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을 特定하면 形相도 그려내고 數도 헤아릴 수 있겠지만
一乘法은 不二法이라 東西南北도 凡聖, 龍蛇도 없어서 特定할 것이 없다.
그저 前三三後三三 서로 어우러져 因緣따라 成住壞空하는 實相法인 것이다.
垂示云。 | 수시(垂示) |
定龍蛇分玉石。 別緇素決猶豫。 若不是頂門上有眼。 肘臂下有符。 往往當頭蹉過。 只如今見聞不昧。 聲色純真。 且道是皂是白。 是曲是直。 到這裏作麼生辨。 |
용사(龍蛇)를 정하고 옥석(玉石)을 가리거나 치소(緇素)를 분별하고 유예(猶豫*)를 결정함에는 정문(頂門) 위에 달린 눈이나 팔꿈치 밑에 감춘 부적이 있지 않다면 왕왕 그 자리에서 바로 어긋나버리지만 다만 지금의 보고 들음이 미혹하지만 않다면 소리와 빛깔[聲色]이 순수하고 참될 것이다. 자, 말해보라. 이것이 검은가 흰가? 굽은 것인가 곧은 것인가? 이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변별(辨別)할 것인가? |
*猶豫; 망설여 결정하지 못함(遲疑不決). [百度百科]
*肘臂下有符; 팔꿈치 아래 즉 소매깃 속에 넣고 다니는 호신부(護身符).
위기에 대응할 비장의 수단.
*當頭; 말 끝나자 마자(猶言直下), 그 자리에서(當下). [佛學大辭典]
【三五】舉。 | 【제35칙】 문수(文殊)의 전후삼삼(前後三三) |
文殊問無著。 近離什麼處 (不可不借問。 也有這箇消息) 無著云。南方 (草窠裏出頭。 何必擔向眉毛上。 大方無外。 為什麼卻有南方) 殊云。南方佛法。如何住持 (若問別人則禍生。 猶掛唇齒在) 著云。末法比丘。 少奉戒律 (實頭人難得) 殊云。多少眾 (當時便與一喝。 一拶拶倒了也) 著云。或三百或五百 (盡是野狐精。 果然漏逗) |
문수(文殊)가 무착(無著)에게 물었다. "근래 어디에 있었느냐?"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래야 어떤 소식이 있을 것이다.) "남방(南方)에 있었습니다." (잡초덤불[草窠*] 속을 빠져나올 것이지 하필 눈썹 위에 짐을 지우는 것이며, 대방<大方*>은 외부가 없거늘 무슨 또 남방<南方>이 있다는 것이냐?) "남방의 불법(佛法)은 어떻게 지켜지더냐?" (다른 사람에게 물은 즉 화<禍>가 생기니, 입술을 깨물고 있어야 했다.) "말법(末法)시대 비구들이 적으나마 계율을 받들고 있었습니다." (정말 사람 찾아보기 어렵다.) "그 대중이 얼마나 되던가?" (당시에 바로 일할<一喝>해 주고 한 번 윽박질러 쓰러뜨려버릴 것을.) "삼백이나 오백 쯤 됩니다." (모두가 야호정<野狐精*>이라 알고보면 실은 잘못 된 것[漏逗]이다.) |
無著問文殊。 此間如何住持 (拶著。便回轉鎗頭來也) 殊云。凡聖同居龍蛇混雜 (敗缺不少。直得腳忙手亂) 著云。多少眾 (還我話頭來。也不得放過) 殊云。前三三後三三 (顛言倒語。 且道是多少。 千手大悲數不足)。 |
무착이 문수에게 물었다. "이런 때는 어떻게 지켜가야 합니까?" (내질렀으니, 창끝이 갑자기 되돌려졌다.) "범부와 성인이 함께 살고 용과 뱀이 섞여 지낸다." (빈틈이 많아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는구나.) "그 무리가 얼마나 됩니까?" (내게 화두를 돌려 오다니, 그냥 봐줄 수 없다.) "전삼삼후삼삼(前三三後三三)이니라." (말이 뒤바뀌었다. 자, 말해보라. 이것이 얼마나 되는가? 천수<千手>로 베푸는 대비의 수도 부족하다.) |
*草窠; 잡초덤불. 갈등(葛藤)과 동의어.
*出頭; 비참한 지경이나 협박 혹은 곤경 속에서 벗어나는 것. [百度百科]
*擔向眉毛上; 눈썹은 눈에 티끌 먼지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인데
그 위에 짐을 지운다는 것은 갈등을 차단하려는 데다 오히려 갈등을 더한다는 뜻.
*大方; 모든 방면을 아우르는 평등무애한 경지.
*掛唇齒; (삼키지 않으려, 말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다.
