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巖錄

벽암록(碧巖錄) 제37칙 반산(盤山)의 삼계무법(三界無法)

碧雲 2023. 3. 8. 08:10

 한 생각 문득 일어나면 이 생각이 기쁘게 하기도 하고 슬프게도 한다.

한 생각이라는 인(因)이 연(緣)을 따라 여러 갈래의 과(果)를 낳는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생사윤회이다. 

이 생사윤회를 벗어나려거든 한 생각 있기 이전,

즉 아무런 법이 없었던 바로 그 시절로 돌아가서 상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해서 한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 생각이란 불쑥 일어났다가 어느듯 사라지는 허망한 것이니, 

이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槃山; 盤山. 幽州盤山寶積禪師(馬祖道一 法嗣) 南嶽下二世. 

 

垂示云。 수시(垂示) 
掣電之機徒勞佇思。
當空霹靂。掩耳難諧。
腦門上播紅旗。
耳背後輪雙劍。
若不是眼辨手親。
爭能搆得。
有般底。低頭佇思。
意根下卜度。
殊不知髑髏前見鬼無數。

且道不落意根。
不抱得失。
忽有箇恁麼舉覺。
作麼生祗對。
試舉看。
번개치듯 하는 기(機)에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공중의 벽력(霹靂)을 당하면 귀를 막아도 소용이 없다.
이마 위에서는 홍기(紅旗)가 번뜩거리고
귀 뒤에서는 쌍검(雙劍)이 휙휙 돌아가는데
눈썰미 좋고 손놀림이 정확한 놈이 아니라면
어찌 헤쳐나갈 수 있겠는가?
어떤 자들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의근(意根) 하에서 복탁(卜度*)해보지만
죽기 전에 무수한 귀신이 보인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자 말해보라. 의근(意根)에 떨어지지 않고
득실(得失)에 사로잡히지도 않고서
홀연히 그렇듯 깨달음을 들춰내려면
어떻게 대해야만 하겠는가?
예를 들어 살펴보자. 

*佇思; 沉思(깊이 생각하다). 凝思(생각에 잠기다. 골똘히 생각하다)
*難諧; 서로 화합하기 어려움.
*眼辨手親; '눈썰미가 예리하고 손놀림이 정확함'을 형용하는 말. 手親眼便.
*卜度; 추측하다. 짐작하다. 가늠하다. 

 

 【三七】舉。  【제37칙】 반산(盤山)의 삼계에 어떤 법도 없다
   盤山垂語云。
   三界無法
   (箭既離弦無返回勢。
   月明照見夜行人。
   中也。識法耆懼。
   好和聲便打)
   何處求心
   (莫瞞人好。
   不勞重舉。自點檢看。
   便打云。是什麼)。
   반산(盤山)이 수어(垂語)하되,
   "삼계(三界)가 무법(無法)인데
   (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돌아 올 기세가 없다가,
   달이 밝으면 내가 밤길을 다녔음을 비춰 알리라.
   맞다. 법을 알면 두려워지는 것이니
   그 소리에 화답하여 무릎을 치겠다.)
   어디서 마음을 구하겠느냐?" 하였다.
   (사람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쓸데 없이 또 들추지 말고 스스로를 점검해 보라.
   무릎을 치며 "이 무엇고?") 

 

向北幽州盤山寶積和尚。
乃馬祖下尊宿。
後出普化一人。
師臨遷化謂眾云。
還有人邈得吾真麼。
眾皆寫真呈師。
師皆叱之。普化出云。
某甲邈得。
師云。何不呈似老僧。
普化便打筋斗而出。
師云。這漢向後
如風狂接人去在
북방 유주(幽州)의 반산보적(盤山寶積) 화상은
저 마조(馬祖) 하의 존숙(尊宿)이며,
뒤로는 보화(普化*) 한 사람만 나왔다.
선사가 천화(遷化)에 임하여 대중에게 일러
"누가 내 진영(眞影)을 그려보겠느냐?" 하니,
대중이 다 진영을 그려 선사에게 드렸는데,
선사가 그 모두를 못마땅해 하자, 보화(普化)가 나서서
"제가 그려냈습니다." 하였다.
선사가 "왜 내게 가져오지 않았느냐?" 하니,
보화가 갑자기 때려 곤두박아버리고 나가버리자,
선사가 "저 놈이 나중에
미친듯이 사람들을 접인(接引)해 갈 것이다." 하였다.
一日示眾云。
三界無法。何處求心。

