垂示云。
門庭施設。且恁麼。破二作三。
入理深談。也須是七穿八穴。
當機敲點。擊碎金鎖玄關。
據令而行。直得掃蹤滅跡。
且道誵訛在什麼處。具頂門眼者。請試舉看。
[수시(垂示)]
선문(禪門) 뜰의 시설(施設;描述)이 그렇게 파이작삼(破二作三*)하고,
이치에 깊이 들어가 담론해보면 그야말로 칠천팔혈(七穿八穴*)이거니와,
기틀을 두드려 점파(點破)하고, 쇠자물쇠와 현묘(玄妙)의 관문을 쳐부수며,
영에 따라 시행하고는 곧바로 종적(蹤跡)을 쓸어 없애버린다.
말해보라,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 정문안(頂門眼;一隻眼)을 갖췄다면 예를 들추리니 살펴보라.
*破二作三; 둘을 쪼개 셋을 만든다 함은 사리(事理)를 분석(分析)하는 것을 뜻한다.
《오등회원(五燈會元)》 隆興府黃龍死心悟新禪師(1044~1115; 南嶽下 4世) 편에
선사가 상당하여 “어느 때는 둘을 쪼개 셋을 만들고(有時破二作三),
어느 때는 셋이 만나 하나로 돌아가며(有時會三歸一),
어느 때는 셋과 하나가 같이 뒤섞이고(有時三一混同), 어느 때는 수량을 이루지 못하는데(有時不落數量),
말해보라. 어디가 황룡(黃龍)이 사람 된 곳이냐?”고 했다 하였다.
*七穿八穴(七花八裂); 선림용어. 七縱八橫, 七通八達, 七顛八倒, 七支八節, 七零八落, 七凹八凸와 같은 의미로서
이리저리 흩어져 갈피를 잡지 못한다(支離滅裂)는 뜻. 때로는 자재히 통달하여 장애가 없음을 찬탄하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八八】舉。
玄沙示眾云。
諸方老宿。盡道接物利生 (隨分開箇鋪席。隨家豐儉)
忽遇三種病人來。作麼生接 (打草只要蛇驚。山僧直得目瞪口呿。管取倒退三千里)
患盲者。拈鎚豎拂。他又不見 (端的瞎。是則接物利生。未必不見在)
患聾者。語言三昧。他又不聞 (端的聾。是則接物利生。未必聾在。是那箇未聞在)
患啞者教伊說。又說不得 (端的啞。是則接物利生。未必啞在。是那箇未說在)
且作麼生接。若接此人不得。佛法無靈驗 (誠哉是言。山僧拱手歸降。已接了也。便打)
僧請益雲門 (也要諸方共知。著)
雲門云。汝禮拜著 (風行草偃。咄)
僧禮拜起 (這僧拗折拄杖子也)
雲門以拄杖挃。僧退後。門云。汝不是患盲 (端的瞎。莫道這僧患盲好)
復喚近前來。僧近前 (第二杓惡水澆。觀音來也。當時好與一喝)
門云。汝不是患聾 (端的聾。莫道這僧患聾好)
門乃云。還會麼 (何不與本分草料。當時好莫作聲)
僧云。不會 (兩重公案。蒼天蒼天)
門云。汝不是患啞 (端的啞。口吧吧地。莫道這僧啞好)
僧於此有省 (賊過後張弓。討什麼碗)
瞪 (持陵切。怒目直視也)
呿 (去伽切。張口貌)
挃 (陟栗切。音窒撞空也)。
【88則】 현사삼종병(玄沙三種病)
현사(玄沙)스님이 대중에게 말했다.
“제방(諸方)의 노숙(老宿)들이 다 접물이생(接物利生*)을 말하거니와
(분수대로 자리를 펴고, 집에 따라 풍요롭기도 검소하기도 하다.)
갑자기 세 가지 병든 사람이 찾아오면 어떻게 접(接)하겠는가?
(풀을 치는 것이 다만 뱀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라, 산승은 곧바로 어안이 벙벙하여 분명 30리는 물러났으리라.)
장님은 쇠망치를 잡고 불자(拂子)를 들어도 보지 못하고,
(단적으로 눈이 멀었다는 것은 이는 곧 접물이생(接物利生)이거나, 아니면 보지 못함이 있다. )
귀머거리는 어언삼매(語言三昧)여도 듣지 못할 것이며,
(단적으로 귀머거리는 접물이생이거나, 아니면 듣지 못함이 있거니와 이는 어째서 듣지 못함이 있는가?)
벙어리는 저에게 말을 가르쳐주어도 말하지 못하니,
(단적으로 벙어리는 접물이생이거나, 아니면 말을 못함이 있거니와 이는 왜 말을 못함이 있는가?)
또 어떻게 접(接)할 것인가? 만약 이 사람들을 접하지 못하면 불법(佛法)이 영험(靈驗)이 없는 것이다.
(진실하도다, 이 말이여! 산승은 공수(拱手*)하고 항복했다. 이미 접(接)했도다. <갑자기 후려치다>) "
어떤 중이 운문(雲門)스님께 청익(請益)하니,
(제방<諸方>이 다 함께 알아야 하니, 잘했다.)
운문은 "절을 하거라." 하였다.
(바람을 불어 풀을 눕히는구나. 쯧!)
중이 절을 하고 일어나자,
(저 중이 주장자<자존심>를 요절<拗折>냈구나.)
운문이 주장자로 찌르니 중이 뒤로 물러나매, 운문이 말했다. "네가 장님은 아니구나."
(단적으로 장님이다. 이 중이 <스스로> 장님이라고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다시 가까이 오라 하여 중이 앞으로 오자.
(두 번째 구정물 바가지를 뿌리는데도 관세음보살이 오는구먼. 그 때 일할<一喝>을 해주었어야 했다.)
운문이 "너는 귀머거리가 아니구나." 하고서,
(단적으로 귀머거리다. 저 중이 귀머거리라고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내 말하기를, "알겠느냐?" 하였다.
(왜 본분<本分> 키울 사료<飼料>는 주지 않는가? 그럴 때는 아무 소리 말아야 한다.)
중이 "모르겠습니다." 하니,
(공안을 거듭하였건만<兩重公案>... 아이고, 아이고!)
운문이 "너는 벙어리가 아니구나." 하자,
(단적으로 벙어리다. 입만 수다스럽다. 저 중이 벙어리라고 말하지 말아야 했다.)
중은 그제서야 어떤 성찰(省察)이 있었다.
(도적 지나간 뒤에 활 당기는구나. 무슨 그릇을 바라느냐?)
