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주불고(庵主不顧)_ 암주의 '돌아보지 않고'】라고도 한다.
蓮華峰은 宋代 雲門 문하 奉先道深의 法嗣인 天台蓮華峯祥菴主를 말한다.
祥庵主는 入寂할 즈음 "주장자를 어께에 메고 그 어떤 것도 돌아보지 않고
千峯萬峯으로 直入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주장자는 수행에 도움을 주는 도구를 뜻하니
언어나 문자 따위에 의지하지 않고(비껴 메고)
곧 바로 열반의 경지[千峯萬峯]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두는 역으로 언어 문자가 아니고서는 道를 알지 못하니
팔만의 장경[千峯萬峯]을 긍정하는 것도
無事道人의 일원이 되는 길이다고 하고 있다.
垂示云。 | 수시(垂示)하여 이르되, |
機不離位。墮在毒海。 語不驚群。陷於流俗。 忽若擊石火裏別緇素。 閃電光中辨殺活。 可以坐斷十方。壁立千仞。 還知有恁麼時節麼。 試舉看。 |
기(機)가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면 독해(毒海)에 잠겨 있을 것이고, 말이 군중을 놀라게 하지 못하면 유속(流俗*)에 빠져 있는 것이려니와, 홀연히 석화(石火) 튀는 순간 치소(緇素*)를 분별하고, 전광(電光) 번쩍하는 동안 살활(殺活)을 분변한다면 가히 시방을 좌단(坐斷)하고 벽립천인(壁立千仞)할 터인데, 그런 시절이 있는 줄을 아는가? 예를 들어 살펴자. |
*機不離位 墮在毒海; 「洞山三滲漏」 중 「見滲漏」를 설명하는 말이다.
曹洞宗의 祖 洞山良价는 末法時代에는 사람들이 대개 지혜가 말라서 진위(真偽)를 가림에
세 가지 참루(滲漏)가 있다고 하였다.
①見滲漏~ 기(機)가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독해(毒海)에 빠져 있다[機不離位 墮在毒海].
(我見으로 諸法이 空함을 보지 못하고 境界에 집착하니 真實을 보지 못한다.)
②情滲漏~ 앞과 뒤의 개념에 사로잡혀 있으니 견처가 편협하고 완고하다[滯在向背 見處偏枯].
(情識으로 헤아려 兩端을 取捨하니 中道를 알지 못한다.)
③語滲漏~ 妙를 추구하고 宗을 잃으니, 機가 시종일관 어둡다[究妙失宗, 機昧終始].
(진리를 깨닫는 도구에 불과한 문자와 언어에 매달려 語句를 해명하려고만 애쓴다.)
*流俗; 世俗. *緇素; 黑白.
【二五】舉。 | 【제25칙】 암주불고(庵主不顧)_ 암주의 '돌아보지 않고' |
蓮花峰庵主。拈拄杖示眾云 (看。頂門上具一隻眼。 也是時人窠窟) 古人到這裏。為什麼不肯住 (不可向虛空裏釘橛。權立化城) 眾無語 (千箇萬箇如麻似粟。卻較些子。 可惜許。一棚俊鶻) 自代云。 為他途路不得力 (若向途中辨。猶爭半月程。 設使得力堪作什麼。 豈可全無一箇) 復云。畢竟如何 (千人萬人只向箇裏坐卻。 千人萬人中一箇兩箇會) 又自代云。 楖?橫擔不顧人。 直入千峰萬峰去 (也好與三十棒。只為他擔板。 腦後見腮。莫與往來)。 |
연화봉 암주가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면서 (보아라. 정문상<頂門上>에 일척안<一隻眼>이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의 과굴<窠窟*>이다.) "고인들은 이것을 왜 인정하지 않았겠느냐?" 하자, (허공에 말뚝 박을 수 없으니 방편으로 화성<化城*>을 세운 것이다.) 대중이 말이 없는지라 (천 개 만 개로 무수히 많았더라면 그래도 좀 나았을 것이디. 가히 애석하다. 한 떼의 준골<俊鶻*>이었더라면...) 자기가 대신하여 답하기를, "그것이 수행 도중(途中)에 힘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더니, (도중<途中>을 말하자면 어찌 반 달의<짧은> 여정이리오만 설사 힘을 얻은들 무엇을 감당해 할 수 있을 것이며, 어찌 하나도 없을 수 있겠는가?) 다시 "그렇다면 필경 어찌할 것인가?" 하고, (천인만인이 다만 그 속을 향해 앉았지만 천인만인 중 하나나 둘 정도가 이회<理會>했다.) 또 자기가 대신하여 "즐률(楖?*)을 비껴 메고서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 곧 바로 천봉만봉(千峰萬峰)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30방을 주어야 하리니, 그가 담판한<擔板漢>이기 때문이다. 뒷통수에 볼이 붙은 놈과는 상종하지 말라.) |
*窠窟; 棲身處. 「時人窠窟」은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그 당시에 쓰던 낡은 수법이라는 뜻.
