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般涅槃經卷第二十七 北涼天竺三藏曇無讖譯 |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제27권 북량(北涼)국 천축삼장 담무참(曇無讖) 역(譯) |
師子吼菩薩品第十一之一 | 11-1. 사자후보살품(師子吼菩薩品) |
爾時佛告一切大眾: 「諸善男子!汝等若疑,有佛、無佛, 有法、無法,有僧、無僧, 有苦、無苦,有集、無集, 有滅、無滅,有道、無道, 有實、無實,有我、無我, 有樂、無樂,有淨、無淨, 有常、無常,有乘、無乘, 有性、無性,有眾生、無眾生, 有有、無有,有真、無真, 有因、無因,有果、無果, 有作、無作,有業、無業, 有報、無報者, 今恣汝所問吾,當為汝分別解說。 善男子!我實不見,若天、若人、 若魔、若梵、若沙門、若婆羅門, 有來問我不能答者。」 |
그때 부처님께서 모든 대중에게 고하셨다. 「선남자들아! 너희가 만약 불(佛)이 있는지 없는지, 법(法)이 있는지 없는지, 승(僧)이 있는지 없는지, 고(苦)가 있는지 없는지, 집(集)이 있는지 없는지, 멸(滅)이 있는지 없는지, 도(道)가 있는지 없는지, 실(實)이 있는지 없는지, 아(我)가 있는지 없는지, 낙(樂)이 있는지 없는지, 정(淨)이 있는지 없는지, 상(常)이 있는지 없는지, 승(乘)이 있는지 없는지, 성(性)이 있는지 없는지, 중생(眾生)이 있는지 없는지, 유(有)가 있는지 없는지, 진(真)이 있는지 없는지, 인(因)이 있는지 없는지, 과(果)가 있는지 없는지, 작(作)이 있는지 없는지, 업(業)이 있는지 없는지, 보(報)가 있는지 없는지 의심이 가는 것을 지금 너희 마음껏 묻거든 내 마땅히 분별하여 해설하리라. 선남자야! 나는 실로 천(天)이나 인(人), 마(魔), 범(梵), 사문, 바라문이거나 누가 와서 내게 물어도 답할 수 없는 것을 보지 못했느니라.」 |
爾時會中有一菩薩名師子吼,即從座起, 斂容整服,前禮佛足, 長跪叉手,白佛言: 「世尊!我適欲問, 如來大慈復垂聽許?」 |
그때 회중에 있던 (師子吼)라는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옷매무새를 바로 잡고 부처님 발에 예배한 다음 장궤(長跪*)하여 차수(叉手*)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마침 여쭈려하온데 여래께서 대자로 허락하시겠나이까?」 |
*長跪; 무릎을 꿇고서 윗몸을 꼿꼿이 세운 자세.
*叉手; 공수(拱手). 두 손을 겹쳐 모아 행하는 옛날의 경례.
爾時佛告諸大眾言: 「諸善男子!汝等今當於是菩薩, 深生恭敬、尊重讚歎, 應以種種香花伎樂、瓔珞幡蓋、 衣服飲食、臥具醫藥、房舍殿堂, 而供養之,迎來送去。所以者何? 是人已於過去諸佛深種善根,福德成就, 是故今於我前欲師子吼。 |
그때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고하셨다. 「선남자들아! 너희는 지금 이 보살에게 깊이 공경과 존중, 찬탄하는 마음을 내서 갖가지 향화(香花)와 기악(伎樂), 영락(瓔珞), 번개(幡蓋)와 의복, 음식, 와구(臥具), 의약, 방사(房舍), 전당(殿堂)을 공양하여 맞이하고 보내드려야 하나니, 어째서인가? 이 사람은 과거 제불께 선근을 깊이 심어 복덕을 성취하였기에 그래서 지금 내 앞에서 사자후를 하려는 것이니라. |
「善男子!如師子王,自知身力, 牙爪鋒芒,四足踞地, 安住巖穴,振尾出聲, 若有能具如是諸相, 當知是則能師子吼。 真師子王,晨朝出穴, 頻申欠呿,四向顧望, 發聲震吼,為十一事。 何等十一? 一為欲壞實非師子詐作師子故, 二為欲試自身力故, 三為欲令住處淨故, 四為諸子知處所故, 五為群輩無怖心故, 六為眠者得覺寤故, 七為一切放逸諸獸不放逸故, 八為諸獸來依附故, 九為欲調大香象故, 十為教告諸子息故, 十一為欲莊嚴自眷屬故。 |
「선남자야! 마치 사자왕이 자신의 힘을 믿고서 이빨과 발톱을 서슬같이 세우고 네 다리로 웅크린 채 바위굴 속에서 꼬리를 흔들며 울부짖는 것과 같이 만일 누가 이러한 모습을 갖출 수 있다면 마땅히 이는 곧 사자후할 수 있음을 알겠거니와, 진정한 사자왕은 이른 아침에 굴에서 나와 빈신흠거(頻申欠呿*)하고 사방을 둘러보며 우레처럼 울부짖어 열한 가지를 위하나니, 어떤 것들이 열하나인가? 하나는 실로 사자가 아니면서 사자행세를 하는 것들을 부수고자 함이요, 둘은 자신의 힘을 시험하고자 함이며, 셋은 주변을 깨끗히 하고자 함이며, 넷은 새끼들에게 어미의 처소를 알리고자 함이며, 다섯은 따르는 무리의 공포심을 없애주려는 것이며, 여섯은 잠자는 것들을 깨우려는 것이며, 일곱은 방일한 모든 짐승들을 방일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며, 여덟은 모든 짐승들을 의지케 하려 함이며, 아홉은 큰 향상(香象)들을 조복시키고자 함이며, 열은 새끼들을 가르치고자 함이며, 열하나는 제 권속들을 장엄하고자 함이니라. |
*頻申欠呿; 頻申은 噸申欠呿. 〈法蘊足論〉 8권에
「頻(噸)申은 몸을 낮췄다 세웠다 하고 사지를 웅크렸다 폈다 하는 것을 말하고,
欠呿는 코를 벌름대고 입을 씰룩거리는 것을 말한다」 하였다.
頻申은 奮迅과 같은 의미로 〈瑜伽師地論〉 89卷에서는
「몸이 무겁고 마음은 부드럽지 못하니 몸을 세워 쭉 뻣는 것」이라 하였고,
〈華嚴疏鈔〉 60卷에서는 「頻申이나 奮迅은 모두 사지가 막힘없이 잘 통하도록 쭉 뻣는 모양새」라 하였다.