禪林에서는 상대방의 말에 구애되어서는 그 진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에 비유하여 쓴다. [佛光大辭典]
*一拶拶倒了; '1찰(拶)로 윽박질러 넘어뜨리다'. 찰(拶)은 '핍박하다'.
*野狐精; '들여우(野狐)의 혼'이니 변신하여 사람을 잘 속인다는 의미로
선림에서는 '자칭 견성(見性)했노라 남을 기만하는 자'에 비유하여 쓰인다.
*漏逗; ①알면서도 부득이 범하는 잘못. ②소홀(疏忽), 과실, 실수.
*敗缺; ①把柄(약점,꼬투리), 漏洞(빈틈,틈새,구멍) ②손해. [中國語辭典]
*腳忙手亂; 당황하여 어째야 좋을지 몰라하는 모양새.[百度百科]
*前三三後三三; 앞에도 세 겹에 또 세 겹, 뒤에도 세 겹에 또 세 겹이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
無著遊五臺。 至中路荒僻處。 文殊化一寺。 接他宿。遂問。 近離甚處。 著云。南方。 殊云。南方佛法。如何住持。 著云。末法比丘。 少奉戒律。 殊云。多少眾。 著云。或三百或五百。 無著卻問文殊。 此間如何住持。 殊云。凡聖同居龍蛇混雜。 著云。多少眾。 殊云。前三三後三三。 |
무착(無著*)이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도중에 황폐한 벽지에 이르니, 문수(文殊)가 한 절을 화현(化現)시켜 그를 맞이하고서 이윽고 물었다. "요새 어디 있었느냐?" "남방(南方)입니다." "남방의 불법은 어떻게 주지하더냐?" "말법시대의 비구들이 적으나마 계율을 받들더이다." "대중은 얼마나 되더냐?" "삼백이나 오백 쯤 됩니다." 무착이 꺼꾸로 문수에게 물었다. "이런 틈에서는 어떻게 주지해야 합니까?" "범부와 성인이 같이 살고, 용과 뱀이 뒤섞여 지낸다." "대중은 얼마나 됩니까?" "전삼삼후삼삼(前三三後三三)이다." |
卻喫茶。 文殊舉起玻璃盞子云。 南方還有這箇麼。 著云。無。 殊云。尋常將什麼喫茶。 著無語遂辭去。 文殊令均提童子。 送出門首。 無著問童子云。 適來道前三三後三三。 是多少。 童子云。大德 著應喏。 童子云。是多少。 又問此是何寺。 童子指金剛後面。 著回首。 化寺童子。悉隱不見。 只是空谷。 彼處後來謂之金剛窟。 |
차를 마신 뒤에 문수가 유리잔을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남방에도 이런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무엇으로 차를 마시느냐?" 무착이 대답을 못하고, 인사하고 떠나려 하니, 문수가 균제(均提)동자에게 문밖까지 전송하게 하였다. 무착이 동자에게 "좀 전에 말씀하신 전삼삼후삼삼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동자가 "대덕(大德)!" 하고 불렀다. 무착이 대답하자, 동자가 "이것은 얼마나 됩니까?" 하더니 또 "이것은 무슨 절이오?" 하며 금강야차(金剛夜叉)의 후면을 가리켰는데, 무착이 고개를 돌려 보니, 화현했던 절과 동자가 다 사라져 보이지 않고, 텅 빈 골짜기 뿐이었다. 그 곳이 그 뒤로 금강굴(金剛窟)이라 전해 온다. |
*無著; 杭州無著文喜禪師(仰山慧寂 法嗣) 南嶽下五世
〈五燈會元〉無著文喜禪師章에
「姓은 朱氏, 七歲에 本邑의 常樂寺에 몸을 의탁하여 國清에 의해 出家剃髮한 뒤
율법을 익히고 교법을 듣던 중 會昌法亂을 만나 승복을 벗고 숨어 살았다.
대중(大中)년 초에 鹽官의 齊峯寺에서 지난 일을 거듭 참회하며 용서를 빌다가
後에 大慈山 性空禪師를 參謁하였는데,
성공이 "너는 왜 한 곳에서 꾸준히 參學하지 못하느냐?" 하자,
곧바로 五臺山 華嚴寺로 가서 金剛窟에 이르러 禮를 올리던 중
소를 끌고 가는 한 노인을 만나 절에 이끌려 들어갔다.
노인이 "균제(均提)야!" 부르니, 한 동자가 나와 맞아들였다.
노인은 소를 풀어두고 법당으로 안내했는데,
법당이 온통 금빛으로 찬란하였다.
노인은 상(牀)에 걸터 앉아 걸상에 앉으라고 하였다.」
이 후로 本則의 談話가 이어진다.
