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巖錄

벽암록(碧巖錄) 제23칙 보복장경유산차(保福長慶遊山次)

碧雲 2022. 4. 15. 21:54

이 공안은 「保福妙峰頂」, 「別峰相見」이라고도 한다.
《화엄경 62권》 입법계품에서 선재(善財)동자가 선지식을 찾아 여쭈어보라는 문수사리의 권고에 따라
맨 처음 南方 勝樂國의 妙峰山(妙峰頂)으로 德雲비구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다른 산[別峰]에서 비로소 만나 「憶念一切諸佛境界智慧光明普見法門」을 듣고
十住門 중의 첫 「初發心住」를 얻는다.
妙峰은 원만평등히 드러난 우주본체에 비유하는 것으로
선림에서는 일체의 언어와 사유(思惟), 정식(情識)의 분별이 끊긴 절대경계(絶對境界)에 비유하여 쓰인다.
따라서 언어가 끊긴 묘봉에서는 덕운비구가 선재에게 들려줄 수 있는 법문이 없기에
7일 뒤 제2의문(第二義門) 별봉(別峰)으로 하산하여 선재에게 법문을 설한 것이다. 

 

垂示云。 수시(垂示)하여 말했다. 
玉將火試。金將石試。
劍將毛試。水將杖試。
至於衲僧門下。一言一句。
一機一境。一出一入。一挨一拶。
要見深淺。要見向背。
且道將什麼。
試請舉看。
옥(玉)은 불을 가져다 시험하고, 금(金)은 돌을 가져다 시험하며,
검(劍)은 털을 가져다 시험하고, 물은 장대를 가져다 시험하거니와,
납승의 문하에 와서 일언일구(一言一句)나
일기일경(一機一境), 일출일입(一出一入), 일애일찰(一挨一拶*)에
심잔(深淺)을 보려거나, 향배(向背)를 보려면
말해보라. 무엇을 가지고 할 것인가?
들추는 예를 살펴보기 바란다. 

*一挨一拶; 挨는 강진(强進;세게 나가다), 拶은 핍박(逼迫)의 뜻으로
상대방을 점검하기 위해 언어나 동작으로 슬쩍[挨] 혹은 강하게[拶] 추궁해가는 것을 말한다.
후에 서로의 기량을 견준다는 뜻으로 전환되었다. 

 

 【二三】舉。  【제23칙】 보복(保福)의 묘봉정(妙峰頂) 
 保福長慶遊山次
   (這兩箇落草漢)
   福以手指云。只這裏便是妙峰頂
   (平地上起骨堆。
   切忌道著。掘地深埋)
   慶云。是則是。可惜許
   (若不是鐵眼銅睛幾被惑了。
   同病相憐。兩箇一坑埋卻)
   雪竇著語云。
   今日共這漢遊山。圖箇什麼
   (不妨減人斤兩。猶較些子。
   傍人按劍)
   復云。百千年後不道無。
   只是少
   (少賣弄。也是雲居羅漢)
   後舉似鏡清
   (有好有惡)
   清云。若不是孫公。
   便見髑髏遍野
   (同道者方知。
   大地茫茫愁殺人。
   奴見婢慇懃。
   設使臨濟德山出來。也須喫棒)。
 보복(保福)과 장경(長慶)이 유산(遊山*)하던 차에
   (이 두 낙초한<落草漢>들이)
   보복이 손으로 가리키며 "다만 저기가 묘봉정(妙峰頂)이네." 하니,
   (평지풍파를 일으키는구나.
   말을 붙여서는 절대 안되니 땅 파서 깊이 묻어라.)
   장경은 "그렇기는 하지만 애석하네." 하였다.
   (철안동정<鐵眼銅睛*>아니면 거의가 현혹되었을 것이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니 둘 다 한 구덩이에 쓸어 넣어라.)
   설두(雪竇)가 말 덧붙이기를,
   "오늘 이 자들이 함께 유산다니며 무슨 짓을 꾸미는가?" 하더니,
   (사람의 무게를 깎아내려 마지않았으니, 조금은 괜찮았다.
   제 3자가 칼자루를 어루만지는 격이다.)
   다시 "백천 년 뒤에도 없다고 하지는 못하겠으나,
   다만 적을 것이다." 하였다.
   (허풍을 떨고 있으니, 이야말로 구름 위에 사는 나한이로구나.)
   후에 같은 일을 경청(鏡清)에게 들추자,
   (잘 했을 수도 있고 잘못 했을 수도 있다.)
   경청은 "손공(孫公;長慶)이 아니었다면
   해골이 들판에 즐비한 것을 보았을 것이다." 하였다.
   (도가 같은 자라야 비로소 안다.
   대지가 망망하여 사람을 몹시 근심스럽게 하지만
   사내 종은 계집 종을 은근하게 보는 법이다.
   설사 임제나 덕산이 나선다 해도 반드시 방<棒>을 맞았을 것이다.)

