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각 문득 일어나면 이 생각이 기쁘게 하기도 하고 슬프게도 한다.
한 생각이라는 인(因)이 연(緣)을 따라 여러 갈래의 과(果)를 낳는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생사윤회이다.
이 생사윤회를 벗어나려거든 한 생각 있기 이전,
즉 아무런 법이 없었던 바로 그 시절로 돌아가서 상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해서 한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 생각이란 불쑥 일어났다가 어느듯 사라지는 허망한 것이니,
이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槃山; 盤山. 幽州盤山寶積禪師(馬祖道一 法嗣) 南嶽下二世.
垂示云。 | 수시(垂示) |
掣電之機徒勞佇思。 當空霹靂。掩耳難諧。 腦門上播紅旗。 耳背後輪雙劍。 若不是眼辨手親。 爭能搆得。 有般底。低頭佇思。 意根下卜度。 殊不知髑髏前見鬼無數。 且道不落意根。 不抱得失。 忽有箇恁麼舉覺。 作麼生祗對。 試舉看。 |
번개치듯 하는 기(機)에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공중의 벽력(霹靂)을 당하면 귀를 막아도 소용이 없다. 이마 위에서는 홍기(紅旗)가 번뜩거리고 귀 뒤에서는 쌍검(雙劍)이 휙휙 돌아가는데 눈썰미 좋고 손놀림이 정확한 놈이 아니라면 어찌 헤쳐나갈 수 있겠는가? 어떤 자들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의근(意根) 하에서 복탁(卜度*)해보지만 죽기 전에 무수한 귀신이 보인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자 말해보라. 의근(意根)에 떨어지지 않고 득실(得失)에 사로잡히지도 않고서 홀연히 그렇듯 깨달음을 들춰내려면 어떻게 대해야만 하겠는가? 예를 들어 살펴보자. |
*佇思; 沉思(깊이 생각하다). 凝思(생각에 잠기다. 골똘히 생각하다)
*難諧; 서로 화합하기 어려움.
*眼辨手親; '눈썰미가 예리하고 손놀림이 정확함'을 형용하는 말. 手親眼便.
*卜度; 추측하다. 짐작하다. 가늠하다.
【三七】舉。 | 【제37칙】 반산(盤山)의 삼계에 어떤 법도 없다 |
盤山垂語云。 三界無法 (箭既離弦無返回勢。 月明照見夜行人。 中也。識法耆懼。 好和聲便打) 何處求心 (莫瞞人好。 不勞重舉。自點檢看。 便打云。是什麼)。 |
반산(盤山)이 수어(垂語)하되, "삼계(三界)가 무법(無法)인데 (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돌아 올 기세가 없다가, 달이 밝으면 내가 밤길을 다녔음을 비춰 알리라. 맞다. 법을 알면 두려워지는 것이니 그 소리에 화답하여 무릎을 치겠다.) 어디서 마음을 구하겠느냐?" 하였다. (사람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쓸데 없이 또 들추지 말고 스스로를 점검해 보라. 무릎을 치며 "이 무엇고?") |
向北幽州盤山寶積和尚。 乃馬祖下尊宿。 後出普化一人。 師臨遷化謂眾云。 還有人邈得吾真麼。 眾皆寫真呈師。 師皆叱之。普化出云。 某甲邈得。 師云。何不呈似老僧。 普化便打筋斗而出。 師云。這漢向後 如風狂接人去在 |
북방 유주(幽州)의 반산보적(盤山寶積) 화상은 저 마조(馬祖) 하의 존숙(尊宿)이며, 뒤로는 보화(普化*) 한 사람만 나왔다. 선사가 천화(遷化)에 임하여 대중에게 일러 "누가 내 진영(眞影)을 그려보겠느냐?" 하니, 대중이 다 진영을 그려 선사에게 드렸는데, 선사가 그 모두를 못마땅해 하자, 보화(普化)가 나서서 "제가 그려냈습니다." 하였다. 선사가 "왜 내게 가져오지 않았느냐?" 하니, 보화가 갑자기 때려 곤두박아버리고 나가버리자, 선사가 "저 놈이 나중에 미친듯이 사람들을 접인(接引)해 갈 것이다." 하였다. |
一日示眾云。 三界無法。何處求心。 四大本空。佛依何住。 璿璣不動。寂止無痕。 覿面相呈。更無餘事。 雪竇拈兩句來頌。 直是渾金璞玉。 不見道。 瘥病不假驢駝藥。 |
하루는 시중(示眾)하여 "삼계(三界)가 무법(無法)이거늘 어디서 마음을 구하겠으며, 사대(四大)가 본래 공(空)한데 부처가 어디에 머물러 있겠느냐? 한 생각도 꿈틀거리지 않아서[璿璣不動*] 흔적도 없이 고요히 멈추면 당면(當面;覿面)하여 드러날 뿐 다시 다른 일이 없다." 하였다. 설두(雪竇)가 이 두 구(句)를 콕찝어 송(頌)하기를 바로 이것이 혼금박옥(渾金璞玉*)이다고 하였는데, 들어보지 못했는가? 병의 치유(治癒)는 많은 약을 쓰는 데에 있지 않다 하였다. |
*普化; 鎮州普化和尚(盤山寶積 法嗣) 南嶽下三世
*風狂; 미치다. 미친듯이 날뛰다.