*化城; 《妙法蓮華經》 化城喩品에 보물 찾으러 먼길을 나선 사람들이 가는 길이 험난하여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가려 하자 인도자가 성(城)을 화현(化現)시켜 잠시 쉬게 한다.
*俊鶻; 쏜살 같이 나는 매.
*楖?; 즐률나무. 주장자를 만드는데 쓰이는 나무.
諸人還裁辨得蓮花峰庵主麼。 腳跟也未點地在。 國初時在天台蓮花峰卓庵。 古人既得道之後。 茅茨石室中。折腳鐺兒內。 煮野菜根喫過日。且不求名利。 放曠隨緣。垂一轉語。 且要報佛祖恩。 傳佛心印。 纔見僧來。便拈拄杖云。 古人到這裏為什麼不肯住。 前後二十餘年。終無一人答得。 |
여러분들은 연화봉 암주가 재변(裁辨;辨别,鑑别)되어지는가? 발꿈치가 땅에 닿아 있지 않다[腳跟未點地*]. 국초(國初*) 때 천태(天台)산 연화봉에 암자를 세워 있었는데, 고인이 기왕 득도한 뒤에는 모자(茅茨*)나 석실(石室) 안에서 다리 부러진 쟁아(鐺兒;솥) 속에 야채 뿌리를 삶아 먹고 날을 보내면서 다만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마음껏 광활히 인연을 쫓아 일전어(一轉語)를 수시한 것은 다만 불조(佛祖)의 은혜에 보답하고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하고자 함이었는지라 어떤 스님이 오기만 하면 곧 주장자를 들고서 "옛사람들은 이것을 왜 인정하지 않았겠느냐?" 하고 물었으나, 20여년 전후 동안 끝내 아무에게서도 대답을 듣지 못했다. |
*腳跟未點地; 腳跟不點地. 腳不點地.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쓰인다.
①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경쾌히 달리는 모양새. 신출귀몰하여 종적을 남기지 않음.
②공부가 충분히 투철해지지 않았음.
'諸人'의 입장이라면 ②로 해석함이 옳겠고, 祥菴主를 평한 것이라면 ①로 해석해야할 것이다.
*國初; 건국 초기. 즉 송나라 초창기.
*茅茨; 띠풀[茅草] 엮어 덮어서 만든 움집.
*放曠隨緣; 隨緣放曠. 龍潭崇信禪師가 天皇道悟禪師의 처소로 參學하러 갔는데,
날마다 물깉고 나무하고 밥짓기만 하고 道悟禪師는 불법 반구도 설해주지 않는지라
하루는 道悟에게 "제가 여기 온 이래 한 번도 心要를 지시받은 적이 없습니다." 하고 따졌다.
도오는 "네가 온 이래 내가 심요를 지시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하자,
"언제 지시하셨습니까?"
"네가 차 끓여 오면 내가 마셨고, 네가 밥 가져오면 내가 먹었고, 네가 인사하면 내가 고개를 숙였는데,
어디가 네게 심요 지시하지 않은 곳이냐?" 하시니, 일거수 일투족이 다 불법이다는 뜻이다.
崇信이 이에 확연히 大悟하여, 숭신이 다시
“(깨달은 후에는 그것을)어떻게 보호하며 운임(運任)합니까[如何保任]?" 여쭙자,
道悟禪師는 이렇게 시를 읊었다.
「근본 흘러가는 대로 맡겨 인연따라 마음대로 넓혀가되, (任性逍遙 隨緣放曠)
범부의 마음만 다하면 달리 성인의 깨달음이랄 것이 없다네. (但盡凡心 別無聖解)」
只這一問。也有權有實。有照有用。 若也知他圈繢。不消一捏。 爾且道因什麼二十年如此問。 既是宗師所為。何故只守一橛。 若向箇裏見得。 自然不向情塵上走。 凡二十年中。有多少人。 與他平展下語呈見解。 做盡伎倆。設有箇道得。 也不到他極則處。 況此事雖不在言句中。 非言句即不能辨。 |
이 질문이야말로 유권유실(有權有實)하고 유조유용(有照有用)하다. 그의 권궤(圈繢*)를 안다면 주물럭댈 필요가 없을 터이니, 너희가 말해보라. 무엇 때문에 20년 동안 이렇게 물었겠으며, 기왕 이것이 종사(宗師)의 행위라면 어째서 한 말뚝만을 고수했는가? 만약 이 속에서 견득한다면 자연히 정진(情塵)을 향해 달리지 않을 것이다. 무릇 20년 동안에 많고 적은 사람들이 그와 더불어 평전하어(平展下語*)하며 견해를 밝혀 온갖 기량을 다했으나, 설령 도득(道得)이 있는 자라 해도 그의 극칙처(極則處)에는 이르지 못했었거니와, 더구나 이 일[一大事]이 언구 중에 있지는 않지만 언구가 아니고서는 변별하지 못함이겠는가. |
*圈繢; 禪林用語. 원래 올무[圈套]나 일정한 격식을 뜻하지만,
禪林에서는 스승이 언어와 동작으로 학인을 시험하고 단련시켜서 이끌어주는 방편을 말한다.
