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般涅槃經卷第二十三 北涼天竺三藏曇無讖譯 |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제23권 북량(北涼)국 천축삼장 담무참(曇無讖) 역(譯) |
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第十之三 | 10.3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 |
「復次善男子!一切凡夫雖善護身, 心猶故生於三種惡覺, 以是因緣,雖斷煩惱, 得生非想非非想處, 猶故還墮三惡道中。 善男子!譬如有人渡於大海, 垂至彼岸,沒水而死。 凡夫之人亦復如是,垂盡三有, 還墮三塗。 何以故?無善覺故。 何等善覺?所謂六念處。 |
「또 선남자야! 일체 범부는 몸은 비록 잘 수호할지라도 마음으로는 세 가지 악각(惡覺*)을 내기에 이런 인연으로 비록 번뇌를 끊어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태어나더라도 삼악도(三惡道) 속에 다시 떨어진다. 선남자야! 마치 어떤 사람이 바다를 건너는데, 피안(彼岸)에 거의 다 가서 물에 빠져 죽어버리듯이 범부도 그와 같아서 삼유(三有*)가 거의 끝날 무렵에 삼도(三塗*)에 도로 떨어지거니와, 왜냐하면 선각(善覺)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선각인가? 소위 육념처(六念處*)이니라. |
*惡覺; 惡한 思想. 《無量壽經》에 일체범부는 三惡覺(三覺)을 구비하고 있다 하였는데,
이 三惡覺은 ①欲覺(貪欲하는 知覺), ②瞋覺(瞋恚하는 知覺), ③害覺(남을 侵害하는 知覺)이다.
*三有; 欲有, 色有, 無色有, 즉 三界. 有는 果로 인해 存在하게 된 것을 말한다.
*三塗; 塗는 途, 道와 같은 의미. 地獄道, 餓鬼道, 畜生道 또는 火途(地獄의 맹렬한 불 속으로 가는 길),
血途(畜生의 서로 잡아먹는 곳), 刀途(餓鬼의 刀劍에 핍박받는 곳)을 말한다.
*六念處; 念佛, 念法, 念僧, 念戒, 念施, 念天.
凡夫之人善心羸劣,不善熾盛, 善心羸故慧心薄少, 慧心薄故增長諸漏。 菩薩摩訶薩慧眼清淨見三覺過, 知是三覺有種種患, 常與眾生作三乘怨。 |
범부들은 선한 마음이 적고 불선한 마음이 치성하니, 선한 마음이 적으므로 슬기로운 마음[慧心]이 엷고, 혜심(慧心)이 엷으므로 누(漏)가 늘어나거니와, 보살마하살은 혜안이 청정하니 삼각(三覺)의 허물을 보고, 이 삼각(三覺)에 있는 갖가지 우환들이 늘 중생에게 삼승(三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을 아느니라. |
三覺因緣, 乃令無量凡夫眾生不見佛性, 無量劫中生顛倒心, 謂佛世尊,無常樂我,唯有一淨, 如來畢竟入於涅槃。 一切眾生無常、無樂、無我、無淨, 顛倒心故,言有常樂我淨。 實無三乘, 顛倒心故言有三乘, 一實之道真實不虛, 顛倒心故言無一實。 是三惡覺常為諸佛及諸菩薩之所呵責, 是三惡覺常害於我、或亦害他。 有是三覺,一切諸惡常來隨從, 是三覺者即是三縛, 連綴眾生無邊生死。 菩薩摩訶薩常作如是觀察三覺。 |
삼각(三覺)의 인연이 결국 무량한 범부중생에게 불성을 볼 수 없게 하고, 무량 겁 동안 전도(顛倒)된 마음을 내게 하며, 제불세존은 상락아(常樂我)는 없고 정(淨)만 있어서 여래는 필경 열반에 든다고 말하게 하느니라. 일체중생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 없는 전도된 마음 때문에 상락아정이 있다고 말하고, 실로 삼승(三乘)이 없건만 전도된 마음 때문에 삼승이 있다고 말하며, 일실(一實*)의 도(道)는 진실하고 허망하지 않건만 전도된 마음 때문에 일실(一實)이 없다고 말하느니라. 이 삼악각(三惡覺)은 제불보살(諸佛菩薩)께서 항상 꾸짖으시는 것들이며, 이 삼악각은 항상 나를 해치기도 하고 남도 해치는 것이다. 이 삼각(三覺)이 있기에 일체의 악(惡)이 늘 따라오고, 이 삼각은 곧 세 가지 속박[三縛*]이어서 중생을 끝없는 생사에 엮는 것이라고 보살마하살은 항상 이렇게 삼각을 관찰하느니라. |
*一實; 하나의 진실, 즉 眞如. *三縛; 貪縛, 瞋縛, 痴縛.
菩薩或時有因緣故, 應生欲覺默然不受, 譬如端正淨潔之人, 不受一切糞穢不淨; 如熱鐵丸,人無受者; 如婆羅門性,不受牛肉; 如飽滿人,不受惡食; 如轉輪王,不與一切旃陀羅等同坐一床。 菩薩摩訶薩惡賤三覺, 不受不味亦復如是。 |
보살은 혹시 어떤 인연으로 악각(惡覺)이 나려고 해도 묵연히 받아들이지 않나니, 마치 단정하고 정결한 사람이 일체의 더러운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고, 뜨거운 쇳덩이를 받을 사람이 없는 것 같고, 바라문 종족이 소고기를 받지 않는 것 같고, 배부른 사람이 나쁜 음식 받지 않는 것 같고, 전륜왕이 어떤 전다라와도 한 자리에 앉지 않는 것 같이, 보살마하살이 삼각(三覺)을 나쁘게 여겨 받거나 맛보지 않는 것도 그와 같으니라. |
何以故?菩薩思惟: 『眾生知我是良福田, 我當云何受是惡法? 若受惡覺則不任為眾生福田。 我自不言是良福田, 眾生見相便言我是。 我今若起如是惡覺, 則為欺誑一切眾生。 我於往昔以欺誑故, 無量劫中流轉生死墮三惡道。 我若以惡心受人信施, 一切天人及五通仙悉當證知,而見訶責。 我若惡覺受人信施, 或令施主果報減少或空無報。 我若惡心受檀越施, 則與施主而為怨讎。 一切施主恒於我所起赤子想, 我當云何欺誑於彼,而生怨想? |
왜냐하면, 보살이 사유하기를, 『중생들은 내가 좋은 복전(福田)인 줄 알고 있는데, 내가 어찌 악법(惡法)을 받아들이겠는가? 만일 악각(惡覺)을 받아들이면 중생의 복전이 되지 못한다. 나 자신은 좋은 복전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중생들이 보고서 내가 복전이라 하니, 내가 만약 그러한 악각을 일으킨다면 곧 일체중생을 속이는 것이거니와, 내가 옛적에 남을 속임으로써 무량 겁 동안 생사에 떠돌고 삼악도에 떨어졌었다. 내가 만약 나쁜 마음으로 사람들의 신시(信施)를 받는다면 모든 천인(天人)과 오통선(五通仙)이 알고서 꾸짖을 것이요, 내가 악각(惡覺)으로 신시(信施)를 받는다면 혹 시주(施主)의 과보를 감소시키거나 없게 할 것이며, 내가 악한 마음으로 단월(檀越)의 보시를 받는다면 시주에게 원수가 될 것이다. 시주들은 항상 나를 갖난아이처럼 여기는데, 내가 어찌 저들을 속이고 원수라 생각하게 하겠는가? |
何以故?或令施主不得果報 或少果報故。 我常自稱為出家人, 夫出家者不應起惡, 若起惡者則非出家。 出家之人身口相應, 若不相應則非出家。 我棄父母兄弟妻子眷屬知識, 出家修道, 正是修習諸善覺時, 非是修習不善覺時。 |
왜냐하면 혹 시주로 하여금 과보를 얻지 못하거나 혹 과보를 줄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늘 출가인이라 자칭하고, 출가한 자는 악(惡)을 일으키지 말아야 할 것이라 만약 악을 일으키면 출가인이 아니며, 출가한 사람은 몸과 말이 상응하여야 하거니와, 상응하지 못하면 출가인이 아니다. 나는 부모, 형제, 처자, 권속과 친지들을 떠나 출가하여 수도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모든 선각(善覺)을 닦아 익힐 때요, 불선각(不善覺)을 닦을 때가 아니다. |
譬如有人入海求寶, 不取真寶,直取水精。 亦如有人棄妙音樂, 遊戲糞穢。 如棄寶女,與婢交通。 如棄金器,用於瓦盂。 如棄甘露,服食毒藥。 如捨親舊良善之醫, 從怨惡醫,求藥而服。 |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보물을 찾으러 바다에 들어가서 보물은 취하지 않고 수정(水精)을 취하는 것과 같고, 또 마치 어떤 사람이 묘한 음악을 버리고, 더러운 곳에서 노는 것과 같고, 보배 같은 여인을 버리고 노비와 통정하는 것과 같고, 금 그릇을 버리고 질그릇을 쓰는 것과 같고, 감로를 버리고 독약을 먹는 것과 같고, 친구같은 좋은 의원을 버리고, 원수같은 나쁜 의원을 쫓아 약을 구해 먹는 것과 같이, |
「『我亦如是,捨離大師、 如來世尊甘露法味, 而服魔怨種種惡覺。 人身難得如優曇花,我今已得; 如來難值過優曇花,我今已值; 清淨法寶難得見聞,我今已聞。 猶如盲龜值浮木孔。 |
「『나 또한 그렇게 큰 스승과 여래 세존의 감로법미(甘露法味)를 버리고, 마군 원수인 갖가지 악각(惡覺)을 먹고 있다. 사람 몸 얻기 어려움이 우담화 같은데 나는 이왕 얻었고, 여래 만나기 어려움은 우담화보다 더한데 나는 만났으며, 청정한 법보는 보고 듣기 어려운데 나는 이미 들었으니, 마치 눈먼 거북이 떠다니는 나무의 구멍을 만난 것 같다. |
人命不停過於山水, 今日雖存,明亦難保, 云何縱心令住惡法? 壯色不停猶如奔馬, 云何恃怙而生憍慢? 猶如惡鬼伺求人過, 四大惡鬼亦復如是, 常來伺求我之過失, 云何當令惡覺發起? 譬如朽宅、垂崩之屋; 我命亦爾,云何起惡? 我名沙門,沙門之人名覺善覺; 我今乃起不善之覺, 云何當得名沙門也? |
사람 목숨은 멈추지 않고 산수(山水)보다 더 빨리 흘러서 오늘은 비록 존재하더라도 내일도 보증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마음을 쫓아 악법에 머물겠는가? 젊음 머물지 않는 것이 달리는 말과 같은데, 무엇을 의지하여 교만을 부리겠는가? 마치 나쁜 귀신이 사람의 헛점을 엿보듯이, 사대(四大)라는 악귀도 그와 같아서 항상 나의 헛점을 엿보고 있는데, 어찌 악각이 일어나게 하겠는가? 마치 낡은 집이나 곧 무너질 집처럼 나의 목숨도 그와 같은데, 어떻게 악각을 일으키겠는가? 나는 사문이고 사문은 선각(善覺)을 깨달았다고 하는데, 내가 지금 불선각(不善覺)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사문이라 하겠는가? |
我名出家, 出家之人名修善道; 我今行惡, 云何當得名為出家? 我今名為真婆羅門, 婆羅門者名修淨行; 我今乃行不淨惡覺, 云何當得名婆羅門? 我今亦名剎利大姓, 剎利姓者能除怨敵; 我今不能除惡怨敵, 云何當得名剎利姓? 我名比丘,比丘之人名破煩惱; 我今不破惡覺煩惱, 云何當得名為比丘? 世有六處,難可值遇,我今已得, 云何當令惡覺居心? |
나는 출가한 사람이고, 출가한 사람은 선도(善道)를 닦는다고 하는데, 내가 지금 악각을 행한다면 어떻게 출가했다고 하겠는가? 나는 지금 참된 바라문이라 하고, 바라문이란 청정한 행을 닦는다고 하는데, 내가 지금 부정한 악각을 행한다면 어떻게 바라문이라 하겠는가? 나는 또 지금 찰리(剎利)라는 큰 종성(種姓)이고, 찰리 종성이란 원수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인데, 내가 지금 악한 원수를 제거할 수 없다면 어떻게 찰리종성이라 하겠는가? 나는 비구이고, 비구인 사람은 번뇌를 깨뜨린다고 하는데, 내가 지금 악각의 번뇌를 깨뜨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비구라 하겠는가? 세간에서 만나기 어려운 육처(六處)를 나는 이미 만났는데, 어떻게 악각으로 하여금 마음에 머물게 하겠는가? |
何等為六? 一佛世難遇, 二正法難聞, 三怖心難生, 四難生中國, 五難得人身, 六諸根難具。 如是六事,難得已得, 是故不應起於惡覺。』 |
어떤 것들이 그 여섯인가? 하나는 부처님 세상 만나기 어려움[佛世難遇]이요, 둘은 정법 듣기 어려움[正法難聞]이며, 셋은 두려워 하는 마음 내기 어려움[怖心難生]이며, 넷은 중심의 나라에 나기 어려움[難生中國]이며, 다섯은 사람의 몸 얻기 어려움[難得人身]이며, 여섯은 제근(諸根)을 구족하기 어려움[諸根難具]이다. 이런 여섯 가지는 얻기 어렵건만 이왕 얻었으니, 그러므로 악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
*六種難處(六難);
①佛世難遇~ 諸佛은 항상 出世하지 않기에 중생이 만나기 몹시 어렵고,
설사 出世하더라도 중생이 수승한 인(因)을 닦거나 많은 善을 행하지 않고서는 만나기 어렵다.