*璿璣不動; 한 생각 나기 이전(一念不生以前). 부모가 태어나기 이전(父母未生以前).
*渾金璞玉; 「다듬지 않은 본디 그대로의 금(金)과 옥(玉)」이라는 뜻으로
본래 청정한 근본 성품을 이르는 말.
*驢駝藥; 나귀나 낙타에 가득 실은 약, 즉 많은 약.
山僧為什麼道。和聲便打。 只為他擔枷過狀。 古人道。 聞稱聲外句。 莫向意中求。 且道他意作麼生。 直得奔流度刃。 電轉星飛。 若擬議尋思。 千佛出世。也摸索他不著。 若是深入閫奧。徹骨徹髓。 見得透底。 盤山一場敗缺。 若承言會宗左轉右轉底。 盤山只得一橛。 若是拖泥帶水。 聲色堆裏轉。 未夢見盤山在。 |
산승이 왜 '소리에 화답하여 곧 무릎을 친다'고 했겠는가? 다만 그에게 스스로 부족했음을 자백한 것이다. 고인이 이르기를, 소리 밖의 구(句)를 들어 헤아리고 뜻 속에서 구하려 하지 말라 하였거니와, 말해보라. 그의 뜻이 무엇인가? 곧바로 분류도인(奔流度刃*)하고 번개치고 유성이 나는 듯 해야 하거니와, 이리 저리 궁리하며 깊이 생각해서는 천 부처가 나올 때까지도 그를 모색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곤오(閫奧*)에 깊이 들어가 골수에 사무치도록 밑바닥까지 철저히 견득(見得)한 사람이었다면 반산(盤山)이 한바탕 낭패를 당했을 것이요, 말씀을 받들어 종지를 알고서 좌우로 자재히 굴리는 자였다면 반산은 다만 한 말뚝만 지키고 있었을 것이지만, 만약 진흙탕에 물 탄듯이 뒤엉켜 무성한 소리들 속에서 구른다면 꿈에도 반산(盤山)이 있는 곳을 보지 못할 것이다. |
*擔枷過狀; 擔枷(목에 칼을 쓰고서) 過狀(고소장을 제출한다)한다 함은
스스로 죄를 자백한다는 뜻이다.
*奔流度刃; '솟구치는 물줄기[奔流]에 칼을 건넨다[度刃]' 함은
물을 칼로 베되 칼에 물이 묻지 않는 신속함을 의미한다.
*閫奧; 내심(內心) 깊은 곳. 학문이나 이치적으로 심오한 곳.
*拖泥帶水; 「화니합수(和泥合水)」, 「회두토면(灰頭土面)」,
「화광동진(和光同塵)」과 같은 의미로
①깨친 뒤에 중생제도를 위해 군중 속에 투신하는 것을 지칭하는 말.
②말만 무성하다 하여 구두선(口頭禪)을 배척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五祖先師道。透過那邊 方有自由分。 不見三祖道。 執之失度必入邪路。 放之自然體無去住。 若向這裏。道無佛無法。 又打入鬼窟裏去。 古人謂之解脫深坑。 本是善因而招惡果。 所以道。無為無事人。 猶遭金鎖難。 也須是窮到底始得。 若向無言處言得。 行不得處行得。 謂之轉身處。 三界無法何處求心。 爾若作情解。 只在他言下死卻。 雪竇見處。七穿八穴。 所以頌出。 |
오조(五祖) 스승님은 "그 쪽을 뚫고 지나가야 비로소 자유분(自由分*)이 있다" 하셨다. 보지 못했는가? 삼조(三祖) 승찬대사는 "집착하면 법도를 잃어 반드시 삿된 길로 가고, 놓아버리면 자연 체(體)에 가고 머뭄이 없다" 하였거니와, 만약 그 속을 부처도 없고 법도 없다고 한다면 또 귀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고인이 이를 일러 '해탈의 깊은 구덩이'라 하였다. 본래 선인(善因)이던 것이 악과(惡果)를 불렀기에 그래서 말하기를, 무위무사인(無為無事人)이 오히려 금쇄난(金鎖難*)을 만난다고 한 것이니, 모름지기 끝까지 하여 밑바닥에 도달해야 한다. 만일 말 없는 곳에서 말을 얻고, 행하지 못할 곳에서 행한다면 이를 전신처(轉身處)라 한다. '삼계가 무법이거늘 어디서 마음을 구하리오' 하였는데, 너희가 만약 정해(情解)를 짓는다면 다만 그의 언하(言下)에서 죽어버리는 것이지만 설두의 견처(見處)는 칠천팔혈(七穿八穴*)하기에 그래서 이렇게 송출(頌出)하였다. |
*自由分; 어떠한 외력의 구속이나 간섭을 받지 않는 대자재한 경지.