四大本空。佛依何住。

璿璣不動。寂止無痕。

覿面相呈。更無餘事。

雪竇拈兩句來頌。
直是渾金璞玉。
不見道。
瘥病不假驢駝藥。

하루는 시중(示眾)하여
"삼계(三界)가 무법(無法)이거늘
어디서 마음을 구하겠으며,
사대(四大)가 본래 공(空)한데
부처가 어디에 머물러 있겠느냐?
한 생각도 꿈틀거리지 않아서[璿璣不動*]
흔적도 없이 고요히 멈추면
당면(當面;覿面)하여 드러날 뿐
다시 다른 일이 없다." 하였다.
설두(雪竇)가 이 두 구(句)를 콕찝어 송(頌)하기를
바로 이것이 혼금박옥(渾金璞玉*)이다고 하였는데,
들어보지 못했는가?
병의 치유(治癒)는
많은 약을 쓰는 데에 있지 않다 하였다. 

*普化; 鎮州普化和尚(盤山寶積 法嗣) 南嶽下三世
*風狂; 미치다. 미친듯이 날뛰다.
*璿璣不動; 한 생각 나기 이전(一念不生以前). 부모가 태어나기 이전(父母未生以前).
*渾金璞玉; 「다듬지 않은 본디 그대로의 금(金)과 옥(玉)」이라는 뜻으로
본래 청정한 근본 성품을 이르는 말.
*驢駝藥; 나귀나 낙타에 가득 실은 약, 즉 많은 약.

山僧為什麼道。和聲便打。

只為他擔枷過狀。
古人道。
聞稱聲外句。
莫向意中求。
且道他意作麼生。
直得奔流度刃。
電轉星飛。
若擬議尋思。
千佛出世。也摸索他不著。
若是深入閫奧。徹骨徹髓。
見得透底。
盤山一場敗缺。
若承言會宗左轉右轉底。

盤山只得一橛。
若是拖泥帶水。
聲色堆裏轉。
未夢見盤山在。
산승이 왜 '소리에 화답하여
곧 무릎을 친다'고 했겠는가?
다만 그에게 스스로 부족했음을 자백한 것이다.
고인이 이르기를,
소리 밖의 구(句)를 들어 헤아리고
뜻 속에서 구하려 하지 말라 하였거니와,
말해보라. 그의 뜻이 무엇인가?
곧바로 분류도인(奔流度刃*)하고
번개치고 유성이 나는 듯 해야 하거니와,
이리 저리 궁리하며 깊이 생각해서는
천 부처가 나올 때까지도 그를 모색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곤오(閫奧*)에 깊이 들어가 골수에 사무치도록
밑바닥까지 철저히 견득(見得)한 사람이었다면
반산(盤山)이 한바탕 낭패를 당했을 것이요,
말씀을 받들어 종지를 알고서
좌우로 자재히 굴리는 자였다면
반산은 다만 한 말뚝만 지키고 있었을 것이지만,
만약 진흙탕에 물 탄듯이 뒤엉켜
무성한 소리들 속에서 구른다면
꿈에도 반산(盤山)이 있는 곳을 보지 못할 것이다. 

*擔枷過狀; 擔枷(목에 칼을 쓰고서) 過狀(고소장을 제출한다)한다 함은
스스로 죄를 자백한다는 뜻이다.
*奔流度刃; '솟구치는 물줄기[奔流]에 칼을 건넨다[度刃]' 함은
물을 칼로 베되 칼에 물이 묻지 않는 신속함을 의미한다.
*閫奧; 내심(內心) 깊은 곳. 학문이나 이치적으로 심오한 곳.
*拖泥帶水; 「화니합수(和泥合水)」, 「회두토면(灰頭土面)」,
「화광동진(和光同塵)」과 같은 의미로
①깨친 뒤에 중생제도를 위해 군중 속에 투신하는 것을 지칭하는 말.
②말만 무성하다 하여 구두선(口頭禪)을 배척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五祖先師道。透過那邊
方有自由分。
不見三祖道。
執之失度必入邪路。
放之自然體無去住。
若向這裏。道無佛無法。
又打入鬼窟裏去。
古人謂之解脫深坑。
本是善因而招惡果。
所以道。無為無事人。
猶遭金鎖難。
也須是窮到底始得。
若向無言處言得。
行不得處行得。
謂之轉身處。
三界無法何處求心。
爾若作情解。
只在他言下死卻。
雪竇見處。七穿八穴。
所以頌出。
오조(五祖) 스승님은 "그 쪽을 뚫고 지나가야
비로소 자유분(自由分*)이 있다" 하셨다.
보지 못했는가? 삼조(三祖) 승찬대사는
"집착하면 법도를 잃어 반드시 삿된 길로 가고,
놓아버리면 자연 체(體)에 가고 머뭄이 없다" 하였거니와,
만약 그 속을 부처도 없고 법도 없다고 한다면
또 귀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고인이 이를 일러 '해탈의 깊은 구덩이'라 하였다.
본래 선인(善因)이던 것이 악과(惡果)를 불렀기에
그래서 말하기를, 무위무사인(無為無事人)이
오히려 금쇄난(金鎖難*)을 만난다고 한 것이니,
모름지기 끝까지 하여 밑바닥에 도달해야 한다.
만일 말 없는 곳에서 말을 얻고,
행하지 못할 곳에서 행한다면
이를 전신처(轉身處)라 한다.
 '삼계가 무법이거늘 어디서 마음을 구하리오' 하였는데,
너희가 만약 정해(情解)를 짓는다면
다만 그의 언하(言下)에서 죽어버리는 것이지만
설두의 견처(見處)는 칠천팔혈(七穿八穴*)하기에
그래서 이렇게 송출(頌出)하였다. 

