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巖錄

벽암록(碧巖錄) 제21칙 지문연화하엽(智門蓮花荷葉)

碧雲 2022. 3. 13. 18:20

 

벽암록(碧巖錄) 제21칙 지문연화하엽(智門蓮花荷葉) _지문선사의 연꽃과 연잎 

 「지문연화(智門蓮華)_지문스님의 연꽃」라고도 한다.
지문선사는 이 공안에서 覺이라는 果과 드러나면 蓮이 꽃피운 것이지만
覺이 구현되지 않았더라도 蓮은 蓮이라고 함으로써 일체중생이 다 불성을 지니고 있음을 표했다.
蓮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서 첫째는 '물 속에서 나온다', 둘째는 '피어난다'는 것이니,
물속에서 나옴은 곧 '출리(出離)'요, 피어남은 곧 '聖敎에 의한 覺'이다.
누구나에게 있는 佛性이라는 因이 聖敎라는 緣을 만나 覺이라는 果를 맺는 것이라
佛性이라는 因이 발현되고 발현되지 않음의 차별이 있을 뿐이다. 

 

垂示云。
建法幢立宗旨。
錦上鋪花。
脫籠頭卸角馱。太平時節
或若辨得格外句。
舉一明三。
其或未然。依舊伏聽處分。
수시(垂示)
법의 기치를 세우고 종지(宗旨)를 일으키는 일은
비단 위에 꽃을 수놓는 것이다.
농두(籠頭*) 벗고 각타(角馱*) 내려놓으면 태평시절인 것이요,
혹 격외구(格外句*)를 변별해낼 수 있다면
하나를 들추거든 셋을 알 것이지만
혹 그렇지 못하면 여전히 엎드려 처분만 바랄 것이다.

*籠頭와 角馱; 농두(籠頭)는 말의 머리에 씌우는 도구요, 각타(角馱)는 소뿔 위에 지우는 무거운 짐이니,
籠頭는 無明業識에, 角駄는 知見解會(妄想執著)에 비유하는 말이다.
 '脫籠頭卸角馱면 太平時節이다' 함은 自己의 本源을 透徹히 하면
妄想執著이라는 角馱를 내려놓아 輕快하고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格外句; 보통의 격식을 초월한 向上의 語句. 

 

 【二一】舉。  【제21칙】 지문선사의 연꽃과 연잎(智門蓮花荷葉)   
   僧問智門。
   蓮花未出水時如何
   (鉤在不疑之地。
   泥裏洗土塊。
   那裏得這消息來)
   智門云。蓮花
   (一二三四五六七。
   疑殺天下人)
   僧云。出水後如何
   (莫向鬼窟裏作活計。
   又恁麼去也)
   門云。荷葉
   (幽州猶自可。最苦是江南。
   兩頭三面。笑殺天下人)。
   어느 중이 지문(智門*)선사에게 물었다.
   "연화(蓮花)가 물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낚시바늘은 의심가지 않는 곳에 있다.
   진창에서 흙덩이 씻고 있는데,
   어느 속에서 이런 소식을 얻었을꼬?)
   지문(智門)은 "연화(蓮花)니라." 하였다.
   (일이삼사오륙칠<一二三四五六七*>이거늘,
   천하인을 너무 의심하는구나.)
   중이 "물에서 나온 뒤에는 어떻습니까?" 하니,
   (귀신굴 속에서 살아갈 궁리하지 말아야 하거늘
   또 그렇게 가는구나.)
   지문은 "하엽(荷葉*)이니라." 하였다.
   (유주<幽州*>가 오히려 낫고, 가장 괴로운 곳이 강남이다.
   양두삼면<兩頭三面*>이니, 천하인을 너무 웃기는구나.)

*智門; 宋代 雲門宗僧 隨州智門光祚禪師(香林澄遠 法嗣, 雪竇重顯의 師).
*一二三四五六七; 수시로 일어날 수 있는 보통의 일. 당연한 이치. 삼척동자도 아는 일.
*荷葉; 荷는 蓮이니, 연잎을 말한다.
*幽州; 古代 지금의 하북성 일부와 요녕성의 땅을 유주라고 하나, 여기서는 「동북방(東北方)」의 뜻이다.
*兩頭三面; '머리 둘에 얼굴이 셋이다'.
선림에서는 이로써 생각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얽히고 섥혀서 어찌하지 못하는 모양새를 표한다.

