宏智禪師는 趙州의 四門이 發心, 修行, 菩提, 涅槃이라 하였다.
垂示云。 | 수시(垂示) |
明鏡當臺。妍醜自辨。 鏌鎁在手。殺活臨時。 漢去胡來。胡來漢去。 死中得活。活中得死。 且道到這裏。又作麼生。 若無透關底眼轉身處。 到這裏灼然不柰何。 且道如何是透關底眼。 轉身處。 試舉看。 |
맑은 거울을 대에 걸면 곱고 추함이 자연히 판별되고, 막야검(鏌鎁劍*)을 손에 쥐면 죽이고 살리기를 때 맞춰 할 수 있거니와, 한인(漢人)이 가면 오랑캐가 오고, 오랑캐가 오면 한인이 가며,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고, 산 가운데서 죽는다. 말해보라. 이 속에 이르러서는 또 어찌 하겠는가? 관문을 뚫어낼 안목과 전신처(轉身處)가 없다면 여기에 이르러 분명 어찌 하지도 못할 것이다. 말해보라. 어떤 것이 관문을 뚫어내는 안목이며, 전신처(轉身處;몸 굴릴 곳)이겠는가? 예를 들어 살펴보자. |
*鏌鎁劍; 막사검(莫邪劍). 고대의 명검.
'막사(莫邪)'는 오나라의 저명한 주검장(鑄劍匠)인 간장(干將)의 아내이다.
두 사람이 오(吳)왕 합려(闔閭)를 도와 검을 주조하다가
음양(陰陽)의 두 검, 즉 양검인 간장(干將), 음검인 막사(莫邪)를 주조했다 한다.
선림(禪林)에서는 자신이 본래 구비하고 있는 지혜,
또는 스승과 막힘없이 대화 할 수 있는 학인의 지견(智見)에 비유한다.[佛光大辭典]
【九】舉 | 【제9칙】 조주(趙州)의 네 문[四門] |
僧問趙州。 如何是趙州 (河北河南。 總說不著。 爛泥裏有刺。 不在河南。正在河北) 州云。東門西門南門北門 (開也。 相罵饒爾接嘴。 相唾饒爾潑水。 見成公案。 還見麼。便打)。 |
어느 중이 조주(趙州)에게 물었다. "무엇이 조주(趙州)입니까?" (하북<河北>이든 하남<河南>이든 어떤 말로도 닿지 못하리니, 고운 진흙 속에 가시가 있구나. 하남에는 없고 바로 하북에 있다.)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 북문(北門)이다." (열었다. 서로 욕설을 퍼붓는데 새 부리를 이어주고, 침이 마를 지경인데 물을 뿌려주었으니, 견성공안<見成公案*>이로다. 보았느냐? 갑자기 후려치다.) |
*相唾饒爾潑水; 서로 침을 튀기며 논쟁을 하는데, (침이 마를까 염려하여)물을 뿌려준다.
*相罵饒爾接嘴; 서로 욕설이 난무하는데 새 부리를 이어준다.
두 용어가 다 '상대의 심행(心行)이 어떤 상황에도 제한 받지 않고
자유자재히 운행(運行)하도록 부추긴다'는 의미이다.
*見成公案; 現成公案. 조작(造作)하지 않고 현상 그대로에서 이루어지는 공안(公案),
즉 여실(如實)한 공안.
