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77칙 운문호병(雲門餬餅) | |
垂示云。 向上轉去。可以穿天下人鼻孔。似鶻捉鳩。 向下轉去。自己鼻孔在別人手裏。如龜藏殼。 箇中忽有箇出來道。本來無向上向下。用轉作什麼。 只向伊道。我也知爾向鬼窟裏作活計。 且道作麼生。辨箇緇素。良久云。 有條攀條無條攀例。試舉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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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垂示)] 위를 향해 굴러가면 매가 비둘기 낚아채듯이 천하인의 콧구멍을 뚫을 수 있을 것이나, 아래를 향해 굴러가면 껍데기 속에 숨어 있는 거북처럼 자기 콧구멍이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문득 누가 나서서 “본래 위와 아래가 없는데 어떻게 굴러가느냐?”고 한다면, 다만 그에게 “그대가 귀신 굴 속에서 살아갈 궁리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고 말해 주겠노라. 말해보라, "어떻게 흑백을 분별할 것인지." 한참 있다가 말했다. “조문(條文)이 있으면 조문을 따르고, 조문이 없으면 예규(例規)를 따르는 법이다. 예를 들어 살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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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七】舉。 僧問雲門。如何是超佛越祖之談 (開。旱地忽雷。拶) 門云。餬餅(舌拄上齶。過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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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칙(本則) 77 ; 운문호병(雲門餬餠) _운문스님의 호떡] 어떤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는 담론(談論)입니까?” (시작부터 마른 땅에 난데없는 천둥이니, 짓눌러버려라!) 운문이 말했다. “호떡(餬餠)이니라.” (혀끝이 입천장에 달라붙을 지경이니, 지나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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這僧問雲門。如何是超佛越祖之談。門云。餬餅。還覺寒毛卓豎麼。 衲僧家問佛問祖。問禪問道。問向上向下了。 更無可得問。卻致箇問端。問超佛越祖之談。 雲門是作家。便水長船高。泥多佛大。便答道。餬餅。可謂道不虛行。功不浪施。 雲門復示眾云。爾勿可作了。見人道著祖師意。便問超佛越祖之談道理。 爾且喚什麼作佛。喚什麼作祖。即說超佛越祖之談。便問箇出三界。爾把三界來看。 有什麼見聞覺知隔礙著爾。有什麼聲色佛法與汝可了。了箇什麼碗。以那箇為差殊之見。 他古聖勿奈爾何。橫身為物。道箇舉體全真物物覿體。不可得。 我向汝道。直下有什麼事。早是埋沒了也。會得此語。便識得餬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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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祖云。驢屎比麝香。所謂直截根源佛所印。摘葉尋枝我不能。到這裏欲得親切。莫將問來問。 看這僧問。如何是超佛越祖之談。門云。餬餅。還識羞慚麼。還覺漏逗麼。有一般人。 杜撰道。雲門見兔放鷹。便道餬餅。若恁麼將餬餅。便是超佛越祖之談見去。豈有活路。 莫作餬餅會。又不作超佛越祖會。便是活路也。與麻三斤解打鼓一般。雖然只道餬餅。其實難見。 後人多作道理云。麤言及細語皆歸第一義。若恁麼會。且去作座主。一生贏得多知多解。 如今禪和子道。超佛越祖之時。諸佛也踏在腳跟下。祖師也踏在腳跟下。 所以雲門只向他道餬餅。既是餬餅。豈解超佛越祖。 試去參詳看。諸方頌極多。盡向問頭邊作言語。