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巖錄

벽암록(碧巖錄) 제47칙 운문(雲門)의 육불수(六不收)

碧雲 2023. 5. 18. 10:00

 부처의 진신(眞身;法身)은 일체의 상(相)을 여읜 자성신(自性身)이요
태허(太虛)와 같은 하나의 절대적 본체라서
생각과 언어로 표현될 경계를 벗어난 것이며,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대(六大), 육합(六合) 따위의
상대세계(相對世界)로 다루어질 것이 아니다. 

 

垂示云。 수시(垂示)
天何言哉。四時行焉。
地何言哉。萬物生焉。
向四時行處。可以見體。
於萬物生處。可以見用。
且道向什麼處見得衲僧。
離卻言語動用行住坐臥。
併卻咽喉唇吻。
還辨得麼。
하늘이 어찌 말을 하리오만 사시(四時)가 행해지고
땅이 어찌 말을 하리오만 만물이 생겨나며,
사시가 행하는 곳을 향해 체(體)를 볼 수 있고,
만물이 생하는 곳에서 용(用)을 볼 수 있다.
말해보라, 어느 곳을 향해 납승을 견득(見得)할 것인지.
말과 행동과 행주좌와(行住坐臥)를 여의어버리고
아울러 목구멍과 입술도 닫아버린다.
알겠느냐.

*天何言哉 四時行焉; 《論語》陽貨第十七에
「공자가 "말하지 않겠다." 하자,
자공(子貢)이 "공자님이 말씀하지 않으신 즉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니,
공자가 "하늘이 무슨 말을 했길래 사시(四時)가 행하고 만물이 생기느냐?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하였다.
(子曰:予欲無言! 子貢曰:子如不言,則小子何述焉?
子曰:天何言哉四時行焉,百物生焉;天何言哉?)」

 

 【四七】舉。  【제47칙】 운문(雲門)의 육불수(六不收) 
   僧問雲門。
   如何是法身
   (多少人疑著。
   千聖跳不出。
   漏逗不少)
   門云。六不收
   (斬釘截鐵。
   八角磨盤空裏走。
   靈龜曳尾朕兆未分時薦得。
  已是第二頭。
   朕兆已生後薦得。
   又落第三首。
    若更向言語上辨得。
   且喜沒交涉)。
   한 중이 운문에게 물어
   "무엇이 법신(法身)입니까?" 하니,
   (많은 사람이 의문을 갖지만
   일천 성인이 뛰어도 벗어나지 못하거늘
   누두<漏逗>가 적지 않다.)
   운문은 "육불수(六不收*)다." 하였다.
   (참정절철<斬釘截鐵*>이요,
   팔각마반<八角磨盤*>이 허공 속을 달리니,
   신령한 거북 꼬리를 끌 조짐이 보이기 전에 천득하면
  이미 제2두(第二頭*)인 것이며,
   조짐이 이미 생긴 뒤에 천득하면
   또 제3수<第三首*>에 떨어진 것이거니와,
    만약 다시 언어 상에서 분별해 얻는다면
   기쁜 일이기는 하나 아무런 교섭이 없다.)

*六不收; 「육(六)」은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대(六大), 육합(六合) 등의
불교에서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개괄(概括)하여 쓰는 기본 법수(法數)이고,
「수(收)」는 섭수(攝收), 포함(包含)의 뜻이니,
법신(法身)은 육근(六根) 등의 상대적 개념으로 다루어질 바가 아니다는 뜻.
*斬釘截鐵; 말과 행동이 단호하고 과감하여 추호도 주저함이 없음을 형용하는 말.
*八角磨盤空裏走; 맷돌[磨盤]은 응당 원형인데 팔각진 맷돌이 공중을 난다 함은
불가사의하여 언설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다는 의미이다. 

*靈龜曳尾 ; 만 년 동안 산다는 신령스러운 거북이 진흙 위에서 꼬리를 끈다는 뜻으로,
출세하기 위하여 무리하다가 일찍 죽기보다는 좋지 않은 환경에서 살더라도
오래 사는 것이 좋음을 이르는 말.
〈祖庭事苑 第6卷〉에
「장자(莊子)가 복수(濮水)에서 낚시하고 있는데, 초왕(楚王)이 두 대신을 보내서
"원컨대 경내(境內;國內)로 들어오십시요." 하고 조정으로 불렀다.
장자가 "초나라에는 죽은 지 삼천 년이 된 신령한 거북이 있어서
왕께서 소중히 간수하여 묘당(廟堂)에 모셔두었다는데,
그 거북이란 것이 죽어서 뼈를 남기는 것이 귀하겠소,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끄는 것이 낫겠소?" 물으니,
두 대부가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끄는 것이 낫지요." 하자,
장자는 "돌아가시오. 나는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겠소. '복,복'(거북이 소리)." 하였다.