②正法難聞~ 비록 諸佛의 出世를 만나더라도 機緣이 맞지 않거나 신체에 장애가 있거나
根性이 우둔하거나 하면 聽受할 수 없고, 또 佛滅後에도 正法을 들을 수 없으며,
혹 邪見을 낸다면 비록 듣더라도 信受하지 못한다.
③怖心難生~ 사람이 世間에 나서 오래 묵은 塵垢가 무거운데,
惡緣에 쉽게 물들고 邪惑에 마음이 가려 온갖 貪著을 일으키면서도
그로 인해 畢竟 얻게 될 果報를 두려워할 줄 모른다.
④難生中國~ 中國은 邊國에 反한 표현으로 佛教에서의 中國은 恒河流域 중심 摩羯陀國 地方을 말한다.
이곳은 佛法이 流布되고 文物이 發達한 땅이니, 持戒하며 修福하지 않고서는 그곳에 날 수 없다.
⑤難得人身~ 오상(五常;仁義禮智信)과 오계(五戒)를 지녀 행하고,
四趣(地獄,餓鬼,畜生,阿修羅)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人身을 얻는 것이라 人身은 얻기 어렵다는 것이다.
⑥諸根難具~ 비록 人身을 얻더라도 혹 聾盲瘖瘂 등이 되니, 六根을 온전히 구비하기 어렵다.
菩薩爾時修行如是大涅槃經, 常勤觀察是諸惡心, 一切凡夫不見如是惡心過患 故受三覺,名為受漏。 菩薩見已不受、不著、放捨不護, 依八聖道,推之令去、斬之令斷, 是故菩薩無有受漏, 云何當言如來有漏? 以是義故,如來世尊非是有漏。 |
보살은 이때 이렇듯 대열반경을 수행하며 늘 힘써 모든 악심(惡心)을 관찰하지만 일체범부는 이러한 악심의 허물을 보지 못하고 삼각(三覺)을 받기 때문에 '누를 받는다[受漏]' 하거니와, 보살은 보고서 받거나 집착하지 않고, 버려 지키지 아니하며, 팔성도(八聖道)에 의지하여 떠밀어 보내고 베어 끊어지게 하니, 그래서 보살은 누를 받음이 없거늘, 어찌 여래에게 누가 있다[有漏] 하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여래 세존은 유루가 아닌 것이다. |
「復次善男子!凡夫若遇身心苦惱起種種惡, 若得身病,若得心病, 令身、口、意,作種種惡, 以作惡故輪迴三趣具受諸苦。 何以故?凡夫之人無念慧故, 是故生於種種諸漏, 是名念漏。 |
「또 선남자야! 범부는 심신이 괴로우면 온갖 악을 일으키고. 몸이 병들거나 마음이 병들면 몸(身), 입(口), 뜻(意)으로 하여금 갖가지 악을 짓게 하거니와, 악을 지음으로써 삼취(三趣)를 윤회하며 온갖 고통을 받나니, 어째서인가? 범부는 생각과 지혜[念慧]가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갖가지 누(漏)를 내는 것이니, 이것을 염루(念漏*)라 하느니라. |
*念漏; 妄念이 제멋대로 새 나오는 것.
菩薩摩訶薩常自思惟: 『我從往昔無數劫來, 為是身心造種種惡,以是因緣, 流轉生死在三惡道,具受眾苦, 遂令我遠三乘正路。』 菩薩以是惡因緣故, 於己身心生大怖畏, 捨離眾惡,趣向善道。 |
보살마하살은 늘 스스로 사유하기를, 『나는 옛날 무수한 겁 동안 이 심신을 위해 갖가지 악을 지었고, 그 인연으로 생사를 유전하며 삼악도에서 온갖 고통을 받더니, 마침내 내가 삼승의 바른 길을 멀어지게 하였다.』 하나니, 보살은 이 나쁜 인연 때문에 자기의 심신을 몹시 두려워 하여 모든 악을 버리고 선한 길로 나아가느니라. |
善男子!譬如有王, 以四毒蛇盛之一篋,令人瞻養, 餧飼臥起,摩洗其身, 若令一蛇生瞋恚者, 我當准法戮之都市。 爾時其人聞王切令, 心生惶怖,捨篋逃走。 王時復遣五旃陀羅拔刀隨後, 其人迴顧見後五人,遂疾捨去。 是時五人以惡方便,藏所持刀, 密遣一人詐為親善,而語之言: 『汝可還來。』 其人不信,投一聚落,欲自隱匿。 既入聚中,闚看諸舍都不見人, 執捉?器悉空無物, 既不見人,求物不得, 即便坐地,聞空中聲: 『咄哉,男子!此聚空曠,無有居民。 今夜當有六大賊來, 汝設遇者命將不全, 汝當云何而得免之?』 |
선남자야! 비유컨대 어떤 왕이 독사 네 마리를 상자에 담아 사람에게 맡기면서[一篋四蛇] 먹이를 주고 눕히고 일으키며, 몸을 쓰다듬고 씻기되, 만약 한 마리라도 화를 내게 하면 법에 따라 시가지에 육시(戮屍)하겠노라 하니, 그 사람이 왕의 죽이겠다는 영을 듣고 두렵고 당황하여 상자를 버리고 도주했느니라. 왕이 이에 다섯 전다라[五旃陀羅]를 보내 잡아오게 하니, 그가 다섯 사람이 뒤쫓는 것을 보고 빨리 달아났다. 그러자 다섯 사람이 방편으로 칼을 감추고 은밀히 한 사람을 보내 선의인 척하며[一詐善友] 『당신은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해보았지만 그는 믿지 않고 한 마을로 들어가 숨었다. 마을에 들어가 엿보았더니 어느 집에도 사람이 없고, 독을 들여다 봐도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었으며,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물건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땅에 주저앉았는데,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쯧쯧! 이 남자야! 이 마을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고, 오늘 밤에 여섯 대도적[六大賊]이 올 것이라 당신이 그들을 만나면 목숨이 온전치 못할 터인데, 당신이 어떻게 면해지겠소?』 |
爾時其人恐怖遂增,復捨而去。 路值一河,其河漂急,無有船栰, 以怖畏故,即取種種草木為栰。 復更思惟:『我設住此, 當為毒蛇、五旃陀羅、一詐親者、 及六大賊之所危害。 若渡此河,栰不可依, 當沒水死。 寧沒水死, 終不為彼蛇賊所害。』 即推草栰,置之水中, 身猗其上,手抱脚踏,截流而渡。 既達彼岸,安隱無患, 心意泰然,怖恐消除。 |
이에 그는 공포가 더하여 다시 도망쳤다. 가다가 강을 만났는데, 물살은 급하고 땟목은 없으니, 두려움에 온갖 초목을 끌어다 땟목을 만들고서, 다시 생각하되, 『내가 설령 여기 머문다 해도 독사나 다섯 전다라나 친한 척하는 자, 그리고 여섯 대적에게 위해를 당할 것이고, 이 강을 건넌다면 땟목이 부실하니 물에 빠져 죽게 될 터인데, 차라리 물에 빠져 죽을지언정 절대 저 독사와 도적에게 해를 입지는 않으리라.』 하고서, 곧 풀땟목을 밀어 물속에 넣고 그 위에 올라타 손발 허우적거리며 물살 헤치고 건넜다. 건너편에 이르자 안은하고 걱정이 없어서 마음이 편안하고 공포가 사라졌느니라. |
復次善男子!菩薩摩訶薩觀 四毒蛇有四種姓, 所謂剎利、婆羅門、毘舍、首陀。 是四大蛇亦復如是,有四種性, 堅性、濕性、熱性、動性, 是故菩薩觀是四大與四毒蛇同其種性。 |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네 독사에는 네 가지 종성(種姓), 소위 찰리, 바라문, 비사, 수타가 있다고 보거니와, 이 사대(四大)라는 독사도 그와 같아서 네 종성, 즉 견성(堅性), 습성(濕性), 열성(熱性), 동성(動性)이 있기에 그래서 보살은 이 사대와 네 독사는 그 종성이 같다고 보느니라. |
復次善男子!菩薩摩訶薩 觀是四大如四毒蛇。 云何為觀? 是四毒蛇常伺人便, 何時當視?何時當觸? 何時當[口*歔]?何時當齧? 四大毒蛇亦復如是, 常伺眾生求其短缺。 |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이 사대가 네 독사와 같다고 보나니, 어떻게 관찰하는가? 이 네 독사는 늘 사람을 두고 어느 때 볼까[視]? 언제 건드릴까[觸]? 언제 기를 뿜을까[(口*歔)]? 언제 물까[齧]? 하고 엿보는데, 사대라는 독사도 그와 같아서 늘 중생을 엿보아 그 헛점[短缺;결핍]을 찾는다고 보느니라. |
若為四蛇之所殺者, 終不至於三惡道中; 若為四大之所殺害, 必至三惡道,定無有疑。 是四毒蛇雖復瞻養,亦欲殺人; 四大亦爾,雖常供給, 亦常牽人造作眾惡。 是四毒蛇若一瞋者則能殺人; 四大之性亦復如是, 若一大發亦能害人。 是四毒蛇雖同一處,四心各異; 四大毒蛇亦復如是, 雖同一處,性各別異。 是四毒蛇雖復恭敬,難可親近; 四大毒蛇亦復如是, 雖復恭敬亦難親近。 |
네 독사에 물려 죽더라도 결코 삼악도에 이르지는 않겠지만, 사대(四大)에 의해 살해되면 반드시 삼악도에 이를 것이 틀림 없느니라. 이 네 독사는 저를 길러주어도 사람을 죽이려 하듯이, 사대도 그러하여 늘 공급(供給)해 주어도 사람을 늘 온갖 악을 짓게 하며, 이 네 독사는 한 마리가 화를 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듯이, 사대의 성품도 그와 같아서 하나의 대(大)만 일어나도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이 네 독사가 같은 곳에 있더라도 마음은 각각 다르듯이, 사대라는 독사도 그와 같아서 비록 같은 곳에 있더라도 성품은 각각 다르며, 이 네 독사는 공경히 대해주어도 가까워지기 어렵듯이, 사대라는 독사도 그와 같아서 아무리 공경히 대해주어도 가까워지기 어려우니라. |
是四毒蛇若害人時, 或有沙門、婆羅門等, 若以呪藥則可療治; 四大殺人,雖有沙門、婆羅門等 神呪良藥,則不能治。 如自喜人聞四毒蛇 氣臭可惡,則便遠離; 諸佛菩薩亦復如是, 聞四大臭,即便遠離。 爾時菩薩復更思惟四大毒蛇, 生大怖畏,背之馳走, 修八聖道。 |
이 네 독사가 사람을 해쳤을 때는 혹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주술과 약을 써서 치료할 수 있겠지만, 사대가 사람을 죽이면 어떤 사문 바라문이 신주(神呪)나 양약(良藥)을 써도 치료하지 못하느니라. 마치 자희인(自喜人*)은 네 독사의 나쁜 냄새만 맡아도 곧 멀리하듯이, 제불보살(諸佛菩薩)도 그와 같아서 사대의 냄새를 맡으면 곧 멀리하거니와, 이때 보살은 다시 사대를 독사라고 생각하여 몹시 두렵게 여기고서 등지고 내달아 팔성도(八聖道)를 닦느니라. |
*自喜人;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愛護自己的人)
「五旃陀羅即是五陰。 云何菩薩觀於五陰如旃陀羅? 旃陀羅者,常能令別人恩愛別離、 怨憎集會。五陰亦爾, 令人貪近不善之法, 遠離一切純善之法。 復次善男子!如旃陀羅, 種種器仗以自莊嚴, 若刀, 若楯, 若弓, 若箭, 若鎧, 若矟, 能害於人。五陰亦爾, 以諸煩惱牢自莊嚴,害諸癡人, 令墮諸有。 善男子!如旃陀羅, 有過之人得便害之;五陰亦爾, 有諸結過,常能害人。 以是義故,菩薩深觀五陰如旃陀羅。 |