*解脫深坑; '해탈에 집착하여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이 원만치 못함'에 비유하는 용어.
*金鎖難; 자물쇠의 어려움. 제 몸을 가두는 곤란함.
*七穿八穴; 七花八裂, 七縱八橫, 七通八達, 七顛八倒, 七支八節.
三界無法 (言猶在耳) 何處求心 (不勞重舉。自點檢看。 打云。是什麼) 白雲為蓋 (頭上安頭。千重萬重) 流泉作琴 (聞麼。相隨來也。 一聽一堪悲) 一曲兩曲無人會 (不落宮商非干角徵。 借路經過。五音六律盡分明。 自領出去。聽則聾) 雨過夜塘秋水深 (迅雷不及掩耳。 直得拖泥帶水。 在什麼處。便打) |
삼계(三界)에 법이 없거늘 (말이 아직도 귀전을 맴돈다.) 어디서 마음을 구하겠는가. (또 들추려 애쓰지 말고 스스로를 점검해 보라. 무릎을 치며 "이 무엇고?") 흰구름으로 일산(日傘)을 삼고 (머리 위에 머리를 얹으니 천 겹 만 겹이다.) 흐르는 개천으로 거문고를 삼아 (들리는가? 뒤따라서 한 번 들으면 한 번 슬퍼진다.) 한 곡, 두 곡 해보아도 아는 사람 없지만 (궁상<宮商>에 떨어지지 않으면 각치<角徵>와 무관하니, 길을 비켜 지나가면 5음6율<五音六律*>이 다 분명해진다. 스스로 나아가도록 하라. 들은 즉 귀가 먹으리라.) 야당(夜塘*)에 비가 지나가면 추수(秋水*)가 깊어지리라. (빠른 우레소리에 귀 막을 겨를이 없었을 텐데 곧바로 타니대수(拖泥帶水*)을 얻다니. 어디에 있던가? 무릎을 친다.) |
*五音六律; 五音은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六律은 12律 중 여섯 陽律.
*雨過夜塘秋水深; 夜塘은 어두운 밤의 연못이니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에의 비유요,
秋水는 가을날 호수의 물이니 맑고 아름다움에 비유하는 말이니,
미혹한 사람도 한 번 두 번 듣다보면 깨달음이 깊어진다는 뜻.
*拖泥帶水; 여기서는 진흙탕에 더할 물, 즉 오는 말에 더하여 답해줄 말.
三界無法何處求心。 雪竇頌得。一似華嚴境界。 有者道。雪竇無中唱出。 若是眼皮綻底。終不恁麼會。 雪竇去他傍邊。貼兩句道。 白雲為蓋。 流泉作琴。 蘇內翰見照覺。有頌云。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清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舉似人。 雪竇借流泉。 作一片長舌頭。 所以道。一曲兩曲無人會。 不見九峰虔和尚道。 還識得命麼。 流泉是命。湛寂是身。 千波競起是文殊家風。 一亘晴空。 是普賢境界。 |
'삼계무법(三界無法) 하처구심(何處求心)'이라고 설두가 읊었으니, 꼭 화엄경계(華嚴境界)와 같건만 혹자는 설두가 무(無) 가운데서 노래해냈다고 하는데, 눈꺼풀이 터진 놈이라면 결코 그렇게 알지 않기에 설두가 그 곁으로 가서 두 구(句)를 붙여 말하기를, '백운(白雲)으로 일산 삼고, 유천(流泉)으로 거문고 삼는다'고 하였다. 소내한(蘇內翰*)이 조각(照覺*)을 참견하여 게송으로 「계곡 소리가 곧 광장설(廣長舌*)이거늘 산빛[山色]이 어찌 청정신(清淨身)이 아니리오. 어제[夜來]의 8만4천 게(偈)를 다른 날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릴꼬?」 하였는데, 설두가 흐르는 개천[流泉]을 빌려 한 조각 장설(長舌)의 화두(話頭)를 던졌으니, 그래서 '한 곡 두 곡 해봐도 아무도 모른다'고 한 것이다. 보지 못했는가, 구봉건(九峰虔*) 화상이 말하기를, "목숨[命]을 아는가? 유천(流泉)이 목숨이요, 고요함[湛寂]은 몸[身]이거니와, 일천의 풍파가 다투어 일어나는 것이 문수(文殊)의 가풍(家風)이요, 하나로 펼쳐진 맑은 하늘은 보현(普賢)의 경계(境界)다" 하였다. |
*蘇內翰; 蘇는 蘇軾, 內翰은 翰林.
