 여러가지 신통, 본제(本際;根源)를 아는 지혜, 성문의 지혜, 연각의 지혜, 보살의 지혜, 부처의 지혜이니라. 선남자야! 이와 같은 법들은 자(慈)가 근본이 되기에 선남자야! 이런 의미에서 자(慈)는 진실한 것이요 허망한 것이 아니며, 어떤 사람이 묻기를, 『무엇이 모든 선근의 근본인가?』 한다면 자(慈)라고 말해야 하리니, 이런 의미에서 자(慈)는 진실한 것이요 허망한 것이 아니니라. |
*不淨; 不淨觀. *三觀處; 空觀, 假觀, 中觀(非空非假). *暖法, 頂法, 忍法, 世第一法을 四善根이라 한다. -小乘의 四善根; 聲聞乘의 修行人이 五停心觀과 四念處觀을 닦은 뒤에 四諦觀을 닦으면 無漏智의 불꽃이 일어나 따뜻함을 느끼게 되므로 暖法이라 하고, 수행이 더 깊어지면 지혜가 증장하여 정점에 이른다 하여 頂法이라 하며, 다시 나아가 四諦의 이치에 밝아지면 마음이 견고하여 흔들림이 없으니 忍法이라 하고, 다시 더 나아가 有漏智의 最終點에 달하면 세간의 유정 중 가장 수승하다 하여 世第一法이라 한다. -大乘의 四善根; 佛覺을 이루면 마음이 불타오르듯 하니 暖法, 自心成佛로 높은 산에 올라 몸이 허공에 들어간듯 하니 頂法, 더 나아가 迷와 覺이 兩忘하고 中과 邊이 不立하여 비록 初地見道의 出世間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유루(有漏) 세간 최후의 경지에 도달하여 세간 제일이니 世第一法이라 한다. *見道; 참 무루지(無漏智)를 발하여 진실한 이치를 관하고 일체의 견혹(見惑)을 끊은 지위. 보살의 초지(初地)에 든 마음. *修道; 見道에서 더 나아가 일체의 수혹(修惑)을 끊은 지위. 보살 초지 이후 십지까지의 지위. 見道, 修道, 無學道를 行位三道라 하여 열반의 길로 통한다. 無學道는 의혹을 끊고 이치를 증득하여 더 이상 배울 법이 없는 지위. 성문승의 아라한과, 보살승의 불과(佛果)를 말한다. *八勝處; 1)內有色想觀外色少勝處 2)內有色想觀外色多勝處 3)內無色想觀外色少勝處 4)內無色想觀外色多勝處 5)青勝處 6)黃勝處 7)赤勝處 8)白勝處 *入; 진리를 증득하여 아는 것[證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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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男子!慈即菩提道, 菩提道即如來,如來即慈。 善男子!慈即大梵, 大梵即慈,慈即如來。 善男子!慈者能為一切眾生而作父母, 父母即慈,慈即如來。 善男子!慈者乃是不可思議, 諸佛境界不可思議, 諸佛境界即是慈也, 當知慈者即是如來。 善男子!慈者即是眾生佛性, 如是佛性,久為煩惱之所覆蔽故, 令眾生不得覩見, 佛性即慈,慈即如來。 |
선남자야! 자(慈)는 곧 보리도(菩提道)요, 보리도는 곧 여래이며, 여래는 곧 자(慈)이니라. 선남자야! 자(慈)는 대범천(大梵天)이요, 대범천은 곧 자(慈)이며, 자(慈)는 곧 여래니라. 선남자야! 자(慈)는 일체중생에게 부모가 되어주거니와, 부모는 곧 자(慈)요, 자(慈)는 곧 여래니라. 선남자야! 자(慈)는 불가사의하고, 제불의 경계도 불가사의하며, 제불의 경계는 곧 자(慈)이니, 자(慈)는 곧 여래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자(慈)는 곧 중생의 불성, 이러한 불성이 오랫동안 번뇌에 덮여 있었기에 중생이 보지 못하였거니와, 불성는 곧 자(慈)요, 자(慈)는 곧 여래이니라. |
善男子!能為善根者,名實思惟, 實思惟者,即名為慈, 慈即如來,慈即大乘, 大乘即慈,慈即如來。 善男子!慈即大空,大空即慈, 慈即如來。 善男子!慈即虛空,虛空即慈, 慈即如來。 善男子!慈即是常,常即是法, 法即是僧,僧即是慈, 慈即如來。 善男子!慈即是樂,樂即是法, 法即是僧,僧即是慈, 慈即如來。 善男子!慈即是淨,淨即是法, 法即是僧,僧即是慈, 慈即如來。 善男子!慈即是我,我即是法, 法即是僧,僧即是慈, 慈即如來。 |