一切禽獸聞師子吼, 水性之屬潛沒深淵, 陸行之類藏伏窟穴,飛者墮落, 諸大香象怖走失糞。 諸善男子!如彼野干雖逐師子至于百年, 終不能作師子吼也。 若師子子,始滿三年, 則能哮吼如師子王。 |
모든 짐승들은 사자후를 들으면 물에 사는 속성의 무리는 물 속 깊이 숨어들고, 뭍에 사는 무리는 바위굴로 숨고, 나는 것들은 떨어지고, 큰 향상들은 무서워 똥을 흘리며 달아나느니라. 선남자들아! 저 야간(野干*)이 사자 쫓아하기를 백년에 이르러도 결코 사자후를 할 수 없지만 사자새끼라면 겨우 3년만 되어도 곧 사자왕처럼 효후(哮吼;울부짖음)할 수 있듯이, |
*野干(siṅgāla); 狐狼(자칼).
善男子!如來正覺智慧牙爪, 四如意足、六波羅蜜滿足之身, 十力雄猛,大悲為尾, 安住四禪清淨窟宅, 為諸眾生而師子吼,摧破魔軍。 示眾十力,開佛行處, 為諸邪見作歸依所, 安撫生死怖畏之眾, 覺寤無明睡眠眾生, 行惡法者為作悔心。 開示邪見一切眾生, 令知六師非師子吼故, 破富蘭那等憍慢心故, 為令二乘生悔心故, 為教五住諸菩薩等生大力心故, 為令正見四部之眾 於彼邪見四部徒眾不生怖畏故, 從聖行、梵行、天行窟宅, 頻申而出, 為欲令彼諸眾生等破憍慢故欠呿, 為令諸眾生等生善法故四向顧望, 為令眾生得四無礙故四足踞地, 為令眾生具足安住尸波羅蜜故, 故師子吼。 |
선남자야! 여래 정각은 지혜의 아조(牙爪)와, 4여의족(如意足)과 6바라밀을 만족한 몸에 십력(十力)이 웅맹(雄猛)하고 대비(大悲)로 꼬리를 삼아 4선(四禪)의 청정한 굴집[窟宅]에 안주하여 모든 중생을 위해 사자후하고 마군을 최파(摧破)하느니라. 중생들에게 십력을 보이고 부처의 행할 곳을 열어서 모든 사견(邪見)이 귀의할 곳을 만들고, 생사의 두려움에 떠는 중생을 어루만지며, 무명(無明)의 잠에 빠진 중생을 깨우치고, 악법(惡法) 행하는 자를 뉘우치게 하느니라. 사견을 가진 모든 중생에게 열어보여서 6사(六師)들은 사자후가 아님을 알게 하고자 하고, 부란나(富蘭那) 등의 교만심을 깨뜨리고자 하고, 2승(二乘)으로 하여금 후회하게 하고자 하고, 5주(五住) 보살들에게 대력심(大力心)을 내게 하고자 하고, 정견(正見)을 가진 사부대중으로 하여금 저 사견(邪見)의 사부대중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자 하며, 성행(聖行)과 범행(梵行), 천행(天行)의 굴집으로부터 기지개를 켜고[頻申] 나와 저 중생들로 하여금 교만을 깨뜨리게 하고자 흠거(欠呿)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선한 법을 내게 하고자 사향고망(四向顧望)하며, 중생들이 4무애(四無礙)를 얻게 하고자 사족굴지(四足踞地)하며, 중생들이 具足安住시(尸)바라밀을 구족하여 안주케 하고자 사자후(師子吼)를 하느니라. |
爾時世尊告師子吼菩薩摩訶薩言: 「善男子!汝若欲問今可隨意。」 |
이때 세존께서 사자후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네가 물으려거든 지금 마음대로 묻거라.」 |
師子吼菩薩摩訶薩白佛言: 「世尊!云何為佛性? 以何義故名為佛性? 何故復名常樂我淨? 若一切眾生有佛性者, 何故不見一切眾生所有佛性? 十住菩薩住何等法,不了了見? 佛住何等法,而了了見? 十住菩薩以何等眼,不了了見? 佛以何眼而了了見?」 |
사자후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불성이옵고, 무슨 의미에서 불성이라고 하오며, 무슨 연고로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하나이까? 만약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면 어째서 일체중생이 지닌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옵니까? 십주보살은 어떤 법에 머물렀기에 요료(了了)히 보지 못하고, 부처님은 어떤 법에 머무시기에 요료히 보시며, 십주 보살은 어떤 눈이기에 요료히 보지 못하고, 부처님은 어떤 눈이기에 요료히 보시나이까?」 |
佛言:「善男子!善哉,善哉! 若有人能為法諮啟, 則為具足二種莊嚴: 一者智慧,二者福德。 若有菩薩具足如是二莊嚴者, 則知佛性,亦復解知名為佛性, 乃至能知十住菩薩以何眼見, 諸佛世尊以何眼見。」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참으로 장하도다! 어떤 사람이 여쭈어 법을 위할 수 있는 즉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하나니, 첫째는 지혜요, 둘째는 복덕이니라. 보살이 이러한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하면 곧 불성도 알고 불성이라 부르는 이유도 풀어 알 것이며, 십주보살은 어떤 눈으로 보고 제불세존은 어떤 눈으로 보는지까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니라.」 |
「善男子!慧莊嚴者, 謂從一地乃至十地,是名慧莊嚴。 福德莊嚴者, 謂檀波羅蜜乃至般若非般若波羅蜜。 復次善男子!慧莊嚴者,所謂諸佛菩薩。 福德莊嚴者,謂聲聞緣覺九住菩薩。 |
「선남자야! 지혜장엄이란 초지에서 십지까지를 지혜장엄이라 하고, 복덕장엄이란 단(檀)바라밀에서 반야바라밀까지를 말하느니라. 또 선남자야! 지혜장엄이란 이른 바 제불보살이요, 복적장엄이란 성문연각과 구주(九住)보살을 말하느니라. |
「復次善男子!福德莊嚴者, 有為、有漏、有有、有果報、 有礙、非常,是凡夫法。 慧莊嚴者,無為、無漏、 無無、無果報、無礙、常住。 善男子!汝今具足是二莊嚴, 是故能問甚深妙義, 我亦具足是二莊嚴, 能答是義。」 |
「또 선남자야! 복덕장엄이란 유위(有為)와 유루(有漏), 유유(有有), 유과보(有果報), 유애(有礙), 비상(非常)이니, 이는 범부의 법이요, 지혜장엄이란 무위(無為)와 무루(無漏), 무무(無無), 무과보(無果報), 무애(無礙), 상주(常住)이니라. 선남자야! 너는 지금 이 두 가지 장엄을 구족했기에 심오한 묘의(妙義)를 물을 수 있거니와, 나 또한 그 두 가지 장엄을 구족했기에 그 뜻을 답할 수 있는 것이니라.」 |
師子吼菩薩摩訶薩言: 「世尊!若有菩薩具足如是二莊嚴者, 則不應問一種、二種。 云何世尊說言能答一種二種? 所以者何?一切諸法無一、二種。 一種、二種者,是凡夫相。」 |