大凡參禪問道。 明究自己。 切忌揀擇言句。 何故 不見趙州舉道。 至道無難。 唯嫌揀擇。 又不見雲門道。如今禪和子。 三箇五箇聚頭口喃喃地。 便道。這箇是上才語句。 那箇是就身處打出語。 不知古人方便門中。 為初機後學。 未明心地。 未見本性。 不得已而立箇方便語句。 如祖師西來。單傳心印。 直指人心。見性成佛。 那裏如此葛藤。 須是斬斷語言。 格外見諦。 透脫得去。 可謂如龍得水。似虎靠山。 |
대체로 참선(參禪)하며 도(道)를 묻는 일은 자기를 밝혀 탐구하는 것이라서 절대 언구(言句)를 간택(揀擇)해서는 안되거니와, 어째서인가? 보지 못했는가? 조주는 (신심명을)들춰 이르되, "지극한 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간택(揀擇)을 꺼릴 뿐이다."고 하였고, 또 운문은 "요즘의 참선인(參禪人;禪和子)들은 삼삼오오 무리지어 입으로만 나불대면서 '이것은 상급 재능의 어구(語句)이고, 저것은 상황에 따라[就身處] 내뱉은 말이다'고 한다." 하였다. 고인이 방편문 안에서 초기(初機)의 후학(後學)들이 아직 심지(心地)를 밝히지 못하고 본성(本性)을 보지 못하는 것을 위해 부득이 그런 방편의 어구(語句)를 세웠다는 것을 모른다. 조사서래(祖師西來)나 단전심인(單傳心印)과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과 같은 것의 어느 것 속에 이와 같은 말들[葛藤]이 있던가? 모름지기 언어를 베어 끊어버리고 격외(格外)에서 참 이치를 보아 투철히 벗어나 갈 수 있어야 가히 용이 물을 얻고 범이 산을 의지함 같다 하리라. |
久參先德。有見而未透。 透而未明。 謂之請益。 若是見得透請益。 卻要語句上周旋。 無有凝滯。 久參請益。 與賊過梯。 其實此事不在言句上。 所以雲門道。 此事若在言句上。 三乘十二分教。 豈是無言句。 何須達磨西來。 汾陽十八問中。 此問謂之驗主問。 亦謂之探拔問。 |
선덕(先德)에게 견(見)이 있으나 뚫지 못한 것, 뚫었으나 밝히지 못한 것을 오래 참(參)하는 것을 청익(請益)이라 하거니와, 만약 견(見)이 뚫리고서 청익하는 것이라면 어구상(語句上)을 맴돌아 응체(凝滯)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구참(久參)의 청익은 도적에게 타고 넘을 사다리를 주는 것이라서 사실 이 일은 언구상(言句上)에 있지 않는지라 그래서 운문(雲門)은 "이 일이 만약 언구상에 있는 것이라면, 삼승(三乘) 십이분교(十二分教)에 어찌 언구가 없을 것이며, 왜 달마(達磨)조사의 서래(西來)가 필요하겠는가?" 하였다. 분양(汾陽)의 18문(問) 중 이 질문을 험주문(驗主問*) 또는 탐발문(探拔問)이라 한다. |
*驗主問; 汾陽十八問 중 하나로 探拔問, 心行問이라고도 한다.
주(主)는 스승을 말하며, 제자가 질문을 통해 스승의 기략(機略)이
깊은지 얕은지를 시험한다 하여 험주문이라 한다.
[汾陽十八問] 請益問, 呈解問, 察辨問, 投機問, 偏僻問, 心行問, 探拔問, 警擔問, 置問問,
故問問, 借事問, 實問問, 假問問, 審問問, 徵問問, 明問問, 默問問.[人天眼目 참조]
這僧致箇問頭。也不妨奇特。 若不是趙州。也難抵對他。 這僧問如何是趙州。 趙州是本分作家。便向道。 東門西門南門北門。 僧云。某甲不問這箇趙州。 州云。爾問那箇趙州。 後人喚作無事禪。 賺人不少。 何故他問趙州。州答云。 東門西門南門北門。 所以只答他趙州。 爾若恁麼會。三家村裏漢。 更是會佛法去。 只這便是破滅佛法。 如將魚目比況明珠。 似則似是則不是。 |
저 중이 그 문두(問頭)를 던진 것은 기특하여 마지 않아서 조주(趙州)가 아니었다면 대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저 중이 “어떤 것이 조주입니까?”하고 묻자, 조주는 본분작가(本分作家)인지라 곧 답하여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다”고 하였고, “저는 그런 조주를 묻지 않았습니다.”고 하니, 조주는 “너는 어떤 조주를 물었느냐?”고 하였다. 후에 사람들이 '무사선(無事禪)을 만들어 사람을 속이는 것이 적지 않다. 왜냐하면 그가 조주를 묻자, 조주가 답하되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라는 것으로써 다만 그에게 조주를 답했기 때문이다' 하거니와, 너희가 이렇게 안다면 세 가구 사는 동네 시골놈인 것이요, 다시 불법(佛法)을 알러 간다는 것도 다만 이것이 곧 불법(佛法)을 파멸(破滅)시키는 것이니, 생선 눈깔을 가져다 명주(明珠)에 비하는 것과 같아서 비슷하다면 비슷하겠으나 이것이다 한다면 아닌 것이다. |
山僧道。不在河南。 正在河北。 且道是有事是無事。 也須是子細始得。 遠錄公云。末後一句。 始到牢關。 指南之旨不在言詮。 十日一風。五日一雨。 安邦樂業。 鼓腹謳歌。謂之太平時節。 謂之無事。 不是拍盲便道無事。 須是透過關捩子。 出得荊棘林。 淨裸裸赤灑灑。 依前似平常人。 由爾有事也得。 無事也得。七縱八橫。 終不執無定有。 |
산승이 “하남(河南)에는 없고, 바로 하북(河北)에 있다.”고 하였는데, 말해보라, 이것이 유사(有事)인가, 무사(無事)인가? 모름지기 자세(仔細)히 해야 하리라. 원록공(遠錄公*)이 말하기를, "말후일구(末後一句*)에야 비로소 뇌관(牢關*)에 이른다." 하였는데, 하남을 가리킨 취지는 언전(言詮*)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열흘에 한 번 바람불고, 닷새에 한 번 비내리며, 평안한 나라에서 생업을 즐기면서 배 두드리고 노래하는 것을 태평시절이라 하고, 무사(無事)하다고 하거니와, 박맹(拍盲*)을 곧 무사(無事)라 말하지 않는다. 모름지기 관려자(關捩子)를 뚫고 지나 형극(荊棘)의 숲을 벗어나야만 정라라적쇄쇄(淨裸裸赤灑灑*)하여 여전히 평상인(平常人)과 같을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유사(有事)거나 무사(無事)거나 간에 칠종팔횡(七縱八橫*)하면 결국 무(無)에도 유(有)에도 정착하지 않을 것이다. |
*遠錄公; 宋代禪僧 浮山法遠(991~1067). 九帶禪 창시자.