징[瞪] (지릉절<持陵切>로서 성난 눈으로 노려보다.)
거[呿] (거가절<去伽切>로서 입을 크게 벌린 모양)
질[挃] (척율절<陟栗切>로서 말이 막혀 허공을 치다.)
*接物利生; 중생을 접인(接引)하여 화도(化導)하고 그 근기에 맞게 이익을 주는 것.
*管取; <방언> 틀림없이. 반드시. 꼭.
*倒退; <동사> 뒤로 물러나다. 후퇴하다. 뒷걸음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后退). <명사> 후퇴. 역행. (=倒溯)
*拱手; 왼손을 오른손 위에 놓고 두 손을 마주 잡아, 공경(恭敬)의 뜻을 나타내는 예(禮).
玄沙參到絕情塵意想。淨裸裸赤灑灑地處。方解恁麼道。是時諸方。列剎相望。
尋常示眾道。諸方老宿。盡道接物利生。忽遇三種病人來時。作麼生接。
患盲者。拈鎚豎拂他又不見。患聾者。語言三昧他又不聞。患啞者。教他說又說不得。
且作麼生接。若接此人不得。佛法無靈驗。
如今人若作盲聾瘖啞會。卒摸索不著。所以道。莫向句中死卻。須是會他玄沙意始得。
현사(玄沙) 선사는 정진의상(情塵意想)이 끊겨 정라라적쇄쇄(淨裸裸赤灑灑)한 경지에 이르러
그렇듯 풀어 말한 것이라 그 때의 제방(諸方)에 줄지은 사찰들이 우러러 보았다.
시중(示眾)하여 예사롭게 말하기를, "제방(諸方)의 노숙(老宿)들이 다 접물이생(接物利生)을 말하는데
갑자기 세 가지 병든 사람이 찾아왔을 때는 어떻게 접(接)하겠는가?
맹인은 쇠망치를 잡고 불자(拂子)를 들어도 보지 못하고,
귀머거리는 어언삼매(語言三昧)여도 듣지 못할 것이며,
벙어리는 저에게 말을 가르쳐주어도 말하지 못하니, 또 어떻게 접(接)할 것인가?
만약 이 사람들을 접하지 못하면 불법(佛法)이 영험(靈驗)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
지금의 사람들처럼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로 안다면 끝내 찾아도 안될 것이기에
그래서 "구절 속을 향해 빠져 죽지 말라."고 하였으니, 모름지기 이렇게 현사의 뜻을 알아야 한다.
玄沙常以此語接人。有僧久在玄沙處。一日上堂。僧問和尚云。三種病人話。還許學人說道理也無。
玄沙云許。僧便珍重下去。沙云。不是不是。這僧會得他玄沙意。
後來法眼云。我聞地藏和尚舉這僧語。方會三種病人話。
若道這僧不會。法眼為什麼卻恁麼道。若道他會。玄沙為什麼。卻道不是不是。
현사 선사는 늘 이 말로 사람들을 접했다.
어떤 중이 현사의 처소에 오래 있었는데, 어느 날 선사가 당에 오르시자 이 중이 선사에게
"삼종병인(三種病人) 화두의 도리(道理)를 학인(學人)이 말하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물었다.
현사가 허락하자, 중은 문득 "안녕히 계십시요." 하고 내려가니,
현사가 "틀렸다, 틀렸어!" 하였지만 저 중은 현사의 뜻을 알았던 것이다.
후에 와서 법안(法眼)스님이 “나는 지장(地藏)화상이 저 스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비로소 삼종병인(三種病人)이라는 화두를 알았다.”고 하였는데,
만약 그 중이 몰랐다고 한다면 법안은 왜 그렇게 말한 것이며,
알았다고 한다면 현사는 무엇 때문에 “틀렸다, 틀렸어!”라고 말했겠는가?
一日地藏道。某甲聞。和尚有三種病人話是否。沙云是。藏云。珪琛現有眼耳鼻舌。
和尚作麼生接。玄沙便休去。若會得玄沙意。豈在言句上。他會底自然殊別。
하루는 지장(地藏) 선사가 "제가 듣기로 화상께 삼종병인이라는 화두가 있다는데,
그렇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렇소.”
"안이비설(眼耳鼻舌)이 멀쩡한 규침(珪琛*) 선사라면 화상께서는 어찌 접하시렵니까?"
이에 현사는 문득 말문을 닫아버렸다. 만일 현사의 뜻을 알아채리고
'어찌 언구(言句) 상에 있겠는가' 그대들이 이렇게 알면 자연히 특별해지리라.
*珪(桂)琛; 규침(계침) 선사. 漳州羅漢院桂琛禪師
後有僧舉似雲門。門便會他意云。汝禮拜著。僧禮拜起。門以拄杖挃。這僧退後。
門云。汝不是患盲。復喚近前來。僧近前。門云。汝不是患聾。
乃云會麼僧云。不會。門云。汝不是患啞。其僧於此有省。
當時若是箇漢。等他道禮拜著。便與掀倒禪床。豈見有許多葛藤。
且道雲門與玄沙會處。是同是別。他兩人會處都只一般。
후에 어떤 중이 운문스님에게 이를 들추자 운문은 그의 뜻을 바로 알고 말했다.
“절을 하거라.” 중이 절을 하고 일어나자 운문이 주장자로 찌르니,
중이 뒤로 물러나매, 운문이 말했다. “네가 장님은 아니구나.”
다시 가까이 오라 하여 중이 앞으로 오자, 운문이 “너는 귀머거리가 아니구나.” 하고서,
이내 말하기를, “알겠느냐?” 하였다. 중이 “모르겠습니다.” 하자,
운문이 “너는 벙어리가 아니구나.” 하니, 중은 그제서야 어떤 성찰이 있었다.
당시에 좀 하는 놈이었다면 그가 절하라고 했을 때 바로 선상(禪床)을 들어 엎어버리지
어찌 허다한 갈등(葛藤)을 보고 있겠는가?
말해보라. 운문과 현사가 아는 곳이 같은가, 다른가?
저 두 사람이 안 곳은 다 매일반이다.