사자후보살마하살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만약 이러한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하면 한 가지나 두 가지를 물어서는 아니될 터이온데, 어찌하여 세존께서는 한 가지 두 가지를 답한다고 하시나이까? 왜냐하면 일체제법은 한 가지 두 가지가 없사옵고 한 가지 두 가지라는 것은 범부의 생각이기 때문이옵니다.」 |
佛言:「善男子! 若有菩薩無二種莊嚴, 則不能知一種、二種。 若有菩薩具二莊嚴, 則能解知一種、二種。 若言諸法無一、二者, 是義不然。 何以故?若無一、二, 云何得說一切諸法無一、無二? 善男子!若言一、二是凡夫相, 是乃名為十住菩薩,非凡夫也。 何以故?一者名為涅槃, 二者名為生死。 何故一者名為涅槃? 以其常故。 何故二者名為生死? 愛、無明故。 常涅槃者,非凡夫相。 生死二者,亦非凡夫相。 以是義故,具二莊嚴者能問能答。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보살이 만약 두 가지 장엄이 없다면 곧 한 가지 두 가지를 알 수 없겠지만, 보살이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하면 곧 한 가지 두 가지를 풀어 알 수 있느니라. 모든 법이 한 가지 두 가지가 없다고 하는 것은 이치가 그렇지 않나니, 어째서인가? 만약 한 가지 두 가지가 없다면 어떻게 일체제법이 하나도 없고 둘도 없다고 말하겠느냐? 선남자야! 만일 한 가지 두 가지가 범부상(凡夫相)이라고 한다면 이는 결국 십주보살이라 할 것이요 범부가 아니니라. 왜냐하면 하나라는 것은 열반(涅槃)이라 하고, 둘이라는 것은 생사(生死)라 하기 때문이니라. 어째서 하나를 열반이라 하는가? 그것이 항상하기 때문이며, 어째서 둘을 생사라 하는가? 애(愛)와 무명(無明) 때문이니라. 항상된 열반이란 범부의 상이 아니요, 생사가 둘이라는 것 또한 범부상이 아니니, 이런 뜻에서 두 장엄을 구족하면 묻고 답할 수 있다는 것이니라. |
「善男子!汝問云何為佛性者? 諦聽,諦聽!吾當為汝分別解說。 善男子!佛性者名第一義空, 第一義空名為智慧。 所言空者,不見空與不空。 智者見空及與不空、常與無常、 苦之與樂、我與無我。 空者一切生死,不空者謂大涅槃; 乃至無我者即是生死, 我者謂大涅槃。 見一切空,不見不空,不名中道; 乃至見一切無我, 不見我者,不名中道, 中道者名為佛性。 以是義故,佛性常恒、無有變易, 無明覆故,令諸眾生不能得見。 聲聞緣覺見一切空,不見不空; 乃至見一切無我,不見於我。 以是義故,不得第一義空, 不得第一義空故,不行中道, 無中道故,不見佛性。 |
「선남자야! 네가 어떤 것을 불성이라고 하느냐고 물었으니, 자세히 듣거라. 내 마땅히 네게 분별하여 해설하리라. 선남자야! 불성이라는 것을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 하고, 제일의공을 지혜라 한다. 공(空)이라 하는 것은 공(空)과 불공(不空)을 보지 않는 것이요, 지(智)란 공(空)과 불공(不空), 상(常)과 무상(無常), 고(苦)와 낙(樂), 아(我)와 무아(無我)를 보는 것이니, 공은 일체의 생사(生死)를 이르고, 불공은 대열반을 이르는 것이며, 나아가 무아(無我)까지도 생사를 말하고, 아(我)는 대열반을 말하는 것이니라. 일체의 공을 보고 불공을 보지 않는 것은 중도(中道)라 할 수 없고, 나아가 일체의 무아(無我)를 보고 아(我)를 보지 않는 것도 중도라 하지 못하며, 중도란 불성(佛性)을 이르는 것이라 이런 뜻에서 불성은 항상하여 변역이 없건만 무명(無明)에 가리워진 까닭에 중생이 보지 못하는 것이니라. 성문연각은 일체의 공을 보고, 불공을 보지 아니하며, 나아가 일체가 무아(無我)임을 보고 아(我)로 보지 아니하니, 이런 이치로 제일의공(第一義空)을 얻지 못하고 제일의공을 얻지 못하므로 중도를 행하지 못하는 것이며, 중도가 없기 때문에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라. |
*第一義空(paramārtha-śūnyatā); 18空의 하나.
大乘의 지극한 열반과 諸法의 實相이 空이라는 것으로 勝義空, 真實空이라고도 한다.
涅槃과 諸法의 實相을 第一義의 無上法으로 여기니, 항상하지도 멸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애착하지도 아니하며, 그 성품이 자연 그대로이되 본래 없던 것이 지금에 있고,
지금에 있던 것이 다시 없어지므로 공이 된다는 이치를 「第一義空」이라 한다. [佛光大辭典]
善男子!不見中道者,凡有三種: 一者定樂行,二者定苦行, 三者苦樂行。 定樂行者, 所謂菩薩摩訶薩憐愍一切諸眾生故, 雖復處在阿鼻地獄,如三禪樂。 定苦行者,謂諸凡夫。 苦樂行者,謂聲聞、緣覺, 聲聞緣覺行於苦樂,作中道想。 以是義故,雖有佛性而不能見。 |
선남자야! 중도를 보지 못하는 것에는 무릇 세 가지가 있어서 첫째는 정락행(定樂行)이요, 둘째는 정고행(定苦行)이며, 셋째는 고락행(苦樂行)이니라. 정락행(定樂行)이란 이른바 보상마하살이 일체의 모든 중생을 연민하기에 비록 아비지옥에 처하더라도 삼선락(三禪樂) 같은 것이요, 정고행(定苦行)이란 모든 범부를 말하고, 고락행(苦樂行)이란 성문 연각을 말하니, 성문 연각은 고락(苦樂)을 행하면서 중도라고 생각하니, 이런 이치로써 비록 불성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이니라. |
如汝所問,以何義故名佛性者? 善男子!佛性者,即是一切諸佛 阿耨多羅三藐三菩提中道種子。 復次善男子!道有三種,謂下、上、中。 下者梵天,無常謬見是常。 上者生死無常謬見是常, 三寶是常橫計無常。 何故名上? 能得最上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 中者名第一義空, 無常見無常,常見於常。 第一義空,不名為下。 何以故?一切凡夫所不得故。 不名為上。 何以故?即是下故。 諸佛菩薩所修之道,不上、不下, 以是義故,名為中道。 |
너는 무슨 의미로 불성이라 하느냐고 물었거니와, 선남자야! 불성이란 곧 일체제불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중도(中道)의 씨앗이니라. 또 선남자야! 도(道)에는 세 가지, 소위 상, 중, 하가 있는데, 하(下)는 범천은 무상하거늘 항상하다고 잘못 보는 것이요, 상(上)은 생사(生死)는 무상하건만 항상하다고 잘 못 보고, 삼보(三寶)는 항상하건만 함부로 무상하다고 하는 것이니라. 어째서 상(上)이라 하는가? 최상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요, 중(中)이란 제일의공(第一義空)을 이르거니와, 무상(無常)을 무상으로 보고, 상(常)을 상으로 보는 것이니라. 제일의공(第一義空)은 하(下)라 하지 않나니, 어째서인가? 일체범부는 얻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요, 상(上)이라고도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는 곧 하(下)이기 때문이며, 제불보살이 닦는 도(道)는 상(上)도 아니고 하(下)도 아닌지라 이런 뜻에서 중도(中道)라 하는 것이니라. |
