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巖錄

벽암록(碧巖錄) 제45칙 조주(趙州)의 칠근포삼(七斤布衫)

碧雲 2023. 4. 28. 07:12

 만법(萬法)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적삼을 지었더니 결과적으로 무게가 일곱 근이 되었듯이
선을 지으면 선업이 늘고 악을 지으면 악업이 늘어 인연법을 따라 흘러가지만
하나같이 찾아가야 할 본래면목은 문자와 어구로 설명될 것이 아니요,
일체를 다 서호 속에 던져버림으로써 그 옛 누각에 한가히 노니는
무사인(無事人)이 된다 하고 있다. 

 

垂示云。 수시(垂示) 
要道便道。舉世無雙。
當行即行。全機不讓。
如擊石火。似閃電光。
疾焰過風。奔流度刃。
拈起向上鉗鎚。
未免亡鋒結舌。
放一線道。試舉看。
말해야 할 때 곧 말하기는 세상에 둘도 없이 하고,
행해야 할 때 곧 행하기는 전기(全機)를 사양하지 않고서
마치 석화(石火) 튀고 전광(電光) 번쩍이며
질염과풍(疾焰過風*)하고, 분류도인(奔流度刃*)하듯이 하여
향상(向上)의 겸추(鉗鎚*)를 염기(拈起)하니,
망봉결설(亡鋒結舌*)을 면치 못하거니와,
한 가닥 길을 놓았으니, 예를 들어 살펴보자. 

*疾焰過風; 빠른 불길이 바람을 (섞이지 않고)통과하다.
*奔流度刃; 세찬 물줄기에 칼날을 (젖지 않고)건네다.
둘 모두 매우 민첩함을 형용하는 말이다.
*鉗鎚; 鉗은 부집게, 鎚는 달군 쇠를 치는 망치이니, 둘 다 쇠를 단련시키는 도구이다.
선림에서는 이로써 '엄격히 지도하기 위해 쓰이는 도구'에 비유한다.
*亡鋒結舌; 끝을 잃고 혀가 굳다. 대꾸할 길이 없어 말문이 막힘. 

 

 【四五】舉。  【제45칙】 조주(趙州)의 일곱 근 홑적삼
   僧問趙州。
   萬法歸一。
   一歸何處
   (拶著這老漢。
   堆山積嶽。
   切忌向鬼窟裏作活計)
   州云。我在青州。
   作一領布衫。
   重七斤
   (果然七縱八橫。
   拽卻漫天網。
   還見趙州麼。
    衲僧鼻孔曾拈得。
   還知趙州落處麼。
    若這裏見得。
   便乃天上天下唯我獨尊。
    水到渠成。
   風行草偃。
   苟或未然。
   老僧在爾腳跟下)。
   어느 중이 조주(趙州)에게 물어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간다는데,
   하나같이 어디로 돌아갑니까?" 하니,
   (이 늙은이를 윽박질렀으나
   산더미 하나 더 쌓는 일이니,
   귀신굴 속에서 살아갈 궁리하지 말기 바란다.)
   조주는 "내가 청주(青州)에 있을 때
   홑적삼 한 벌을 지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 하였다.
   (과연 칠종팔횡<七縱八橫>하는구나.
   온 하늘 가득 그물을 펼쳤는데
   도리어 조주가 보이는가?
    납승의 콧구멍을 일찌감치 꿰어버렸는데
   도리어 조주의 의도한 바를 알겠는가?
    만약 이 속에서 보아 얻는다면
   이내 천상천하에 유아독존하여
    물이 이르면 도랑을 이루고
   바람이 불면 풀이 눕겠지만
   혹 그렇지 못하면
   노승이 너희 발꿈치 밑에 있을 것이다.)。

*拽卻漫天網; 온 하늘 가득 그물을 펼쳐서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으로
禪林에서는 師家가 學人을 接化함이 주도면밀함에 비유하며,
장만천망(張幔天網), 포만천망(布幔天網), 개천개지(蓋天蓋地)라 쓰기도 한다.

 