*遊山; 禪門의 사람이 일을 이미 마쳐 더 이상 參問할 필요가 없으니 좋은 경치나 구경다니는 것.
*鐵眼銅睛; 근기(根器)가 영민(靈敏)하고 기봉(機鋒)이 특출한 禪僧에 비유하는 용어.
*少賣弄; 적은 것을 (많다고) 속여 파는 것. 사깃꾼, 허풍쟁이, 과시하는 자.
*平地上起骨堆; 평지에 뼈무덤을 만들다. 평지풍파를 일으키다와 같은 의미로
평온한 가운데 어떤 사건이나 화근을 만드는 것에 비유하는 말.  

 

保福長慶鏡清。總承嗣雪峰。
他三人同得同證。
同見同聞。同拈同用。
一出一入。遞相挨拶。
蓋為他是同條生底人。
舉著便知落處。
在雪峰會裏。居常問答。
只是他三人。
古人行住坐臥。以此道為念。
所以舉著便知落處。
보복(保福), 장경(長慶), 경청(鏡清)은 다 설봉(雪峰)을 승사(承嗣)했기에
이 세 사람은 동득동증(同得同證)이요,
동견동문(同見同聞)이며, 동념동용(同拈同用)이니,
일출일입(一出一入)하고 체상애찰(遞相挨拶*)함에
결국 그들은 같은 가지의 저변을 드러내는 사람들인지라
들추기만 하면 곧 낙처(落處)를 알았거니와,
설봉의 회하에 있는 동안 통상 문답을 주고 받는 것이
다만 이 세 사람이었고,
고인들은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이 도(道)를 염두에 두었기에
들추기만 하면 곧 낙처를 안 것이다. 

[주요등장인물들의 전등계보(傳燈系譜)]
六祖大鑒 (638~713)
   青原行思 (671~740)
      石頭希遷 (700~790)
         天皇道悟 (748~807)
            龍潭崇信 ( ~  838)
               德山宣鑑 (782~865)
                  巖頭全奯
                  雪峰義存 (822~908)
                     玄沙師備 (835~908)
                        羅漢桂琛 (867~928)
                           法眼文益 (885~958)
                              天台德韶 (891~972)
                     長慶慧稜 (854~932)
                     保福從展 ( ?  ~928)
                     鏡清道怤 (868~937)
                     雲門文偃 (864~949)
                        香林澄遠 (908~987)
                           智門光祚 (950~1030)
                              雪竇重顯 (980~1052)

*遞相挨拶; 서로 일애일찰을 주고 받는 것. 

一日遊山次。保福以手指云。
只這裏便是妙峰頂。
如今禪和子。恁麼問著。
便只口似匾檐。
賴值問著長慶。
爾道保福恁麼道。圖箇什麼。
古人如此。
要驗他有眼無眼。
是他家裏人。自然知他落處。
便對他道。是即是可惜許。
且道長慶恁麼道。意旨如何。
不可一向恁麼去也。似則似。
罕有等閑無一星事。
賴是長慶識破他。
하루는 유산하던 차에 보복이 손으로 가리키며
"다만 저 속이 곧 묘봉정(妙峰頂)이다." 하였는데,
요즘 선화자(禪和子) 같아서는 이런 질문에 봉착하면
곧 다만 입이 납짝[匾檐]해졌겠지만
다행히도 장경에게 질문 던져졌다.
너희가 말해보라, 보복이 이렇게 말한 것은 무엇을 꾀함인가?
고인이 이렇게 한 것은
그가 안목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그 집안 사람인지라 자연 그 낙처를 알고서
곧 그에게 응대하여 "그렇기는 하지만 애석하네."라고 하였다.
자, 말해보라 장경이 그렇게 말한 것은 취지가 무엇이겠는가?
한결같이 그렇게 가지 못하니 비슷하기야 하지만
등한(等閑)히 일성사(一星事)도 없는 자는 거의 없다고
마침 장경이 그에게 식파(識破)해 준 것이다. 
雪竇著語云。
今日共這漢遊山。圖箇什麼。
且道落在什麼處。
復云。百千年後不道無。
只是少。
雪竇解點胸
正似黃檗道不道無禪。
只是無師。
雪竇恁麼道。也不妨險峻。
若不是同聲相應。
爭得如此孤危奇怪。
此謂之著語。落在兩邊。
雖落在兩邊。卻不住兩邊。
설두(雪竇)가 착어(著語)하여
"오늘 이 자들이 함께 유산다니며 무슨 짓을 꾸미는가?" 하였는데,
말해보라, 뜻이 어디에 있는가?
또 말하기를, "백천 년 뒤에도 없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으나,
다만 적을 것이다." 하였으니,
설두가 흉중을 파악할 줄 안 것이
바로 황벽(黃檗)의 '선(禪)이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승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라는 말과 같아서
설두의 그러한 말은 험준(險峻)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것이 한 목소리로 호응한 것[同聲相應]이 아니다면
어찌 이렇듯 고위(孤危)하고 기괴(奇怪)함이 깃들여지겠는가?
이를 일러 착어(著語)가 양변(兩邊)에 떨어져 있다고 하거니와,
비록 양변에 떨여져 있지만 도리어 양변에 머물지도 않는다. 