「復次善男子!生死本際,凡有二種: 一者無明,二者有愛。 是二中間,則有生老病死之苦, 是名中道, 如是中道能破生死,故名為中。 以是義故,中道之法名為佛性, 是故佛性常樂我淨。 以諸眾生不能見故, 無常無樂、無我無淨, 佛性實非無常無樂、無我無淨。 |
「또 선남자야! 생사의 본제(本際;根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무명(無明)이요, 둘째는 유애(有愛)니라.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苦)가 있는 이 둘의 중간, 이것을 중도(中道)라고 하거니와, 이와 같은 중도가 생사를 깨뜨릴 수 있기에 중(中)이라 하고, 이런 뜻에서 중도의 법을 불성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 때문에 불성(佛性)은 상락아정(常樂我淨)하건만, 중생들은 보지 못하는 까닭에 무상무락(無常無樂)하고 무아무정(無我無淨)하거니와, 불성은 실로 무상무락도 무아무정도 아니니라. |
善男子!譬如貧人,家有寶藏, 是人不見,以不見故, 無常無樂、無我無淨。 有善知識而語之言: 『汝舍宅中,有金寶藏, 何故如是貧窮困苦、 無常無樂、無我無淨?』 即以方便令彼得見。 以得見故,是人即得常樂我淨。 佛性亦爾,眾生不見, 以不見故,無常無樂、無我無淨。 有善知識諸佛菩薩,以方便力, 種種教告,令彼得見, 以得見故,眾生即得常樂我淨。 |
선남자야! 마치 가난한 사람이 집에 숨겨진 보물이 있는데 이 사람이 보지 못하니, 보지 못함으로써 무상무락(無常無樂), 무아무정(無我無淨)하다가, 어떤 선지식이 『당신 집 안에 금보가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빈궁곤고(貧窮困苦)하고 무상무락하며 무아무정합니까?』하고 말해주고 곧 방편으로 그가 보게 하면 그것을 봄으로써 이 사람이 곧 상락아정을 얻듯이, 불성도 그러하여 중생이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함으로써 무상무락, 무아무정하다가, 선지식인 제불보살이 방편력으로 여러가지를 가르쳐서 저가 보게 하거든 봄으로써 중생이 곧 상락아정을 얻느니라. |
「復次善男子!眾生起見,凡有二種: 一者常見,二者斷見。 如是二見不名中道, 無常無斷乃名中道。 無常無斷,即是觀照十二因緣智, 如是觀智是名佛性。 二乘之人雖觀因緣, 猶亦不得名為佛性。 佛性雖常, 以諸眾生無明覆故,不能得見。 又未能渡十二因緣河,猶如兔馬。 何以故?不見佛性故。 |
「또 선남자야! 중생이 일으키는 견(見)에는 두 가지가 있어 첫째는 상견(常見)이요, 둘째는 단견(斷見)인데, 이러한 두 견[二見*]은 중도(中道)라 할 수 없고 무상무단(無常無斷)이라야 중도라 할 것이니라. 무상무단은 곧 12인연을 관조(觀照)하는 지혜이며, 이러한 관지(觀智)를 불성(佛性)이라 하거니와, 2승(二乘)들이 인연을 관조하는 것은 불성이라 하지 않느니라. 불성은 항상하건만 중생들은 무명에 가려 보지 못하고 또 12인연의 강을 건너지 못하니, 토끼나 말[兔馬*]과 같다. 어째서인가? 불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
*二見; 常見(śāśvatadrsti)과 斷見(uccheda-drsti).
常見은 世界는 常住不滅하고 사람이 죽은 뒤에도 我[靈魂]은 常住不滅한다는 견해.
斷見은 斷滅的見解, 즉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아무것도 만지 않는다는 견해.
*兔馬; 3승을 토끼와 말, 코끼리의 세 짐승[三獸]에 비유하셨는데, 이 세 짐승이 생사의 강을 건넘에 있어서
토끼의 발은 물위에 있다는 것으로써聲聞의 悟道가 가장 옅음에 비유하고,
말의 발은 물 중간에 있음으로써 緣覺의 悟道가 약간 깊음에 비유하고,
코끼리 발은 물 밑에 이른다는 것으로써 菩薩의 悟道가 가장 깊다는 것에 비유하신 것이다.
善男子!是觀十二因緣智慧, 即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種子, 以是義故,十二因緣名為佛性。 善男子!譬如胡瓜名為熱病。 何以故?能為熱病作因緣故。 十二因緣亦復如是。 善男子!佛性者,有因有因因, 有果有果果。 有因者即十二因緣, 因因者即是智慧, 有果者即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 果果者即是無上大般涅槃。 善男子!譬如無明為因, 諸行為果,行因識果, 以是義故,彼無明體亦因、亦因因, 識亦果、亦果果。佛性亦爾。 善男子!以是義故, 十二因緣不出不滅、不常不斷、 非一非二、不來不去、 非因非果。 |
선남자야! 12인연을 관조하는 지혜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종자인지라 이런 뜻에서 12인연을 불성이라 하거니와, 선남자야! 마치 호과(胡瓜*)를 열병이라고 하는 것이 열병이 되는 인연을 짓기 때문이듯이 12인연도 그와 같아서 선남자야! 불성은 인이 있고[有因] 인의 인도 있으며[有因因], 과가 있고[有果] 과의 과도 있나니[有果果], 인(因)이란 곧 12인연이요, 인의 인[因因]이란 곧 지혜이며, 과(果)는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요, 과의 과[果果]는 무상대반열반(無上大般涅槃)이니라. 선남자야! 마치 무명(無明)이 인(因)이 되고 모든 행이 과(果)가 되며, 행(行)은 인이요 식(識)이 과인지라 이런 뜻에서 저 무명의 본체는 인(因)이자 인의 인[因因]이요, 식(識)도 과(果)이자 과의 과[果果]이듯이, 불성도 그러하느니라. 선남자야! 이런 이치에서 12인연은 나지도 멸하지도 않고, 항상하지도 단멸하지도 아니하며,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며, 오지도 가지도 않고, 인(因)도 과(果)도 아니니라. |
*胡苽; 동인도가 원산지인 호로(葫蘆;호리병박)과 호고(胡瓜)속 식물. Cynanchum corymbosum.