若向一擊便行處會去。
天下老和尚鼻孔一時穿卻。
不奈爾何。
自然水到渠成。
苟或躊躇。
老僧在爾腳跟下。
만약 일격(一擊)을 곧 가할 곳을 안다면
천하 노화상들은 비공(鼻孔)이 일시에 뚫려버려도
그대를 어찌 해보지 못하리니
자연히 물 흐르는 곳에 도랑이 생기겠지만,
정말 혹 망설여진다면
노승(老僧)이 너희 발뒤꿈치 밑에 가까이 있겠다. 
佛法省要處。
言不在多。語不在繁。
只如這僧問趙州。
萬法歸一。一歸何處。
他卻答道。
我在青州作一領布衫
重七斤。
若向語句上辨。
錯認定盤星。
不向語句上辨。
爭奈卻恁麼道。
這箇公案。雖難見卻易會。
雖易會卻難見。
難則銀山鐵壁。
易則直下惺惺。
無爾計較是非處。
此話與普化道
來日大悲院裏有齋話。
更無兩般。
불법(佛法)의 깊히 살펴야 할 곳은
언어의 많고 번잡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느 중이 조주에게 물어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라고 하니,
그는 도리어 답하되
"내가 청주에 있을 때 홑적삼 한 벌 지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고 한 것과 같다.
어구(語句) 상에서 변별한다면
중요한 점을 놓친[定盤星錯認*] 것이거니와,
어구 상에서 변별하지 않더라도
어찌 도리어 그렇게 말한 것인가?
이런 공안은 비록 보기 어려운 듯하나 알기 쉽기도 하고,
알기 어려운 듯해도 보기는 쉽기도 해서
어려운 즉 은산철벽(銀山鐵壁*)이겠지만
쉬운 즉 그자리에서 환히 깨달아지는 것인지라
너희가 계교(計較)하고 시비(是非)할 곳이 없다.
이 얘기는 보화(普化*)가 말한
"내일 대비원(大悲院) 안에 재(齋)가 있다"와
다르지 않다. 

*錯認定盤星; 저울눈금을 잘못 읽다. 중요한 점을 놓친 것에 비유하는 말.
*銀山鐵壁; 은으로 된 산 쇠로 된 벽이란 오르기 어려우니,
凡情이나 分別로는 철저히 밝혀 알기 어렵다는 뜻이다.
「壁立萬仞」과 같은 뜻으로 쓰기도 한다.

*普化; 鎮州普化和尚(盤山寶積 法嗣) 南嶽下三世.
하루는 임제(臨濟:南嶽下四世)가 시자에게 붙들고서
"모두가 그렇지 못할 때는 어떻습니까?" 하고 여쭈게 하니,
보화는 밀치면서 "내일 대비원(大悲院)에서 재(齋)가 있다."고 하였다.
시자가 돌아와서 임제에게 그렇게 전하자,
임제가 "나는 전부터 이 자를 의심했었다."고 하였다.
果州永慶光普禪師가 스승인 谷隱蘊聰에게 여쭈되,
"古人이 來日大悲院裏有齋라 하였는데, 뜻이 무엇입니까?" 하니,
곡은은 "해가 뜨면 양지바른 곳에 앉고, 날씨가 추우면 고개를 들지 않는다" 하였다.

一日僧問趙州。
如何是祖師西來意。
州云。庭前柏樹子。
僧云。和尚莫將境示人。
州云。老僧不曾將境示人。
看他恁麼
向極則轉不得處轉得。
自然蓋天蓋地。
若轉不得。觸途成滯。
且道他有佛法商量也無。
若道他有佛法。
他又何曾說心說性。
說玄說妙。
若道他無佛法旨趣。
他又不曾辜負爾問頭。
하루는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물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하자,
"뜰 앞의 잣나무니라." 하였고,
"화상은 경계(境界)로 표시하지 마십시오." 하니,
"노승은 경계로 표시한 적 없다." 하였다.
이러한 것을 살펴보건대,
극칙(極則)이 구르지 못할 곳을 향해 구르면
자연히 온 천지를 덮을 것이지만,
만약 구르지 못하면 도처에서 막힐 것이다.
말해보라, 그에게 불법을 두고 흥정한 것이 있는가?
만약 그에게 불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가 또 언제 심성(心性)을 말하고
현묘(玄妙)를 말한 적이 있었던가?
만일 그에게 불법의 지취(旨趣;宗旨)가 없다고 한다면
그는 또 그대들의 의문을 일찍이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豈不見。僧問木平和尚。
如何是佛法大意。
平云。這箇冬瓜如許大。
又僧問古德。
深山懸崖迥絕無人處。
還有佛法也無。
古德云。有。
僧云。如何是深山裏佛法。
古德云。石頭大底大小底小。
看這般公案。誵訛在什麼處。
雪竇知他落處。
故打開義路。與爾頌出。
어찌 보지 못했는가? 중이 목평(木平*)화상에게 물어
"무엇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 하자,
목평은 "이 동과(冬瓜; 오이 일종)가 이렇게 크구나." 하였고,
또 중이 고덕(古德*)에게 묻되,
"깊은 산 속 깎아지른 절벽 사람 없는 곳에도
불법이 있습니까?" 하자,
고덕이 "있다." 하니,
"무엇이 이 깊은 산 속의 불법입니까?" 하매,
"돌이 크면 바닥이 크고, 작으면 바닥도 작다." 하였는데,
이런 공안을 보건대 효와(誵訛)가 어디에 있는가?
설두가 그의 낙처(落處;歸結,目的)를 알기에
의로(義路)를 타개(打開)하여 너희에게 송출(頌出)하였다. 