看他古人出來。作千萬種方便。意在鉤頭上。多少苦口。只令諸人各各明此一段事。
五祖老師云。一人說得卻不會。一人卻會說不得。二人若來參。如何辨得他。
若辨這兩人不得。管取為人解粘去縛不得在。若辨得。纔見入門。
我便著草鞋向爾肚裏走幾遭了也。猶自不省。討什麼碗出去。
且莫作盲聾瘖啞會好。若恁麼計較。所以道。眼見色如盲等。耳聞聲如聾等。
又道*。滿眼不視色。滿耳不聞聲。文殊常觸目。觀音塞耳根。
到這裏眼見如盲相似。耳聞如聾相似。方能與玄沙意不爭多。
諸人還識盲聾瘖啞底漢子落處麼。看取雪竇頌云。
저 옛사람들이 내놓은 천만 가지 방편을 살펴보면 그 의도가 낚시 끝에 있어서
많고 적게 입이 쓰도록 사람들 각각으로 하여금 이 일단사(一段事*)를 밝히게 하였다.
오조(五祖) 노스님이 “한 사람은 말해주어도 모르고, 한 사람은 알아도 말하지 못한다.
두 사람이 와서 참례한다면 어떻게 판별하겠는가?" 하셨는데,
이 두 사람을 판별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에게 해점거박(解粘去縛;去粘解縛*)해 줄 수 없고,
만약 판별한다면 문에 들어서는 것만 보고도 나 같으면 곧 신발을 신고
그의 뱃속을 몇 바퀴 돌았겠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무슨 그릇이 나오기를 바라겠는가?
또 장님이나 귀머거리, 벙어리로 알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계교(計較)하기 때문에 <유마경>에 말하기를,
“눈으로 색을 보되 장님과 같고, 귀로 소리를 듣되 귀머거리와 같다”고 하였고,
또 "눈 가득한 것이 본래 색이 아니고, 귀 가득한 것이 본래 소리가 아니니,
문수보살은 늘 눈을 느끼고, 관세음보살은 귀를 막았다네.<장사(長沙)선사*>" 한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는 눈으로 보되 장님과 같고, 귀로 듣되 귀머거리와 같아야
비로소 현사의 뜻과 다툼이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맹롱음아(盲聾瘖啞)라는 한자의 의미를 알았는가?
설두스님이 게송을 취해 살펴보자.
*一段事; 목전(目前)의 일, 중요한 일, 오도(悟道)하는 일 등으로 부모미생시(父母未生時)와 같이 쓰인다.
*去粘解縛; 신상의 점박(粘縛)을 제거함.
선림(禪林)에서는 번뇌집착을 풀어 없애므로써 자재무애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長沙景岑 禪師; <전등록 10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다라니(陀羅尼)입니까?"
선사가 선상(禪床) 오른쪽 끝을 가리키며 "저 강사스님이 외울줄 안다." 하였다.
"또 누가 외울줄 압니까?" 이번에는 선상 왼쪽 끝을 가리키며 "저 강사스님도 외울줄 안다."
"제게는 왜 들리지 않습니까?"
"그대는 어째서 들리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참된 낭송은 울림이 없고 참된 들음은 들림이 없다네."
"그렇다면 곧 음성은 법계의 성품에 못들어가겠습니다."
"색(色)을 떠나 보려는 것은 정견(正見)이 아니고, 소리[聲]를 떠나서 들으려는 것은 그릇된 들음이다."
"어째서 색을 떠나지 않고 보는 것이 정견이고, 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참된 들음이라 하십니까?"
선사가 이내 게송으로 말했다.
눈 가득한 것이 본래 색이 아니고, 귀 가득한 것이 본래 소리가 아니라네.
문수보살은 늘 눈을 느끼고, 관세음보살은 귀를 막았으니,
셋이 원래 한 몸임을 알면 넷이 본래 다같이 참임을 요달하려니와
당당한 법계의 성품은 부처도 없고 사람도 없다네.
<景德傳燈錄卷第十 湖南長沙景岑號招賢大師。>
又問。如何是陀羅尼。師指禪床右邊曰。遮箇師僧卻誦得。又問。別有人誦得否。
又指禪床左邊曰。遮箇師僧亦誦得。云某甲為什麼不聞。
師曰。大德豈不聞道。真誦無響真聽無聞。云恁麼則音聲不入法界性也。
師曰。離色求觀非正見。離聲求聽是邪聞。云如何不離色是正見。不離聲是真聞。師乃有偈曰。
滿眼本非色 滿耳本非聲
文殊常觸目 觀音塞耳根
會三元一體 達四本同真
堂堂法界性 無佛亦無人
盲聾瘖啞 (已在言前。三竅俱明。已做一段了也)
杳絕機宜 (向什麼處摸索。還做計較得麼。有什麼交涉)
天上天下 (正理自由。我也恁麼)
堪笑堪悲 (笑箇什麼。悲箇什麼。半明半暗)
離婁不辨正色 (瞎漢。巧匠不留蹤。端的瞎)
師曠豈識玄絲 (聾漢。大功不立賞。端的聾)
爭如獨坐虛窗下 (須是恁麼始得。莫向鬼窟裏作活計。一時打破漆桶)
葉落花開自有時 (即今什麼時節。切不得作無事會。今日也從朝至暮。明日也從朝至暮)。
復云。還會也無 (重說偈言)
無孔鐵鎚 (自領出去。可惜放過。便打)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들아!
(이미 말하기 전에 있었지만 세 구멍이 다 밝아지면 이왕 그랬더라도 일단사<一段事>를 마친다.)
기의(機宜*)가 아득히 끊겼으니,
(어디서 찾을 것이며, 그래서 계교(計較)가 얻어질 것이며, 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천상천하(天上天下)가,
(바른 이치는 자유로운 것인데, 나야말로 그렇다.)
웃을만도 하고 슬퍼할만도 하구나.
(웃을 일은 무엇이고, 슬퍼할 일은 무엇인가? 반은 밝고, 반은 어둡다.)
이루(離婁)도 바른 색을 판별 못하려니와
(눈먼 놈이다. 능숙한 장인[巧匠]은 종적을 남기지 않는 법이라, 단적으로 눈이 멀었다.) "
사광(師曠)은 어찌 현사(玄絲*)를 알 것이며,
(귀먹은 놈이다. 큰 공은 상(賞)을 세우지 않는 법이라, 단적으로 귀머거리다.)
어찌 공허한 창 아래 홀로 앉아
(아무쪼록 그래야 하니, 귀신굴 속에 살림살이 하지 말라며 일시에 칠통<漆桶>을 타파<打破>했다.)
잎 지고 꽃 피움이 절로 있는 때만 같겠는가?
(곧 지금은 무슨 시절인가? 일 없는 것<無事>으로 알면 안된다. 오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고, 내일도 아침부터 저녁까지이다.)。
다시 말하노니, 알겠느냐?
(거듭 게언<偈言>을 말했다.)
무공철추(無孔鐵鎚*)로다.