 

智門若是應機接物。
猶較些子。
若是截斷眾流。千里萬里。
且道這蓮花。出水與未出水。
是一是二。若恁麼見得。
許爾有箇入處。
雖然如是。若道是一。
顢頇佛性儱侗真如。
若道是二。心境未忘
落在解路上走
有什麼歇期。
且道古人意作麼生。
지문선사가 응기접물(應機接物*)했다고 하면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지만
만약 절단중류(截斷眾流*)했다고 한다면 천리만리다.
자 말해보라. 출수(出水)와 미출수(未出水)가
하나인가 둘인가? 만약 여기서 견득(見得)하면
그대에게 어떤 깨달아 들어간 곳[得入處]이 있다 하려니와,
비록 그렇다 해도 만약 하나라고 말한다면
불성(佛性)에 만한(顢頇*)하고, 진여에 농동(儱侗*)한 것이요,
둘이라고 한다면 마음의 경계가 끊기지 않아서
해결하려는 집착 위에서 달리고 있는 것이거늘
무슨 놈의 쉬어질 기약이 있겠는가?
또 고인의 뜻이 무엇인지 말해보라. 
其實無許多事。
所以投子道
爾但莫著名言數句。
若了諸事自然不著
即無許多位次不同。
爾攝一切法。
一切法攝爾不得。
本無得失夢幻如許多名目
不可強與他安立名字。
誑諕爾諸人得麼。
爾諸人問故所以有言。
爾若不問。
教我向爾道什麼即得。
一切事。皆是爾將得來。
都不干我事。
기실(其實)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투자(投子)선사가 말하기를,
"그대가 다만 명(名), 언(言), 수(數), 구(句) 따위에 집착하지 말아서
자연히 매사에 집착하지 않게 되면
그 어떠한 지위의 차별함이 없을 것이다.
그대가 일체법을 섭수한다거나
일체법이 그대를 섭수하지 못한다는 것들은
본래 득실 없는 몽환(夢幻)이요, 허다한 이름[名目]과 같아서
남에게 강제로 이름을 붙여줄 수 없거늘
그대 모든 이들을 속인들 얻어지겠는가?
그대들이 묻는 까닭에 그래서 말이 있는 것이요,
그대들이 만약 묻지 않는다면
나더러 그대들에게 말하게 할 무엇이 얻어지겠는가?" 하였으니,
모든 일이 다 그대들이 장차 얻어가야 할 것들이라
도무지 내가 간여할 일이 아니다. 

〈古尊宿語錄〉 投子和尚錄에 실린 글이다.
*應機接物; 근기에 상응하여 인물을 접대하다.
*截斷眾流; 한 글자의 말을 사용하여 질문자의 생각을 절단해버림으로써
생각을 굴리지 않고 깨달음에 直入하게 하는 雲門宗의 敎學法을 말한다.
*顢頇; 멍청함. 어리숙함. 사리에 밝지 못함.
*儱侗; 성숙되지 못함. 무분별함, 意思가 불명확함. 