「다섯 전다라[五旃陀羅]는 곧 오음(五陰)이니라. 어째서 보살은 오음을 전다라 같이 보겠는가? 전다라(旃陀羅)는 항상 사람의 은애(恩愛)를 떠나게 하고, 원증(怨憎)을 모여들게 하거니와, 오음(五陰)도 그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불선법을 가까이 탐하게 하고, 일체의 순선(純善)한 법을 멀리하게 하느니라. 또 선남자야! 마치 전다라는 갖가지 무기를 지니고 있어서 칼이나 방패, 활이나 화살, 갑옷이나 창으로 사람을 해칠 수 있듯이, 오음도 그러하여 온갖 번뇌로 단단히 무장하고 어리석을 사람들을 해쳐서 제유(諸有)에 떨어지게 하느니라. 선남자야! 마치 전다라가 허물 있는 사람을 찾아 해치듯이, 오음도 그러하여, 제결(諸結)의 허물을 찾아 항상 사람을 헤치니, 이런 뜻에서 보살은 오음을 심관(深觀)하되 전다라와 같이 하는 것이니라. |
復次菩薩觀察五陰如旃陀羅: 旃陀羅人無慈愍心, 怨親俱害;五陰亦爾, 無慈愍心,善惡俱害。 如旃陀羅惱一切人;五陰亦爾, 以諸煩惱,常惱一切生死眾生。 是故菩薩觀於五陰如旃陀羅。 |
또 보살은 오음을 전다라와 같이 보나니, 전다라는 자민심(慈愍心)이 없어서 원수거나 친구거나 다 헤치듯이, 오음도 그렇게 자민심이 없어서 선과 악을 모두 해치느니라. 전다라가 모든 사람을 괴롭하듯이, 오음도 그러하여 온갖 번뇌로 모든 생사 속의 중생을 늘 괴롭히니, 그래서 보살은 오음을 전다라와 같다고 보느니라. |
復次菩薩觀察五陰如旃陀羅: 旃陀羅人常懷害心;五陰亦爾, 常懷諸結惱害之心。 如人無足刀杖侍從, 當知必為旃陀羅人之所殺害; 眾生亦爾,無足、無刀、無有侍從, 則為五陰之所賊害。 足名為戒,刀名為慧, 侍從名為善知識也, 無此三事故,為五陰之所賊害。 是故菩薩觀於五陰如旃陀羅。 |
또 보살은 오음을 전다라와 같이 보나니, 전타라는 늘 해치려는 마음을 품듯이, 오음도 그러하여 늘 온갖 번뇌로 해치려는 마음을 품으며, 마치 사람이 발이나 칼이나 몽둥이나 시종이 없으면 필경 전타라에게 살해될 줄을 알아야 하듯이, 중생도 그러하여 발도 칼도 없고 시종도 없으면 오음의 해를 입게 되거니와, 발은 계(戒)요, 칼은 혜(慧)이며, 시종은 선지식을 말하느니라.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오음의 해를 입게 될 것이라 그래서 보살은 오음을 전다라와 같이 보느니라. |
「復次善男子!菩薩摩訶薩 觀察五陰過旃陀羅。 何以故?眾生若為五旃陀羅之所殺者, 不墮地獄, 為陰殺者則墮地獄, 以是義故,菩薩觀陰過旃陀羅。 作是觀已而作願言: 『我寧終身近旃陀羅, 不能暫時近於五陰。 旃陀羅者,唯能害於欲界癡人; 是五陰賊,遍害三界凡夫眾生。 旃陀羅人唯能殺戮有罪之人; 是五陰賊 不問眾生有罪無罪,悉能害之。 旃陀羅人不害衰老、婦女、稚小; 是五陰賊不問眾生老稚、 婦女,一切悉害。』 是故菩薩深觀此陰過旃陀羅, 是故發願,寧當終身近旃陀羅, 不能暫時親近五陰。 |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오음을 전다라보다 더하다고 관찰하나니, 왜냐하면 중생이 만일 다섯 전다라에게 살해되더라도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으려니와, 오음에 살해되면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니, 이런 뜻에서 보살은 오음을 전타라보다 더하다고 보느니라. 이렇게 관찰하고서 원을 세우며 말하기를, 『나는 죽을 때까지 전다라를 가까이할지언정 잠시도 오음을 가까이 하지 않겠다. 전다라는 욕계(欲界)의 어리석은 자만 해치지만 이 오음이라는 도적은 삼계의 범부중생을 두루 해치고, 전다라는 죄 있는 사람만 살륙하지만 이 오음이라는 도적은 중생의 유죄와 무죄를 불문하고 다 해치며, 전다라는 늙은이나 부녀, 어린아이는 해치지 않지만 이 오음이라는 도적은 중생의 늙은이, 어린애, 부녀자를 불문하고 모두 다 해친다.』고 하느니라. 그래서 보살은 이 오음이 전다라보다 더하다고 보는 것이며, 그 때문에 '차라리 종신토록 전다라를 가까이할지언정 잠시도 오음을 친근하지 않겠노라'고 발원하는 것이니라. |
復次善男子!旃陀羅者唯害他人, 終不自害; 五陰之賊自害、害他, 過旃陀羅。 旃陀羅人可以善言、錢財、 寶貨求而得脫; 五陰不爾,不可強以善言誘喻、 錢財寶貨求而得脫。 旃陀羅人於四時中不必常殺; 五陰不爾,常於念念害諸眾生。 旃陀羅人唯在一處可有逃避; 五陰不爾,遍一切處,無可逃避。 旃陀羅人雖復害人,害已不隨; 五陰不爾, 殺眾生已隨逐不離。 是故菩薩寧以終身近旃陀羅, 不能暫時近於五陰。 有智之人以善方便得脫五陰。 |
또 선남자야! 전다라는 다른 사람만 해치고 결코 자기는 해치지 않지만 오음의 도적은 자기도 해치고 남도 해치니, 전다라보다 더한 것이니라. 전다라는 좋은 말이나 금전, 재물, 보화(寶貨)로 벗어날 수 있지만 오음은 그렇지 않아서 좋은 말로 달래거나 금전, 재물이나 보배로 벗어날 수 없고, 전다라는 사계절 동안 늘 꼭 살해하지 않지만 오음은 그렇지 않아서 항상 순간순간 중생을 해친다. 전다라는 한 곳에만 있으니 피할 수 있지만 오음은 그렇지 않아서 모든 곳에 두루하니 피할 수가 없고, 전다라는 사람을 해쳐도 해친 뒤에 따라오지는 않지만 오음은 그렇지 않아서 중생을 죽이고서도 따라다니며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보살은 종신토록 전다라를 가까이할지언정 잠시도 오음을 가까이 할 수는 없는 것이니, 지혜로운 사람은 좋은 방편으로 오음에서 벗어날 것이니라. |
善方便者,即八聖道、 六波羅蜜、四無量心, 以是方便而得解脫, 身心不為五陰所害。 何以故?身如金剛,心如虛空, 是故身心難可沮壞。 以是義故,菩薩觀陰成就種種諸不善法, 生大怖畏,修八聖道。 亦如彼人畏四毒蛇、五旃陀羅, 涉路而去,無所顧留。 |
좋은 방편[善方便]이란 곧 팔성도(八聖道)와 육바라밀(六波羅蜜)과 사무량심(四無量心)이니, 이 방편으로 해탈을 얻으면 몸과 마음이 오음의 해를 입지 않게 되느니라. 어째서인가? 몸은 금강과 같고, 마음은 허공과 같을 것이라 심신이 무너뜨리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니, 이런 뜻에서 보살은 오음이 온갖 불선법을 이룬다고 보아 크게 두려워하며 팔성도를 닦는 것이며, 또한 저 사람이 네 독사와 다섯 전다라가 두려워서 돌아볼 겨를 없이 강 건너 가려는 것과 같으니라. |
「詐親善者,名為貪愛。 菩薩摩訶薩深觀愛結, 如怨詐親, 若知實者則無能為, 若不能知必為所害。 貪愛亦爾,若知其性, 則不能令眾生輪轉生死苦中, 如其不知, 輪迴六趣具受眾苦。 何以故?愛之為病,難捨離故。 如怨詐親難可遠離, 怨詐親者,常伺人便, 令愛別離, 怨憎合會。 愛亦如是, 令人遠離一切善法, 近於一切不善之法。 以是義故,菩薩摩訶薩 深觀貪愛,如怨詐親。 |
「'친한 척하는 것[詐親善者]'은 탐애(貪愛)이니라. 보살마하살은 애결(愛結)을 심관(深觀)하되, '마치 원수가 친한 척할 때 만약 진실을 알면 어찌할 수 없겠지만 알지 못하면 필경 해를 입게 되듯이, 탐애도 그러하여 만약 그 성품을 알면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 속에 윤전하게 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면 육취(六趣)를 윤회하며 온갖 고통을 받게 되는데, 어째서인가? 탐애하는 병을 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원수가 친한 척해도 멀리하지 못하면 친한 척하는 원수가 항상 사람을 틈을 엿보아 사랑하는 것은 이별하게 하고, 미워하는 것은 모여들게 하듯이, 탐애도 그와 같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일체의 선법(善法)을 멀리하고, 일체의 불선법을 가까이 하게 한다'고 하나니, 이런 의미에서 보살마하살은 탐애를 원수가 친한 척하는 것과 같다고 심관(深觀)하느니라. |
見不見故,聞不聞故, 如凡夫人見生死過, 雖有智慧以癡覆故,後還不見。 聲聞緣覺亦復如是, 雖見不見,雖聞不聞。 何以故?以愛心故。 所以者何?見生死過, 不能疾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 以是義故,菩薩摩訶薩觀此愛結 如怨詐親。 |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까닭에, 마치 범부가 생사의 허물을 보되 지혜가 있더라도 어리석음에 가려 도리어 보지 못하듯이, 성문연각도 그와 같아서 비록 보더라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애심(愛心) 때문이며, 어째서인가? 생사의 허물을 보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빨리 이를 수 없는 것이라 이런 의미에서 보살마하살은 탐애 보기를 원수가 친한 척하는 것 같이 하느니라. |
云何名為怨詐親相? 如怨不實詐現實相, 不可親近詐現近相, 實是不善詐現善相, 實是不愛詐為愛相。 何以故?常伺人便,欲為害故。 |
어떤 것이 원수가 친한 척하는 모양인가? 원수는 진실이 아닌데 거짓 진실한 모양을 나타내고, 친근할 수 없는데 거짓 친근한 모양을 나타내며, 사실은 불선한데 거짓 선한 모양을 나타내고, 실로 사랑하지 않는데 거짓 사랑하는 모양을 나타내나니, 어째서인가? 항상 사람의 틈을 엿보아 해치기 위해서이니라. |
愛亦如是, 常為眾生非實詐實、 非近詐近、 非善詐善、 非愛詐愛, 常誑一切,輪迴生死。 以是義故,菩薩觀愛 如怨詐親。 |
탐애도 그와 같아서 항상 중생에게 진실 아닌 것으로 진실인 척하고, 친근하지 않은 것으로 친근한 척하며, 선하지 않은 것으로 선한 척하고, 사랑 아닌 것으로 사랑인 척하면서 늘 일체중생을 속여 생사에 윤회하게 하니, 이런 의미에서 보살이 탐애 보기를 원수가 친한 척하는 것 같이 하는 것이니라. |
怨詐親者, 但見身口,不覩其心,是故能誑; 愛亦如是,唯為虛誑, 實不可得, 是故能惑一切眾生。 怨詐親者, 有始有終,易可遠離; 愛不如是,無始無終,難可遠離。 怨詐親者, 遠則難知,近則易知; 愛不如是,近尚難知, 況復遠耶?以是義故, 菩薩觀愛過於詐親。 |
원수가 친한 척하는 것은 몸과 입만 보고 마음을 보지 못하기에 속일 수 있거니와, 탐애도 그와 같아서 오로지 허황된 것만을 위하니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 그 때문에 일체중생을 미혹시킬 수 있는 것이며, 원수가 친한 척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쉽게 멀어져버릴 수 있지만, 탐애는 그렇지 않아서 시종일관 멀리하기 어려우며, 원수가 친한 척하는 것은 멀리 있으면 알기 어렵고 가까우면 알기 쉽지만, 탐애는 그렇지 않아서 가까이 있어도 오히려 알기 어렵거늘 하물며 멀리 있는 것이겠는가? 이런 뜻에서 보살은 탐애를 친한 척하는 것보다 더하다고 보는 것이니라. |
*三垢; 三毒(貪, 瞋, 癡)의 다른 이름.