(스스로 자백하면<自領出去> 애석하지만 봐주겠다. <갑자기 후려치다>)
*機宜; 근기에 알맞음. 중생(衆生)은 다 선근이 있으므로 교화하려거든
곧 근기에 따라 적절한 교법(敎法)을 베풀라는 의미로 쓰인다.
*玄絲; 현묘한 음[玄音]을 내는 줄[絃].
*無孔鐵鎚; 구멍없는 철추, 즉 손 봐줄 데가 없다는 뜻.
*自領出去; 중국 법정용어. 자진출두하여 죄를 자백하는 것.
盲聾瘖啞杳絕機宜。
盡爾見與不見聞與不聞說與不說。雪竇一時與爾掃卻了也。
直得盲聾瘖啞見解。機宜計較。一時杳絕。總用不著。這箇向上事。可謂真盲真聾真啞。無機無宜。
天上天下堪笑堪悲。
雪竇一手抬一手搦。且道笑箇什麼悲箇什麼。
堪笑是啞卻不啞。是聾卻不聾。堪悲明明不盲卻盲。明明不聾卻聾。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들아! 기의(機宜)가 아득히 끊겼구나.'라고 하여,
그대들의 봄[見]과 보지 못함[不見], 들음[聞]과 듣지 못함[不聞], 말함[說]과 말하지 못함[不說] 모두를
설두스님이 일시에 쓸어버렸다.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의 견해에 빠지면 기의(機宜*)와 계교(計較)가 일시에 아득히 끊겨 다 쓸 수 없게 되리니,
그 참모습[向上事*]은 진짜 장님, 진짜 귀머거리, 진짜 벙어리여서 기(機)도 의(宜)도 없다 할 것이다.
'천상천하가 웃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리라.'고 하여 설두스님은 한 손으로 치켜 세우고
한 손으로는 짓눌렀는데, 말해보라, 어떤 것을 웃고, 어떤 것을 슬퍼하겠는가?
벙어리인데 벙어리가 아니고, 귀머거리인데 귀머거리가 아니니 웃을만 하고,
분명히 장님이 아닌데 장님이고, 분명히 귀머거리가 아닌데 귀머거리니 슬퍼할만 한 것이다.
離婁不辨正色。不能辨青黃赤白。正是瞎。
離婁黃帝時人。百步外能見秋毫之末。其目甚明。
黃帝游於赤水沈珠。令離朱尋之不見。令喫詬尋之亦不得。後令象罔尋之方獲之。
故云。象罔到時光燦爛。離婁行處浪滔天。
這箇高處一著。直是離婁之目亦辨他正色不得。師曠豈識玄絲。
周時絳州晉景公之子。師曠字子野(一云。晉平公之樂太師也)
善別五音六律。隔山聞蟻鬥。時晉與楚爭霸。師曠唯鼓琴。撥動風絃。知戰楚必無功。
雖然如是。雪竇道。他尚未識玄絲在。不聾卻是聾底人。
這箇高處玄音。直是師曠亦識不得。
'이루(離婁)도 바르게 색을 판별하지 못한다' 하였는데,
청, 황, 적, 백을 분별하지 못하면 바로 눈이 먼 것이다.
이루는 황제(黃帝) 때의 사람으로, 백 보 밖에서도 털끝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눈이 매우 밝았다는데,
황제가 적수(赤水)를 노닐다가 구슬을 빠뜨려 이루에게 찾게 하였으나 찾지 못했고,
끽구(喫詬)에게 또 찾게 하였어도 찾지 못하다가 후에 상망(象罔)에게 찾게 하고서야 비로소 찾았다 한다.
그래서 '상망이 오면 빛이 찬란하고, 이루가 가는 곳은 물결이 하늘을 넘친다'고 하였다.
이렇듯 높은 경지의 한 수는 이루의 눈으로도 그 바른 색을 판별하지 못하려니와
사광(師曠)인들 어찌 현묘한 음(音)을 내는 줄[絃]을 알겠는가?
주(周)나라 때 강주(絳州) 진경공(晋景公)의 아들 사광은 자(字)는 자야(子野)로서
(진평공<晉平公>의 음악선생이었다는 설이 있다.)
5음6률(五音六律)을 잘 구별하여 산 너머 개미 싸우는 소리도 들었다는데,
진(晉)이 초(楚)와 패권을 다툴 때 사광은 오로지 거문고를 뜯고 풍현(風絃)을 다스리기만 하고서도
초와의 전쟁에서 필경 전공이 없을 것임을 알았다 한다.
그런데도 설두스님이 그도 오히려 현사(玄絲)가 있음을 모른다고 한 것은
귀먹지 않았으나 도리어 귀먹은 사람이라서 이런 고처(高處)의 현음(玄音)은 사광도 모른다는 것이다.
雪竇道。我亦不作離婁。亦不作師曠。爭如獨坐虛窗下。葉落花開自有時。
若到此境界。雖然見似不見。聞似不聞。說似不說。飢即喫飯。困即打眠。任他葉落花開。
葉落時是秋。花開時是春。各各自有時節。雪竇與爾一時掃蕩了也。
又放一線道云。還會也無。雪竇力盡神疲。只道得箇無孔鐵鎚。這一句急著眼看方見。若擬議又蹉過。
師舉拂子云。還見麼。遂敲禪床一下云。還聞麼。下禪床云。還說得麼。
설두스님은 말했다. '나는 이루가 되지 않고 사광도 되지 않으리니,
어찌 공허한 창 아래 홀로 앉아 낙엽지고 꽃 피움이 절로 있는 때만 하겠는가?'
만약 이 경계에 이르면 비록 본다지만 보지 않는 것과 같고, 들어도 듣지 앉는 것과 같으며,
말해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아서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곧 잠 자면서
저가 낙엽 지고 꽃 피게 맡겨둔다. 낙엽이 지면 가을이요, 꽃이 피면 봄이라
저마다 스스로 시절이 있다고 하여 설두스님이 그대들에게 일시의 소탕을 주고서,
또 한가닥 길을 열어놓고 '알겠느냐?' 하였다.
설두스님은 힘이 다하고 정신이 피로하여 다만 '구멍 없는 철추'라고 하였는데,
이 한 구절에 급히 착안하여 살펴야 비로소 보일 것이나,
만일 시비곡직 따지면 또 미끄러져 지나버린다.
원오 선사는 불자를 들고 “보이느냐?” 하더니,
이윽고 선상(禪床)을 한 차례 내려치면서 “들리느냐?” 하고,
선상에서 내려오면서 “말하겠느냐?” 하였다.