*平展; 禪林에서 스승이 학인을 인도하는 방법의 하나로 「提持」의 對稱인 「放行」의 手法이니,
곧 학인의 견해를 긍정해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스스로 悟道의 機를 발전시키게 하는 것.
여기서는 '암주의 경지를 긍정하는 행위'를 말한다.
*下語; 禪林用語. ①公案이나 古則에 자기 견해를 다는 것. ②스승이 학인에게 내리는 교훈의 말.
③經論에 대한 短評으로 著語나 揀語와 같은 의미.
여기서는 '암주의 경지에 대해 자기의 견해를 밝히는 것'.
不見道。 道本無言因言顯道。 所以驗人端的處。 下口便知音。 古人垂一言半句。亦無他。 只要見爾知有不知有 他見人不會。所以自代云。 為他途路不得力。 看他道得。自然契理契機。 幾曾失卻宗旨。 |
이런 말을 모르는가? 도(道)는 본디 언어가 없으나 언어로 인해 도가 드러난다 하였으니, 그래서 사람의 단적인 곳을 시험함에 있어서 입만 열게 하면 곧 음(音)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고인이 수시한 일언반구(一言半句)도 다른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앎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려는 것이었지만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니, 그래서 자기가 대신하여, "그것이 수행의 길에 힘이 되지 못해서이다"고 한 것이다. 그가 한 말을 살펴보면 자연히 이(理)와 기(機)에 계합하려니와, 언제 종지(宗旨)를 잃은 적이 있었던가? |
古人云。承言須會宗。 勿自立規矩。 如今人只管撞將去便了。 得則得。爭柰顢頇儱侗。 若到作家面前。將三要語印空。 印泥印水驗他。 便見方木逗圓孔。無下落處。 到這裏討一箇同得同證。 臨時向什麼處求。 若是知有底人。 開懷通箇消息。 有何不可。 若不遇人。且卷而懷之。 且問爾諸人。 拄杖子是衲僧尋常用底。 因什麼卻道途路不得力。 古人到此不肯住。 其實金屑雖貴落眼成翳。 |
고인이 이르기를, '말씀을 받들어 모름지기 종지(宗旨)를 알고 스스로 규구(規矩)를 세우지 말라' 하였거늘, 요즘 사람들은 부딪쳐보기[撞]만 하고 마니, 얻기야 얻겠지만 만한농동(顢頇儱侗*)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만약 작가의 면전에서 삼요어(三要語*)를 가지고 인공(印空), 인니(印泥), 인수(印水)하여 그를 시험하려는 것은 네모난 나무로 둥근 구멍 막기라서 딱 들어맞지 않음을 알 것이다. 이에 이르러서 어떤 동득동증(同得同證;同道者)을 찾아본들 막상 어디서 구하리오만, 만일 앎이 있는 사람[知音]이라면 마음을 터놓고 어떤 소식을 소통하는 것이 어찌 불가능하겠는가? 동득동즉을 만나지 못했거든 말아서 가슴에 품어 둘지어다. 잠깐 여러분들에게 묻겠다. 주장자는 스님들이 평상시에 쓰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수행의 여정[途路]에 힘을 얻지 못한다'고 했겠는가? 고인은 이에 이르러 머무는 것을 긍정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사실 금가루가 비록 귀하다지만 눈에 들어가면 티끌이 되는 것이다. |
*承言須會宗 勿自立規矩; 石頭선사가 쓴 5言44句220字 古詩 「參同契」의 한 구절이다.
*儱侗顢頇; 儱侗은 '두루뭉술하다'는 뜻이고, 顢頇은 '①낯짝이 두껍다
②사리가 불분명하고 흐리멍덩한 모양새'를 말하니, '알아도 대충 아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三要語; 상대의 기량을 점검해보고자 통상적으로 던지는 三轉語와 같은 질문들.
*印空印泥印水; '도장을 허공에 찍고, 진흙에 찍고, 물에 찍는다'는 것은 '헛되이 이러저리 애쓴다'는 뜻이다.