善男子!是因非果如佛性, 是果非因如大涅槃。 是因是果,如十二因緣所生之法。 非因非果名為佛性。 非因果故,常恒無變。 以是義故,我經中說 十二因緣其義甚深, 無知無見,不可思惟, 乃是諸佛菩薩境界, 非諸聲聞緣覺所及。 以何義故甚深甚深? 眾生業行不常不斷而得果報, 雖念念滅而無所失, 雖無作者而有作業, 雖無受者而有果報, 受者雖滅果不敗亡, 無有慮知和合而有。 一切眾生雖與十二因緣共行 而不見知, 不見知故無有終始, 十住菩薩惟見其終不見其始, 諸佛世尊見始見終。 以是義故,諸佛了了得見佛性。 |
선남자야! 인(因)이되 과(果)가 아님은 불성(佛性)과 같고, 과(果)이되 인(因)이 아님은 대열반(大涅槃)과 같거니와, 인(因)이자 과(果)인 것은 12인연에서 생긴 법과 같으니라. 인(因)도 과(果)도 아닌 것을 불성(佛性)이라 하거니와, 인도 과도 아니므로 항상하여 변함이 없으니, 이런 뜻에서 내가 경(經)에서 이르기를, '12인연은 그 이치가 몹시 깊어서 알지도 보지도 못하고, 사유할 수 도 없어서 마침내 이것이 제불보살의 경계요, 성문연각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고 한 것이니라. 어떤 의미에서 매우 깊고 깊다고 하겠는가? 중생의 업행(業行)은 항상하지도 단멸하지도 않지만 과보를 얻고, 비록 순간순간 멸하지만 사라지지 아니하며, 짓는 자가 없어도 짓는 업은 있고, 받을 자가 없어도 과보는 있으며, 받는 자는 소멸해도 과보는 패망하지 않고, 생각으로 알 수는 없더라도 있는 것이니라. 일체중생은 12인연과 더불어 함께 행하면서도 보지도 알지도 못하고, 견지(見知)하지 못하기에 끝과 시작이 없으며, 십주보살은 오직 그 끝만 보고 시작은 보지 못하거니와, 제불세존은 시작과 끝을 보니, 이런 뜻에서 제불은 불성을 요료히 본다는 것이니라. |
"善男子!一切眾生不能見於十二因緣, 是故輪轉。 善男子!如蠶作繭,自生自死。 一切眾生亦復如是,不見佛性故, 自造結業,流轉生死, 猶如拍毬。 善男子!是故我於諸經中說: 『若有人見十二緣者,即是見法。 見法者,即是見佛, 佛者即是佛性。何以故? 一切諸佛以此為性。』" |
선남자야! 일체중생은 12인연을 보지 못하니, 그 때문에 윤전(輪轉)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마치 누에가 고치를 만들어 스스로 나고 스스로 죽듯이 일체중생도 그와 같아서 불성을 보지 못하므로 스스로 짓고 업을 맺어서 생사를 흘러 구르는 것이 마치 때린 공과 같은지라, 선남자야! 그래서 내가 여러 경전에서 말하기를, 『만일 사람이 12인연을 보면 곧 법을 본 것이요, 법을 보면 곧 부처를 본 것이며, 부처란 곧 불성인데, 왜냐하면 일체제불이 이로써 성품을 삼기 때문이다.』고 한 것이니라. |
「善男子!觀十二緣智,凡有四種: 一者下,二者中,三者上, 四者上上。 下智觀者不見佛性, 以不見故得聲聞道。 中智觀者不見佛性, 以不見故得緣覺道。 上智觀者見不了了, 不了了故住十住地。 上上智觀者見了了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道。 以是義故,十二因緣名為佛性。 佛性者即第一義空, 第一義空名為中道, 中道者即名為佛,佛者名為涅槃。」 |
「선남자야! 12인연을 관조하는 지혜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하(下), 둘째는 중(中), 셋째는 상(上), 넷째는 상상(上上)이니라. 하(下)지혜로 보면 불성을 보지 못하니, 보지 못하는 까닭에 성문의 도[聲聞道]를 얻고, 중(中)지혜로 보면 불성을 보지 못하니, 보지 못함으로써 연각의 도[緣覺道]를 얻고, 상(上)지혜로 보면 요료히 보지 못하니, 요료하지 못하므로 십주(十住)지위에 머물며, 상상(上上)지혜로 보면 요료히 보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도를 얻는지라 이런 뜻에서 12인연을 불성(佛性)이라 하거니와, 불성이란 곧 제일의공(第一義空)이요, 제일의공을 중도(中道)라 하며, 중도는 곧 부처이고, 부처는 곧 열반이니라.」 |
爾時師子吼菩薩摩訶薩白佛言: 「世尊!若佛與佛性無差別者, 一切眾生何用修道?」 |
이때 사자후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부처와 불성이 차별하지 않다면 일체중생은 도를 닦아서 어디에 쓰겠나이까?」 |
佛言:「善男子! 如汝所問,是義不然。 佛與佛性雖無差別, 然諸眾生悉未具足。 善男子!譬如有人惡心害母, 害已生悔,三業雖善, 是人故名地獄人也。 何以故?是人定當墮地獄故。 是人雖無地獄陰界諸入, 猶故得名為地獄人。 善男子!是故我於諸經中說: 『若見有人修行善者,名見天人。 修行惡者,名見地獄。 何以故?定受報故。』 善男子!一切眾生 定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 是故我說一切眾生悉有佛性; 一切眾生真實未有三十二相、八十種好, 以是義故,我於此經而說是偈: |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네가 물은 바와 같이 이 이치는 그렇지 않다. 부처와 불성이 비록 차별하지 않다지만 그러나 중생들은 다 구족하지 못했느니라. 선남자야! 마치 사람이 악한 마음으로 어미를 죽이면, 죽인 뒤에 뉘우치고 삼업(三業)이 비록 선(善)하더라도 이 사람은 그 때문에 지옥 갈 사람이라 하는데, 어째서인가? 이 사람은 정히 지옥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며, 이 사람이 비록 지옥 갈 음계입(陰界入)이 없더라도 오히려 그 때문에 지옥 갈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그러므로 내가 제경(諸經)에서 말하기를, 『만약 선을 수행하는 자를 보면 천인(天人)을 보았다 할 것이요, 악을 수행하는 자를 보면 지옥을 보았다 할 것이니, 어째서인가? 받드시 과보를 받기 때문이다.』고 한 것이니라. 선남자야! 일체중생은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기에 그래서 내가 일체중생은 다 불성이 있다고 말한 것이며, 일체중생은 진실로 32상과 80종호가 아직 있지 않기에 이런 뜻에서 내가 이 경에서 이 게(偈)를 설하노라. |