「空聚落者即是六入。 菩薩摩訶薩觀內六入空無所有, 猶如空聚, 如彼怖人既入聚已, 乃至不見有一居人, 遍捉?器,不得一物。 菩薩亦爾,諦觀六入空無所有, 不見眾生一物之實, 是故菩薩觀內六入空無所有, 如彼空聚。 |
「텅 빈 마을[空聚落]이란 곧 육입(六入*)이니라. 보살마하살은 내육입(內六入)이 텅 비고 없는 것이 마치 빈 마을과 같음을 보나니, 저 무서워하는 사람이 마을에 들어갔으나 한 사람도 보지 못하기에 이르고, 장독을 다 뒤져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것과 같으니라. 보살도 그러하여 육입이 텅 비고 없음을 체관(諦觀)하되 중생이라는 일물(一物)의 실상을 보지 못하였기에 그래서 보살은 내육입이 텅 비고 없음이 마치 저 빈 마을과 같다고 보는 것이니라. |
*六入; 眼耳鼻舌身意의 六根을 內六入, 色聲香味觸法의 六境을 外六入 또는 外六塵이라 한다.
「入」은 舊譯으로서 新譯으로는 「處」이다.
善男子!彼空聚落,群賊遠望, 終不生於虛空之想。 凡夫之人亦復如是, 於六入聚不生空想, 以其不能生空想故, 輪迴生死受無量苦。 |
선남자야! 저 빈 마을을 도적떼들은 멀리서 보고 결코 텅 비었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범부도 그와 같아서 육입이라는 마을을 비었다고 생각하지 아니하니, 비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것 때문에 생사를 윤회하며 무량한 고통을 받는 것이니라. |
善男子!群賊既至乃生空想, 菩薩亦爾, 觀此六入常生空想, 生空想故, 則不輪迴生死受苦。 菩薩摩訶薩於此六入常無顛倒, 無顛倒故, 是故不復輪迴生死。 |
선남자야! 도적떼가 마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비었다고 생각하듯이, 보살도 그러하여 이 육입을 관찰하되 항상 공하다고 생각하거니와, 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사를 윤회하는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은 이 육입에 전도되는 일이 없으니, 전도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또 생사를 윤회하지 않느니라. |
復次善男子!如有群賊 入此空聚則得安樂, 煩惱諸賊亦復如是, 入此六入則得安樂。 如賊住空聚,心無所畏, 煩惱群賊亦復如是, 住是六入,亦無所畏。 如彼空聚,乃是師子、虎狼、 種種惡獸之所住處, 是內六入亦復如是, 一切眾惡煩惱走獸之所住處。 是故菩薩深觀六入空無所有, 純是一切不善住處。 |
또 선남자야! 마치 저 도적떼가 이 빈 마을에 들어간 즉 안락을 얻듯이, 번뇌라는 도적들도 그와 같아서 이 육입에 들어가면 안락을 얻고, 도적떼가 빈 마을에 머물면 무서울 것이 없듯이, 번뇌라는 도적떼도 그와 같아서 이 육입에 머물면 두려울 것이 없으며, 또 저 빈 마을은 마침내 사자나 범, 이리 같은 온갖 사나운 짐승의 소굴이 되듯이, 이 내육입도 그와 같아서 모든 사악한 번뇌라는 짐승들의 소굴이 될 것이라 그래서 보살은 육입은 텅 비어 없고 순전히 온갖 불선한 것들이 사는 곳이라고 보는 것이니라. |
「復次善男子!菩薩摩訶薩 觀內六入空無所有、如彼空聚。 何以故?虛誑不實故, 空無所有作有想故, 實無有樂作樂想故, 實無有人作人想故。 內六入者亦復如是, 空無所有而作有想, 實無有樂而作樂想, 實無有人而作人想, 唯有智人乃能知之得其真實。 |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내육입이 텅 비고 없는 저 빈 마을과 같다고 보나니, 어째서인가? 허황되고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텅 비고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실로 낙이 없건만 낙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실로 사람이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니라. 내육입도 그와 같아서 텅 비고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고, 실로 낙이 없는데 즐겁다고 생각하고, 실로 사람이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거니와, 오직 지혜 있는 사람이라야 마침내 그 진실을 알아 얻을 수 있는 것이니라. |
復次善男子!如空聚落, 或時有人,或時無人; 六入不爾,一向無人。 何以故?性常空故, 智者所知非是眼見。 是故菩薩觀內六入,多諸怨害, 修八聖道不休不息, 猶如彼人畏四毒蛇、五旃陀羅、 一詐親善及六大賊, 怖著正路。 |
또 선남자야! 빈 마을은 어떤 때는 사람이 있고 어떤 때는 없기도 하지만, 육입은 그렇지 않아서 한결같이 사람이 없는데, 왜냐하면 성품이 항상 공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이가 알 바요, 눈으로 볼 것이 아니니, 그래서 보살이 내육입은 원수의 해침이 많음을 보고 팔성도를 쉬지 않고 닦는 것이어니와, 마치 저 사람이 네 독사와 다섯 전다라, 친구인 척하는 한 사람, 여섯 도적을 무서워하여 바른 길로 내달리는 것과 같으니라. |
「六大賊者即外六塵。 菩薩摩訶薩觀此六塵如六大賊。 何以故?能劫一切諸善法故。 如六大賊能劫一切人民財寶, 是六塵賊亦復如是, 能劫一切眾生善財。 如六大賊,若入人舍 則能劫奪現家所有,不擇好惡, 令巨富者忽爾貧窮。 是六塵賊亦復如是, 若入人根則能劫奪一切善法, 善法既盡,貧窮孤露,作一闡提, 是故菩薩諦觀六塵如六大賊。 |
「육대적(六大賊)은 곧 외육진(外六塵)이니라. 보살마하살은 이 육진을 육대적과 같다고 보나니, 어째서인가? 일체의 선한 법을 겁박하기 때문이니라. 여섯 대적이 모든 백성의 재보(財寶)를 겁탈하듯이, 이 육진(六塵)이라는 도적도 그와 같아서 일체중생의 선(善)이라는 재보를 겁탈하고, 여섯 대적이 만약 사람의 집에 들어가면 집에 있는 것들을 좋고 나쁘고를 가리지 않고 겁탈하며, 令거부(巨富)를 갑자기 가난하게 만들어버리듯이, 이 육진이라는 도적도 그와 같아서 사람의 근(根)에 들어가면 일체의 선법(善法)을 겁탈하니, 선법이 기왕 없어지면 가난하고 외로운 일천제가 되기에 그래서 보살은 육진을 육대적과 같이 체관(諦觀)하느니라. |
復次善男子!如六大賊, 欲劫人時,要因內人, 若無內人,則便中還。 是六塵賊亦復如是, 欲劫善法要因內有,眾生知見、 常樂我淨、不空等相。 若內無有如是等相, 六塵惡賊,則不能劫一切善法。 有智之人內無是相, 凡夫則有, 是故六塵常來侵奪善法之財, 不善護故,為其所劫。 護者名慧, 有智之人能善防護,故不被劫, 是故菩薩觀是六塵 如六大賊等無差別。 |
또 선남자야! 육대적이 사람을 겁탈하려 할 때에는 내부의 사람을 요하거니와, 만약 내부인이 없으면 중도에 돌아가듯이, 이 육진이라는 도적도 그와 같아서 선법을 겁탈려면 안에 중생의 지견(知見)과 상락아정, 불공(不空) 등의 상(相)이 있어야 하거니와, 만일 안에 이러한 상(相)이 없으면 육진의 악한 도적이 일체의 선법을 겁탈하지 못하느니라. 지혜 있는 사람은 안에 이런 상이 없지만, 범부에게는 있기에 그래서 육진이 늘 와서 선법이라는 재물을 침탈하니, 잘 수호하지 못하고 겁탈당하는 것이니라. 수호하는 것은 지혜인지라 지혜 있는 사람은 잘 방호하여 겁탈당하지 않을 것이니, 그래서 보살은 육진이 육대적과 다름이 없다고 보는 것이니라. |
「復次善男子!如六大賊 能為人民身心苦惱; 是六塵賊亦復如是, 常為眾生身心苦惱。 六大賊者唯能劫人現在財物; 是六塵賊常劫眾生三世善財。 六大賊者夜則歡樂; 六塵惡賊亦復如是, 處無明闇則得歡樂。 是六大賊唯有諸王乃能遮止; 六塵惡賊亦復如是, 唯佛菩薩乃能遮止。 |
「또 선남자야! 육대적이 사람의 심신을 괴롭히듯이, 육진이라는 도적도 그와 같아서 항상 중생의 심신을 괴롭히느니라. 육대적은 사람의 현재하는 재물만 겁탈하지만 이 육진이라는 도적은 중생 삼세의 선재(善財)를 겁탈하고, 육대적은 밤을 좋아하듯이, 육진이라는 악적(惡賊)도 그와 같아서 무명의 어두움에 처하기를 좋아하며, 이 육대적은 오직 왕이라야만 저지할 수 있듯이, 육진이라는 악적도 그와 같아서 오직 불보살이라야만 저지할 수 있느니라. |