*선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없다; 제11칙 황벽당주조한(黃蘗噇酒糟漢)에서 나오는 말

後舉似鏡清。
清云。若不是孫公
便見髑髏遍野
孫公乃長慶俗姓也。
不見僧問趙州。
如何是妙峰孤頂。
州云。老僧不答爾這話。
僧云。為什麼不答這話。
州云。我若答爾。
恐落在平地上
후에 같은 일을 경청(鏡清)에게 들추자,
경청은 "만약 손공(孫公)이 아니었다면
곧 해골이 들판에 즐비한 것을 보았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손공은 장경의 속성(俗姓)이다.
보지 못했는가? 어떤 중이 조주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묘봉고정(妙峰孤頂)입니까?" 하니,
조주는 "노승은 그런 얘기에는 답하지 않겠다." 하였고,
중이 다시 "어째서 그 얘기에 답하지 않습니까?" 하니,
"내가 만일 네게 답해주면
평지상(平地上*)에 떨어질까 걱정이라 그런다."고 하였다. 

*平地上; 아무 일도 없는 곳. '평지상에 떨어질까 두렵다' 함은
묘봉정이 일체가 끊긴 곳이라고 말해주었다가는 네가 참구할 것도 없다 하여
무사안일에 빠질까 염려된다는 말이다. 

教中說妙峰孤頂。
德雲比丘。從來不下山。
善財去參。七日不逢。
一日卻在別峰相見。及乎見了。
卻與他說一念三世。一切諸佛。
智慧光明。普見法門。
德雲既不下山。
因什麼卻在別峰相見。
若道他下山。教中道。
德雲比丘從來不曾下山。
常在妙峰孤頂到這裏。
德雲與善財。的的在那裏。
교(教;화엄경) 중에서 묘봉고정(妙峰孤頂)을 설했는데,
덕운비구(德雲比丘)가 그때까지 하산하지 않는지라
선재(善財)가 참알(參謁)하러 가서 7일 동안을 만나지 못하더니,
하루는 도리어 다른 산[別峰]에서 만났고, 마침내 만나서는
삼세 일체제불의
지혜광명으로 두루 보기를 오롯히 생각하라는 법문을 설해 주었다.
덕운이 기왕 하산하지 않았는데
무엇으로 인해 도리어 별봉에서 만난 것이며,
만약 그가 하산했다고 말한다면 교(教)에서는
덕운비구가 여태껏 하산한 적이 없이
항상 묘봉고정에 있었다 했으니, 이에 이르러서는
덕운과 선재는 분명 어디에 있었다는 것인가? 
自後李長者打葛藤。打得好。
道妙峰孤頂。是一味平等法門。
一一皆真。一一皆全。
向無得無失。無是無非處獨露。
所以善財不見。
到稱性處。如眼不自見。
耳不自聞。指不自觸。
如刀不自割。火不自燒。
水不自洗。到這裏。
教中大有老婆相為處。
所以放一線道。於第二義門。
立賓立主。立機境立問答。
所以道。
諸佛不出世。亦無有涅槃。
方便度眾生。故現如斯事。
그 뒤로 이장자(李長者*)가 한 말을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그는 말하기를, 「묘봉고정(妙峰孤頂)은 평등으로 일관한 법문으로
낱낱이 다 진실이요, 하나하나가 다 온전한 것이며,
득실(得失)도 없고 시비(是非)도 없는 곳을 홀로 드러내기에
그래서 선재가 보지 못한 것이며,
칭성처(稱性處*)에 이르러서는 마치 눈이 스스로 보지 못하고,
귀가 스스로 듣지 못하며, 손가락이 스스로 만지지 못하는 것 같고,
또 칼이 스스로 자르지 못하고, 불이 스스로 태우지 못하며,
물이 스스로 씻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였으니, 이에 이르러서는
교(教) 중에 큰 노파심으로 서로를 위한 곳이 있었기에
한 갈래 길[一線道;실마리]을 놓아 제2의문(第二義門)에서
손님과 주인을 세우고, 기경(機境)과 문답(問答)을 세운 것인지라
그래서 말하되(華嚴經*),
「제불(諸佛)은 출세(出世)하지 않고 열반하시는 일도 없지만
중생을 제도하려는 까닭에 이와 같은 일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李長者; 李通玄(635~730). 당대 화엄학자. 창주(滄州)인.
천부적 자질로 스승없이 공부하여 유교와 불교에 정통했다.
개원(開元) 7년(719) 태원부(太原府) 수양(壽陽) 방산(方山)의 토감(土龕)에 은거하며 新華嚴經을 참구했고,
산 속에서 사는 수년 동안 매일 대추와 잣잎의 떡만 먹었하 하여 세칭 조백대사(棗柏大士)라 하였다.
개원 18년 3월 감실(龕室)에서 향년 96세로 좌화(坐化)하니,
송(宋) 휘종(徽宗)이 현교묘엄장자(顯教妙嚴長者)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저서로 新華嚴經論 40권, 華嚴經會釋論 14권, 略釋新華嚴經修行次第決疑論 4권,
略釋과 釋解迷顯智成悲十明論 각 1권, 十玄六相, 百門義海, 普賢行門, 華嚴觀 諸詩賦 등이 있다. [佛光大辭典]
*稱性處; 法界의 참 성품에 부합하는 곳.
*《華嚴經》 卷第23 「兜率宮中偈讚品」 金剛幢菩薩의 頌
   「如來不出世 亦無有涅槃
   以本大願力 示現自在法」