唯雪竇頌得最好試舉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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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評唱)] 저 스님이 운문(雲門)에게 묻기를, '무엇이 불조(佛祖)를 초월한 담화입니까' 하자, 운문은 '호떡[餬餅]'이라고 하였으니, 털이 솟는 써늘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납승가(衲僧家)들은 부처[佛]를 묻고 조사[祖]를 묻고, 선(禪)을 묻고 도(道)를 묻고, 향상(向上)을 묻고 향하(向下)를 묻다가, 다시 물을 만한 것이 없으면 질문의 단초(端初)를 돌려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는 대담'을 묻는다. 운문은 작가(作家)였다. 그저 물 깊으면 배가 높아지고, 흙이 많으면 부처가 커지듯 편하게 '호떡[餬餅]'이라고 답했으니, 가히 도(道)를 헛되지 행하지 않고, 공(功)을 아무렇게나 들이지 않았다 하겠다. 운문(雲門)은 다시 시중(示眾)하여 말했다. 그대들은 가히 지어낸 것이라 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에 착안하여 문득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는 담론의 도리를 묻는데, 저들은 무엇을 부처라 하고, 무엇을 조사라고 부르기에 부처와 조사를 초월한 담론을 말하는가? 삼계(三界)를 벗어난 것을 물었으니, 그대들은 삼계를 가져와보아라. 어떤 견문각지(見聞覺知)가 있어서 그대들을 장애하여 멀어지게 하고, 무슨 성색(聲色)과 불법(佛法)이 있어서 그대들에게 요달할 만한 것을 줄 것이며, 어떤 그릇을 이룬 것으로 어찌 특별한 견해라 하겠는가? 저 옛 성인은 그대들을 어쩌지 못해 몸을 던져 물(物)을 삼고서 체(體)가 온전한 진물(真物)임을 들어 물(物)에서 체(體)를 보라 하였으나 그렇지 않다. 내가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무슨 일이 있기만 하면 벌써 땅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이 말을 안다면 곧 '호떡'을 알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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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조(五祖;法演)스님은 '당나귀 똥으로 사향에 비교한다'고 하였는데, 소위 '곧바로 근원을 끊는 일은 부처님이 인가하신 바이지만, 잎 따고 가지 치는 일은 나는 못한다'고 한 그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몸소 간절히 얻고자 한다면 질문하려고 묻지 마라. 저 중이 '어떤 것이 부처와 조사를 초월한 담론입니까?' 묻자, 운문이 '호떡이다'고 한 것을 보고서 부끄럽지 않던가? 누두(漏逗*)를 깨달았는가? 일반인들은 제멋대로 '운문스님이 토끼를 보자마자 매를 날려 곧바로 호떡이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이런 호떡을 가지고 곧 부처와 조사를 초월한 담론을 보겠다 한다면 어찌 활로(活路)가 있겠는가? 호떡을 알려 하지 말고 또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는 것도 알려 하지 않으면 곧 이것이 활로이다. '삼 세 근[麻三斤]'과 '북칠 줄 안다[解打鼓]'와 매일반이라 비록 그렇게 다만 ‘호떡’이라고 말했으나 그 실체는 알기 어렵다. 후인(後人)들은 흔히 이치를 따져, '거친 말과 고운 말이 다 제일의(第一義)에 귀결된다”고 하는데, 만일 이렇게 알면 좌주(座主)가 되어 평생 알음알이만 넘쳐날 것이다. 요즈음 선승이라는 화상들은 '부처와 조사를 초월할 때는 제불(諸佛)이야 발밑에 밟혀 있고, 조사도 발밑에 밟혀 있으니, 그래서 운문이 저들에게 다만 '호떡'이라 한 것이다'고 하나, 그 호떡으로 어찌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함을 알겠는가? 시험삼아 참구해 자세히 살펴보라. 제방(諸方)에 게송이 지극히 많으나 모두가 언저리를 향해 지어진 언어지만 설두스님 게송만은 가장 좋으니, 시험삼아 살펴보자. *누두(漏逗); 공안의 구성요소로서 상대에게 짐짓 허(虛)를 보이거나 진실과 다르게 말을 하여 의심을 내게 하고 깨닫게 하는 방편을 말한다. *麻三斤; 12칙 洞山스님의 麻三斤, *解打鼓; 44칙 '禾山스님의 解打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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頌云。 