선남자야! 선근을 위하는 것이 실다운 사유(思惟)요, 실다운 사유는 곧 자(慈)이며, 자(慈)는 곧 여래요, 자(慈)가 곧 대승(大乘)이며, 대승(大乘)이 곧 자(慈)요, 자(慈)는 곧 여래이니라. 선남자야! 자(慈)는 곧 대공(大空)이요, 대공은 곧 자(慈)이며, 자(慈)는 곧 여래니라. 선남자야! 자(慈)는 곧 허공이요, 허공는 곧 자(慈)이며, 자(慈)는 곧 여래니라. 선남자야! 자(慈)는 곧 상(常)이요, 상(常)은 곧 법(法)이며, 법은 곧 승(僧), 승(僧)은 곧 자(慈)이며, 자(慈)는 곧 여래니라. 선남자야! 자(慈)는 곧 낙(樂)이요, 낙은 곧 법(法)이며, 법은 곧 승(僧), 승(僧)은 곧 자(慈)이며, 자(慈)는 곧 여래니라. 선남자야! 자(慈)는 곧 정(淨)이요, 정(淨)은 곧 법(法)이며, 법은 곧 승(僧), 승(僧)은 곧 자(慈)이며, 자(慈)는 곧 여래니라. 선남자야! 자(慈)가 곧 나[我]요, 나는 곧 법(法)이며, 법은 곧 승(僧), 승(僧)은 곧 자(慈)이며, 자(慈)는 곧 여래니라. |
善男子!慈即甘露,甘露即慈, 慈即佛性,佛性即法, 法即是僧,僧即是慈, 慈即如來。 善男子!慈者即是一切菩薩無上之道, 道即是慈,慈即如來。 善男子!慈者即是諸佛世尊無量境界, 無量境界即是慈也, 當知是慈即是如來。 |
선남자야! 자(慈)가 곧 감로요, 감로는 곧 자(慈)이며, 자(慈)는 곧 불성, 불성는 곧 법(法)이며, 법은 곧 승(僧), 승(僧)은 곧 자(慈)이며, 자(慈)는 곧 여래니라. 선남자야! 자(慈)는 곧 是모든 보살의 위없는 도(道)요, 도는 곧 자(慈), 자(慈)는 곧 여래니라. 선남자야! 자(慈)는 곧 제불세존의 무량한 경계(境界)요, 무량한 경계는 곧 자(慈)이니, 자(慈)는 곧 여래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
「善男子,慈若無常,無常即慈, 當知是慈,是聲聞慈。 善男子!慈若是苦,苦即是慈, 當知是慈是聲聞慈。 善男子!慈若不淨,不淨即慈, 當知是慈是聲聞慈。 善男子!慈若無我,無我即慈, 當知是慈是聲聞慈。 善男子!慈若妄想,妄想即慈, 當知是慈是聲聞慈。 |
「선남자야 ,자(慈)가 만일 무상(無常)하고 무상이 곧 자(慈)라면 그 자(慈)는 성문의 자(慈)인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자(慈)가 만일 고(苦)이고, 고(苦)가 곧 자(慈)라면 자(慈)는 성문의 자(慈)인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자(慈)가 만일 부정(不淨)이고, 부정이 곧 자(慈)라면 자(慈)는 성문의 자(慈)인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자(慈)가 만일 무아(無我)이고, 무아(無我)가 곧 자(慈)라면 자(慈)는 성문의 자(慈)인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자(慈)가 만일 망상(妄想)이고, 망상이 곧 자(慈)라면 자(慈)는 성문의 자(慈)인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
善男子!慈若不名檀波羅蜜, 非檀之慈, 當知是慈是聲聞慈, 乃至般若波羅蜜亦復如是。 善男子!慈若不能利益眾生, 如是之慈是聲聞慈。 善男子!慈若不入一乘之道, 當知是慈是聲聞慈。 善男子!慈若不能覺了諸法, 當知是慈是聲聞慈。 善男子!慈若不能見如來性, 當知是慈是聲聞慈。 善男子!慈若見法,悉是有相, 當知是慈是聲聞慈。 |
선남자야! 자(慈)가 만일 단(檀)바라밀이라 할 수 없다면 보시하는 자(慈)가 아니니, 그 자(慈)는 성문의 자(慈)인 것이며, 나아가 반야바라밀까지도 그와 같은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자(慈)가 만일 중생을 이익할 수 없다면 그러한 자(慈)는 성문의 자(慈)이니라. 선남자야! 자(慈)가 만일 일승(一乘)의 도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 자(慈)는 성문의 자(慈)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자(慈)가 만일 제법(諸法)을 깨달을 수 없다면 그 자(慈)는 성문의 자(慈)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자(慈)가 만일 여래의 성품을 볼 수 없다면 그 자(慈)는 성문의 자(慈)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자(慈)가 만일 법(法)을 유상(有相)으로 본다면 그 자(慈)는 성문의 자(慈)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