*自由分; 어떠한 외력의 구속이나 간섭을 받지 않는 대자재한 경지.
*解脫深坑; '해탈에 집착하여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이 원만치 못함'에 비유하는 용어.
*金鎖難; 자물쇠의 어려움. 제 몸을 가두는 곤란함.
*七穿八穴; 七花八裂, 七縱八橫, 七通八達, 七顛八倒, 七支八節. 

 

 三界無法
   (言猶在耳)
 何處求心
   (不勞重舉。自點檢看。
   打云。是什麼)
  白雲為蓋
   (頭上安頭。千重萬重)
 流泉作琴
   (聞麼。相隨來也。
   一聽一堪悲)
 一曲兩曲無人會
   (不落宮商非干角徵。
   借路經過。五音六律盡分明。
    自領出去。聽則聾) 
   雨過夜塘秋水深
   (迅雷不及掩耳。
   直得拖泥帶水。
   在什麼處。便打)
 삼계(三界)에 법이 없거늘
   (말이 아직도 귀전을 맴돈다.)
 어디서 마음을 구하겠는가.
   (또 들추려 애쓰지 말고 스스로를 점검해 보라.
   무릎을 치며 "이 무엇고?")
  흰구름으로 일산(日傘)을 삼고
   (머리 위에 머리를 얹으니 천 겹 만 겹이다.)
 흐르는 개천으로 거문고를 삼아
   (들리는가? 뒤따라서
   한 번 들으면 한 번 슬퍼진다.)
 한 곡, 두 곡 해보아도 아는 사람 없지만
   (궁상<宮商>에 떨어지지 않으면 각치<角徵>와 무관하니,
   길을 비켜 지나가면 5음6율<五音六律*>이 다 분명해진다.
    스스로 나아가도록 하라. 들은 즉 귀가 먹으리라.) 
   야당(夜塘*)에 비가 지나가면 추수(秋水*)가 깊어지리라.
   (빠른 우레소리에 귀 막을 겨를이 없었을 텐데
   곧바로 타니대수(拖泥帶水*)을 얻다니.
   어디에 있던가? 무릎을 친다.)

*五音六律; 五音은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六律은 12律 중 여섯 陽律.
*雨過夜塘秋水深; 夜塘은 어두운 밤의 연못이니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에의 비유요,
秋水는 가을날 호수의 물이니 맑고 아름다움에 비유하는 말이니,
미혹한 사람도 한 번 두 번 듣다보면 깨달음이 깊어진다는 뜻.
*拖泥帶水; 여기서는 진흙탕에 더할 물, 즉 오는 말에 더하여 답해줄 말. 

 

三界無法何處求心。
雪竇頌得。一似華嚴境界。
有者道。雪竇無中唱出。
若是眼皮綻底。終不恁麼會。
雪竇去他傍邊。貼兩句道。
白雲為蓋。
流泉作琴。
蘇內翰見照覺。有頌云。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清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舉似人。
雪竇借流泉。
作一片長舌頭。
所以道。一曲兩曲無人會。
不見九峰虔和尚道。
還識得命麼。
流泉是命。湛寂是身。
千波競起是文殊家風。