「『本有今無, 本無今有。 三世有法, 無有是處。』 |
「『본래 있던 것이 지금에 없고, 본래 없던 것이 지금에 있으니, 삼세(三世)에 법(法)이 있다는 것은 옳지 못하느니라.』 |
「善男子!有者凡有三種: 一未來有,二現在有, 三過去有。 一切眾生未來之世, 當有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名佛性。 一切眾生現在悉有煩惱諸結, 是故現在無有三十二相、八十種好。 一切眾生過去之世有斷煩惱, 是故現在得見佛性。 以是義故,我常宣說一切眾生悉有佛性, 乃至一闡提等亦有佛性。 一闡提等無有善法,佛性亦善, 以未來有故,一闡提等悉有佛性。 何以故?一闡提等 定當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 |
「선남자야! 유(有)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미래유(未來有), 둘은 현재유(現在有), 셋은 과거유(過去有)니라. 일체중생은 미래의 세상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으리니, 이것을 불성이라 하고, 일체중생은 현재 다 번뇌의 결박(結縛)이 있으니, 그 때문에 현재에 32상과 80종호가 없는 것이며, 일체중생이 과거 세상에 번뇌 끊는 일이 있으면 그 때문에 현재에 불성을 보게 되는 것이라 이런 의미에서 내가 늘 말하기를 일체중생은 다 불성이 있고, 일천제 따위까지도 불성이 있다고 한 것이니라. 일천제 등은 선법(善法)이 없지만 불성은 선(善)하여 미래에 있을 것이므로 일천제 등도 다 불성이 있다는 것이니, 어째서인가? 일천제 따위도 정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니라. |
善男子!譬如有人家有乳酪, 有人問言:『汝有蘇耶?』 答言:『我有酪,實非蘇, 以巧方便定當得故, 故言有蘇。』 眾生亦爾,悉皆有心,凡有心者, 定當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以是義故,我常宣說一切眾生悉有佛性。 |
선남자야! 마치 어떤 사람의 집에 유락(乳酪)이 있는데, 누가 『당신에게 소(蘇)가 있소?』라고 물으면, 『내게는 낙(酪)이 있으니, 실로 소(蘇)는 아니지만 정교한 방편으로 반드시 얻어질 것이라 그래서 소(蘇)가 있다고 말합니다.』고 하듯이, 중생도 그러하여 모두에게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게 될 것이라 이런 뜻에서 내가 늘 일체중생은 다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라. |
「善男子!畢竟有二種: 一者莊嚴畢竟,二者究竟畢竟。 一者世間畢竟, 二者出世畢竟。 莊嚴畢竟者,六波羅蜜。 究竟畢竟者,一切眾生所得一乘, 一乘者名為佛性, 以是義故,我說一切眾生悉有佛性, 一切眾生悉有一乘, 以無明覆故不能得見。 善男子!如欝單越、三十三天, 果報覆故,此間眾生不能得見。 佛性亦爾,諸結覆故,眾生不見。 復次善男子!佛性者即首楞嚴三昧, 性如醍醐,即是一切諸佛之母。 以首楞嚴三昧力故, 而令諸佛常樂我淨。 一切眾生悉有首楞嚴三昧, 以不修行故不得見, 是故不能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
「선남자야! 필경(畢竟*)에는 두 가지가 있어서 첫째는 장엄필경(莊嚴畢竟), 둘째는 구경필경(究竟畢竟)인데, 장엄필경은 세간필경(世間畢竟)이고, 구경필경은 출세간필경(出世畢竟)이니라. 장엄필경이란 육바라밀(六波羅蜜)이고, 구경필경이란 일체중생이 얻는 일승(一乘)이며, 일승을 불성(佛性)이라 하니, 이런 뜻에서 내가 말하기를, 일체중생은 다 불성이 있고, 일체중생은 다 일승이 있건만 무명(無明)에 가려서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울단월(欝單越)이나 삽십삼천(三十三天)을 과보에 가려서 이 세간의 중생이 보지 못하듯이, 불성도 그러하여 결사(結使)에 가려서 중생이 보지 못하느니라. 또 선남자야! 불성이란 곧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이고, 성품이 제호(醍醐) 같으니, 곧 이것이 일체제불의 어미인 것이요, 수능업삼매의 힘으로써 제불(諸佛)이 상락아정(常樂我淨)하는 것이건만 일체중생은 다 수능엄삼매를 지니고 있으되 수행하지 않는 까닭에 보지 못하니, 그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니라. |
*二種畢竟; ①莊嚴畢竟; 畢竟은 「決定」의 뜻으로, 일체중생은 다 一乘의 성품이 있으나
육바라밀을 닦음으로써 莊嚴되고, 닦지 않으면 얻지 못하니, 육바라밀의 결정이 장엄의 도구가 된다는 것.