*方木逗圓孔; 〈景德傳燈錄〉에 의하면 洪州雲居道膺禪師(洞山良价法嗣)는
「유한(有限)한 심식(心識)으로 무한(無限)한 중용(中用)을 지으려 한다면
마치 네모난 나무로 둥근 구멍을 막으려는 것과 같아서 크게 잘못된 것이다
(若將有限心識。作無限中用。如將方木逗圓孔多少差訛。)」고 하였는데,
이 말에서 「圓孔方木」이라는 용어가 생겨났으니, 양자가 서로 投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작가 앞에서 삼전어 따위로 요리조리 물어 시험해보려 해보아야 소용없다는 말이다.
石室善道和尚。 當時遭沙汰。常以拄杖示眾云。 過去諸佛也恁麼。 未來諸佛也恁麼。 現前諸佛也恁麼。 雪峰一日僧堂前拈拄杖示眾云。 這箇只為中下根人。 時有僧出問云。 忽遇上上人來時如何。 峰拈拄杖便去。 雲門云。 我即不似雪峰打破狼籍。 僧問未審和尚如何。 雲門便打。 |
석실선도(石室善道*)화상은 사태(沙汰*)를 만났을 당시에 늘 주장자로 시중하여 이르기를, "과거제불(過去諸佛)도 그러하고, 미래제불(未來諸佛)도 그러하며, 현전제불(現前諸佛)도 그러하다."고 하였다. 설봉이 하루는 승당(僧堂) 앞에서 주장자를 들고 시중해 이르기를, "이것은 중하근(中下根)인 사람만을 위한다."고 하자, 그때 어떤 스님이 나서서 묻기를, "갑자기 상상근(上上根)인 사람을 만났을 때는 어떻습니까?" 하니, 설봉은 주장자를 들고 곧 가버렸다. 운문(雲門)이 평하기를, "나라면 설봉이 낭자(狼籍;쑥대밭)를 타파(打破)하듯 하지 않겠다." 하니, 어떤 스님이 "화상께서는 어찌 하실런지요?" 하고 묻자, 운문이 바로 후려쳤다. |
*石室善道; 潭州石室善道禪師(石頭希遷_長髭曠 法嗣).
圓悟佛果禪師語錄卷第十七에
「舉 : 石室은 중이 오기만 하면 주장자를 세워 들고
"과거제불도 그러하고[恁麼], 현재제불도 그러하고, 미래제불도 그러하다"고 했는데,
長沙는 "주장자를 내려놓고 달리 통해야 어떤 소식이 온다"고 했다.
圓悟는 "石室이 질문의 단초(端初)를 둔 것은 고준해 마지않은데,
만일 장사가 아니었다면 어찌 투기(投機)를 얻겠는가? 비록 그렇더라도
그런[恁麼]줄만 알았지 그렇지 않은[不恁麼]은 모른 것이다." 하더니, 마침내 주장자를 들고서
"과거제불도 그렇지 않았고, 현재제불도 그렇지 않으며, 미래제불도 그렇지 않다.
혹시 모두 다 주장자를 내려놓으라고 말한다면, 나는 너희들이 말만 배우는 부류라고 알겠거니와,
생기처(生機處)의 말로 일구(一句)를 가져와보라." 하였다.
(舉。石室見僧來拈起拄杖云。過去諸佛也恁麼。現在諸佛也恁麼。未來諸佛也恁麼。
長沙云。放下拄杖子。別通箇消息來。
師云。石室置箇問端。不妨孤峻。若非長沙。爭得投機。雖然只知恁麼。不知不恁麼。
遂舉拄杖云。過去諸佛不恁麼。現在諸佛不恁麼。
未來諸佛不恁麼。或若總道放下拄杖子。我也知爾只是學語之流。生機處道將一句來。)
*沙汰; 唐武宗 會昌元年(841) 9月에 武宗이 道教를 숭상하여 일으킨 廢佛事件, 즉 「會昌法難」을 말한다.
大凡參問也無許多事。 為爾外見有山河大地。 內見有見聞覺知。 上見有諸佛可求。 下見有眾生可度。 直須一時吐卻。然後十二時中。 行住坐臥。打成一片。 雖在一毛頭上。寬若大千沙界。 雖居鑊湯爐炭中。 如在安樂國土。 雖居七珍八寶中。 如在茅茨蓬蒿下。 這般事。若是通方作者。 到古人實處。自然不費力。 |
대저 참문(參問)이란 별다른 일이 아니라 너희가 밖으로는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있음을 보고, 안으로는 견문각지(見聞覺知)가 있음을 보고, 위로는 가히 구할 제불(諸佛)이 있음을 보며, 아래로는 가히 제도할 중생이 있음을 보게 하는 것이거니와, 곧 일시에 내뱉어버린 연후에 열두 시진(12時辰;子~亥時) 중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타성일편(打成一片*)하여 비록 털끝만한 곳에 있더라도 대천사계(大千沙界*)와 같고, 확탕노탄(鑊湯爐炭) 속에 살더라도 안락국토(安樂國土)에 있는 것 같고, 많은 재물[七珍八寶] 속에 살더라도 모자봉호(茅茨蓬蒿*) 아래 있는 것 같아야 할 것이니, 이런 일에 통방(通方)한 작자(作者)라면 고인의 실처(實處)에 도달하는 일이 자연 힘들지 않을 것이다. |
*打成一片; 禪林用語. 融合一體의 뜻. 일체의 情量과 計較를 제거하여
千差萬別한 事物을 一體로 融合시켜 彼此나 主客 등의 차별한 情想이 없는 것을 말한다.