一亘晴空。
是普賢境界。
 '삼계무법(三界無法) 하처구심(何處求心)'이라고
설두가 읊었으니, 꼭 화엄경계(華嚴境界)와 같건만
혹자는 설두가 무(無) 가운데서 노래해냈다고 하는데,
눈꺼풀이 터진 놈이라면 결코 그렇게 알지 않기에
설두가 그 곁으로 가서 두 구(句)를 붙여 말하기를,
 '백운(白雲)으로 일산 삼고,
유천(流泉)으로 거문고 삼는다'고 하였다.
소내한(蘇內翰*)이 조각(照覺*)을 참견하여 게송으로
 「계곡 소리가 곧 광장설(廣長舌*)이거늘
 산빛[山色]이 어찌 청정신(清淨身)이 아니리오.
 어제[夜來]의 8만4천 게(偈)를
 다른 날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릴꼬?」 하였는데,
설두가 흐르는 개천[流泉]을 빌려
한 조각 장설(長舌)의 화두(話頭)를 던졌으니,
그래서 '한 곡 두 곡 해봐도 아무도 모른다'고 한 것이다.
보지 못했는가, 구봉건(九峰虔*) 화상이 말하기를,
"목숨[命]을 아는가?
유천(流泉)이 목숨이요, 고요함[湛寂]은 몸[身]이거니와,
일천의 풍파가 다투어 일어나는 것이
문수(文殊)의 가풍(家風)이요,
하나로 펼쳐진 맑은 하늘은
보현(普賢)의 경계(境界)다" 하였다. 

*蘇內翰; 蘇는 蘇軾, 內翰은 翰林.
북송의 한림학자로 당송8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사람인 소식(蘇軾;1036~1101).
*照覺; 江州東林興龍寺常總照覺禪師(黃龍慧南 法嗣) 南嶽下十二世
*廣長舌; 32상의 하나로 길고, 유연하고, 붉고, 얇아서 머리털 끝까지 이르는 혀.
지도론(智度論)에 '이러한 혀를 지녔거늘 어찌 그 말이 진실하지 않으리오?' 하였으니,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이 진실한 말을 하는 혀를 뜻한다.
*長舌頭; 한가한 소리로 시비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나 그런 사람에 비유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장설(長舌)의 화두(話頭)'로 해석함이 옳겠다.
*九峯虔; 瑞州九峯道虔禪師(石霜慶諸 法嗣) 青原下五世

流泉作琴。
一曲兩曲無人會。
這般曲調。也須是知音始得。
若非其人。徒勞側耳。
古人道。
聾人也唱胡家曲。
好惡高低總不聞。
雲門道。
舉不顧即差互。
擬思量。
何劫悟。
舉是體。顧是用。
未舉已前。
朕兆未分已前見得。
坐斷要津。
若朕兆纔分見得。
便有照用。
若朕兆分後見得。
落在意根。
 '유천(流泉)으로 거문고를 삼아
한 곡 두 곡 해보아도 아는 사람이 없다' 하였는데,
이런 곡조야말로 모름지기 지음(知音)이라야 하기에
그 사람이 아니면 헛되이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고인(古人;道場如訥*)이 이르기를,
"귀머거리도 호가곡(胡家曲)을 부르지만
호악고저(好惡高低)를 다 듣지는 못한다" 하였으며,
운문(雲門)은
"들춰 주어도[舉] 돌아보지[顧] 않으면 틀렸다.
이럴까 저럴까만 해서야
어느 세월에 깨치겠느냐?" 하였는데,
들춘 것[舉]은 체(體)이고, 돌아봄[顧]은 용(用)이거니와,
들추기 이전이나
조짐이 아직 보이기 이전에 견득(見得)하여
요진(要津)을 좌단(坐斷)하라는 것이다.
만약 조짐이 잠깐 보이매 견득한다면
조용(照用;관조와 작용)이 있는 것이겠으나,
조짐이 나타난 뒤에야 견득한다면
의근(意根)에 떨어져 있는 것이다. 
雪竇忒殺慈悲。更向爾道。
卻似雨過夜塘秋水深。

此一頌曾有人論量。
美雪竇有翰林之才。
雨過夜塘秋水深。
也須是急著眼看。
更若遲疑。
即討不見。
설두가 지나친 자비로 다시 너희에게
"야당(夜塘)에 비가 지나가면
추수(秋水)가 깊어지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 송(頌)을 일찍이 어떤 사람이 논량(論量*)하여
"설두에게 한림(翰林)의 재능이 있다"고 찬미 하였다.
비가 야당을 지나면 추수가 깊어진다는 것에
모름지기 급히 착안하여 살펴야 하려니와,
다시 또 우물쭈물하다가는
당장 필요할 때 보지 못할 것이다. 

*古人; 安吉州道場山如訥禪師(翠微無學 法嗣) 青原下四世
*論量; 시비(是非)를 논의(論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