*末後一句; 末後句. 철저한 대오(大悟)의 극에 달하여 내뱉는 지극한 말.
*牢關; 미혹과 깨달음[迷悟] 사이의 단단한 관문(關門)을 말한다.
*言詮; 語言나 文字로 의미와 취지를 표현함. [佛光大辭典]
*拍盲; 눈을 사용하지 않고 마음으로 헤아려 사물을 인식하는 것.
*淨裸裸赤灑灑;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모양새.
*七縱八橫; '일곱 번 세로로, 여덟 번 가로로'란 종횡무진 자유자재히 한다는 뜻.
有般底人道。本來無一星事。 但只遇茶喫茶。遇飯喫飯。 此是大妄語。 謂之未得謂得。 未證謂證。 元來不曾參得透。 見人說心說性說玄說妙。 便道只是狂言。本來無事。 可謂一盲引眾盲。 |
어떤 사람은 '본래 한 눈금 만큼의 일도 없으니, 차를 만나면 차 마시고, 밥을 만나면 밥 먹는다.'고 하나 이는 크게 허망한 말인지라 이를 일러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 하고, 증(證)하지 못하고서 증했다 한다'고 하거니와, 원래 참구하여 투철히 얻은 적도 없이 누가 심성(心性)을 설하고, 현묘(玄妙)를 설하는 것을 보면 곧 '미친소리일 뿐이고, 본래 무사(無事)다'고 말하니, 가히 한 맹인이 여러 맹인을 인도한다 하겠다. |
殊不知。祖師未來時。 那裏喚天作地。喚山作水。 來為什麼祖師更西來。 諸方陞堂入室。說箇什麼。 盡是情識計較。 若是情識計較。 情盡方見得透。 若見得透。依舊天是天。 地是地。山是山。水是水。 |
전혀 모르는데, 조사께서 오시지 않았을 때인들 어찌 하늘을 땅이라 하고, 산을 물이라 했겠으며, 무엇을 위해 조사께서는 또 서쪽에서 오셨겠는가? 제방(諸方)이 승당입실(陞堂入室)하여 어떤 무엇을 설함이 모두 정(情)과 식(識)으로 계교(計較)함이거니와, 만약 이것이 정식(情識)의 계교라면 정(情)이 다해야 바야흐로 견(見)이 투철해질 것이요, 견이 투철해지면 의구(依舊)히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 산은 산, 물은 물일 것이다. |
古人道。 心是根。法是塵。 兩種猶如鏡上痕。 到這箇田地。 自然淨裸裸赤灑灑。 若極則理論。 也未是安穩處在。 到這裏。人多錯會。 打在無事界裏。 佛也不禮。香也不燒。 似則也似。 爭奈脫體不是。 纔問著。卻是極則相似 纔拶著。七花八裂。 坐在空腹高心處。 及到臘月三十日。 換手搥胸。已是遲了也。 |
고인(古人;永嘉의 證道歌)이 이르되, '마음은 근(根)이요, 법은 진(塵)이라, 두 가지가 마치 거울 위의 흔적과 같다.' 하였으니, 이러한 전지(田地)에 이르면 자연히 정라라적쇄쇄(淨裸裸赤灑灑)하겠으나, 만약 궁극의 법칙[極則]을 이치로 논한다면 아직 안온처(安穩處)에 있지 못한 것이거니와, 이 속에 이르러서 사람들이 대개 잘못 알고 무사(無事)한 경계 속에 빠져서 부처님께 절하지 않고, 향도 사르지 않는다는 것은 비슷하기야 비슷하겠지만 본질을 벗어나 옳지 못함을 어찌 하겠는가? 잠깐 물었을 때는 도리어 극칙(極則)과 흡사하다가도 약간만 내지르면 산산히 부셔져버리니, 속은 텅 빈 채로 마음만 높은 곳에 앉아 있다가 급기야 납월 삼십일(죽을 날)에 이르러 손으로 가슴을 쳐봐도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
這僧恁麼問。趙州恁麼答。 且道作麼生摸索。 恁麼也不得。不恁麼也不得。畢竟如何。這些子是難處。 所以雪竇拈出來。 當面示人。 |