是六大賊凡欲劫奪 不擇端正、種姓、聰哲、 多聞博學、豪貴貧賤; 六塵惡賊亦復如是, 欲劫善法不擇端正乃至貧賤。 是六大賊雖有諸王截其手足, 猶故不能令其心息; 六塵惡賊亦復如是, 雖須陀洹、斯陀含、阿那含截其手足, 亦不能令不劫善法。 如勇健人乃能摧伏是六大賊, 諸佛菩薩亦復如是, 乃能摧伏六塵惡賊。 |
이 육대적이 겁탈할 때는 단정(端正)이나 종성(種姓), 총철(聰哲), 다문박학(多聞博學), 호귀빈천(豪貴貧賤)을 가리지 않듯이, 육진이라는 악적도 그와 같아서 선법을 겁탈할 때 그러한 것들을 가리지 않고, 이 육대적이 왕이 그의 손발을 잘라버려도 오히려 그 때문에 그 마음을 버릴 수 없듯이, 육진이라는 악적도 그와 같아서 수다원이나 사다함, 아나함은 그의 수족은 자르더라도 선법을 겁탈하지 못하게 할 수 없으며, 용맹한 사람이라야 이 육대적을 굴복시킬 수 있듯이, 제불보살(諸佛菩薩)도 그와 같아서 마침내 육진이라는 악적을 최복(摧伏)시킬 수 있느니라. |
譬如有人多諸種族,宗黨熾盛, 則不為彼六賊所劫; 眾生亦爾,有善知識, 不為六塵惡賊所劫。 是六大賊若見人物,則能偷劫; 六塵不爾,若見若知、若聞若嗅、 若觸若覺、皆悉能劫。 六大賊者唯能劫奪欲界人財, 不能劫奪色無色界; 六塵惡賊則不如是, 能劫三界一切善寶。 是故菩薩諦觀六塵過彼六賊, 作是觀已,修八聖道, 直往不迴。 如彼怖人,畏四毒蛇、五旃陀羅、 一詐親者及六大賊, 捨空聚落涉路而去。 |
비유컨대 종족(種族)이 많고 종당(宗黨)이 치성한 사람은 저 육대적에게 겁탈당하지 않듯이, 중생도 그러하여 선지식이 있으면 육진이라는 악적에게 겁탈당하지 않느니라. 이 육대적은 사람이나 재물을 보면 곧 훔치고 빼앗지만, 육진은 그렇지 않아서 보거나 알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만지거나 느끼거나간에 모두 겁탈하며, 육대적은 오로지 욕계(欲界) 사람의 재물만 겁탈하고, 색계와 무색계 사람의 것은 겁탈할 수 없지만, 육지이라는 악적은 그렇지 않고, 삼계(三界) 일체의 선보(善寶)를 겁탈하기에 그래서 보살은 육진이 저 육대적보다 더하다고 체관하며, 이렇게 관하고서 팔성도 닦는 일에 돌아보지 않고 곧장 가는 것이니, 마치 저 무서워하는 사람이 네 독사와 다섯 전다라, 친한 척하는 자와 육대적이 두려워 빈 마을을 버리고 길을 떠난 것과 같으니라. |
「路值一河者即是煩惱。 云何菩薩觀此煩惱猶如大河? 如彼駛河,能漂香象; 煩惱駛河亦復如是,能漂緣覺, 是故菩薩深觀煩惱猶如駛河。 深難得底,故名為河; 邊不可得,故名為大, 其中多有種種惡魚, 煩惱大河亦復如是。 唯佛菩薩能得底故,故名極深。 唯佛菩薩得其邊故,故名廣大。 常害一切癡眾生故,故名惡魚。 是故菩薩觀此煩惱猶如大河。 |
「길에서 강을 만났다는 것은 곧 번뇌이니라. 어째서 보살이 이 번뇌를 큰 강과 같이 보는가? 저 사하(駛河*)가 향상(香象)을 떠내려 보내듯이, 번뇌라는 사하도 그러하여 능히 연각(緣覺)을 떠내려 보내니, 그래서 보살은 번뇌를 사하 같이 보는 것이니라. 깊기는 바닥을 알 수 없으니 강[河]이라 하고, 변(邊)을 알 수 없으니 크다고 하거니와, 그 중에는 갖가지 나쁜 물고기들이 있듯이, 번뇌라는 큰 강도 그러하여 불보살만이 바닥을 알 수 있기에 극심(極深)하다고 하고, 불보살만이 그 변을 알 수 있기에 광대하다고 하며, 늘 어리석은 중생들을 해치므로 나쁜 물고기라 하는 것이라 그래서 보살은 이 번뇌를 큰 강 같이 보는 것이니라. |
*駛河; 물이 급히 흐르는 강.
如大河水能長一切草木叢林; 煩惱大河亦復如是, 能長眾生二十五有, 是故菩薩觀此煩惱猶如大河。 譬如有人,墮大河水無有慚愧; 眾生亦爾,墮煩惱河無有慚愧。 如墮河者未得其底即便命終; 墮煩惱河亦復如是, 未盡其底,周迴輪轉二十五有。 |
큰 강은 모든 초목과 숲을 길러내듯이, 번뇌의 큰 강도 그러하여 중생 25유(有)를 길러내기에 그래서 보살은 이 번뇌를 큰 강 같이 보는 것이니라. 마치 어떤 사람이 큰 강물에 빠져도 참괴(慚愧)가 없듯이, 중생도 그러하여 번뇌의 강에 빠져도 참괴가 없거니와, 강에 빠지면 그 바닥을 알기 전에 곧 죽게 되듯이, 번뇌의 강에 빠지는 것도 그와 같아서 그 바닥이 다하지 못하고 두루 돌며 25유를 떠도느니라. |
所言底者名為空相, 若有不修如是空相, 當知是人不得出離二十五有, 一切眾生不能善修空無相故, 常為煩惱駛河所漂。 如彼大河唯能壞身, 不能漂沒一切善法; 煩惱大河則不如是, 能壞一切身心善法。 彼大暴河,唯能漂沒欲界中人; 煩惱大河乃能漂沒三界人天。 |
바닥이라 함은 공한 모양[空相]을 말하나니, 만약 그러한 공상(空相)을 닦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25유에서 벗어나지 못하려니와, 일체중생은 공무상(空無相)을 잘 닦지 못하므로 늘 번뇌의 사하에서 허덕인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저 큰 강은 오직 몸만 무너뜨리고, 일체의 선법은 떠내려 보내지 못하지만, 번뇌의 큰 강은 그렇지 않아서 심신의 모든 선법을 무너뜨리며, 저 거센 강은 욕계의 사람만을 떠내려 보내지만, 번뇌라는 큰 강은 삼계의 인천(人天)을 떠내려 보내느니라. |
世間大河,手抱脚踏,則到彼岸; 煩惱大河, 唯有菩薩因六波羅蜜乃能得渡。 如大河水難可得渡; 煩惱大河亦復如是難可得渡。 云何名為難可得渡? 乃至十住諸大菩薩, 猶故未能畢竟得渡, 唯有諸佛乃畢竟渡, 是故名為難可得渡。 |
세간의 큰 강은 손발로 저으면 저 언덕에 이르겠지만, 번뇌의 큰 강은 오직 보살만이 육바라밀로 인해 건널 수 있으며, 저 큰 강물을 건너기 어렵듯이, 번뇌의 큰 강도 그렇듯 건너기 어렵거니와, 어째서 건너기 어렵다고 하는가? 십주(十住)에 이른 대보살들도 오히려 필경히 건널 수 없고, 오직 제불(諸佛)이시라야 필경히 건너는 것이라 그래서 건너기 어렵다고 하는 것이니라. |
譬如有人為河所漂, 不能修習毫釐善法; 眾生亦爾,為煩惱河所漂沒者, 亦復不能修習善法。 如人墮河為水所漂, 餘有力者則能拔濟; 墮煩惱河為一闡提, 聲聞緣覺乃至諸佛不能拔濟。 世間大河劫盡之時, 七日並照,能令枯涸; 煩惱大河則不如是, 聲聞緣覺雖修七覺,猶不能乾, 是故菩薩觀諸煩惱猶如暴河。 |
비유컨대 사람이 강에 빠지게 되면 호리(毫釐*)의 선법도 닦을 수 없듯이, 중생도 그러하여 번뇌의 강에 빠진 자도 또한 선법을 닦을 수 없고, 마치 사람이 강에 빠져서 물에 떠내려가면 힘 센 다른 사람이 건져낼 수 있겠지만, 번뇌의 강에 빠져 일천제가 되면 성문 연각에서 제불(諸佛)까지도 건져내지 못하며, 세간의 큰 강은 겁이 다할[劫盡*] 때 일곱 해가 나란히 비춰서 마르게 할 수 있겠지만, 번뇌의 큰 강은 그렇지 않아서 성문 연각이 칠각(七覺*)을 닦더라도 말릴 수 없기에 그래서 보살은 번뇌를 거친 강[暴河] 같이 보는 것이니라. |
*毫釐; ①자 또는 저울 눈의 호(毫)와 이(釐) ②매우 적은 분량.
*劫盡; 《五苦章句經》에 「諸天에 두 큰 재앙이 있어 하나는 명진(命盡)이요, 둘은 겁진(劫盡)이다.
劫盡에는 세 因緣이 있으니, 하나는 대화(大火), 둘은 대풍(大風), 셋은 대수(大水)이다.
命盡에는 일곱 증상[七證]이 있어 하나는 목덜미 빛이 멸하는 것[項中光滅],
둘은 머리가 시드는 것[頭上華萎], 셋은 안색이 변하는 것[顏色為變], 넷은 옷이 지저분한 것[衣上塵土],
다섯은 겨드랑이 땀나는 것[腋下汗出], 여섯은 몸이 마르는 것[身形損瘦],
일곱은 파리가 덤비니 자연히 자리를 옮기는 것[蠅著自然,離於本座]이다.
수재(水災)를 만났을 때는 큰 홍수가 일어나 15천(天)을 덮치니 그 안 모든 것이 없어지고,
풍재(風災)를 만났을 때는 수람(隨藍) 대풍(大風)이 네 차례 일어나 수미산과 모든 산들을 불어
산과 산이 서로 부딫쳐 가루가 되게 하니 남는 것이 없으며,
화재(火災)를 만났을 때는 일곱 해가 나란히 떠서 엉킨 채 움직이지 않으니,
천지가 불에 타 모두 금 녹듯하여 욕계의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사라진다.
가장 위의 사천(四天)은 80억 4천만 겁이 지나야 하지만 모두 죽어서 팔악도(八惡道)에 속하게 되나니,
이것을 한 고통[一苦]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七覺; 七覺分, 七覺支, 七菩提分.