善男子!慈若有漏, 有漏慈者是聲聞慈。 善男子!慈若有為, 有為之慈是聲聞慈。 善男子!慈若不能住於初住, 非初住慈,當知即是聲聞慈也。 善男子!慈若不能得佛十力、 四無所畏, 當知是慈是聲聞慈。 善男子!慈若能得四沙門果, 當知是慈是聲聞慈也。 |
선남자야! 자(慈)가 만일 유루(有漏)라면 유루(有漏)의 자(慈)는 성문의 자(慈)이니라. 선남자야! 자(慈)가 만일 유위(有為)라면 유위(有為)의 자(慈)는 성문의 자(慈)이니라. 선남자야! 자(慈)가 만약 초주(初住)에 머물 수 없다면 초주(初住)의 자(慈)가 아니니, 성문의 자(慈)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자(慈)가 부처님의 십력(十力)과 4무소외(四無所畏)를 얻을 수 없다면 그 자(慈)는 성문의 자(慈)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자(慈)가 네 가지 사문과(沙門果)를 얻는 것이라면 그 자(慈)는 성문의 자(慈)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
「善男子!慈若有、無、 非有、非無, 如是之慈,非諸聲聞、 辟支佛等所能思議。 善男子!慈若不可思議,法不可思議, 佛性不可思議,如來亦不可思議。 善男子!菩薩摩訶薩住於大乘大般涅槃, 修如是慈,雖復安於睡眠之中, 而不睡眠,勤精進故; 雖常覺悟,亦無覺悟,以無眠故; 於睡眠中,諸天雖護, 亦無護者,不行惡故; 眠不惡夢,無有不善,離睡眠故; 命終之後,雖生梵天, 亦無所生,得自在故。 |
「선남자야! 자(慈)가 만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면 이러한 자(慈)는 성문이나 벽지불 등이 사유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라. 선남자야! 자(慈)가 만일 불가사의하면, 법(法)이 불가사의하고, 불성이 불가사의하고, 여래도 또한 불가사의하느니라.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대승대반열반에 의지하여 이러한 자(慈)를 닦으면 비록 편안히 잠을 자더라도 잠을 자지 않나니, 힘써 정진하기 때문이요, 항상 깨어 있더라도 깨어 있지 않나니, 잠이 없기 때문이며, 잠자는 동안 제천(諸天)이 비록 수호하더라도 수호할 것이 없나니, 악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며, 악몽을 꾸지 않고 불선(不善)도 없나니, 잠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목숨이 다한 뒤에 비록 범천(梵天)에 나더라도 나는 바가 없나니, 자재함을 얻었기 때문이니라. |
善男子!夫修慈者, 能得成就如是無量無邊功德。 善男子!是大涅槃微妙經典, 亦能成就如是無量無邊功德, 諸佛如來亦得成就如是無量無邊功德。」 |
선남자야! 자(慈)를 닦으면 이와 같이 무량무변한 공덕을 능히 성취하거니와, 선남자야! 이 대열반의 미묘한 경전도 또한 그와 같은 무량무변한 공덕을 능히 성취하고, 제불여래도 역시 그렇듯 무량무변한 공덕을 성취하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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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般涅槃經卷第十五 | 대반열반경 제15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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