*第二頭; 第二機, 第二義門, 向下門과 같은 용어.
①향상의 평등처에서 하향의 차별문으로 되돌아가는 교리법문.
보살 하화중생(下化眾生)의 문을 뜻한다. 第一義門은 상구보리(上求菩提)의 문.
②言說과 教義에 과도히 집착함을 비하하는 뜻으로 「落草」와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第三首; 제2두도 못된다는 의미. 

 

雲門道。六不收。直是難搆。
若向朕兆未分時搆得。
已是第二頭。
若向朕兆已生後薦得。
又落第三首。
若向言句上辨明。
卒摸索不著。
且畢竟以何為法身。
若是作家底。聊聞舉著。
剔起便行。
苟或佇思停機。
伏聽處分。
운문이 말한 육불수(六不收)는 곧 얽어내기 어렵다.
조짐이 보이기 전에 구득(搆得)하려는 것은
이미 제2두(第二頭)인 것이요,
조짐이 이미 생긴 뒤에 천득하려는 것은
또 제3수(第三首)에 떨어진 것이며,
만약 언구상(言句上)에서 분별하여 알려 한다면
죽어도 모색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필경 무엇으로써 법신을 삼을 것인가?
만약 작가라면 거론을 들어 귀에 울리거든
망서리지 않고[剔起] 곧 행하겠지만
혹 생각하게 되고 기가 잘 돌지 않는다면
엎드려 처분만 바랄 것이다. 
太原孚上座本為講師。
一日登座講次。說法身云。
豎窮三際。橫亘十方。
有一禪客。在座下聞之失笑。
孚下座云。
某甲適來有甚短處。
願禪者為說看。禪者云。
座主只講得法身量邊事。
不見法身。
孚云。畢竟如何即是。
禪者云。
可暫罷講於靜室中坐。
必得自見。
孚如其言。一夜靜坐。
忽聞打五更鐘。忽然大悟。
遂敲禪者門云。我會也。
禪者云。爾試道看。
孚云。我從今日去。
更不將父母所生鼻孔扭捏也。

又教中道。
佛真法身。猶若虛空。
應物現形。如水中月。
태원부(太原孚*) 상좌는 본래 강사(講師)였는데
하루는 법좌에 올라 강설하면서 법신(法身)을 설하여
「수궁삼제(豎窮三際*) 횡긍시방(橫亘十方*)」이라 하자,
한 선객(禪客)이 좌하(座下)에서 듣고 코웃음쳤다.
부상좌가 법좌에서 내려와서
"내가 방금 무엇을 잘못했는지
선자(禪者)께서 말해 주시기 바라오." 하니, 선자가
"좌주(座主)는 법신의 양(量)만을 강설하고
법신을 보지는 못했소." 하였다.
부상좌가 "필경 어찌한 즉 옳겠습니까?" 하니,
선자가 이르기를,
"가히 잠시 강설을 쉬고 고요한 방에 앉으면
반드시 스스로 보게 될 것입니다." 하여
그의 말 대로 하룻밤을 정좌(靜坐)했더니
문득 오경(五更)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홀연히 대오한지라
이윽고 선자의 문을 두드려 "내가 알았소." 하자,
선자가 "한번 말해 보시오." 하니,
부상좌는 "내가 오늘부터
다시는 부모가 낳아 준 콧구멍을 가지고
멋대로 놀려대지[扭揑] 않겠소." 하였다.
또 경(經;教*)에도 말하기를,
「부처님 참된 법신은 허공과 같고,
사물을 응하여 형상을 나투심은 수중월(水中月) 같다」 하였다. 

*太原孚上座; 雪峰義存法嗣 青原下六世
*豎窮三際 橫亘十方; 三際(과거,현재,미래)에 窮盡하고,
十方(東西南北,東南西南西北東北,上下)에 횡으로 뻗쳤다(두루한다)는 것은
佛陀의 法身境界가 時空을 초월하여 「盡虛空 遍法界」를 형용하는 말이다.
*教; 《合部金光明經》 卷第五 四天王品에 四天王이 부처님 전에 올린 게송이 일부이다. 