古人道。
欲識佛性義當觀時節因緣。
不見雲門舉
僧問靈雲云。
佛未出世時如何。
雲豎起拂子。
僧云。出世後如何。
雲亦豎起拂子。
雲門云。
前頭打著。後頭打不著。
又云不說出與不出。
何處有伊問時節也。
古人一問一答。應時應節無許多事。
爾若尋言逐句。了無交涉。
爾若能言中透得言。
意中透得意。機中透得機。
放令閑閑地。
方見智門答話處。
고인이 말했다(溈山靈祐는 經云이라 하였다).
"불성(佛性)의 뜻을 알려거든 마땅히 시절인연을 관해야 한다"
운문(雲門)이 예를 들어 한 말을 모르는가?
어떤 중이 영운(靈雲*)에게
"부처가 세상에 나지 않았을 때는 어찌 합니까?" 하고 물었는데,
영운이 불자(拂子)를 치켜 세웠고,
"세상에 난 뒤에는 어찌 합니까?" 하니,
영운은 또 불자(拂子)를 치켜 세웠다.
운문(雲門)은
"앞에 한 처사는 옳았으나 뒤의 처사는 틀렸다." 하고,
또 "(부처가) 나고 안나고를 말하지 않았는데,
네가 묻는 시절이 어디에 있겠느냐?" 하였다.
고인의 일문일답이 시절에 상응하는 어떤 일도 없거늘
너희가 언구를 쫓는다면 아예 교섭(交涉)됨이 없다.
너희가 말 속에서 말을 투득하고,
뜻 속에서 뜻을 투득하고, 기(機) 속에서 기(機)를 투득하되,
놓아버려서 한가롭고 한가롭게 하여야
비로소 지문(智門)이 답한 곳을 볼 것이다. 
問佛未出世時如何。
牛頭未見四祖時如何。
斑石內混沌未分時如何。
父母未生時如何。
雲門道。從古至今。
只是一段事。無是無非。
無得無失。無生與未生。
古人到這裏。放一線道有出有入。
若是未了底人。
扶籬摸壁。依草附木。
或教他放下。
又打入莽莽蕩蕩荒然處去。
若是得底人。
二六時中。不依倚一物。
雖不依倚一物。
若露一機一境。
作麼生摸索他。
"부처가 출세하지 않았을 때는 어떠한가?",
"우두(牛頭*)가 4조(四祖; 道信)를 못만났을 때는 어떠한가?",
"반석(斑石) 안의 혼돈(混沌)이 분리되지 않았을 때는 어떠한가?",
"부모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는 어떠한가?" 하는 물음에
운문(雲門)은 "예로부터 지금까지가
다만 일단사(一段事)인지라 옳을 것도 없고 그를 것도 없으며,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고, 생(生)도 미생(未生)도 없다" 하였으니,
고인은 그 속에 이르러 드나들 한 가닥 길을 놓은 것이다.
마치지 못한 사람이라면
부리모벽(扶籬摸壁*)하고 의초부목(依草附木*)하여
그를 버려두게[放下] 하거나
또 망망탕탕(莽莽蕩蕩*)하여 황당한 데로 빠져들게 할 것이지만,
만일 투득한 사람이라면
열 두 때 가운데 아무데도 의지하지 않으려니와,
아무데도 기대어 의지하지 않고서도
일기일경(一機一境)을 드러낸다면
어떻게 그를 모색하겠는가?

*靈雲; 福州靈雲志勤禪師(長慶大安 法嗣)

*牛頭; 牛頭山法融禪師(594~657). 潤州 延陵人으로 姓은 韋氏.
19세에 儒敎는 究竟法이 아님을 깨닫고 茅山으로 들어가 삭발하고 불도에 입문하였다.
후에 우두산(牛頭山) 유서사(幽棲寺) 북암(北巖)의 석실에서 고요히 앉아 마음을 관(靜坐觀心)하던 중,
4조 도신(道信)대사가 멀리 기상(氣象)을 살피니 그 산에 한 기이한 사람이 있는지라
이내 찾아가 법담을 나누고 법요를 가르쳐 주었다.
그 후로 법융의 명성이 높아져서 우두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니, 선종 우두산파의 창시자가 되었다.
4조의 법은 5조 홍인(弘忍)대사에게 전해졌으나 그 또한 4조의 법을 이은 다른 줄기(旁出法嗣)이다.
*扶籬摸壁; 울타리 의지하고 벽을 더듬다. 깜깜히 어두워 담벼락을 붙들고 더듬어 찾는 모양새.
 범부의 사려분별(思慮分別)로 부처의 경계를 억측하는 것에 비유하는 禪林用語.
*依草附木; 依草附葉. 초목에 달라붙어 있다. 본래 사람이 죽은 뒤 生緣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精靈이 獨立自存하지 못하고 반드시 草木에 붙어 있어야 함을 이르는 말인데,
禪宗에서는 '語言文字에 갇혀서 깨달음의 경계에 이를 절대적 자유자재함을 잃었다'는 뜻으로 쓰인다.
*莽莽蕩蕩; 莽莽撞撞. 일을 행하는 태도가 거칠고 경솔함. 