門庭施設。且恁麼。破二作三。
入理深談。也須是七穿八穴。
當機敲點。擊碎金鎖玄關。
據令而行。直得掃蹤滅跡。
且道誵訛在什麼處。具頂門眼者。請試舉看。
[수시(垂示)]
선문(禪門) 뜰의 시설(施設;描述)이 그렇게 파이작삼(破二作三*)하고,
이치에 깊이 들어가 담론해보면 그야말로 칠천팔혈(七穿八穴*)이거니와,
기틀을 두드려 점파(點破)하고, 쇠자물쇠와 현묘(玄妙)의 관문을 쳐부수며,
영에 따라 시행하고는 곧바로 종적(蹤跡)을 쓸어 없애버린다.
말해보라,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 정문안(頂門眼;一隻眼)을 갖췄다면 예를 들추리니 살펴보라.
*破二作三; 둘을 쪼개 셋을 만든다 함은 사리(事理)를 분석(分析)하는 것을 뜻한다.
《오등회원(五燈會元)》 隆興府黃龍死心悟新禪師(1044~1115; 南嶽下 4世) 편에
선사가 상당하여 “어느 때는 둘을 쪼개 셋을 만들고(有時破二作三),
어느 때는 셋이 만나 하나로 돌아가며(有時會三歸一),
어느 때는 셋과 하나가 같이 뒤섞이고(有時三一混同), 어느 때는 수량을 이루지 못하는데(有時不落數量),
말해보라. 어디가 황룡(黃龍)이 사람 된 곳이냐?”고 했다 하였다.
*七穿八穴(七花八裂); 선림용어. 七縱八橫, 七通八達, 七顛八倒, 七支八節, 七零八落, 七凹八凸와 같은 의미로서
이리저리 흩어져 갈피를 잡지 못한다(支離滅裂)는 뜻. 때로는 자재히 통달하여 장애가 없음을 찬탄하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八八】舉。
玄沙示眾云。
諸方老宿。盡道接物利生 (隨分開箇鋪席。隨家豐儉)
忽遇三種病人來。作麼生接 (打草只要蛇驚。山僧直得目瞪口呿。管取倒退三千里)
患盲者。拈鎚豎拂。他又不見 (端的瞎。是則接物利生。未必不見在)
患聾者。語言三昧。他又不聞 (端的聾。是則接物利生。未必聾在。是那箇未聞在)
患啞者教伊說。又說不得 (端的啞。是則接物利生。未必啞在。是那箇未說在)
且作麼生接。若接此人不得。佛法無靈驗 (誠哉是言。山僧拱手歸降。已接了也。便打)
僧請益雲門 (也要諸方共知。著)
雲門云。汝禮拜著 (風行草偃。咄)
僧禮拜起 (這僧拗折拄杖子也)
雲門以拄杖挃。僧退後。門云。汝不是患盲 (端的瞎。莫道這僧患盲好)
復喚近前來。僧近前 (第二杓惡水澆。觀音來也。當時好與一喝)
門云。汝不是患聾 (端的聾。莫道這僧患聾好)
門乃云。還會麼 (何不與本分草料。當時好莫作聲)
僧云。不會 (兩重公案。蒼天蒼天)
門云。汝不是患啞 (端的啞。口吧吧地。莫道這僧啞好)
僧於此有省 (賊過後張弓。討什麼碗)
瞪 (持陵切。怒目直視也)
呿 (去伽切。張口貌)
挃 (陟栗切。音窒撞空也)。
【88則】 현사삼종병(玄沙三種病)
현사(玄沙)스님이 대중에게 말했다.
“제방(諸方)의 노숙(老宿)들이 다 접물이생(接物利生*)을 말하거니와
(분수대로 자리를 펴고, 집에 따라 풍요롭기도 검소하기도 하다.)
갑자기 세 가지 병든 사람이 찾아오면 어떻게 접(接)하겠는가?
(풀을 치는 것이 다만 뱀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라, 산승은 곧바로 어안이 벙벙하여 분명 30리는 물러났으리라.)
장님은 쇠망치를 잡고 불자(拂子)를 들어도 보지 못하고,
(단적으로 눈이 멀었다는 것은 이는 곧 접물이생(接物利生)이거나, 아니면 보지 못함이 있다. )
귀머거리는 어언삼매(語言三昧)여도 듣지 못할 것이며,
(단적으로 귀머거리는 접물이생이거나, 아니면 듣지 못함이 있거니와 이는 어째서 듣지 못함이 있는가?)
벙어리는 저에게 말을 가르쳐주어도 말하지 못하니,
(단적으로 벙어리는 접물이생이거나, 아니면 말을 못함이 있거니와 이는 왜 말을 못함이 있는가?)
또 어떻게 접(接)할 것인가? 만약 이 사람들을 접하지 못하면 불법(佛法)이 영험(靈驗)이 없는 것이다.
(진실하도다, 이 말이여! 산승은 공수(拱手*)하고 항복했다. 이미 접(接)했도다. <갑자기 후려치다>) "
어떤 중이 운문(雲門)스님께 청익(請益)하니,
(제방<諸方>이 다 함께 알아야 하니, 잘했다.)
운문은 "절을 하거라." 하였다.
(바람을 불어 풀을 눕히는구나. 쯧!)
중이 절을 하고 일어나자,
(저 중이 주장자<자존심>를 요절<拗折>냈구나.)
운문이 주장자로 찌르니 중이 뒤로 물러나매, 운문이 말했다. "네가 장님은 아니구나."
(단적으로 장님이다. 이 중이 <스스로> 장님이라고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다시 가까이 오라 하여 중이 앞으로 오자.
(두 번째 구정물 바가지를 뿌리는데도 관세음보살이 오는구먼. 그 때 일할<一喝>을 해주었어야 했다.)
운문이 "너는 귀머거리가 아니구나." 하고서,
(단적으로 귀머거리다. 저 중이 귀머거리라고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내 말하기를, "알겠느냐?" 하였다.
(왜 본분<本分> 키울 사료<飼料>는 주지 않는가? 그럴 때는 아무 소리 말아야 한다.)
중이 "모르겠습니다." 하니,
(공안을 거듭하였건만<兩重公案>... 아이고, 아이고!)
운문이 "너는 벙어리가 아니구나." 하자,
(단적으로 벙어리다. 입만 수다스럽다. 저 중이 벙어리라고 말하지 말아야 했다.)
중은 그제서야 어떤 성찰(省察)이 있었다.
(도적 지나간 뒤에 활 당기는구나. 무슨 그릇을 바라느냐?)