*大千沙界; 항하사와 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
*茅茨蓬蒿; 짚 이엉[茅茨]이나 쑥대[蓬蒿]를 엮어 지은 움막.
他見無人搆得他底。復自徵云。 畢竟如何。又柰何不得。 自云。楖?橫擔不顧人。 直入千峰萬峰去。 這箇意又作麼生。 且道指什麼處為地頭不妨句中有眼。 言外有意。自起自倒。 自放自收。 |
그가 그것을 이루어 얻는 사람이 없음을 보고 다시 스스로 징(徵*)하여 필경 어찌할 것인가? 하였지만, 또 어찌하지 못하는지라 스스로 이르기를 '즐률(楖栗) 빗겨 메고서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 곧 바로 천봉만봉(千峰萬峰)으로 들어간다'고 하였거니와, 이러한 것들의 뜻은 또 무엇이겠는가? 자, 말해보라. 어느 곳을 가리켜 구중(句中)에 안목(眼目)이 있고, 언외(言外)에 뜻이 있으며, 자기자도(自起自倒*)하고 자방자수(自放自收*)하여 마지않는 근원지(根源地;地頭)라 하겠는가? |
*徵; 공개적으로 물음.
*自起自倒; 스스로 제기(提起)하고 스스로 꺼꾸러뜨리다.
*自放自收; 스스로 놓아주고 스스로 거두어들이다.
*地頭; ①唐代 稅法의 일종인 青苗地頭錢 ②본래의 자리
③終點, 目的地 ④발원지, 근원, 원천 ⑤논밭의 가장자리
豈不見嚴陽尊者。 路逢一僧。拈起拄杖云。 是什麼。 僧云。不識 嚴云一條拄杖也不識 嚴復以拄杖。地上劄一下云。 還識麼。 僧云。不識 嚴云。土窟子也不識。 嚴復以拄杖擔云會麼。 僧云不會。 嚴云楖?橫擔不顧人。 直入千峰萬峰去。 古人到這裏。為什麼不肯住。 |
어찌 보지 못했는가? 엄양존자(嚴陽尊者*)가 길에서 만나 한 스님에게 주장자를 세워 들고서 "이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다. 그 스님이 "모르겠습니다." 하자, 엄양이 "주장자 하나도 모르느냐?" 하더니, 다시 주장자로 땅을 한 번 찍고서 "이제는 알겠느냐?" 하였다. 그 스님이 "모르겠습니다." 하자, 엄양은 "땅굴[土窟]도 모르느냐?" 하더니, 다시 주장자를 메고서 "알겠느냐?" 하였다. 스님이 "모르겠습니다." 하자, 엄양은 "즐률을 빗겨 메고서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 곧 바로 천봉만봉(千峰萬峰)으로 들어가겠다." 하였다. 고인은 이 속에 이르러 어째서 머물려 하지 않았겠는가? |
*嚴陽尊者; 洪州新興嚴陽尊者[趙州從諗法嗣]
雪竇有頌云。 誰當機舉不賺。亦還希。 摧殘峭峻銷鑠玄微。 重關曾巨闢。 作者未同歸。 玉兔乍圓乍缺。 金烏似飛不飛。 盧老不知何處去。 白雲流水共依依。 因什麼山僧道。 腦後見腮莫與往來。 纔作計較。 便是黑山鬼窟裏作活計。 若見得徹信得及。 千人萬人。自然羅籠不住。 柰何不得。 動著拶著。自然有殺有活。 雪竇會他意道直入千峰萬峰去。 方始成頌。 要知落處。看取雪竇頌云。 |
설두는 한 게송으로 「누가 기(機)를 당하여 속지 않겠는가? 또한 여전히 드물다. 초준(峭峻)함을 꺽어 없애고 현미(玄微)함을 녹여 없애며 겹겹 관문을 일찍이 활짝 열었으되 작자(作者)는 함께 돌아가지 않는다. 옥토(玉兔;달)는 잠깐 둥글었다가 금새 이즈러지고, 금오(金烏;해)는 나는 듯 날지 않는데 이 늙은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건만 흰구름 강물이 함께 의의(依依*)하네.」라고 하였거늘 무엇 때문에 산승(山僧)이 착어하여 '뒷통수에 볼이 보이거든 상종하지 말라'고 했겠는가? 잠깐이라도 계교(計較)하기만 하면 곧 이것이 흑산(黑山*) 귀굴(鬼窟) 속에서 살궁리 하는 것이다. 만일 견득(見得)하여 철저한 믿음이 가면 어느 누구도 자연 나롱(羅籠*)하지 못해 어찌할 수 없을 것이며, 동착찰착(動著拶著*)에 자연 유살유활(有殺有活*)할 것이다. 설두가 '곧 바로 천봉만봉으로 들어간다'고 한 그의 뜻을 알고 바야흐로 송(頌)을 만들었는데, 낙처(落處)를 알고자 하거든 설두의 송을 살펴 취하거라. |
*依依; [形]①연약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한들거리는 모양새 ②아쉬워하는, 섭섭해 하는 모양새
③思慕. 想念 ④어렴풋이, 아른아른, 까마득히.