②究竟畢竟; 究竟은 「至極」의 뜻으로, 일체중생이 一乘의 성품을 얻은 즉 지극한 지위에
결정히 이를 수 있다는 것. [佛光大辭典]
善男子!首楞嚴三昧者,有五種名: 一者首楞嚴三昧,二者般若波羅蜜, 三者金剛三昧,四者師子吼三昧, 五者佛性; 隨其所作,處處得名。 善男子!如一三昧得種種名, 如禪名四禪,根名定根, 力名定力,覺名定覺, 正名正定。八大人覺名為定覺, 首楞嚴定亦復如是。 |
선남자야! 수능엄삼매는 다섯 가지 이름이 있어서 첫째는 수능엄(首楞嚴)삼매, 둘째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셋째는 금강(金剛)삼매, 넷째는 사자후(師子吼)삼매, 다섯째는 불성(佛性)이거니와, 그 짓는 바를 따라 곳곳에서 이름을 얻느니라. 선남자야! 마치 하나의 삼매가 여러가지 이름을 얻고, 선(禪)은 4선(四禪)이라 하며, 근(根)은 정근(定根), 역(力)은 정력(定力), 각(覺)은 정각(正覺), 정(正)은 정정(正定), 8대인각(大人覺)은 정각(定覺)이라 하듯이 수능엄삼매도 그와 같으니라. |
「善男子!一切眾生具足三定, 謂上、中、下。 上者謂佛性也, 以是故言,一切眾生悉有佛性。 中者一切眾生具足初禪, 有因緣時則能修習, 若無因緣則不能修。 因緣二種:一謂火災, 二謂破欲界結, 以是故言一切眾生悉具中定。 下定者,十大地中心數定也, 以是故言,一切眾生悉具下定。 一切眾生悉有佛性, 煩惱覆故不能得見, 十住菩薩雖見一乘, 不知如來是常住法, 以是故言十地菩薩雖見佛性而不明了。 善男子!首楞者名一切畢竟, 嚴者名堅, 一切畢竟而得堅固名首楞嚴, 以是故言首楞嚴定名為佛性。 |
「선남자야! 일체중생은 세 가지 정[三定]을 갖추는데, 소위 상(上), 중(中), 하(下)이니라. 상(上)은 불성(佛性)을 말하니, 이 때문에 일체중생은 다 불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요, 중(中)은 일체중생은 초선(初禪)을 갖추되 인연이 있을 때는 곧 수습(修習)할 수 있지만 인연이 없으면 닦지 못하느니라. 인연에는 두 가지가 있어서 하나는 화재(火災)를 말하고, 둘은 욕계(欲界)의 번뇌를 깨뜨리는 것을 이르니, 이 때문에 일체중생은 다 중(中)의 정(定)을 갖춘다고 하며, 하(下)의 정(定)이란 십대지(十大地*) 중 심수(心數*)의 정(定)이니, 이 때문에 일체중생은 다 하(下)의 정(定)을 갖춘다고 하느니라. 일체중생은 다 불성이 있지만 번뇌에 가려 보지 못하고, 십주(十住)보살은 비록 일승(一乘)을 본다지만 여래가 상주하는 법[常住法]임을 알지 못하니, 그래서 십지보살은 불성을 보되 명료치 못하다고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수능(首楞)은 일체필경(一切畢竟)이라 하고, 엄(嚴)은 견(堅)이라 , 일체가 필경하여 견고해지는 것을 수능엄이라 하니, 이 때문에 수능엄정(首楞嚴定)을 불성이라 하는 것이니라. |
*十大地法; 受, 想, 思, 觸, 作意, 欲, 勝解, 念, 三摩地, 慧.
*心數; 新譯은 心所. 마음 법[心法]은 그 수가 많은지라 심수(心數)라 한다.
「善男子!我於一時住尼連禪河, 告阿難言:『我今欲洗, 汝可取衣及以澡豆。』 我既入水, 一切飛鳥水陸之屬悉來觀我, 爾時復有五百梵志來在河邊, 因到我所各相謂言: 『云何而得金剛之身? 若使瞿曇不說斷見, 我當從其啟受齋法。』 |
「선남자야! 나는 한 때 니련선하(尼連禪河*)에서 아난에게 『내가 목욕을 하려고 하니 옷과 조두(澡豆*)를 가져오너라.』고 하여, 내가 물에 들어가자 모든 새들과 수륙(水陸)의 무리들이 다 와서 나를 보았는데, 그때 또 강변에 와 있던 오백 범지(梵志)들이 내게로 와서 저마다 『어떻게 금강(金剛)의 몸을 얻었을까? 설사 구담(瞿曇)이 단견(斷見)을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로부터 재법(齋法*)을 배워야겠다.』고 하였느니라. |
*尼連禪河(Nairañjanā); 갠지스강의 지류(支流).
*澡豆; 고대 인도에서 신체나 의복의 때를 씻을 때 쓰인 두분[豆粉;콩가루,전분].
*齋法; ①威儀를 嚴整히 하는 법. ②정오가 지나서는 먹지 않는 법.
善男子!我於爾時以他心智, 知是梵志心之所念,告梵志言: 『云何謂我說於斷見?』 彼梵志言:『瞿曇先於處處經中 說諸眾生悉無有我。 既言無我,云何而言非斷見耶? 若無我者,持戒者誰? 破戒者誰?』 佛言:『我亦不說一切眾生悉無有我, 我常宣說一切眾生悉有佛性, 佛性者豈非我耶? 以是義故,我不說斷見。 一切眾生不見佛性故, 無常、無我、無樂、無淨, 如是則名說斷見也。』 時諸梵志聞說佛性即是我故, 即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尋時出家修菩提道。 一切飛鳥水陸之屬亦發無上菩提之心, 既發心已,尋得捨身。 善男子!是佛性者實非我也, 為眾生故說名為我。 |
선남자야! 나는 그때 타심지(他心智;他心通)으로 범지들의 생각을 읽고 범지들에게 말하기를, 『어째서 내가 단견(斷見)을 말한다고 하는가?』 하니, 저 범지가 『구담(瞿曇)께서 전에 여러 경 안에서 모든 중생은 나[我]가 없다고 하셨는데, 무아(無我)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단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으며, 만일 무아(無我)라면 지계(持戒)하는 자는 누구고, 파계(破戒)하는 자는 누구겠습니까?』 하는지라, 내가 『나 또한 일체중생이 다 무아(無我)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늘 일체중생은 다 불성이 있다고 말하는데, 불성이 어찌 나[我]가 아니겠는가? 이런 뜻에서 나는 단견(斷見)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체중생은 불성을 보지 못하므로 무상(無常), 무아(無我), 무락(無樂), 무정(無淨)하다는 이와 같은 것을 단견을 말한다고 하는 것이다.』고 하자, 이에 범지들이 불성이 곧 나[我]라는 말을 듣고서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하고 때를 찾아 출가하여 보리도(菩提道)를 닦았으며, 모든 새들과 수륙의 무리들도 무상보리심(無上菩提心)을 발했고, 기왕 발심한 다음에는 사신(捨身;몸 버리기) 얻기에 나섰거니와, 선남자야! 이 불성이란 실로 나[我]가 아니지만 중생을 위해서 나[我]라고 말하는 것이니라. |
「善男子!如來有因緣故, 說無我為我,真實無我, 雖作是說,無有虛妄。 善男子!有因緣故, 說我為無我,而實有我。 為世界故,雖說無我,而無虛妄。 佛性無我,如來說我, 以其常故。 如來是我,而說無我, 得自在故。」 |