북송의 한림학자로 당송8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사람인 소식(蘇軾;1036~1101).
*照覺; 江州東林興龍寺常總照覺禪師(黃龍慧南 法嗣) 南嶽下十二世
*廣長舌; 32상의 하나로 길고, 유연하고, 붉고, 얇아서 머리털 끝까지 이르는 혀.
지도론(智度論)에 '이러한 혀를 지녔거늘 어찌 그 말이 진실하지 않으리오?' 하였으니,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이 진실한 말을 하는 혀를 뜻한다.
*長舌頭; 한가한 소리로 시비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나 그런 사람에 비유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장설(長舌)의 화두(話頭)'로 해석함이 옳겠다.
*九峯虔; 瑞州九峯道虔禪師(石霜慶諸 法嗣) 青原下五世
流泉作琴。 一曲兩曲無人會。 這般曲調。也須是知音始得。 若非其人。徒勞側耳。 古人道。 聾人也唱胡家曲。 好惡高低總不聞。 雲門道。 舉不顧即差互。 擬思量。 何劫悟。 舉是體。顧是用。 未舉已前。 朕兆未分已前見得。 坐斷要津。 若朕兆纔分見得。 便有照用。 若朕兆分後見得。 落在意根。 |
'유천(流泉)으로 거문고를 삼아 한 곡 두 곡 해보아도 아는 사람이 없다' 하였는데, 이런 곡조야말로 모름지기 지음(知音)이라야 하기에 그 사람이 아니면 헛되이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고인(古人;道場如訥*)이 이르기를, "귀머거리도 호가곡(胡家曲)을 부르지만 호악고저(好惡高低)를 다 듣지는 못한다" 하였으며, 운문(雲門)은 "들춰 주어도[舉] 돌아보지[顧] 않으면 틀렸다. 이럴까 저럴까만 해서야 어느 세월에 깨치겠느냐?" 하였는데, 들춘 것[舉]은 체(體)이고, 돌아봄[顧]은 용(用)이거니와, 들추기 이전이나 조짐이 아직 보이기 이전에 견득(見得)하여 요진(要津)을 좌단(坐斷)하라는 것이다. 만약 조짐이 잠깐 보이매 견득한다면 조용(照用;관조와 작용)이 있는 것이겠으나, 조짐이 나타난 뒤에야 견득한다면 의근(意根)에 떨어져 있는 것이다. |
雪竇忒殺慈悲。更向爾道。 卻似雨過夜塘秋水深。 此一頌曾有人論量。 美雪竇有翰林之才。 雨過夜塘秋水深。 也須是急著眼看。 更若遲疑。 即討不見。 |
설두가 지나친 자비로 다시 너희에게 "야당(夜塘)에 비가 지나가면 추수(秋水)가 깊어지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 송(頌)을 일찍이 어떤 사람이 논량(論量*)하여 "설두에게 한림(翰林)의 재능이 있다"고 찬미 하였다. 비가 야당을 지나면 추수가 깊어진다는 것에 모름지기 급히 착안하여 살펴야 하려니와, 다시 또 우물쭈물하다가는 당장 필요할 때 보지 못할 것이다. |
*古人; 安吉州道場山如訥禪師(翠微無學 法嗣) 青原下四世
*論量; 시비(是非)를 논의(論議)하다.
'碧巖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벽암록(碧巖錄) 제42칙 방거사(龐居士)의 호설편편(好雪片片) (0) | 2023.03.19 |
---|---|
벽암록(碧巖錄) 제41칙 조주(趙州)의 대사저인(大死底人) (0) | 2023.03.11 |
벽암록(碧巖錄) 제40칙 육긍(陸亘) 천지동근(天地同根) (0) | 2023.02.28 |
벽암록(碧巖錄) 제39칙 운문화약란(雲門花藥欄) (0) | 2023.02.21 |
벽암록(碧巖錄) 제38칙 풍혈(風穴)선사의 조사심인(祖師心印) (0) | 2023.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