「譬如彼人,畏四毒蛇、五旃陀羅、 一詐親善及六大賊, 捨空聚落,隨路而去, 既至河上取草為栰者。 菩薩亦爾,畏四大蛇、五陰旃陀羅、 愛詐親善、六入空聚、 六塵惡賊,至煩惱河, 修戒、定、慧、解脫、解脫知見、 六波羅蜜、三十七品, 以為船栰,依乘此栰,渡煩惱河, 到於彼岸,常樂涅槃。 |
「마치 저 사람이 네 독사와 다섯 전다라, 친한 벗인 척하는 사람과 여섯 도적이 무서워서 빈 마을을 버리고 길 따라 가다가 강에 이르거든 초목을 모아 뗏목을 만들었듯이, 보살도 그러하여 사대의 독사와 오음의 전다라, 친한 척하는 탐애, 육입의 빈 마을, 육진의 악적이 무서워서 번뇌의 강에 이르거든 계(戒), 정(定), 혜(慧), 해탈(解脫), 해탈지견(解脫知見)과 육바라밀(六波羅蜜), 삼십칠품(三十七品)을 닦음으로써 뗏목을 삼고, 이 뗏목을 의지하여 번뇌의 강을 건너서 피안(彼岸)에 이르러 항상히 열반을 즐기느니라. |
菩薩修行大涅槃者作是思惟: 『我若不能忍受如是身苦心苦, 則不能令一切眾生渡煩惱河。』 以是思惟,雖有如是身心苦惱, 默然忍受,以忍受故則不生漏。 如是菩薩尚無諸漏, 況佛如來而當有漏? 是故諸佛不名有漏。 |
대열반을 수행하는 보살은 이렇게 사유하느니라. 『내가 만약 이러한 심신의 고통을 견뎌내지 못한다면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번뇌의 강을 건너게 해줄 수 없으리라.』 이렇게 사유함으로써 그러한 심신의 고뇌가 있더라도 묵연히 참아내니, 그 때문에 누(漏)가 생기지 않는 것이니라. 이렇듯 보살도 오히려 제루(諸漏)가 없거늘, 하물며 제불여래가 어찌 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불은 유루(有漏)가 아닌 것이니라. |
「云何如來非無漏也? 如來常行有漏中故。 有漏即是二十五有, 是故聲聞、凡夫之人言佛有漏, 諸佛如來真實無漏。 善男子!以是因緣, 諸佛如來無有定相。 善男子!是故犯四重禁、謗方等經 及一闡提,悉皆不定。」 |
「어째서 여래는 무루(無漏)도 아닌가? 여래는 늘 유루(有漏) 속을 행하기 때문이니라. 유루는 곧 25유(有)이기에 그래서 성문이나 범부들은 제불이 유루라고 하지만, 제불여래는 진실로 무루이니라. 선남자야! 이런 인연으로 제불여래가 일정한 모양[定相]이 없는 것이며, 선남자야! 그래서 사중금을 범하거나 방등경을 비방하거나 그리고 일찬제(一闡提)가 다 정해지지 않은 것이니라.」 |
爾時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摩訶薩言: 「如是,如是。誠如聖教, 一切諸法皆悉不定。以不定故, 當知如來亦不畢竟入於涅槃。 如佛先說, 菩薩摩訶薩修大涅槃, 聞不聞中有涅槃、大涅槃?(。) 云何涅槃?云何大涅槃?」 |
그때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이 아뢰었다. 「그러하겠나이다. 거룩하신 가르침 대로 일체제법이 다 정해지지 않았고, 정해지지 않았기에 여래께서도 필경 열반에 드시지 않음을 알겠나이다. 부처님께서 앞서 말씀하시기를,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을 닦아서 듣지 못하던 것을 듣는 가운데는 열반과 대열반이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것이 열반이고, 어떤 것이 대열반이옵니까?」 |
爾時佛讚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摩訶薩言: 「善哉,善哉!善男子! 若有菩薩得念總持, 乃能如汝之所諮問。 善男子!如世人言有海、大海, 有河、大河,有山、大山,有地、大地, 有城、大城,有眾生、大眾生, 有王、大王,有人、大人,有天、天中天, 有道、大道, 涅槃亦爾,有涅槃、有大涅槃。 |
이에 부처님이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을 칭찬하셨다. 「참으로 장하도다. 선남자야! 보살이 념총지(念摠持*)를 얻어야 마침내 너와 같이 물을 수 있느니라. 선남자야! 세상 사람이 바다와 큰 바다가 있고, 강과 큰 강, 산과 큰 산, 땅과 큰 땅, 성(城)과 큰 성, 중생과 큰 중생, 왕과 대왕, 사람과 대인, 천(天)과 천중천(天中天), 도(道)와 대도가 있다고 말하듯이, 열반도 그러하여 열반도 있고 대열반도 있거니와, |
云何涅槃? 善男子!如人飢餓, 得少飯食名為安樂, 如是安樂亦名涅槃。 如病得差則名安樂, 如是安樂亦名涅槃。 如人怖畏得歸依處則得安樂, 如是安樂亦名涅槃。 如貧窮人獲七寶物則得安樂, 如是安樂亦名涅槃。 如人觀骨不起貪欲則得安樂, 如是安樂亦名涅槃。 如是涅槃不得名為大涅槃也。 何以故?以飢渴故、病故、 怖故、貧故、生貪著故, 是名涅槃,非大涅槃。 |
어떤 것을 열반이라 하는가? 선남자야! 사람이 굶주렸을 때 밥을 조금 먹으면 안락해지는 것 같은 이러한 안락도 열반이고, 병이 나으면 안락한 것 같은 이러한 안락도 열반이며, 사람이 두렵다가 귀의처를 얻은 즉 안락해지는 이러한 안락도 열반이며, 가난한 사람이 칠보를 얻으면 곧 안락해지는 이러한 안락도 열반이며, 사람이 뼈를 보고 탐욕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락한 이러한 안락도 열반이지만, 이러한 열반은 대열반이라 하지는 않나니, 어재서인가? 굶주림 때문이요, 병 때문이며, 두려움 때문이고, 가난 때문이며, 탐착 때문에 이것들이 열반인 것이지 대열반은 아닌 것이니라. |
善男子!若凡夫人及以聲聞, 或因世俗,或因聖道, 斷欲界結則得安樂, 如是安樂亦名涅槃, 不得名為大涅槃也。 能斷初禪, 乃至能斷非想非非想處結, 則得安樂,如是安樂亦名涅槃, 不得名為大涅槃也。 何以故?還生煩惱, 有習氣故。 |
선남자야! 범부와 성문이 혹 세속이나 성도(聖道)를 인해 욕계(欲界)의 결사[結]를 끊으면 안락을 얻거니와, 이러한 안락도 열반이겠지만 대열반이라 하지는 못하고, 초선(初禪)의 결사를 끊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까지의 결사를 끊어서 얻은 이러한 안락도 열반이라 하겠지만, 대열반이라 할 수는 없나니, 어째서인가? 다시 번뇌가 생기거나 습기(習氣)가 있기 때문이니라. |
云何名為煩惱習氣? 聲聞緣覺有煩惱氣, 所謂我身、我衣、我去、我來、 我說、我聽,諸佛如來入於涅槃, 涅槃之性無我、無樂, 唯有常淨, 是則名為煩惱習氣。 佛、法、眾僧有差別相, 如來畢竟入於涅槃。 聲聞、緣覺諸佛如來所得涅槃等無差別, 以是義故,二乘所得非大涅槃。 何以故?無常樂我淨故。 常樂我淨乃得名為大涅槃也。 |
어떤 것을 번뇌의 습기라고 하는가? 성문 연각은 번뇌의 습기가 있으니, 소위 내 몸, 내 옷, 내가 가고, 내가 오고, 내가 말하고, 내가 듣고, 제불여래는 열반에 들며, 열반의 성품은 아(我)와 낙(樂)은 없고 오로지 상(常)과 정(淨)만 있다고 하는 이것을 번뇌의 습기라 하느니라. 불(佛), 법(法), 승(僧)에 차별한 상(相)이 있어서 여래는 필경 열반에 드는 것이고, 성문 연각이나 제불여래가 얻는 열반이 다르지 않다고 하니, 이런 뜻에서 이승(二乘)이 얻는 바는 대열반이 아닌 것이니라. 어째서인가? 상락아정(常樂我淨)이 없기 때문이니, 상락아정이라야 대열반이라 할 수 있느니라. |
善男子!譬如有處能受眾水, 名為大海。 隨有聲聞、緣覺、菩薩、諸佛如來 所入之處,名大涅槃。 四禪、三三昧、八背捨、 八勝處、十一切處, 隨能攝取如是無量諸善法者, 名大涅槃。 |
선남자야! 마치 여러 강물을 받아들이는 곳을 대해(大海)라 하듯이, 성문 연각이나 보살, 제불여래가 쫓아 들어가는 곳을 대열반이라 하며, 사선(四禪), 삼삼매(三三昧*), 팔배사(八背捨*), 팔승처(八勝處*), 십일체처(十一切處*)를 쫓아서 무량한 선법(善法)을 섭취(攝取)하는 것을 대열반이라고 하느니라. |
*念總持; 總持는 善을 지켜 잃지 않고, 惡을 지켜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니,
생각생각 선을 지키고 악을 여의는 것이 념총지이다.
*四禪; 12권 註 참조.
*三三昧(trayah samādhayah); 新稱 三三摩地. 譯하여 三定, 三等持라 한다.
三昧는 禪定의 異稱이니 三種禪定을 말하며, 이 三昧를 有漏와 無漏 두 가지로 나누어
有漏의 定을 三三昧라 하고, 無漏의 定을 三解脫門이라 한다.
《增一阿含經 卷十六》에 三三昧는 空三昧, 無願三昧, 無想三昧라 하시고,
空三昧는 一切諸法이 다 空虛함을 觀하는 三昧요,
無想三昧는 一切諸法에 想念이 전혀 없고 가히 볼 것도 없는 三昧이며,
無願三昧는 一切諸法을 願求하지도 않는 三昧다 하셨다.
*八背捨; 新稱은 八解脫이다. 八勝處와 十一切處를 더해 三法이라 한다.
이 三法은 한결같이 三界의 貪愛가 여의어진 出世間의 禪이다.
智度論에 「背舍는 初門이고, 勝處는 中行이며, 一切處는 成就이거니와,
三種觀이 具足한 즉 이것이 觀禪體가 成就된 것이다.」 하였다. [佛學大辭典]
팔해탈(八解脫); 八種禪定에 의해 色과 無色에 대한 貪欲을 捨去하는 것.
①內有色想觀外色解脫[안에 있는 色想을 위해 外色을 觀하는 解脫]~
몸 안에 있는 色想의 貪을 除去하기 위해 밖으로 不淨하고 푸른 피멍 같은 色을 觀하여
貪이 일어나지 않게 하므로 解脫이라 한다.
이 初解脫은 初禪定에 의해 일어나며 欲界의 色을 緣한다.
②內無色想觀外色解脫[안에 色想이 없으나 外色을 觀하는 解脫]~
몸 안에 色想의 貪이 없더라도 다시 굳건히 하고자 밖으로 不淨하고 푸른 피멍 같은 色을 觀하여
貪이 不起케 하므로 解脫이라 한다.
이는 二禪에 의해 일어나고 初禪의 色을 緣한다. 이상의 두 가지는 不淨觀이다.
③淨解脫身作證具足住[淨解脫을 몸으로 證得하여 具足히 머문다]~
淨色을 觀하므로 淨解脫이라 한다.
定中에 不淨相을 除하고, 오로지 八色의 光明清淨하고 光潔妙寶 같은 色을 觀한다.
淨色을 觀하니 貪이 생기지 않고, 觀이 더욱 수승히 드러나
몸 안에서 이 性解脫을 證得하므로 몸으로 증득한다는 것이며,
具足圓滿히 이 定에서 머물게 되므로 具足히 머문다는 것이다.
이 第三 解脫의 位는 第四禪에 의해 일어나되, 역시 欲界의 色을 緣하는데, 다른 점은
위의 둘은 可憎의 不淨한 色을 觀하고, 이것은 可愛의 淨色을 觀하니, 淨觀이라 한다.
④空無邊處解脫, ⑤識無邊處解脫, ⑥無所有處解脫, ⑦非想非非想處解脫은
四無色定에 의해 일어나며, 각각 얻는 바 定에서 苦, 空, 無常, 無我를 觀하여
厭心을 내고 棄捨하므로 解脫이라 한다.
⑧滅受想定身作證具住[受와 想을 滅하는 定을 몸으로 증득하여 구족히 머문다]~
受와 想을 滅하는 定이란 滅盡定이며,
이 또한 第四禪에 의해 앞의 非非想 즉 一切의 所緣을 棄捨하므로 解脫이라 한다. [佛學大辭典]
팔승처(八勝處); 欲界의 色相을 觀하여 貪愛를 制伏 除去하는 八種禪定.
勝知勝見을 일으켜야 할 곳이라 하여 勝處라 하고, 八除入, 八除處라고도 한다.
①內有色想, 觀外色少~ 內心에 있는 色想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外界의 적은 色境을 緣하여 勝知見을 일으켜 그 色想을 勝伏함으로써
貪愛를 斷壞超越하는 禪定.
②內有色想, 觀外色多~ 반대로 外界의 많은 色境을 緣하여 色想을 勝伏.