징[瞪] (지릉절<持陵切>로서 성난 눈으로 노려보다.)
거[呿] (거가절<去伽切>로서 입을 크게 벌린 모양)
질[挃] (척율절<陟栗切>로서 말이 막혀 허공을 치다.)
*接物利生; 중생을 접인(接引)하여 화도(化導)하고 그 근기에 맞게 이익을 주는 것.
*管取; <방언> 틀림없이. 반드시. 꼭.
*倒退; <동사> 뒤로 물러나다. 후퇴하다. 뒷걸음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后退). <명사> 후퇴. 역행. (=倒溯)
*拱手; 왼손을 오른손 위에 놓고 두 손을 마주 잡아, 공경(恭敬)의 뜻을 나타내는 예(禮).
玄沙參到絕情塵意想。淨裸裸赤灑灑地處。方解恁麼道。是時諸方。列剎相望。
尋常示眾道。諸方老宿。盡道接物利生。忽遇三種病人來時。作麼生接。
患盲者。拈鎚豎拂他又不見。患聾者。語言三昧他又不聞。患啞者。教他說又說不得。
且作麼生接。若接此人不得。佛法無靈驗。
如今人若作盲聾瘖啞會。卒摸索不著。所以道。莫向句中死卻。須是會他玄沙意始得。
현사(玄沙) 선사는 정진의상(情塵意想)이 끊겨 정라라적쇄쇄(淨裸裸赤灑灑)한 경지에 이르러
그렇듯 풀어 말한 것이라 그 때의 제방(諸方)에 줄지은 사찰들이 우러러 보았다.
시중(示眾)하여 예사롭게 말하기를, "제방(諸方)의 노숙(老宿)들이 다 접물이생(接物利生)을 말하는데
갑자기 세 가지 병든 사람이 찾아왔을 때는 어떻게 접(接)하겠는가?
맹인은 쇠망치를 잡고 불자(拂子)를 들어도 보지 못하고,
귀머거리는 어언삼매(語言三昧)여도 듣지 못할 것이며,
벙어리는 저에게 말을 가르쳐주어도 말하지 못하니, 또 어떻게 접(接)할 것인가?
만약 이 사람들을 접하지 못하면 불법(佛法)이 영험(靈驗)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
지금의 사람들처럼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로 안다면 끝내 찾아도 안될 것이기에
그래서 "구절 속을 향해 빠져 죽지 말라."고 하였으니, 모름지기 이렇게 현사의 뜻을 알아야 한다.
玄沙常以此語接人。有僧久在玄沙處。一日上堂。僧問和尚云。三種病人話。還許學人說道理也無。
玄沙云許。僧便珍重下去。沙云。不是不是。這僧會得他玄沙意。
後來法眼云。我聞地藏和尚舉這僧語。方會三種病人話。
若道這僧不會。法眼為什麼卻恁麼道。若道他會。玄沙為什麼。卻道不是不是。
현사 선사는 늘 이 말로 사람들을 접했다.
어떤 중이 현사의 처소에 오래 있었는데, 어느 날 선사가 당에 오르시자 이 중이 선사에게
"삼종병인(三種病人) 화두의 도리(道理)를 학인(學人)이 말하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물었다.
현사가 허락하자, 중은 문득 "안녕히 계십시요." 하고 내려가니,
현사가 "틀렸다, 틀렸어!" 하였지만 저 중은 현사의 뜻을 알았던 것이다.
후에 와서 법안(法眼)스님이 “나는 지장(地藏)화상이 저 스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비로소 삼종병인(三種病人)이라는 화두를 알았다.”고 하였는데,
만약 그 중이 몰랐다고 한다면 법안은 왜 그렇게 말한 것이며,
알았다고 한다면 현사는 무엇 때문에 “틀렸다, 틀렸어!”라고 말했겠는가?
一日地藏道。某甲聞。和尚有三種病人話是否。沙云是。藏云。珪琛現有眼耳鼻舌。
和尚作麼生接。玄沙便休去。若會得玄沙意。豈在言句上。他會底自然殊別。
하루는 지장(地藏) 선사가 "제가 듣기로 화상께 삼종병인이라는 화두가 있다는데,
그렇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렇소.”
"안이비설(眼耳鼻舌)이 멀쩡한 규침(珪琛*) 선사라면 화상께서는 어찌 접하시렵니까?"
이에 현사는 문득 말문을 닫아버렸다. 만일 현사의 뜻을 알아채리고
'어찌 언구(言句) 상에 있겠는가' 그대들이 이렇게 알면 자연히 특별해지리라.
*珪(桂)琛; 규침(계침) 선사. 漳州羅漢院桂琛禪師
後有僧舉似雲門。門便會他意云。汝禮拜著。僧禮拜起。門以拄杖挃。這僧退後。
門云。汝不是患盲。復喚近前來。僧近前。門云。汝不是患聾。
乃云會麼僧云。不會。門云。汝不是患啞。其僧於此有省。
當時若是箇漢。等他道禮拜著。便與掀倒禪床。豈見有許多葛藤。
且道雲門與玄沙會處。是同是別。他兩人會處都只一般。
후에 어떤 중이 운문스님에게 이를 들추자 운문은 그의 뜻을 바로 알고 말했다.
“절을 하거라.” 중이 절을 하고 일어나자 운문이 주장자로 찌르니,
중이 뒤로 물러나매, 운문이 말했다. “네가 장님은 아니구나.”
다시 가까이 오라 하여 중이 앞으로 오자, 운문이 “너는 귀머거리가 아니구나.” 하고서,
이내 말하기를, “알겠느냐?” 하였다. 중이 “모르겠습니다.” 하자,
운문이 “너는 벙어리가 아니구나.” 하니, 중은 그제서야 어떤 성찰이 있었다.
당시에 좀 하는 놈이었다면 그가 절하라고 했을 때 바로 선상(禪床)을 들어 엎어버리지
어찌 허다한 갈등(葛藤)을 보고 있겠는가?
말해보라. 운문과 현사가 아는 곳이 같은가, 다른가?
저 두 사람이 안 곳은 다 매일반이다.