又僧問夾山。
如何是法身。
山云。法身無相。
如何是法眼。
山云。法眼。無瑕。
雲門道。六不收。
此公案有者道。
只是六根六塵六識。
此六皆從法身生。
六根收他不得。
若恁麼情解。
且喜沒交涉。
更帶累雲門。
要見便見。無爾穿鑿處。
또 중이 협산(夾山*)에게 물어
"무엇이 법신입니까?" 하니,
"법신은 상(相)이 없다." 하였고,
"무엇이 법안(法眼)입니까?" 하니,
"법안은 티(瑕)가 없다." 하였다.
운문은 육불수(六不收)라고 하였는데,
이 공안을 어떤 자는 말하기를,
"다만 이것은 6근(六根), 6진(六塵), 6식(六識)이며,
이 여섯이 다 법신으로부터 생겨나는지라
6근(六根)으로 그것을 거두지 못하는 것이다"고 하니,
이렇게나마 정해(情解)하는 것도
기쁘기는 하나 아무런 교섭이 없거니와,
다시 운문에게 누(累)를 끼치는 것이요,
보려거든 곧 볼 것이라 너희가 파고들 곳이 없다. 
不見教中道。
是法非思量分別之所能解。

他答話多惹人情解。
所以一句中。須具三句。
更不辜負爾問頭。
應時應節。
一言一句。一點一畫。
不妨有出身處。
所以道。一句透。
千句萬句一時透。
且道是法身。是祖師。
放爾三十棒。
雪竇頌云。
보지 못했는가? 교(敎*) 중에 말하기를,
「이 법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운문의 대답이 사람의 정해(情解)를 흔히 야기(惹起)하니,
1구(句) 중에 반드시 3구를 갖추고
다시 상대의 문두(問頭*)를 저버리지 않음으로써
응시응절(應時應節*)하였거니와,
일언일구(一言一句) 일점일획(一點一畫)마다에
출신처(出身處)가 있어 마지 않으니,
그래서 1구를 투득(透得)하면
천구만구(千句萬句)를 일시에 투득한다고 하는 것이다.
자 말해보라. 이것이 법신인가, 조사인가?
너희에게 30방을 놓겠다.
설두는 이렇게 송했다.

*夾山; 澧州夾山善會禪師(船子德誠法嗣) 青原下四世
*穿鑿; ①파다. 관통시키다. 통하게 하다. ②억지로 해석을 가져다 붙이다.
*敎; 《法華經 方便品第二》
*問頭; 질문의 단초[問端]. 묻게된 연유.
*應時應節; 때와 절기에 적응하다. 상황에 따라 알맞게 대처하다. 

 

 一二三四五六
   (周而復始。
   滴水滴凍。
   費許多工夫作什麼)
  碧眼胡僧數不足
   (三生六十劫。
   達磨何曾夢見。
   闍黎為什麼知而故犯)
  少林謾道付神光
   (一人傳虛萬人傳實。
   從頭來已錯了也)
  卷衣又說歸天竺
   (賺殺一船人。懡㦬不少)
 天竺茫茫無處尋
   (在什麼處。始是太平。
   如今在什麼處)
 夜來卻對乳峰宿
   (刺破爾眼睛。
   也是無風起浪。
   且道是法身是佛身。
   放爾三十棒)
 일이삼사오륙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시작이다.
   적수적동(滴水滴凍*)이로구나.
   그 많은 공부는 해서 무엇하겠는가.)
  달마대사[碧眼胡僧]도 족히 세지 못하여
   (3생 60겁에도
   달마가 어찌 꿈엔들 본 적 있으리오.
   선생은 어째서 알면서도 고의로 범하는가.)
 소림사에서 슬그머니 신광(神光*)에게 부촉한다 하고
   (한 사람이 거짓을 전하매 만인이 진실이라고 전했으니,
   머리서부터 오기를 이미 빗나가버린 것이다.)
  옷을 챙기고서 또 천축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는데,
   (한 배 탄 사람을 너무 속였으니, 낭패가 적지 않다.)
 천축이 망망하여 찾을 길이 없더니
   (어디에 있어야 비로소 태평한 것이며,
   지금은 어디에 있느냐?)
 간밤에 와서 유봉(乳峰*)을 마주해 묵었나보구나.
   (너희 눈동자를 찔러 부셨고
   또 바람 없는데 파도를 일으켰다.
   말해보라. 이것이 법신인가, 불신<佛身>인가?
   너희에게 30방을 놓겠다.)