③內無色想, 觀外色少~ 內心에 이미 色想이 제거되었더라도
다시 적은 色境을 관하여 그 色想을 勝伏.
④內無色想, 觀外色多~ 반대로 많은 色境을 관하여 勝伏.
⑤內無色想, 觀外色青 ⑥內無色想, 觀外色黃
⑦內無色想, 觀外色赤 ⑧內無色想, 觀外色白은
內心에 色想이 없더라도 다시 青, 黃, 赤, 白 등의 外色을 觀하여 勝伏.
①②는 初解脫, ③④는 第二解脫, ⑤⑥⑦⑧은 第三解脫과 같다.
십 일체처(十一切處); 一切萬有를 하나의 對象을 삼아 觀하는 것으로 그 方法에 열 가지가 있으니,
地, 水, 火, 風, 青, 黃, 赤, 白, 空, 識이 그것이다.
만약 水라는 想에 住한다면 萬有와 自身이 모두 '흐른다'고 觀하는 것이다.
十禪支, 十徧處定이라고도 한다.
「善男子!譬如有河, 第一香象不能得底, 則名為大。 聲聞緣覺至十住菩薩不見佛性, 名為涅槃,非大涅槃。 若能了了見於佛性, 則得名為大涅槃也。 是大涅槃,唯大象王能盡其底, 大象王者謂諸佛也。 |
선남자야! 마치 어떤 강이 제일가는 향상(香象)도 바닥에 닿지 않으면 크다[大]고 하듯이, 성문 연각이나 십주보살까지는 불성을 보지 못하니 열반이지 대열반은 아닌 것이니라. 불성을 요료(了了)히 본 즉 대열반이라 하려니와, 이 대열반은 대상왕(大象王)만이 바닥에 닿을 수 있거니와, 대상왕이란 제불(諸佛)을 말하느니라. |
善男子!若摩訶那伽及鉢揵陀、 大力士等經歷多時, 所不能上,乃名大山。 聲聞、緣覺及諸菩薩、摩訶那伽、 大力士等所不能見, 如是乃名大涅槃也。 |
선남자야! 마하나가(摩訶那伽*)나 발건타(鉢犍陁), 대력사(大力士)가 긴 세월 동안 가도 오르지 못해야 큰 산이라고 하듯이, 성문 연각이나 보살, 마하나가, 대력사가 보지 못하는 이러한 것이라야 대열반이라고 하느니라. |
摩訶那伽; 智度論에 「摩訶那伽는 아라한을 말한다. 摩訶는 大, 那는 無, 伽는 罪의 뜻이니,
阿羅漢은 모든 煩惱가 끊겨서 죄가 없는 큰 사람이라는 것이다.
那伽는 혹 龍이나 象을 말하기도 하는데, 이 五千 阿羅漢은 모든 아라한 중 가장 큰 힘을 가졌으므로
龍이나 象이라 하거니와, 물에서는 龍의 힘이 크고, 육지에서는 象의 힘이 크다.」 하였다.
復次善男子!隨有小王之所住處, 名為小城, 轉輪聖王所住之處乃名大城。 聲聞、緣覺,八萬、六萬、四萬、 二萬、一萬住處,名為涅槃。 無上法主、聖王住處, 乃得名為大般涅槃, 以是故名大般涅槃。 |
또 선남자야! 소왕(小王)이 머무는 곳을 소성(小城)이라 하고, 전륜성왕이 머무는 곳을 대성(大城)이라 하거니와, 성문 연각 8만이나 6만, 4만, 2만, 1만이 머무는 곳을 열반이라 하고, 부상법주(無上法主)나 성왕(聖王)이 머무는 곳이라야 마침내 대반열반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라 그 때문에 대반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
善男子!譬如有人 見四種兵不生怖畏, 當知是人名大眾生。 若有眾生於三惡道、 煩惱惡業不生怖畏, 而能於中廣度眾生, 當知是人得大涅槃。 若有人能供養父母、 恭敬沙門及婆羅門, 修治善法所言誠實無有欺誑, 能忍諸惡, 惠施貧乏名大丈夫。 菩薩亦爾,有大慈悲憐愍一切, 於諸眾生猶如父母, 能度眾生於生死河, 普示眾生一實之道, 是則名為大般涅槃。 |
선남자야! 마치 어떤 사람이 군대[四種兵]를 보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큰 중생임을 알 수 있듯이, 만약 어떤 중생이 삼악도나 번뇌의 악업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속에서 중생을 널리 제도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대열반을 얻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부모를 공양하고, 사문과 바라문을 공경하며, 선법을 닦아 말이 성실하여 속이는 일이 없고, 모든 악을 능히 인내하고, 가난한 이에게 혜시(惠施)하면 대장부라고 하듯이, 보살도 그러하여 대자비로 일체를 연민하고, 모든 중생을 부모와 같이 여기며, 중생을 생사의 강 건너게 해 주고, 널리 중생에게 진여[一實]의 도를 보여 준다면 이것이 곧 대반열반이라 할 것이니라. |
「善男子!大名不可思議, 若不可思議,一切眾生所不能信, 是則名為大般涅槃, 唯佛菩薩之所見故名大涅槃。 以何因緣復名為大? 以無量因緣然後乃得, 故名為大。 善男子!如世間人, 以多因緣之所得者,則名為大。 涅槃亦爾,以多因緣之所得故, 故名為大。 云何復名為大涅槃? 有大我故,名大涅槃。 涅槃無我,大自在故, 名為大我。 |
「선남자야! 대(大)는 불가사의하다는 것이요, 불가사의하여 일체중생이 믿을 수 없다면 이는 곧 대반열반이라 하려니와, 오직 불보살만이 보는 것이므로 대열반이라 하는 것이며, 무슨 인연으로 또 대(大)라 하는가? 무량한 인연을 만난 연후에야 얻는 것이라 그래서 크다[大]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세간 사람들이 수 많은 인연으로 얻은 것을 대(大)라고 하듯이, 열반도 그러하여 수 많은 인연으로 얻는 것이라 그래서 크다고 하느니라. 어째서 또 대열반이라 하는가? 대아(大我)가 있기 때문에 대열반이라고 한다. 열반은 무아(無我)이되 대자재(大自在)하기 때문에 대아(大我)라고 하는 것이니라. |
云何名為大自在耶? 有八自在,則名為我。 何等為八? 一者、能示一身以為多身, 身數大小猶如微塵, 充滿十方無量世界。 如來之身實非微塵, 以自在故現微塵身, 如是自在則為大我。 |
어떤 것을 대자재(大自在)하다고 하는가? 팔자재(八自在)를 갖춘 나[我]를 이르거니와, 어떤 것들이 그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한 몸으로 여러 몸을 보이되, 몸 수와 크기가 마치 티끌처럼 시방의 무량한 세계에 충만한 것이니라. 여래의 몸은 실로 티끌이 아니지만 자재하시므로 티끌 같은 몸을 나타내시거니와, 이렇듯 자재한 즉 대아(大我)라 하느니라. |
「二者、示一塵身滿於三千大千世界, 如來之身實不滿於三千大千世界。 何以故?以無礙故,直以自在故, 滿於三千大千世界, 如是自在,名為大我。 |
「둘째는 한 티끌의 몸으로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워보이는 것인데, 여래의 몸은 실로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우지 못하거늘, 어째서인가? 걸림이 없으시고, 자재하신 까닭에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우시는 것이니, 이렇듯 자재한 것을 대아(大我)라 하느니라. |
「三者、能以滿此三千大千世界之身 輕舉飛空, 過於二十恒河沙等諸佛世界 而無障礙。 如來之身,實無輕重, 以自在故能為輕重, 如是自在名為大我。 |
「셋째는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몸으로 가볍게 허공을 날아서 20항하사와 같은 제불세계를 아무런 장애없이 지나가는 것인데, 여래의 몸은 실로 가볍고 무거움이 없지만 자재하신 까닭에 가벼울 수도 무거울 수도 있거니와, 이렇듯 자재한 것을 대아(大我)라 하느니라. |
「四者、以自在故而得自在。 云何自在? 如來一心安住不動, 所可示化無量形類,各令有心。 如來有時或造一事, 而令眾生各各成辦。 如來之身常住一土, 而令他土一切悉見。 如是自在名為大我。 |
「넷째는 자재한 까닭에 자재함을 얻는 것인데, 어떤 것이 자재인가? 여래는 일심으로 안주부동(安住不動)하신 채 무량한 형상으로 화현하시되 각각 마음이 있게 하시며, 여래는 어느 때는 하나의 일을 지으시어 중생 각각으로 하여금 업인(業因)을 성취하게 하시며, 여래의 몸은 한 국토에 상주(常住)하시되 다른 국토의 모두로 하여금 다 보게 하시나니, 이렇듯 자재한 것을 대아(大我)라 하느니라. |
「五者、根自在故。 云何名為根自在耶? 如來一根,亦能見色、聞聲、 嗅香、別味、 覺觸、知法。 如來六根,亦不見色、 聞聲、嗅香、別味、 覺觸、知法。 以自在故,令根自在, 如是自在名為大我。 |
「다섯째는 근(根)이 자재한 까닭인데, 어떤 것을 근이 자재하다고 하는가? 여래는 하나의 근으로도 색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분별하고 촉감을 느끼고 법(法)을 알 수가 있고, 여래는 여섯 근[六根]으로도 색을 보지 않고 소리를 듣지도 냄새 맡지도 맛을 느끼지도 않고 촉감을 느끼거나 법을 알지 아니하기도 하니, 자재하심으로써 근을 자재하게 하는 것이거니와, 이렇듯 자재한 것을 대아(大我)라 하느니라. |
「六者、以自在故得一切法, 如來之心亦無得想。 何以故?無所得故。 若是有者可名為得, 實無所有云何名得? 若使如來計有得想, 是則諸佛不得涅槃, 以無得故名得涅槃, 以自在故得一切法, 得諸法故名為大我。 |
「여섯째는 자재함으로써 일체법을 얻었으되, 여래의 마음에는 얻었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이니, 왜냐하면 얻은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있는 것이라면 얻었다 할 수 있겠지만 실로 있는 바가 없는데 어떻게 얻었다 하겠는가? 가사 여래가 얻음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라면 이는 곧 제불이 열반을 얻지 못하는 것이라 얻음이 없음으로써 열반을 얻는다고 하거니와, 자재함으로써 일체법을 얻고, 모든 법을 얻은 까닭에 대아(大我)라 하는 것이니라. |
「七者、說自在故。 如來演說一偈之義, 經無量劫,義亦不盡, 所謂若戒、若定、若施、若慧, 如來爾時都不生念,我說彼聽; 亦復不生一偈之想, 世間之人以四句為偈, 隨世俗故說名為偈; 一切法性亦無有說, 以自在故如來演說, 以演說故名為大我。 |
「일곱째는 말씀이 자재하시기 때문인데, 여래가 한 게송의 뜻을 연설하되 무량한 겁이 지나도 그 뜻을 다하지 못하나니, 소위 계(戒)나 정(定), 시(施), 혜(慧)이며, 여래는 도무지 내가 설하고 저가 듣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또 한 게송이라 생각하지도 않건만 세간 사람들이 사구(四句)로 게송을 삼으니, 세속을 따라서 게송이라고 말하는 것이요, 일체법의 성품 또한 말이 없지만 자재함으로써 여래가 연설하는 것이며, 연설하는 까닭에 대아(大我)라고 하는 것이니라. |