'백운과 유수가 헤어지기 아쉬워 뒤따라 오는 것 같다'고 노래한 것.
*黑山; 원래는 南贍部洲의 북쪽 세 곳에 각각 세 겹의 黑山이 있어 惡鬼들이 사는 闇黑세계를 말하는데,
禪林에서는 執著하는 情識과 分別하는 作用을 黑山의 暗穴에 빠져 꼼짝 못하는 것에 비유한다. [佛光大辭典]
*羅籠; 籠羅, 包羅. 망라하다, 포괄하다. 羅籠不住는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
*不住; 不停, 不斷. 動詞의 뒤에 써서 동작의 목적이 실현되지 못함을 나타낸다.
*動著拶著; 動은 상대의 질문 등에 빠져나가는 것, 拶을 되받아 치는 것.
*有殺有活;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이니, 자유로히 함을 뜻한다.
眼裏塵沙耳裏土 (懞憧三百檐。 鶻鶻突突有什麼限。 更有恁麼漢) 千峰萬峰不肯住 (爾向什麼處去。 且道是什麼消息) 落花流水太茫茫 (好箇消息。 閃電之機。徒勞佇思。 左顧千生右顧萬劫) 剔起眉毛何處去 (腳跟下更贈一對眼。 元來只在這裏。 還截得庵主腳跟麼。 雖然如是。 也須是到這田地始得。 打云。為什麼只在這裏) |
눈 안의 티끌이요 귓 속의 흙인지라 (몽동삼백담<懞憧三百檐*>이 골골돌돌<鶻鶻突突*>한데 무슨 기약이 있겠느냐? 또 이런 놈이 있다니.) 천봉만봉(千峰萬峰*)에 머물려 하지 않는구나 (너는 어디로 가느냐? 말해보라. 이것이 무슨 소식인지.) 낙화유수(落花流水*)면 태망망(太茫茫*)이거늘 (좋은 소식이다. 번뜩이는 기<機>로 도로저사<徒勞佇思*>하면서 천생<千生>을 좌고<左顧>하고 만겁<萬劫>을 우고<右顧>한다.) 눈썹 치켜 세우고 어디로 가는가? (발꿈치 밑에 다시 일대안<一對眼*>을 선사했지만 원래 다만 그 속에 있었다. 암주의 발꿈치를 잘라 얻을 수가 있겠는가마는 비록 그렇더라도 반드시 이 전지<田地;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후려치며 이르되, "무엇 때문에 다만 그 속에 있는가?") |
*懞憧三百檐; 懞憧은 事理와 是非, 曲直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요,
三百擔은 극히 무거운 짐을 진다는 것으로써 業識이 한이 없고 우둔함에 비유하니,
'아둔한 업식 뭉치'라는 뜻이다.
*鶻鶻突突; 鶻鶻은 '흐리멍덩함', 突突은 塗塗 즉 '농후한 모양'을 뜻하니, 멍청하기 짝이 없다는 뜻이다.
*千峰萬峰; 여기서는 팔만장경이나 조사의 가르침 등의 무수한 것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
*落花流水; '꽃이 떨어진 삭막한 풍경'으로 '얻어 맞고 대패(大敗)함'에 비유한다.
落花流水 太茫茫은 落花紛紛 流水茫茫. '꽃 떨어져 어수선히 흩날리면 흐르는 물이 아득하다' 함은
'일단 대패하고 나면 앞 길이 막막해진다'는 뜻이다.
*一對眼; 頂門 一隻眼의 대칭 위치인 '발바닥에 달린 눈'.