*木平; 袁州木平山善道禪師(蟠龍可文 法嗣) 青原下六世
*古德; 青原下八世 廬山歸宗道詮禪師(保福從展_延壽慧輪 法嗣)의 말이다.

 

 編辟曾挨老古錐
   (何必拶著這老漢。
   挨拶向什麼處去)
  七斤衫重幾人知
   (再來不直半分錢。
   直得口似匾擔。
   又卻被他贏得一籌)
  如今拋擲西湖裏
   (還雪竇手腳始得。
   山僧也不要)
  下載清風付與誰
   (自古自今。
   且道雪竇與他酬唱。
   與他下注腳。一子親得)
 편벽(編辟)하여 일찍이 노고추(老古錐*)를 추궁했으나
   (왜 꼭 이 늙은이를 추궁한 것이며,
   도대체 무엇을 추궁한 것이냐?)
  일곱 근 적삼 무게를 몇 사람이나 알리오?
   (다시 가져와도 반푼어치도 안되는지라
   곧 입을 닫아버린 것이지만,
   또 도리어 그에게서 한 까치 이익을 얻으리라.)
  지금은 서호(西湖) 속에 던져버렸거늘
   (설두의 수단이다고 해야 할 것이지,
   나는 그럴 필요 없다.)
 하재(下載)의 청풍(清風)인들 누구에게 부촉하리오?
   (예로부터 지금에도 그렇다.
   말해보라. 설두가 그에게 답해준 것인가,
   주석을 달아준 것인가? 아들 하나 얻었다.)

*編辟; 偏僻.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침. 여기서는 분양십팔문 중 '편벽문(偏僻問)'.
學人이 한 쪽에 치우친 견해를 세우고서 師家에게 질문하는 것을 말한다.
*老古錐; 오래된 송곳. '노련하고 원숙한 사가(師家)'를 지칭하는 말.
*不直半分錢; 반푼의 가치도 없다. 사량분별로 상량할 대상이 아니다는 뜻.
*口似匾擔; 편담(匾擔)은 짐을 나를 때 쓰는 일(一)자 모양의 나무를 말하니,
입이 그 나무처럼 일자 모양이라는 것은 '입을 꾹 다문 모습'이다.
사량분별이나 언구로 설명이 불가한 것인지라 입을 다물고 선기(禪機)를 보였다는 뜻.
*下載清風; 남종선(南宗禪)의 신선한 선풍(禪風)

 

十八問中。此謂之編辟問。
雪竇道。
編辟曾挨老古錐。
編辟萬法。
教歸一致。
這僧要挨拶他趙州。
州也不妨作家。
向轉不得處有出身之路。
敢開大口便道。
我在青州作一領布衫。
重七斤。雪竇道。
這箇七斤布衫能有幾人知。
如今拋擲西湖裏。
萬法歸一。一亦不要。
七斤布衫亦不要。
一時拋在西湖裏。
雪竇住洞庭翠峰。有西湖也。
18문(十八問) 중 이를 편벽문(編辟問)이라 한다.
설두가 말하기를,
"편벽하여 일찍이 해묵은 송곳을 추궁했다"고 했는데,
만법(萬法)을 엉뚱한 곳에 치우쳐서 생각하니
진실로 돌아가 일치(一致)하도록 가르친 것이다.
이 중이 저 조주를 윽박지르고자 했으나
조주는 어쩔 수 없는 작가이니
향해 구르지 못할 곳에서도 빠져나갈 길이 있는지라
감히 큰 입을 열어서
 '내가 청주에 있을 때 홑적삼 한 벌을 지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 한 것을 설두는
"이런 일곱 근 적삼을 몇 사람이나 알겠는가?" 하였다.
"지금은 서호(西湖) 속에 던져버렸다" 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고 나면 하나도 필요치 않고,
일곱 근 적삼도 소용 없으니,
한꺼번에 서호(西湖) 속에 던져버리라는 것이다.
설두가 거주한 동정호의 취봉(翠峰)에 서호(西湖)가 있다.
下載清風付與誰。
此是趙州示眾。
爾若向北來。與爾上載。
爾若向南來。與爾下載。
爾若從雪峰雲居來。
也是箇擔板漢。
雪竇道。如此清風堪付阿誰。
上載者。與爾說心說性。
說玄說妙。種種方便。
若是下載。
更無許多義理玄妙。
"청풍을 하재하여 누구에게 부여하리오." 한 것은
이는 조주(趙州)가 시중(示眾)하여
"니가 북쪽에서 왔다면 상재(上載*)해 주고,
남쪽에서 왔다면 하재(下載*)해 주겠지만
니가 만약 설봉(雪峰)이나 운거(雲居)에게서 왔다면
이는 담판한(擔板漢*)이다." 하였는데,
설두가 이런 청풍을 감히 누구에게 부여하겠느냐고 한 것이다.
상재(上載)란 너희에게 심성(心性)을 설하고
현묘(玄妙)를 설하여 갖가지 방편을 주지만,
이것이 하재(下載)라면
따져볼만 한 별다른 의리(義理)나 현묘(玄妙)가 없다. 