後有僧問風穴。 如何是清涼山中主。 穴云。一句不遑無著問。 迄今猶作野盤僧。 |
후에 어느 중이 풍혈(風穴)에게 물었다. "무엇이 이 청량산(清涼山)중의 주인입니까?" 풍혈은 "무착에게 1구(句) 물을 틈이 없이 여태껏 야반승(野盤僧*) 노릇을 한다" 하였다. |
若要參透平平實實。 腳踏實地。 向無著言下薦得。 自然居鑊湯爐炭中。 亦不聞熱。 居寒冰上亦不聞冷。 若要參透使孤危峭峻。 如金剛王寶劍。 向文殊言下薦取。 自然水灑不著風吹不入。 |
만약 투철히 참구하여 평평실실(平平實實*)히 실지(實地)를 밟으려거든 무착의 언하(言下)에 깨달아 얻어야 자연히 확탕(鑊湯), 노탄(爐炭) 속에 있어도 뜨거운 줄 모르고, 찬 얼음 위에서도 차가운 줄 모를 것이며, 또 참투(參透)하여 홀로 위태로이 우뚝 솟아서 마치 금강왕 보검 같아지려거든 문수의 언하에 깨달아 얻어야 자연히 물에 던져지지도 않고, 부는 바람에 휩쓸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
*野盤僧; 사방을 쉴새없이 바삐 쏘다니는 스님.
산야(山野)에 노숙하는 행각승.[佛光大辭典]
*平平實實; 平坦嚴實. 평범하고 실답게. 꾸밈 없이 진실하게.
*腳踏實地; 착실하고 온건(穩健)히 일을 처리함에 비유하는 말.
不見漳州地藏問僧。 近離甚處。 僧云。南方。 藏云。彼中佛法如何。 僧云。商量浩浩地。 藏云。爭似我這裏種田博飯喫。 且道與文殊答處。是同是別。 |
모르는가? 장주(漳州) 지장(地藏*)이 어떤 중에게 "요새 어디 있다 왔느냐?" 물으니, 그 중이 "남방입니다." 하였다. 지장이 "그 가운데의 불법은 어떻드냐?" 하니, 중이 "거론하기에는 너무 넓습니다." 하자, 지장은 "내가 여기서 밭에 씨뿌려 그저 밥이나 먹는 것만 하겠더냐?" 하였는데, 말해보라. 문수가 대답한 곳과 같은가 다른가? |
有底道。無著答處不是。 文殊答處。也有龍有蛇。 有凡有聖。 有什麼交涉。 還辨明得前三三後三三麼。 前箭猶輕後箭深。 且道是多少。 若向這裏透得。 千句萬句。只是一句。 若向此一句下。 截得斷把得住。 相次間到這境界。 |
어떤 자들은 '무착의 답처는 틀렸고, 문수의 답처야말로 용도 뱀도 있고, 범부도 성인도 있다'고 말하지만 무슨 교섭이 있겠으며, 그래서야 전삼삼 후삼삼이 판명되겠는가? 앞 화살은 오하려 얕고 뒷 화살이 깊이 박혔는데, 말해보라. 이것이 얼마나 되는지. 만약 그 속을 향해 투득하면 천 구(句), 만 구가 다만 이 한 구이니, 이 한 구 하에서 잘라 끊어내고, 붙들어 안주한다면 머지 않아 그 경계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
*地藏; 漳州羅漢院桂琛禪師(867~928; 玄沙師備 法嗣)
玄沙의 인가를 받은 뒤, 漳州 州牧이 閩城 서쪽 石山에 地藏院을 세우고
선사를 청해 법을 펼치게 하니, 18년을 駐錫하는 동안 學徒가 200餘人이 모였다.