這僧問道。蓮花未出水時如何。
智門云。蓮花。
便只攔問一答。不妨奇特。
諸方皆謂之顛倒語。那裏如此。
不見嵒頭道。
常貴未開口已前。猶較些子。
古人露機處。
已是漏逗了也。
如今學者。不省古人意。
只管去。理論出水與未出水。
有什麼交涉。
저 중이 연꽃이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때는 어떠한지 물으니,
지문은 '연꽃'이라고 하였는데,
간단히 질문을 막는 일답(一答)이라 기특하여 마지 않다.
제방은 모두가 뒤바뀐 말이라고 하는데 어느 속이 그렇던가?
보지 못했는가? 암두(嵒頭*)가 말하기를,
"늘 입 열기 전을 귀히 여긴다" 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조금은 낫다.
고인(古人;지문)이 기봉을 드러낸 곳은
이미 이것이 누두(漏逗*)해버린 것이건만,
지금의 배우는 자들은 고인의 뜻을 살피지 못하고
오로지 '출수(出水)'와 '미출수(未出水)'만을 이치로 따져가니,
무슨 교섭(交涉)이 있겠는가? 

*嵒頭; 鄂州巖頭全奯<豁>禪師(德山宣鑒 法嗣)
*漏逗; 언어를 떠나 있는 진실을 부득이 언어로 표하는 과실. 

不見僧問智門。
如何是般若體。
門云。蚌含明月。
僧云如何是般若用。
門云。兔子懷胎。
看他如此對答。
天下人討他語脈不得。
或有人問夾山道。
蓮花未出水時如何。
只對他道。露柱燈籠。
且道與蓮花是同是別。
出水後如何。
對他道。杖頭挑日月。
腳下太泥深。
爾且道是不是。
且莫錯認定盤星。
雪竇忒殺慈悲。
打破人情解。所以頌出。
보지 못했는가? 저 중이 지문에게 묻기를,
"무엇이 이 반야의 체(體)입니까?" 하니,
지문은 "조개가 밝은 달을 머금었다." 하였고,
또 "무엇이 이 반야의 용(用)입니까?" 하니,
지문은 "토끼가 새끼를 배었다." 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대답을 살펴보라.
천하인들은 그 어맥(語脈)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혹 어떤 사람이 나[夾山]에게
"연화가 미출수(未出水)한 때는 어떠한가?" 하고 묻는다면
다만 그에게 "노주등롱(露柱燈籠*)이다."고 하겠는데,
자 말해보라. 연화와 더불어 이것이 같은가 다른가?
또 "출수(出水) 후에는 어떠한가?" 한다면
그에게 "주장자 끝은 일월에 닿고,
발꿈치는 지극히 깊은 진흙 속에 잠긴다." 하겠는데,
그대들은 또 말해보라. 옳은가 옳지 않은가?
다만 정반성(定盤星*)을 잘못 읽지 말지어다.
설두는 지나친 자비로
사람들의 정해(情解*)를 타파하고자 하여 송(頌)하였다. 

*露柱燈籠; 노주는 법당 앞의 기둥이요, 등롱은 승방에 켜는 등불이니,
禪宗에서는 이로써 무정(無情)함이나 비정(非情)함을 표시한다.
*定盤星; 定盤은 저울이요, 星은 눈금이니, 저울의 "0"점(시작점)을 말한다.
*情解; 흔히 '알음알이'라고 해석하나, 엄밀히 情은 당시에 근(根)을 情이라 하였다 하니,
 '감관으로 이해하다', 즉 진리에 직입(直入)하지 못하고 마음에 형상을 지어 이해하려는 것을 말한다. 