雪竇頌得甚好。 有轉身處。不守一隅。 便道眼裏塵沙耳裏土。 此一句頌蓮花峰庵主。 衲僧家到這裏。 上無攀仰下絕已躬。 於一切時中如癡似兀。 不見南泉道。 學道之人。如癡鈍者也難得。 禪月詩云。 常憶南泉好言語。 如斯癡鈍者還希。 法燈云。 誰人知此意。令我憶南泉。 南泉又道。 七百高僧。盡是會佛法底人。 唯有盧行者不會佛法。 只會道。 所以得他衣缽。 且道佛法與道相去多少。 |
설두의 송은 몹시 훌륭하다. 전신처(轉身處)가 있고 한 귀퉁이만을 고수하지 않았다. 곧 '눈 속의 진사(塵沙;티끌모래) 귀 속의 흙'이라 했는데, 이 한 구절은 연화봉 암주를 송한 것이다. 납승가(衲僧家)도 이 속에 이르면 위로는 붙잡아 볼 데가 없고, 아래로는 이미 제 몸도 끊겨서 언제나 바보 같이 얼이 빠진 듯하다. 보지 못했는가? 남전(南泉)이 이르기를, "도를 배우는 사람이 바보 둔치 같아서는 얻기 어렵다." 하였는데, 선월(禪月*)은 시(詩)로 「늘 남전의 좋은 말들을 돌이켜보지만 바보 둔치 같은 사람은 도리어 드물다.」 하였고, 법등(法燈*)은 "뉘라서 이 뜻을 알리오? 나로 하여금 남전을 회상케 한다." 하였다. 남전이 또 이르되, "7백의 고승(高僧)들이 다 불법(佛法)을 아는 그런 사람이었고, 오직 노행자(盧行者*)가 있어 불법을 알지 않고 다만 도(道)를 알았다"고 하였으니, 그 때문에 그의 의발(衣缽)을 전해 얻은 것이다. 자, 말해보라. 불법과 도(道)는 서로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
*禪月; 禪月貫休禪師(法嗣未詳. 青原下七世)
貫休가 詩畫에 精通했기에 吳越의 武肅王 錢鏐이 그의 시화를 사랑하여 禪月이라는 호를 내렸다.
*法燈; 金陵清涼泰欽法燈禪師(法眼文益 法嗣)
*盧行者; 六祖慧能. 혜능의 성이 노(盧)씨이다.
雪竇拈云。 眼裏著沙不得。耳裏著水不得。 或若有箇漢。信得及把得住。 不受人瞞。 祖佛言教是什麼熱碗鳴聲。 便請高掛缽囊。拗折拄杖。 管取一員無事道人。 又云。眼裏著得須彌山。 耳裏著得大海水。 有一般漢。受人商量。 祖佛言教。如龍得水。似虎靠山。 卻須挑起缽囊。橫擔拄杖。 亦是一員無事道人。 復云。恁麼也不得。不恁麼也不得。 然後沒交涉。 |
설두가 염(拈)하여 이르기를, '눈 속에 모래 붙여도 안 되고, 귓 속에 물 붙여도 안 된다' 하였는데, 혹 이런 자가 있어 믿어 얻음이 붙들어 얻기에 이르면 속임을 당하지 않아서 불조(佛祖)의 언교(言教)를 이 무슨 같잖은 소리인가 하리니, 그저 발낭(缽囊;바랑) 높이 걸어 두고 주장자 요절내고서 반드시 무사도인(無事道人)의 일원(一員)이 되기를 청한 것이다. 또 '눈 속에 수미산을 얻어 붙이고, 귓 속에 대해수(大海水)를 얻어 붙여라' 하였는데, 일반인이 남의 상량(商量;思想,見解)을 받아들일 줄 안다면 불조의 언교는 용이 물을 얻음과 같고 범이 산을 만난 것과 같으리니, 도리어 발낭 추켜들고 주장자 빗겨 메는 이 또한 무사도인의 일원인 것인지라 다시 "이렇지도 않고, 저렇지도 않는다면 그런 뒤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
*熱碗鳴聲; 「뜨거운 사발 울음소리」란 사발 끓는 소리 요란함이 음식의 맛과는 같지 않다는 뜻이니,
「같잖은 소리」를 말한다.
*高掛缽囊; 禪林用語. 행각을 마치고 돌아와 바랑을 걸어 둔다는 것은
諸方을 다니며 參學한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묶어 둔다는 의미이다.
주장자를 요절낸다 함도 수행의 방편도구들을 떨쳐버린다는 것이다.