【설두의 송(頌)】 | |
千峰盤屈色如藍 (還見文殊麼) 誰謂文殊是對談 (設使普賢也不顧。 蹉過了也) 堪笑清涼多少眾 (且道笑什麼。 已在言前) 前三三與後三三 (試請腳下辨看。 爛泥裏有刺。 碗子落地楪子成七片) |
일천 봉이 구비구비 얽혀 쪽빛이거늘 (문수가 보이겠느냐?) 뉘라서 문수가 대담한 것이다 하리오? (설사 보현이라 해도 돌아보지 않고 지나쳐버린다.) 우습구나. 청량산 대중이 얼만가 하니, (말해보라. 무엇이 우스운가? 말하기 전에도 이미 있었다.) 전삼삼 후삼삼이라네. (자기 처지를 한 번 헤아려 살펴보라. 진흙 속에 가시가 있는지, 사발이 땅에 떨어져 일곱 조각이 났는지.) |
千峰盤屈色如藍。 誰謂文殊是對談。 有者道。 雪竇只是重拈一遍。 不曾頌著。 只如僧問法眼。 如何是曹源一滴水。 眼云。是曹源一滴水。 又僧問瑯琊覺和尚。 清淨本然 云何忽生山河大地。 覺云。清淨本然 云何忽生山河大地。 不可也喚作重拈一遍。 |
'일천 봉이 구비구비 얽혀 쪽빛 같은데 누가 문수가 한 얘기라고 하겠는가?'를 어떤 자들은 '설두가 중복해서 념한 것[重拈]의 하나일 뿐 송을 지어 붙인 것이 아니다'고 하는데, 그러나 어느 중이 법안(法眼)에게 '무엇이 조계(曹溪)의 근원 한 방울 물입니까?' 하니, '그것이 조계 근원인 한 방울 물이다' 한 것이나, 또 어떤 중이 낭야각(瑯琊覺*)화상에게 "청정하여 본래 그대로인데 어째서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깁니까?" 묻자, 각(覺)화상이 "청정하여 본래 그대로인데 왜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기겠느냐?" 한 것과 같은 중복된 념(拈)이라고 할 수 없다. |
明招獨眼龍。亦頌其意。 有蓋天蓋地之機道。 廓周沙界勝伽藍。 滿目文殊是對談。 言下不知開佛眼。 回頭只見翠山巖。 廓周沙界勝伽藍。 此指草窟化寺。 所謂有權實雙行之機。 |
명초(明招) 독안룡(獨眼龍*)도 그 뜻을 송(頌)했는데, 하늘을 가리고 땅을 덮는 기틀의 도가 있다. 「모래알 같은 세계 안의 승가람(勝伽藍*)에 가득한 눈이 문수의 이 대담을 보아도 말 끝에 불안(佛眼)을 열 줄 모르고 고개 돌려 먼 산 바위만 바라보는구나.」 '항하사 세계 범주 안의 승가람(勝伽藍)' 이는 초굴(草窟)이 변한 절을 말하니, 이른바 권(權)과 실(實)을 동시에 행하는 기법이다. |
*瑯琊覺; 滁州琅邪山慧覺廣照禪師(汾陽善昭 法嗣) 南嶽下十世
*明招獨眼龍; 婺州明招德謙禪師(德山_巖頭_羅山道閑 法嗣) 青原下七世
*勝伽藍(sajghārāma); 僧伽藍摩. 僧伽藍. 意譯하여 僧院. 寺院.
*權實; 권모(權謀)와 진실(真實). 善權方便 즉 시의적절한 법을 권(權)이라 하고,
구경히 불변하는 법을 실(實)이라 한다.
十雙權實; 事理, 理教, 教行, 縛脫, 因果, 體用, 漸頓, 開合, 通別, 悉檀.
滿目文殊是對談。 言下不知開佛眼。 回頭只見翠山巖。 正當恁麼時。 喚作文殊普賢觀音境界得麼。 要且不是這箇道理。 雪竇只改明招底用。 卻有針線。 |
'가득한 눈이 문수의 대담을 보았거늘 말 끝에 불안(佛眼)을 열 줄 모르고 고개 돌려 푸른 산 바위만 바라보네.' 하였는데, 정녕 이런 때를 당해서야 문수, 보현, 관음의 경계를 지어 얻겠는가? 사실인 즉[要且] 그런 도리(道理)가 아니니, 설두가 명초(明招)의 것을 손질해 썼으나 도리어 재봉선[針線;흠집]을 남긴 것이다. |
*要且; 卻是(사실인 즉. 알고본 즉. 결국. 역시.)
千峰盤屈色如藍。 更不傷鋒犯手。 句中有權有實。 有理有事。 |
'일천 봉이 구비구비 얽혀 쪽빛이다'는 절대 봉(鋒)이나 손에 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구(句) 중에 권(權)도 실(實)도 있고, 이(理)도 사(事)도 있다. |
誰謂文殊是對談。 一夜對談。不知是文殊。 後來無著。在五臺山作典座。 文殊每於粥鍋上現。 被無著拈攪粥篦便打。 雖然如是。 也是賊過後張弓。 當時等他道南方佛法。 如何住持。 劈脊便棒。猶較些子。 |
'누가 문수가 대담한 것이라 하겠는가?' 하였는데, 하룻 밤을 대담했으나 문수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후에 무착이 오대산 전좌(典座)로 있을 때 문수가 죽냄비 위에 나타날 때마다 무착으로부터 죽 젓는 주걱으로 두들김을 당했지만 비록 그리 했더라도 또한 도적 지나간 뒤에 활 당긴 격이거니와, 오히려 그가 '남방의 불법은 어찌 주지하더냐?'라고 했을 당시에 등짝에 몽둥이질을 했어야 조금은 나았다. |
堪笑清涼多少眾。 雪竇笑中有刀。 若會得這笑處。 便見他道前三三與後三三。 |
'청량산에 대중이 얼마냐 하다니, 우습다' 하니, 설두스님의 웃음 속에 칼이 숨겨져 있거니와, 만약 그 웃은 이유를 알면 곧 그가 말한 '전삼삼 후삼삼'을 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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