 

 蓮花荷葉報君知
   (老婆心切。見成公案。
   文彩已彰)
  出水何如未出時
   (泥裏洗土塊。
   分開也好。不可儱侗去也)
  江北江南問王老
   (主人公在什麼處。問王老師作什麼。
   爾自踏破草鞋)
 一狐疑了一狐疑
   (一坑埋卻。自是爾疑。
   不免疑情未息。
   打云。會麼)
 연꽃과 연잎이 그대가 알도록 보답했거늘
   (노파심이 간절한 견(현)성공안<見成公案>이다.
   문채가 이왕 찬란히 빛난다.)
  물에서 나온 것이 나오지 않은 때와 어찌 같으리오?
   (진흙탕 속에 흙덩이 씻는 격이다.
   분리시켜야지 두리뭉실<儱侗> 넘어가면 안된다.)
  강북이건 강남이건 왕로(王老;선지식)께 묻거라.
   (주인공이 어디 있으며, 왕노사에게 물어서 무엇하려는가?
   네 스스로 짚신이 닳도록 밟아가라.)
 한 여우의심[狐疑]이 끝나자 한 여우의심이로다.
   (한 구덩이에 묻어야 한다. 자연히 이것이 네 의심이라
   의정<疑情>이 아직 쉬어지지 못함을 면치 못하리라.
   후려치며 말한다. "알겠느냐?")

 

智門本是淅人。
得得入川參香林。
既徹。卻回住隋州智門。
雪竇是他的子。
見得好窮玄極妙。
直道蓮花荷葉報君知。
出水何如未出時。
這裏要人直下便會。
山僧道。未出水時如何。
露柱燈籠。
出水後如何。
杖頭挑日月。
腳下太泥深。
爾且莫錯認定盤星。
如今人咬人言句者。有甚麼限。
爾且道出水時是什麼時節。
未出水時是什麼時節。
若向這裏見得。
許爾親見智門。
지문은 본시 절강사람인데,
일부러 사천(四川)에 가서 향림(香林)을 참했고,
기왕 투철해지자 다시 수주(隋州) 지문으로 돌아가 머물렀다.
설두는 그의 적자(的子;直系法嗣)인지라
보고 얻은 것이 좋고 궁현극묘(窮玄極妙)하니
곧바로 "연꽃과 연잎이 그대가 알도록 보답했거늘
출수(出水)가 미출(未出)한 때와 어찌 같으리오" 하였는데,
이 속에서 사람들이 직하에 곧 알아차리기를 바란다.
내(원오)가 '미출수(未出水) 때는 어떠한가?' 하는 물음에는
 '노주등롱(露柱燈籠)이다'고 답하고,
 '출수(出水)한 뒤에는 어떠한가?'라고 하면
 '주장자 끝은 일월에 닿고,
발꿈치는 지극히 깊은 진흙 속에 잠긴다.'고 하였으니,
그대들은 정반성을 오인하지 말라.
요즘 사람들이 사람의 언구를 씹는 데에 무슨 한정이 있던가?
그대들은 또 말해보라. 물에서 나온 때는 어떤 시절이고,
물에서 나오지 않은 때는 어떤 시절인가?
만약 이 속을 향해 보아 얻는다면
그대들이 지문을 친견했다고 인정하겠다. 
雪竇道。爾若不見。
江北江南問王老。
雪竇意道。爾只管去江北江南。
問尊宿出水與未出水。
江南添得兩句。
江北添得兩句。一重。添一重。
展轉生疑。
且道何時得不疑去。
如野狐多疑。冰凌上行。
以聽水聲。若不鳴方可過河。
參學人若一狐疑了一狐疑。
幾時得平穩去。
설두는 '그대들이 만약 알지 못하거든
강북이건 강남이건 왕로(王老)에게 물어라' 하였는데,
설두가 그 뜻이 '그대들은 오로지 강북과 강남으로 가서
존숙(尊宿)들께 출수와 미출수를 물어
강남에서 양구(兩句)를 보태어 얻고,
강북에서 양구를 첨득(添得)하기를 거듭하고 거듭해서
더욱 의심을 펼쳐가라는 것이다'고 말했다.
자 말해보라. 어느 때에 의심하지 않게 되겠는가?
마치 의심 많은 들여우가 얼음판 위를 다니되
물소리를 들어보고 들리지 않으면 비로소 하천을 건너듯이
배우는 사람이 한 여우의심[狐疑]이 끝나자 또 한 호의를 해서야
몇 때나 평온(平穩)을 얻어 가겠는가? 

이왕 꽃을 피우면 좋겠지만 피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꽃피울 근본자질은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