超談禪客問偏多 (箇箇出來便作這般見解。如麻似粟) 縫罅披離見也麼 (已在言前。開也。自屎不覺臭) 餬餅[祝/土]來猶不住 (將木槵子換卻爾眼睛了也) 至今天下有誵訛 (畫箇圓相云。莫是恁麼會麼。咬人言語。有甚了期。大地茫茫愁殺人。便打) [祝/土] (仄六切塞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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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頌)으로 ; 초담(超談)은 선객(禪客)들이 자주 묻는 편이지만 (낱낱이 와서 쉽게 이런 견해(見解)를 지음이 참깨 같고, 좁쌀 같이 많다) 꿰맨 틈새가 벌어져 있는 것을 보는가? (말하기 전에 이미 벌어져 있었으나, 제 똥 구린 줄을 모른다.) 호떡[餬餅]으로 내질러 주었건만 도리어 멈추지 않고 (염주알로 네 눈동자를 바꿔 끼운 모양이구나.) 지금의 천하에도 효와(誵訛*)가 있다니. (원상圓相)을 그리면서 '그렇게 알지 마라. 남의 말만 되씹어서 언제나 깨우칠 기약이 있겠느냐? 대지(大地)는 망망(茫茫)하고, 근심은 사람을 죽이 느니라.' 하고, 갑자기 후려치다.) 축?[祝/土]! (어렴풋한 육근은 막아야 한다.) *誵訛; 淆訛. 어지러이 뒤섞여 잘못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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超談禪客問偏多。此語禪和家偏愛問。 不見雲門道。爾諸人橫擔拄杖。道我參禪學道。 便覓箇超佛越祖道理。我且問爾。十二時中。 行住坐臥。屙屎放尿。 至於茅坑裏蟲子市肆買賣羊肉案頭。還有超佛越祖底道理麼。 道得底出來。若無莫妨我東行西行。便下座。 有者更不識好惡。作圓相。土上加泥。添枷帶鎖。 縫罅披離見也麼。他致問處。有大小大縫罅。 雲門見他問處披離。所以將餬餅攔縫塞定。 這僧猶自不肯住。卻更問。是故雪竇道。 餬餅[祝/土]來猶不住。至今天下有誵訛。如今禪和子。 只管去餬餅上解會。 不然去超佛越祖處作道理。既不在這兩頭。畢竟在什麼處。 三十年後。待山僧換骨出來。卻向爾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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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담(超談)은 선객(禪客)들이 흔히들 묻는다'는 이 말은 선화상(禪僧,和尙)들이 즐겨 묻는다는 것이다. 듣지 못했는가? 운문(雲門)이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주장자를 맡아 들고 나는 참선학도(參禪學道)다 하면서 곧장 초불초조(超佛越祖)의 도리(道理)를 찾는데, 내가 그대들에게 묻겠노라. 열두 때 중에 행주좌와(行住坐臥)와 똥 싸고 오줌 누는 일이나 썩은 풀 속 구더기와 시전(市廛) 양고기 파는 매대까지에도 초불초조(超佛越祖)의 도리가 있겠는가? 말할 수 있다면 나와보라. 만약 없다면 내가 동으로 가든 서로 가든 방해하지 마라.' 하고, 법좌에서 내려가셨다. 어떤 사람은 좋고 나쁜 것도 모르면서 원만한 척하는데, 땅 위에 흙을 더하고, 사슬 맨 데다 칼을 더 씌우는 격이다. '꿰맨 틈새가 벌어져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는 그가 꺼낸 문처(問處)에 크고 작은 꿰맨 틈이 있었고, 운문이 그 문처의 벌어져 있는 것을 보았기에 그래서 호떡으로 막아 주었으나 이 스님은 오히려 긍정하려 하지 않고 다시 물으니, 그 때문에 설두스님이 '호떡으로 막아주는데도 도리어 기대지 않고 지금의 천하에도 효와가 있다니.' 한 것이다. 요즘의 선화상들은 다만 호떡 위에서 알려고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초불초조(超佛越祖)의 곳에서 도리(道理)를 지어가려 하는데, 기왕 이 두 가지에 있지 않다면 필경에 어디에 있겠는가? 30년 뒤 산승이 환골(換骨)하여 올 때까지 기다리면 그대들에게 말해 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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