三員無事道人中。 要選一人為師。 正是這般生鐵鑄就底漢。 何故或遇惡境界。或遇奇特境界。 到他面前。悉皆如夢相似。 不知有六根。亦不知有旦暮。 直饒到這般田地。 切忌守寒灰死火。 打入黑漫漫處去。 也須是有轉身一路始得。 |
3원의 무사도인(三員無事道人*) 중에 한 사람을 골라서 스승을 삼고자 하는 바로 이런 자가 생철(生鐵)로 주물 만들어가는 사람인 것이다. 어째서인가? 혹 나쁜 상황을 만나거나 기이한 경우를 만나서 그것이 면전에 닥치면 모두가 꿈만 같고 육근(六根)이 있는지 단모(旦暮)가 있는지 조차 모르는데, 설령 그런 상황[田地]에 처하더라도 절대 한회사화(寒灰死火*)를 고수하면서 흑만만처(黑漫漫處*)로 들어가는 일을 삼가하여 몸 돌이킬 한 가닥 길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
*三員의 無事道人;
①眼裏著沙不得。耳裏著水不得。~ 敎法 조차도 좌단하는 無事.
②眼裏著得須彌山。耳裏著得大海水。~ 기왕 敎法을 쫓으려면 須彌山이나 大海水 같이 大成하는 無事.
③恁麼也不得。不恁麼也不得。然後沒交涉。~ 그도 저도 다 개연치 않는 無事.
*寒灰死火 黑漫漫處; '다 타고 남은 싸늘한 재가 되어서 까맣기만 한 곳'이란
다시는 불씨를 일으킬 수 없는 즉 회생의 희망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不見古人道。 莫守寒巖異草青。 坐卻白雲宗不妙。 所以蓮花峰庵主道。 為他途路不得力。 直須是千峰萬峰去始得。 且道喚什麼作千峰萬峰。 雪竇只愛他道楖?橫擔不顧人。 直入千峰萬峰去。 所以頌出。 且道向什麼處去。 還有知得去處者麼。 落花流水太茫茫。 落花紛紛。流水茫茫。 閃電之機。眼前是什麼。 剔起眉毛何處去。 雪竇為什麼也不知他去處。 只如山僧道適來舉拂子。 且道即今在什麼處。 爾諸人若見得。 與蓮花峰庵主同參。 其或未然。三條椽下。七尺單前。 試去參詳看。 |
알지 못하는가? 고인이 이르기를, "차가운 바위의 색다른 풀이 될 꿈을 꾸지 말고 백운(白雲*)에 앉으면 도리어 종지(宗旨)가 묘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연화봉 암주가 말하기를, '그것이 수행의 길에 힘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곧바로 천봉만봉으로 가야 한다'고 한 것이다. 자, 말해보라. 어떤 것을 천봉만봉이다고 하겠느냐? 설두는 다만 즐률 빗겨 메고 사람 돌아보지 않고서 곧 바로 천봉만봉으로 들어간다고 한 그의 말을 사랑했기에 그래서 송출(頌出)한 것이데, 말해보라.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이냐? 가는 곳을 아는 자가 있느냐? '낙화유수(落花流水*)하여 태망망(太茫茫)하다' 하였는데, 낙화분분(落花紛紛*)이면 유수망망(流水茫茫*)이다. 번뜩이는 기(機)가 "눈 앞에 이것이 무엇인가?" 할 것이다. '눈썹 치켜 세우고 어디로 가느냐?' 하였는데, 설두가 왜 그가 가는 곳을 몰랐겠는가? 다만 산승(山僧)이 저번에 불자(拂子)를 들고서 말한 "말해보라 지금 곧 어디에 있느냐?"와 같다. 여러분들이 만약 견득(見得)한다면 연화봉 암주와 더불어 동참(同參;同學)이겠지만 혹 그렇지 못하다면 삼조연하 칠척단전(三條椽下 七尺單前*)에서 상세히 참구하고 살피기를 시도해 가거라. |
*白雲; 흰구름이 자유로이 오가는 것으로 '집착을 여읜 자재함'에 비유하거나, 은거(隱居)에 비유한다.
*落花流水; 꽃이 떨어진 삭막한 풍경으로 얻어 맞고 대패한 것에 비유한다.
*落花紛紛 流水茫茫; '꽃 떨어져 어수선히 흩날리면 흐르는 물이 아득하다' 함은
일단 대패하고 나면 흐르는 물이 아득해진다, 즉 앞 길이 막막해진다는 뜻이다.
*三條椽下七尺單前; 승당 내 자기 이름을 써 붙인 좌상(座床)을 單位라 한다.
가로가 석 자인데 그 위로 서까래 세 개가 있기 때문에 '새 서까래 밑[三條椽下]'이라 하며,
그 밑에서 좌선하는 자를 '삼조연하객(三條椽下客)'이라 한다.
또 상(床) 세로는 6자인데 그 앞의 명판 넓이 1자를 더해 칠척단전(七尺單前)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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