「八者、如來遍滿一切諸處, 猶如虛空。 虛空之性不可得見, 如來亦爾實不可見, 以自在故令一切見, 如是自在名為大我, 如是大我名大涅槃, 以是義故名大涅槃。 |
「여덟째는 여래는 일체처에 두루 가득함이 마치 허공과 같다는 것이다. 허공의 성품을 볼 수 없듯이 여래도 그러하여 실로 볼 수가 없지만, 자재하신 까닭에 일체로 하여금 보게 하시거니와, 이렇듯 자재한 것을 대아(大我)라 하는 것이요, 이러한 대아가 대열반인 것이라 이런 의미에서 대열반이라고 하느니라. |
「復次善男子!譬如寶藏,多諸珍異, 百種具足,故名大藏。 諸佛如來甚深奧藏亦復如是, 多諸奇異,具足無缺, 名大涅槃。 復次善男子!無邊之物乃名為大, 涅槃無邊是故名大。 |
또 선남자야! 마치 보장(寶藏)에 진귀한 보배가 많고, 여러가지로 구족하거든 대장(大藏)이라 하듯이, 제불여래의 심오한 법장도 그와 같아서 기이한 모든 것들이 구족하여 빠짐이 없으니 대열반이라 하는 것이며, 또 선남자야! 끝이 없는 물건이라야 대(大)라 하듯이, 열반도 끝이 없으므로 대라고 하는 것이니라. |
「復次善男子!有大樂故名大涅槃。 涅槃無樂; 以四樂故,名大涅槃。 何等為四? 一者、斷諸樂故, 不斷樂者則名為苦, 若有苦者不名大樂。 以斷樂故則無有苦, 無苦無樂乃名大樂。 涅槃之性無苦無樂, 是故涅槃名為大樂, 以是義故名大涅槃。 |
「또 선남자야! 대락(大樂)이 있기에 대열반이라 한다. 열반은 낙이 없지만 네 가지로 즐겁기[四樂] 때문에 대열반이라 하나니, 무엇이 그 넷인가? 첫째는 모든 낙(樂)이 끊겼기 때문이니, 낙(樂)이 끊기지 않은 것인 즉 고(苦)인 것이요, 만일 고(苦)가 있다면 대락(大樂)이라 할 수 없거니와, 낙(樂)이 끊어짐으로써 고(苦)가 없는 것이라, 고도 없고 낙도 없어야[無苦無樂] 대락(大樂)인 것이니라。 열반의 성품은 무고무락(無苦無樂)하니, 그래서 열반을 대락(大樂)이라 하는 것이요, 이런 뜻에서 대열반이라 하는 것이니라. |
復次善男子!樂有二種: 一者凡夫,二者諸佛。 凡夫之樂,無常敗壞,是故無樂。 諸佛常樂無有變異, 故名大樂。 |
또 선남자야! 낙에는 두 가지가 있어서 하나는 범부의 것이요, 둘은 제불의 것이어니와, 범부의 낙은 무상하여 무너져 사라지니, 낙이 없는 것이요, 제불은 변함없이 상락(常樂)하니, 그래서 대락(大樂)이라 하느니라. |
復次善男子!有三種受: 一者苦受,二者樂受, 三者不苦不樂受, 不苦不樂是亦為苦。 涅槃雖同不苦不樂,然名大樂, 以大樂故,名大涅槃。 |
또 선남자야! 세 가지 수(受)가 있어서 하나는 고수(苦受)요, 둘은 낙수(樂受), 셋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인데, 불고불락(不苦不樂)도 고(苦)이니라. 열반은 비록 불고불락과 같지만 대락(大樂)이라 하거니와, 크게 즐거운 까닭에 대열반이라 하는 것이니라. |
「二者、大寂靜故名為大樂。 涅槃之性是大寂靜。何以故? 遠離一切憒閙法故, 以大寂故名大涅槃。 |
「둘째는 크게 적정(寂靜)하므로 대락(大樂)이라 하거니와, 열반의 성품이 바로 대적정(大寂靜)이니라. 어째서인가? 일체의 심란하고 시끄러운 법을 떠났기 때문이니, 크게 적정한 까닭에 대열반이라 하는 것이니라. |
「三者、一切知故,名為大樂。 非一切知不名大樂; 諸佛如來一切知故名為大樂。 以大樂故,名大涅槃。 |
「셋째는 일체를 알기 때문에 대락(大樂)이라 한다. 非일체를 알지 못한다면 대락이라 하지 못하려니와, 제불여래는 일체를 아시기 대문에 대락이라 하며, 크게 즐거운 까닭에 대열반이라 하는 것이니라. |
「四者、身不壞故,名為大樂。 身若可壞則不名樂; 如來之身金剛無壞, 非煩惱身、無常之身,故名大樂。 以大樂故,名大涅槃。 |
「넷째는 몸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대락이라 한다. 몸이 만약 무너진다면 낙이라 하지 못하려니와, 여래의 몸은 금강이시라 무너짐이 없으시고, 번뇌의 몸도 무상한 몸도 아니므로 대락이라 하며, 크게 즐거운 까닭에 대열반이라 하는 것이니라. |
「善男子!世間名字或有因緣、 或無因緣。 有因緣者, 如舍利弗,母名舍利, 因母立字,故名舍利弗。 如摩鍮羅道人,生摩鍮羅國, 因國立名,故名摩鍮羅道人。 如目犍連,目犍連者即是姓也、 因姓立名,故名目犍連。 如我生於瞿曇種姓, 因姓立名稱為瞿曇。 如毘舍佉道人,毘舍佉者,即是星名, 因星為名,名毘舍佉。 如有六指,因六指故,名六指人。 如佛奴、天奴, 因佛、因天,故名佛奴、天奴。 因濕生故,故名濕生。 如因聲故,名為迦迦羅、 名究究羅、呾呾羅。 如是等名,是因緣名。 |
「선남자야! 세간의 이름에는 인연이 있거나 혹은 인연이 없거나 하거니와, 인연이 있는 것은 마치 사리불은 모친의 이름이 사리이고, 모친을 인해 이름을 지었기에 사리불이며, 마유라(摩鍮羅*) 도인은 마유라국에 태어나 나라를 인해 이름을 지었기에 마유라 도인인 것이며, 목건련은 목건련이란 곧 성(姓)이지만, 성을 인하여 이름을 지었으니 목건련인 것이며, 나는 구담(瞿曇) 종성(種姓)에 태어나 성을 인해 이름을 지었기에 구담이라 부르며, 비사거(毗舍佉*) 도인은 비사거란 별 이름인데, 별을 인해 이름을 지었으니 비사거인 것이며, 육손[六指]은 여섯 손가락을 인해 육손이라 하고, 불노(佛奴)와 천노(天奴)는 부처를 인하고 하늘을 인하였기에 불노, 천노라 하며, 습기를 인해 났으니 습생이요, 소리를 인하였기에 가가라(迦迦羅*)라 하고, 구구라(究究羅*), 달달라(呾呾羅*)라 하는 것이니, 이러한 이름들은 인연명(因緣名)인 것이니라. |
*摩鍮羅(Mathurā); 佛陀時代 印度 16大國 중 하나로 秣菟羅國, 또는 摩偷羅國, 摩度羅國, 摩突羅國.
*毗舍佉(Visākhā巴); 迦維羅衛城의 剎帝利種 사람으로 원래 宮女였으나
후에 마하파사파제(摩訶波闍波提)와 함께 出家하였다.
*迦迦羅, 究究羅, 呾呾羅; 모두 울음소리로 이름을 붙인 새 이름.
無因緣者, 如蓮花、地、水、火、風、虛空。 如曼陀婆,一名二實, 一名殿堂、 二名飲漿堂, 不飲漿亦復得名為曼陀婆。 如薩婆車多名為蛇蓋, 實非蛇蓋, 是名無因,強立名字。 如坻羅婆夷,名為食油, 實不食油, 強為立名,名為食油。 是名無因,強立名字。 |
인연이 없는 것은 연꽃이나 지(地), 수(水), 화(火), 풍(風), 허공 같은 것이다. 만타바(曼陀婆)는 한 이름에 두 뜻이 있어서 하나는 전당(殿堂)을 말하고, 또 하나는 물 마시는 곳[飲漿堂]을 말하지만 물을 마시지 않아도 이름은 만다바이니라. 살바차다(薩婆車多)는 사개(蛇蓋,蛇退;뱀 허물)의 뜻이지만 실제로는 사개가 아니니, 이는 인(因)이 없이 억지로 붙인 이름이며, 지라바이(坻羅婆夷)는 식유(食油)라지만 실제로는 먹지 못하는 기름인데, 억지로 이름 붙여 먹는 기름[食油]이라 한 것이니, 이는 인(因) 없는 이름을 억지로 붙인 것이니라. |
善男子!是大涅槃亦復如是, 無有因緣,強為立名。 善男子!譬如虛空, 不因小空名為大空也。 涅槃亦爾, 不因小相名大涅槃。 善男子!譬如有法,不可稱量、 不可思議,故名為大。 涅槃亦爾,不可稱量、不可思議, 故得名為大般涅槃。 |
선남자야! 이 대열반도 그와 같아서 인연 없는 것에 억지로 붙인 이름이니라. 선남자야! 마치 허공이 소공(小空)을 인해 대공(大空)이라 하지 않듯이, 열반도 그러하여 작은 모양[小相]을 인해 대열반이라 하지 아니하며, 선남자야! 또 어떤 법이 양을 헤아릴 수 없고, 생각해 볼 수도 없기에 크다[大] 하듯이, 열반도 그러하여 불가칭량하고 불가사의하기에 대반열반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니라. |
以純淨故名大涅槃。 云何純淨? 淨有四種。何等為四? 一者、二十五有名為不淨, 能永斷故得名為淨, 淨即涅槃。 如是涅槃,亦得名有, 而是涅槃,實非是有, 諸佛如來隨世俗故,說涅槃有。 譬如世人,非父言父、 非母言母, 實非父母,而言父母。 涅槃亦爾, 隨世俗故說言諸佛有大涅槃。 |
순수하고 깨끗한[純淨] 까닭에 대열반이라 하거니와, 어떤 것을 순정(純淨)이라 하는가? 정(淨)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무엇이 그 넷인가 하면, 첫째는 26유(有)는 부정(不淨)하다 하여 영단(永斷)한 까닭에 정(淨)이라 하는 것이니[緣淨], 정(淨)은 곧 열반이니라. 이러한 열반도 있다[有]고 하거니와, 그러나 이 열반은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제불여래께서 세속을 쫓아 열반이 있다고 하시는 것이니라. 비유컨대 세인들이 부친 아닌데 부친이라 하고, 모친 아닌데 모친이라 하면서, 실제로 부모 아닌데 부모라고 말하는 것처럼 열반도 그러하여 세속을 쫓아 제불에게 대열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
二者、業清淨故。 一切凡夫業不清淨,故無涅槃; 諸佛如來業清淨故,故名大淨, 以大淨故名大涅槃。 三者、身清淨故。 身若無常,則名不淨; 如來身常故名大淨, 以大淨故名大涅槃。 四者、心清淨故, 心若有漏,名曰不淨; 佛心無漏,故名大淨, 以大淨故名大涅槃。 |
둘째는 업(業)이 청정[業淨]하기 때문이니라. 일체범부는 업이 청정치 못하므로 열반이 없거니와, 제불여래는 업이 청정하시니 그래서 대정(大淨)이라 하며, 크게 청정하시므로 대열반이라 하는 것이니라. 셋째는 몸이 청정[身淨]하기 때문이니라. 몸이 만약 무상(無常)한 즉 부정(不淨)하다 하려니와, 여래의 몸은 항상하시니 대정(大淨)이라 하며, 크게 청정하시므로 대열반이라 하는 것이니라. 넷째는 마음이 청정[心淨]하기 때문이니, 마음에 만약 누가 있으면[有漏] 부정하다 하려니와, 부처님 마음은 누가 없기에[無漏] 그래서 대정인 것이며, 대정하시므로 대열반이라 하는 것이니라. |
善男子!是名善男子、善女人 修行如是大涅槃經, 具足成就初分功德。 |
선남자야! 이릉 일러 '선남자 선여인이 이러한 대열반경을 수행하여 초분공덕(初分功德)을 구족히 성취한다'고 하느니라. |
*初分功德; 十事功德 중 제1의 공덕. 常(大空,無因緣),樂(大樂),我(大我),淨(純淨,四淨),
大般涅槃經卷第二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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