看他古人出來。作千萬種方便。意在鉤頭上。多少苦口。只令諸人各各明此一段事。
五祖老師云。一人說得卻不會。一人卻會說不得。二人若來參。如何辨得他。
若辨這兩人不得。管取為人解粘去縛不得在。若辨得。纔見入門。
我便著草鞋向爾肚裏走幾遭了也。猶自不省。討什麼碗出去。
且莫作盲聾瘖啞會好。若恁麼計較。所以道。眼見色如盲等。耳聞聲如聾等。
又道*。滿眼不視色。滿耳不聞聲。文殊常觸目。觀音塞耳根。
到這裏眼見如盲相似。耳聞如聾相似。方能與玄沙意不爭多。
諸人還識盲聾瘖啞底漢子落處麼。看取雪竇頌云。
저 옛사람들이 내놓은 천만 가지 방편을 살펴보면 그 의도가 낚시 끝에 있어서
많고 적게 입이 쓰도록 사람들 각각으로 하여금 이 일단사(一段事*)를 밝히게 하였다.
오조(五祖) 노스님이 “한 사람은 말해주어도 모르고, 한 사람은 알아도 말하지 못한다.
두 사람이 와서 참례한다면 어떻게 판별하겠는가?" 하셨는데,
이 두 사람을 판별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에게 해점거박(解粘去縛;去粘解縛*)해 줄 수 없고,
만약 판별한다면 문에 들어서는 것만 보고도 나 같으면 곧 신발을 신고
그의 뱃속을 몇 바퀴 돌았겠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무슨 그릇이 나오기를 바라겠는가?
또 장님이나 귀머거리, 벙어리로 알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계교(計較)하기 때문에 <유마경>에 말하기를,
“눈으로 색을 보되 장님과 같고, 귀로 소리를 듣되 귀머거리와 같다”고 하였고,
또 "눈 가득한 것이 본래 색이 아니고, 귀 가득한 것이 본래 소리가 아니니,
문수보살은 늘 눈을 느끼고, 관세음보살은 귀를 막았다네.<장사(長沙)선사*>" 한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는 눈으로 보되 장님과 같고, 귀로 듣되 귀머거리와 같아야
비로소 현사의 뜻과 다툼이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맹롱음아(盲聾瘖啞)라는 한자의 의미를 알았는가?
설두스님이 게송을 취해 살펴보자.
*一段事; 목전(目前)의 일, 중요한 일, 오도(悟道)하는 일 등으로 부모미생시(父母未生時)와 같이 쓰인다.
*去粘解縛; 신상의 점박(粘縛)을 제거함.
선림(禪林)에서는 번뇌집착을 풀어 없애므로써 자재무애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長沙景岑 禪師; <전등록 10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다라니(陀羅尼)입니까?"
선사가 선상(禪床) 오른쪽 끝을 가리키며 "저 강사스님이 외울줄 안다." 하였다.
"또 누가 외울줄 압니까?" 이번에는 선상 왼쪽 끝을 가리키며 "저 강사스님도 외울줄 안다."
"제게는 왜 들리지 않습니까?"
"그대는 어째서 들리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참된 낭송은 울림이 없고 참된 들음은 들림이 없다네."
"그렇다면 곧 음성은 법계의 성품에 못들어가겠습니다."
"색(色)을 떠나 보려는 것은 정견(正見)이 아니고, 소리[聲]를 떠나서 들으려는 것은 그릇된 들음이다."
"어째서 색을 떠나지 않고 보는 것이 정견이고, 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참된 들음이라 하십니까?"
선사가 이내 게송으로 말했다.
눈 가득한 것이 본래 색이 아니고, 귀 가득한 것이 본래 소리가 아니라네.
문수보살은 늘 눈을 느끼고, 관세음보살은 귀를 막았으니,
셋이 원래 한 몸임을 알면 넷이 본래 다같이 참임을 요달하려니와
당당한 법계의 성품은 부처도 없고 사람도 없다네.
<景德傳燈錄卷第十 湖南長沙景岑號招賢大師。>
又問。如何是陀羅尼。師指禪床右邊曰。遮箇師僧卻誦得。又問。別有人誦得否。
又指禪床左邊曰。遮箇師僧亦誦得。云某甲為什麼不聞。
師曰。大德豈不聞道。真誦無響真聽無聞。云恁麼則音聲不入法界性也。
師曰。離色求觀非正見。離聲求聽是邪聞。云如何不離色是正見。不離聲是真聞。師乃有偈曰。
滿眼本非色 滿耳本非聲
文殊常觸目 觀音塞耳根
會三元一體 達四本同真
堂堂法界性 無佛亦無人
盲聾瘖啞 (已在言前。三竅俱明。已做一段了也)
杳絕機宜 (向什麼處摸索。還做計較得麼。有什麼交涉)
天上天下 (正理自由。我也恁麼)
堪笑堪悲 (笑箇什麼。悲箇什麼。半明半暗)
離婁不辨正色 (瞎漢。巧匠不留蹤。端的瞎)
師曠豈識玄絲 (聾漢。大功不立賞。端的聾)
爭如獨坐虛窗下 (須是恁麼始得。莫向鬼窟裏作活計。一時打破漆桶)
葉落花開自有時 (即今什麼時節。切不得作無事會。今日也從朝至暮。明日也從朝至暮)。
復云。還會也無 (重說偈言)
無孔鐵鎚 (自領出去。可惜放過。便打)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들아!
(이미 말하기 전에 있었지만 세 구멍이 다 밝아지면 이왕 그랬더라도 일단사<一段事>를 마친다.)
기의(機宜*)가 아득히 끊겼으니,
(어디서 찾을 것이며, 그래서 계교(計較)가 얻어질 것이며, 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천상천하(天上天下)가,
(바른 이치는 자유로운 것인데, 나야말로 그렇다.)
웃을만도 하고 슬퍼할만도 하구나.
(웃을 일은 무엇이고, 슬퍼할 일은 무엇인가? 반은 밝고, 반은 어둡다.)
이루(離婁)도 바른 색을 판별 못하려니와
(눈먼 놈이다. 능숙한 장인[巧匠]은 종적을 남기지 않는 법이라, 단적으로 눈이 멀었다.) "
사광(師曠)은 어찌 현사(玄絲*)를 알 것이며,
(귀먹은 놈이다. 큰 공은 상(賞)을 세우지 않는 법이라, 단적으로 귀머거리다.)
어찌 공허한 창 아래 홀로 앉아
(아무쪼록 그래야 하니, 귀신굴 속에 살림살이 하지 말라며 일시에 칠통<漆桶>을 타파<打破>했다.)
잎 지고 꽃 피움이 절로 있는 때만 같겠는가?
(곧 지금은 무슨 시절인가? 일 없는 것<無事>으로 알면 안된다. 오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고, 내일도 아침부터 저녁까지이다.)。
다시 말하노니, 알겠느냐?
(거듭 게언<偈言>을 말했다.)
무공철추(無孔鐵鎚*)로다.