且道畢竟作麼生
免得鏡清雪竇恁麼道去。
當時不能拍拍相應。
所以盡大地人髑髏遍野。
鏡清恁麼證將來。
那兩箇恁麼用將來。
雪竇後面頌出更顯煥。
頌云。
자 말해보라. 필경 어떻게 하면
경청과 설두의 그런 말들이 면해지겠는가?
당시에 맞장구쳐서 상대에게 호응해 줄 수 없었기에
그래서 '온 대지 사람의 해골이 들판에 즐비하리라' 하여
경청은 그렇게 장래를 증명했는데,
그렇다면 두 사람은 어떻게 장래를 꾸려가야 하는가?
설두가 뒷면에 송출(頌出)하여 다시 밝혔다.
송(頌)하여 이르되, 

 

 妙峰孤頂草離離
   (和身沒卻。腳下已深數丈也)
  拈得分明付與誰
   (用作什麼。大地沒人知。
   乾屎橛堪作何用。
   拈得鼻孔失卻口)
  不是孫公辨端的
   (錯看箭。著賊了也不知)
 髑髏著地幾人知
   (更不再活。如麻似粟。
   闍黎拈得鼻孔失卻口)
 묘봉고정(妙峰孤頂)은 풀이 무성한데
   (몸까지 빠져들어서 발밑 깊이가 이미 수 길[丈]이다.)
  분명(分明)히 염득(拈得)한들 누구에게 주겠으며,
   (어디에 쓸 것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마른 똥막대기를 어디에 쓰겠는가.
   콧구멍을 붙들어 얻으면 입을 잃는 법이다.)
  손공(孫公)이 단적으로 지적해주지 않았다면
   (날아오는 화살을 잘못 살핀 것이요. 도둑맞은 것을 모른 것이다.)
 해골바가지가 땅에 깔릴 것을 몇 사람이나 알겠는가?
   (다시 살려내지 못할 놈들이 무수히 많다니,
   선생께서는 콧구멍은 붙들었을지언정 입을 잃어버렸소.)

*拈得鼻孔失卻口; 一得一失.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하나를 잃는다.
한 편으로는 긍정하나 한 편으로는 부정한다는 말. 

 

妙峰孤頂草離離。
草裏輥有什麼了期。
拈得分明付與誰。
什麼處是分明處。
頌保福道只這裏便是妙峰頂。
不是孫公辨端的。
孫公見什麼道理。便云。
是則是可惜許。
只如髑髏著地幾人知。
汝等諸人還知麼瞎。
 '묘봉고정은 풀이 무성하다' 하였는데,
풀 속이나 헤쳐서 언제 마칠 기약이 있겠는가?
 '분명함을 주어 얻은들 누구에게 주겠는가' 하였는데,
어디가 분명한 곳인가?
보복이 다만 저 속이 곧 묘봉정이다고 한 말에 송(頌)한 것을
 '손공이 단적으로 지적해 주지 않았더라면'이라 하였는데,
손공은 무슨 도리(道理)를 보았길래 문득 말하기를,
 '옳기는 옳지만 가히 애석하다'고 한 것인가?
다만 '해골바가지가 땅에 깔릴 것을 몇 사람이나 알리오?'와 같을 것을
너희 모두는 도리어 아는가? 눈먼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