저 중이 그렇게 묻고, 조주가 이렇게 답했는데, 자 말해보라, 어떻게 모색(摸索)할 것인지.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이렇게 안 해도 안 된다면 필경 어찌 할 것인가? 이것이 조금은 어려운 곳이다. 그래서 설두가 콕 찝어내 가져다가 당면(當面)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
趙州一日坐次。 侍者報云。大王來也。 趙州矍然云。大王萬福。 侍者云。未到和尚。 州云。又道來也。 參到這裏。見到這裏。 不妨奇特。 南禪師拈云。 侍者只知報客。 不知身在帝鄉。 趙州入草求人。 不覺渾身泥水。 這些子實處。諸人還知麼。 看取雪竇頌。 |
조주가 어느날 앉아 있는데, 시자가 “대왕께서 오십니다.” 하고 아뢰자, 조주가 놀라 두리번거리며 “대왕께서는 만복하소서!" 하니,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큰 스님.” 조주는 “오신다고 또 말해보아라.” 하였다. 참구가 여기에 이르고, 견해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기특하여 마지 않다. 남선사(南禪師;黃龍慧南)가 념(拈)하여 말하기를, "시자가 다만 손님을 아뢸 줄만 알고, 제몸이 황제의 본향(本鄕)에 있음을 모르고 있으니, 조주가 풀 속에 들어가 사람을 찾느라 저도 모르게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 작으나마 진실한 곳을 여러분들은 아는가? 설두의 송을 살펴 취하거라. |
句裏呈機劈面來 (響。魚行水濁。 莫謗趙州好) 爍迦羅眼絕纖埃 (撒沙撒土。 莫帶累趙州。 撈天摸地。作什麼) 東西南北門相對 (開也。那裏有許多門。 背卻趙州城。向什麼處去) 無限輪鎚擊不開 (自是爾輪鎚不到。開也) |
구(句) 속에 기(機)를 드러내 정면으로 쳐들어갔으나 (울려봤으나 물고기가 지나가니 물 흐려진 격이다. 조주를 비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삭가라안(爍迦羅眼*)에는 실낱같은 티끌마저 끊긴지라 (모래를 뿌리고 흙을 뿌리다니. 조주에게 누 끼치지 말라. 하늘을 붙들고 땅을 더듬어서 무엇 하겠느냐?) 동서남북문을 마주하여 (열려 있거늘, 어디에 그리 많은 문이 있기에 조주성(趙州城)을 등지고서 어디를 향해 가려느냐?) 무한윤추(無限輪鎚*)로 때려봐도 열리지 않는구나. (본디 네 윤추가 닿지 않아도 열려 있었다.) |
*無限輪鎚; 무한히 윤전(輪轉)하는 철추(鐵鎚).
趙州臨機。一似金剛王寶劍。 擬議即截卻爾頭。 往往更當面換卻爾眼睛。 這僧也敢捋虎鬚致箇問頭。 大似無事生事。 爭奈句中有機。 他既呈機來。 趙州也不辜負他問頭。 所以亦呈機答。 不是他特地如此。 蓋為透底人自然合轍。 一似安排來相似。 |
조주의 임기응변은 하나 같이 금강보검과 같아서 요리조리 궁리하다보면 곧 너희의 머리가 잘려나가거나 때로는 코 앞에서 너희의 눈동자를 바꿔버린다. 저 중이 감히 호랑이 수염을 건드리며 질문을 던졌으니, 무사(無事)에서 일을 낸 것과 꼭 같지만 구(句) 속에 기(機)가 있음을 어찌 하겠는가? 그가 기왕 기를 드러내 오니, 조주도 그의 문두(問頭)를 저버리지 않고자 하여 그 때문에 또한 기를 건네 답한 것이요, 그의 특별한 처지가 그와 같아서가 아니다. 대개 투저인(透底人*)은 자연스레 합철(合轍*)되어 하나로 편안히 다가오는 것과 같다. |
*透底人; 철저히 투득한 사람.