*上載와 下載; 보리달마의 법맥이 5조 홍인(弘忍)에 이른 뒤에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의 양 갈래로 나뉘어 신수는 북에 법(法;敎)의 기치를 세우고
혜능은 남에 종풍[南宗禪]을 선양하였기에 「남능북수(南能北秀)」라 한다.
남종(南宗)의 선풍(禪風)은 교법의 그물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명상(名相)에 떨어지지 않고 언구(言句)에 체(滯)하지 아니하며
修와 證이 不二요, 迷와 悟가 一如임을 제창한다.
조주가 북에서 왔다면 상재(上載)해 주겠다 하였으니, 상재는 교법의 전수를 의미하고,
남에서 왔다면 하재(下載)하겠다는 것은 남종선(南宗禪)으로 대해주겠다는 뜻이다.
*擔板漢; 등에 널판을 지고 가는 놈.
뒤돌아보지 못한다는 뜻이나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또는 외골수라는 의미로 쓰인다. 

有底擔一擔禪。到趙州處。
一點也使不著。
一時與他打疊。
教灑灑落落無一星事。
謂之悟了還同未悟時。
如今人盡作無事會。
有底道。無迷無悟。
不要更求。
只如佛未出世時。
達磨未來此土時。
不可不恁麼也。
用佛出世作什麼。
祖師更西來作什麼。
總如此有什麼干涉。
也須是大徹大悟了。
依舊山是山水是水。
乃至一切萬法悉皆成現。
方始作。箇無事底人。
어떤 일담선(一擔禪*)을 진 자가 조주에게 가니,
한 점도 붙여보지 못하게 하고
일시에 수습해 주어서
아무런 일도 없이 개운하게 하였는다는데,
이를 깨치고 나서도 깨치지 못한 때와 같다고 하거니와,
요즘 사람들이 다 무사(無事)라고 알고 있다.
어떤 자는 "미혹함도 깨침도 없으니
다시 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데,
다만 부처님 출세하지 않았을 때나
달마가 이땅에 오지 않았을 때에도
그렇지 않을 수 없거늘,
부처님 출세를 이용하여 무엇을 하고,
조사가 또 서쪽에서 와서는 무엇에 쓰며,
모두가 이와 같은데 무슨 간섭이 있겠는가?
그러니 모름지기 대철대오(大徹大悟)해야
여전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것이요,
일체 만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현전(現前)에 이루어야
비로소 저 무사(無事)한 사람인 것이다. 
不見龍牙道學道。
先須有悟由。
還如曾鬥快龍舟。
雖然舊閣閑田地。
一度贏來方始休。
只如趙州這箇七斤布衫話子。
看他古人恁麼道。如金如玉。
山僧恁麼說。
諸人恁麼聽。總是上載。
且道作麼生是下載。
三條椽下看取。
보지 못했는가? 용아(龍牙*)가 이르되, "학도(學道)는
먼저 꼭 깨달아야 할 연유가 있어서
용주(龍舟*)의 빠르기를 다투듯 해야 하지만
그렇더라도 옛 누각 한가한 그자리는
한 번 이기고 와야 비로소 거기에 쉬리라." 한 것이
다만 조주의 이 「일곱 근 적삼」 얘기와 같아서
그 고인의 이러한 말을 보건대 금과 같고 옥과 같다.
산승이 이렇게 말하고,
여러분이 이렇게 듣는 것이 다 상재(上載)이거니와,
자 말해보라. 어떤 것이 하재(下載)인가?
삼조연하(三條椽下*)에서 살펴 취하거라. 

*一擔禪;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여 통한 듯하나 통한 것이 아닌 선(禪).
*龍牙; 潭州龍牙宗密禪師(泐潭應乾 法嗣) 南嶽下十四世
*龍舟; 뱃머리에 용의 형상을 갖춘 인력으로 노를 저어 나가는 배.
중국 단오절에 이 경주를 하는데 그 기원은 물에 빠진 사람을 빨리 구하기 위함이다 한다.
*三條椽下; 승당(僧堂)의 사람마다 앉을 자리는 가로 석 자가 주어지는데
천정 서까래 3개의 공간에 해당하니, 이를 빌어 서까래 세 개 밑[三條椽下]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