(스스로 자백하면<自領出去> 애석하지만 봐주겠다. <갑자기 후려치다>)
*機宜; 근기에 알맞음. 중생(衆生)은 다 선근이 있으므로 교화하려거든
곧 근기에 따라 적절한 교법(敎法)을 베풀라는 의미로 쓰인다.
*玄絲; 현묘한 음[玄音]을 내는 줄[絃].
*無孔鐵鎚; 구멍없는 철추, 즉 손 봐줄 데가 없다는 뜻.
*自領出去; 중국 법정용어. 자진출두하여 죄를 자백하는 것.
盲聾瘖啞杳絕機宜。
盡爾見與不見聞與不聞說與不說。雪竇一時與爾掃卻了也。
直得盲聾瘖啞見解。機宜計較。一時杳絕。總用不著。這箇向上事。可謂真盲真聾真啞。無機無宜。
天上天下堪笑堪悲。
雪竇一手抬一手搦。且道笑箇什麼悲箇什麼。
堪笑是啞卻不啞。是聾卻不聾。堪悲明明不盲卻盲。明明不聾卻聾。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들아! 기의(機宜)가 아득히 끊겼구나.'라고 하여,
그대들의 봄[見]과 보지 못함[不見], 들음[聞]과 듣지 못함[不聞], 말함[說]과 말하지 못함[不說] 모두를
설두스님이 일시에 쓸어버렸다.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의 견해에 빠지면 기의(機宜*)와 계교(計較)가 일시에 아득히 끊겨 다 쓸 수 없게 되리니,
그 참모습[向上事*]은 진짜 장님, 진짜 귀머거리, 진짜 벙어리여서 기(機)도 의(宜)도 없다 할 것이다.
'천상천하가 웃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리라.'고 하여 설두스님은 한 손으로 치켜 세우고
한 손으로는 짓눌렀는데, 말해보라, 어떤 것을 웃고, 어떤 것을 슬퍼하겠는가?
벙어리인데 벙어리가 아니고, 귀머거리인데 귀머거리가 아니니 웃을만 하고,
분명히 장님이 아닌데 장님이고, 분명히 귀머거리가 아닌데 귀머거리니 슬퍼할만 한 것이다.
離婁不辨正色。不能辨青黃赤白。正是瞎。
離婁黃帝時人。百步外能見秋毫之末。其目甚明。
黃帝游於赤水沈珠。令離朱尋之不見。令喫詬尋之亦不得。後令象罔尋之方獲之。
故云。象罔到時光燦爛。離婁行處浪滔天。
這箇高處一著。直是離婁之目亦辨他正色不得。師曠豈識玄絲。
周時絳州晉景公之子。師曠字子野(一云。晉平公之樂太師也)
善別五音六律。隔山聞蟻鬥。時晉與楚爭霸。師曠唯鼓琴。撥動風絃。知戰楚必無功。
雖然如是。雪竇道。他尚未識玄絲在。不聾卻是聾底人。
這箇高處玄音。直是師曠亦識不得。
'이루(離婁)도 바르게 색을 판별하지 못한다' 하였는데,
청, 황, 적, 백을 분별하지 못하면 바로 눈이 먼 것이다.
이루는 황제(黃帝) 때의 사람으로, 백 보 밖에서도 털끝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눈이 매우 밝았다는데,
황제가 적수(赤水)를 노닐다가 구슬을 빠뜨려 이루에게 찾게 하였으나 찾지 못했고,
끽구(喫詬)에게 또 찾게 하였어도 찾지 못하다가 후에 상망(象罔)에게 찾게 하고서야 비로소 찾았다 한다.
그래서 '상망이 오면 빛이 찬란하고, 이루가 가는 곳은 물결이 하늘을 넘친다'고 하였다.
이렇듯 높은 경지의 한 수는 이루의 눈으로도 그 바른 색을 판별하지 못하려니와
사광(師曠)인들 어찌 현묘한 음(音)을 내는 줄[絃]을 알겠는가?
주(周)나라 때 강주(絳州) 진경공(晋景公)의 아들 사광은 자(字)는 자야(子野)로서
(진평공<晉平公>의 음악선생이었다는 설이 있다.)
5음6률(五音六律)을 잘 구별하여 산 너머 개미 싸우는 소리도 들었다는데,
진(晉)이 초(楚)와 패권을 다툴 때 사광은 오로지 거문고를 뜯고 풍현(風絃)을 다스리기만 하고서도
초와의 전쟁에서 필경 전공이 없을 것임을 알았다 한다.
그런데도 설두스님이 그도 오히려 현사(玄絲)가 있음을 모른다고 한 것은
귀먹지 않았으나 도리어 귀먹은 사람이라서 이런 고처(高處)의 현음(玄音)은 사광도 모른다는 것이다.
雪竇道。我亦不作離婁。亦不作師曠。爭如獨坐虛窗下。葉落花開自有時。
若到此境界。雖然見似不見。聞似不聞。說似不說。飢即喫飯。困即打眠。任他葉落花開。
葉落時是秋。花開時是春。各各自有時節。雪竇與爾一時掃蕩了也。
又放一線道云。還會也無。雪竇力盡神疲。只道得箇無孔鐵鎚。這一句急著眼看方見。若擬議又蹉過。
師舉拂子云。還見麼。遂敲禪床一下云。還聞麼。下禪床云。還說得麼。
설두스님은 말했다. '나는 이루가 되지 않고 사광도 되지 않으리니,
어찌 공허한 창 아래 홀로 앉아 낙엽지고 꽃 피움이 절로 있는 때만 하겠는가?'
만약 이 경계에 이르면 비록 본다지만 보지 않는 것과 같고, 들어도 듣지 앉는 것과 같으며,
말해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아서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곧 잠 자면서
저가 낙엽 지고 꽃 피게 맡겨둔다. 낙엽이 지면 가을이요, 꽃이 피면 봄이라
저마다 스스로 시절이 있다고 하여 설두스님이 그대들에게 일시의 소탕을 주고서,
또 한가닥 길을 열어놓고 '알겠느냐?' 하였다.
설두스님은 힘이 다하고 정신이 피로하여 다만 '구멍 없는 철추'라고 하였는데,
이 한 구절에 급히 착안하여 살펴야 비로소 보일 것이나,
만일 시비곡직 따지면 또 미끄러져 지나버린다.
원오 선사는 불자를 들고 “보이느냐?” 하더니,
이윽고 선상(禪床)을 한 차례 내려치면서 “들리느냐?” 하고,
선상에서 내려오면서 “말하겠느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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