*合轍; 두 바퀴가 짝을 이루고 구르는 모양을 지칭하는 것으로,
피차간에 사상과 언행이 합치함을 비유한 말이다.
不見有一外道。 手握雀兒。來問世尊云。 且道某甲手中雀兒。 是死耶是活耶。 世尊遂騎門閫云。 爾道我出耶入耶 (一本云。世尊豎起拳頭云。 開也合也) 外道無語。遂禮拜。 此話便似這公案。 古人自是血脈不斷。 所以道。問在答處。 答在問處。 雪竇如此見得透。 便道句裏呈機劈面來。 句裏有機。 如帶兩意。又似問人。 又似問境相似。 趙州不移易一絲毫。 便向他道。 東門西門南門北門。 |
보지 못했는가? 어느 외도가 손에 참새를 쥐고 와서 세존께 여쭈기를, “말해 보십시오. 제 수중의 참새가 죽었겠습니까? 살았겠습니까?” 하니, 세존께서 문지방으로 나아가 올라서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말해보라. 내가 나가겠느냐, 들어오겠느냐?” (어떤 본<本>에는 세존께서 주먹을 세워 들고서 "펴겠느냐, 쥐겠느냐?"고 하셨다고 되어 있다.) 외도는 대답을 못하고 이윽고 예배하였다는데, 이 이야기가 이 공안과 흡사하다. 고인 스스로 혈맥(血脈)이 끊기지 않았는지라 그래서 질문은 답에 있고, 답은 질문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설두(雪竇)는 이와 같이 견(見)에 투철함을 얻어 '구 속에 기를 드러내 정면으로 쳐들어 왔다'고 하였는데, '구 속에 있는 기(機)'란 두 의미를 띤 듯하여 사람을 묻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경계를 묻는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이다. 조주는 추호도 꼼짝하지 않고, 곧 그에게 답하되,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다"고 하였다. |
爍迦羅眼絕纖埃。 此頌趙州人境俱奪。 向句裏呈機與他答。 此謂之有機有境。 纔轉便照破他心膽。 若不如此難塞他問頭 爍迦羅眼者。是梵語。 此云堅固眼。亦云金剛眼。 照見無礙。 不唯千里明察秋毫。 亦乃定邪決正。辨得失。 別機宜識休咎。 |
'삭가라안(爍迦羅眼)에는 섬애(纖埃)마저 끊겼다.' 하였는데, 이 송(頌)은 조주가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아버리고서 구(句) 속에 기(機)를 드러내 그에게 답해 주었으니, 이를 '기(機*)가 있고 경(境*)이 있다'고 하거니와, 잠깐 굴려 곧 비춰 보고 그의 심지와 담력을 파악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문두(問頭)를 막아내기 어려웠으리라. 삭가라안(爍迦羅眼)이란 범어로서, 이는 견고안(堅固眼), 또는 금강안(金剛眼)을 말하며, 비춰 봄이 무애(無礙)하여 천리 밖 추호(秋毫*)를 환히 볼 뿐 아니라, 또한 사(邪)와 정(正)을 결정하고, 득과 실을 판단하고, 기의(機宜*)를 분별하며, 휴구(休咎*)를 인식한다. |
*機와 境; 機는 내적 마음의 작용, 境은 외적 형상을 갖춘 사물.
예컨대, 세존의 염화(拈花)가 경(境)이라면,
가섭이 그 의미를 알고 파안미소(破顏微笑)한 것이 기(機)이다.
*秋毫; 가을철에 털갈이를 하여 새로 돋아나는 짐승의 가는 털. {비유} 극히 적음.
*機宜; 시기(時期)나 형편에 알맞음. 중생에게 선근이 있어 교화하기에 알맞음.
*休咎; 길(吉)한 것과 흉(凶)한 것. 복(福)과 화(禍).
雪竇云。東西南北門相對。 無限輪鎚擊不開。 既是無限輪鎚。 何故擊不開。 自是雪竇見處如此。 爾諸人又作麼生。 得此門開去。 請參詳看。 |
설두는 '동서남북문을 상대하여 무한윤추로 때려봐도 열리지 않는다.' 하였는데, 기왕에 이것이 무한히 윤전하는 철추라면 어째서 때려도 열리지 않겠는가? 애초에 설두의 견처(見處)는 이러하다지만 여러분들은 또 어떻게 이 문을 열어가겠는가? 청컨대, 자세히 참구하여 살피기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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