*乳峰; ①젖꼭지. 가슴, 내 마음.
②하남(河南) 등봉현(登封縣) 서북방 소실산(少室山)에 있는 봉우리. 이곳에 소림사가 있다.

 

雪竇善能於無縫罅處。
出眼目頌出教人見。
雲門道。六不收。
雪竇為什麼卻道。
一二三四五六。
直是碧眼胡僧也數不足。
所以道。只許老胡知。
不許老胡會。
須是還他屋裏兒孫始得。
適來道。一言一句。
應時應節。
若透得去。
方知道不在言句中。
其或未然。不免作情解。
五祖老師道。
釋迦牟尼佛。下賤客作兒。
庭前柏樹子。一二三四五。
若向雲門言句下。諦當見得。
相次到這境界。
설두가 어떠한 꿰맨 흔적없이
안목을 내서 사람들이 잘 볼 수 있게 송출(頌出)했다.
운문은 '육불수(六不收)'라 하였는데
설두는 어째서 도리어
'일이삼사오륙'이라고 했겠는가?
바로 달마대사일지라도 족히 세지 못하는 것이라
그래서 말하기를 '다만 달마가 안다[知]고는 하겠으나
부합했다[會]고는 못하겠다'고 하였거니와,
모름지기 이는 운문 집안 자손의 차지라고 해야 하리라.
좀 전에 '일언일구(一言一句)가
응시응절(應時應節)하다'고 하였는데,
만약 투철히 얻어 간다면
바야흐로 도(道)가 언구(言句) 안에 있지 않음을 알겠지만
혹 그렇지 못하다면 정해(情解) 짓기를 면치 못할 것이다.
오조(五祖) 노사(老師)께서는
석가모니불도 하천(下賤)한 객작아(客作兒*)며
뜰 앞 잣나무[庭前柏樹子]는 일이삼사오다고 하셨는데,
만약 운문의 언구 아래서 이치에 맞게 견득한다면
점차[相次] 이 경계에 이를 것이다. 
少林謾道付神光。
二祖始名神光。
及至後來。又道歸天竺。
達磨葬於熊耳山之下。
時宋雲奉使西歸。
在西嶺見達磨
手攜隻履歸西天去。
使回奏聖。
開墳惟見遺下一隻履。
雪竇道。其實此事。
作麼生分付。
既無分付。
卷衣又說歸天竺。
且道為什麼。
此土卻有二三。
遞相恁麼傳來。
這裏不妨誵訛。
也須是搆得始可入作。
天竺茫茫無處尋。
夜來卻對乳峰宿。
且道即今在什麼處。
師便打云。瞎。
 '소림사에서 짐짓 신광에게 부촉한다고 했다'는 것은
2조(二祖)의 처음 이름이 신광(神光)이었고,
그 뒤에 '또 천축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고 하였는데,
달마는 웅이산(熊耳山) 아래 매장하였다.
그런데 송운(宋雲)이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던 길에
서령(西嶺)에서 달마를 보았는데
손에 짚신 한 짝을 들고 서천으로 돌가가고 있었는지라
사신이 돌아와 성상(聖上)께 아뢰어
봉분을 열어보니 짚신 한 짝만 있었으니,
설두가 실은 이 일을 말한 것이다.
무엇을 분부(分付)했는가?
기왕 분부한 것이 없거니와,
옷을 챙기고서 천축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는데,
말해보라. 무엇을 위해
이 땅에 도리어 육[六;二三*]이 있어。
차례차례 그렇게 전해 왔는가?
이 속이 헛갈려[誵訛*] 마지 않는지라
반드시 구득(搆得*)해야만 비로소 들어가 지을 수 있다.
 '천축이 망망하여 찾을 길이 없더니
간밤에 와서 유봉(乳峰)을 대하여 묵었는가' 하였는데,
말해보라.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선사가 갑자기 후려치며 "할(瞎*)!" 하였다. 

*客作兒;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 천박하다는 의미로 사람을 꾸짖는 말로 쓰인다.
*二三; 육(六). 동토 육대조사(六代祖師;達磨,慧可,僧璨,道信,弘忍,慧能).
*誵訛; 헛갈린 착오[混淆訛誤].
*搆; ① (주의를) 끌다. 야기하다. (사건 등을) 일으키다. 조성(造成)하다.
②세우다. ③닿다. 건드리다. 언급하다.
*瞎; 눈이 멀었구나(말이 온 곳을 보지 못할 때 쓰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