「선남자야! 여래는 어떤 인연으로는 진실은 무아(無我)인데 무아를 유아(有我)라 설하지만 비록 이렇게 말을 해도 허망하지 않고, 선남자야! 또 어떤 인연으로는 실로 유아(有我)인데 유아를 무아(無我)라 설하지만 세계를 위한 것이라서 비록 무아(無我)라고 해도 허망하지 않다. 불성은 무아(無我)이건만 여래가 유아(有我)라고 설하는 것은 그것이 항상하기 때문이며, 여래가 아(我)이건만 무아(無我)라고 설하는 것은 자재함을 얻었기 때문이니라.」 |
爾時師子吼菩薩摩訶薩白佛言: 「世尊!若一切眾生悉有佛性, 如金剛力士者, 以何義故,一切眾生不能得見?」 |
이때 사자후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일체중생 모두가 불성이 있어서 금강력사(金剛力士)와 같다면 어째서 일체중생이 보지 못하는 것이옵니까?」 |
佛言:「善男子! 譬如色法,雖有青黃赤白之異、 長短質像,盲者不見。 雖復不見,亦不得言無青黃赤白、 長短質像。 何以故?盲雖不見,有目見故。 佛性亦爾,一切眾生雖不能見, 十住菩薩見少分故,如來全見。 十住菩薩所見佛性如夜見色, 如來所見如晝見色。 善男子!譬如瞎者見色不了, 有善良醫而為治目, 以藥力故得了了見。 十住菩薩亦復如是, 雖見佛性不能明了, 以首楞嚴三昧力故,能得明了。 |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예컨대 색법(色法)이 비록 청황적백(青黃赤白)의 차이와 장단(長短)과 재질[質], 형상[像]이 있지만 맹인은 보지 못하고, 또 비록 보지 못하지만 청황적백과 장단(長短), 질(質), 상(像)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눈이 멀어 보지는 못하되 목견(目見)이 있기 때문이듯이, 불성도 그러하여 일체중생은 볼 수 없지만 십주보살은 적은 분량을 보고, 여래는 온전히 보니, 십주보살이 보는 불성은 밤에 색(色)을 보는 것과 같고, 여래가 보는 것은 낮에 보는 색과 같으니라. 선남자야! 눈이 멀면 색을 보는 것이 명료치 않고, 훌륭한 의원이 눈을 치료하면 약의 효력으로 요료히 보게 되듯이, 십주보살도 그와 같아서 불성을 봄이 명료치 못하였더라도 수능엄삼매의 힘으로 명료해질 수 있느니라. |
善男子!若有人見一切諸法 無常、無我、無樂、無淨, 見非一切法無常、無我、無樂、無淨, 如是之人不見佛性。 一切者名為生死, 非一切者名為三寶。 聲聞緣覺見一切法 無常、無我、無樂、無淨, 非一切法亦見無常、無我、無樂、無淨, 以是義故,不見佛性。 十住菩薩見一切法 無常、無我、無樂、無淨, 非一切法分見常樂我淨, 以是義故,十分之中得見一分。 諸佛世尊見一切法 無常、無我、無樂、無淨, 非一切法見常樂我淨, 以是義故,見於佛性, 如觀掌中阿摩勒果。 以是義故,首楞嚴定名為畢竟。 善男子!譬如初月, 雖不可見,不得言無。 佛性亦爾,一切凡夫雖不得見, 亦不得言無佛性也。 |
선남자야! 만약 어떤 사람이 일체의 모든 법을 무상(無常), 무아(無我), 무락(無樂), 무정(無淨)하다고 보거나, 일체가 아닌 법을 무상, 무아, 무락, 무정하다고 본다면 이런 사람은 불성을 보지 못하나니, 일체(一切)란 생사(生死)를 이르는 것이지 삼보(三寶)를 이르는 것이 아니니라. 성문연각은 일체법이 무상, 무아, 무락, 무정하다고 보고, 일체 아닌 법도 무상, 무아, 무락, 무정하다고 보니, 이런 이치로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며, 십주보살은 일체법이 무상, 무아, 무락, 무정하다고 보고, 일체 아닌 법 부분은 상락아정으로 보니, 이런 이치로 십분 중 일분을 얻거니와, 제불세존은 일체법이 무상, 무아, 무랃, 무정하다고 보고, 일체 아닌 법은 상락아정으로 보는지라 이런 이치로 불성을 봄이 마치 손바닥 안의 아마륵과(阿摩勒果)과 같기에 이런 이치에서 수능엄정(首楞嚴定)을 필경이라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마치 초승달은 보이지 않지만 없다고 말할 수 없듯이 불성도 그러하여 일체 범부는 보지 못하지만 불성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느니라. |
「善男子!佛性者,所謂十力、 四無所畏、大悲、三念處。 一切眾生悉有三種破煩惱故, 然後得見一闡提等,破一闡提, 然後能得十力、四無所畏、 大悲、三念處。以是義故, 我常宣說一切眾生悉有佛性。 |
「선남자야! 불성이란 소위 십력(十力)과 4무소외(四無所畏), 대비(大悲), 3념처(三念處)를 말한다. 일체중생은 다 지니고 있는 세 가지 번뇌를 깨뜨리므로써 그런 뒤에 보게 되고, 일천제(一闡提)들은 일천제를 깨뜨린 연후에 십력과 4무소외, 대비, 3념처를 얻는 것이니, 이런 뜻에서 내가 늘 일체중생은 다 불성이 있다 하는 것이니라. |
「善男子!十二因緣, 一切眾生等共有之,亦內亦外。 何等十二? 過去煩惱名為無明, 過去業者則名為行。 現在世中,初始受胎,是名為識。 入胎五分,四根未具, 名為名色。 具足四根,未名觸時, 是名六入。 未別苦樂,是名為觸。 染習一愛,是名為受。 習近五欲,是名為愛。 內外貪求,是名為取。 為內外事,起身口意業, 是名為有。 現在世識,名未來生。 現在名色、六入、觸、受, 名未來世老病死也。 是名十二因緣。 |
「선남자야! 십이인연은 일체중생이 다같이 안팎으로 지니고 있나니, 어떤 것들이 열둘인가? 과거세의 번뇌[過去煩惱]를 무명(無明)이라 하고, 과거세의 업[過去業]을 행(行)이라 하며, 현재세에 처음으로 수태(受胎)된 것을 식(識)이라 하고, 입태(入胎)하여 5분(五分*)과 4근(四根*)을 갖추지 못한 것을 명색(名色)이라 하며, 4근은 구족하였으되 촉(觸)이라 할 수 없는 때 이것을 6입(六入)이라 하고, 아직 고락(苦樂)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촉(觸)이라 하며, 하나에 애착(愛着)해가는 것을 수(受)라 하고, 5욕(五欲)에 가까워진 것을 애(愛)라 하며, 안팎으로 탐내 구하는 것을 취(取)라 하고, 안팎의 일을 위해 신구의(身口意) 업을 일으키는 이것을 유(有)라 하며, 현재세의 식(識)을 미래세의 생(生)이라 하고, 현재의 명색(名色)과 육입(六入), 촉(觸), 수(受)를 미래세의 노병사(老病死)라 하나니, 이것을 12인연(十二因緣)이라 하느니라. |
無明과 行이라는 過去世의 인(因)으로 識, 名色, 六入, 觸, 受라는 現在世의 과(果)를 받아
愛, 取, 有라는 現在世의 인(因)을 더하므로써 다시 未來世에 生, 老死라는 과(果)를 받게 된다.
*五分; 戒, 定, 慧, 解脫, 解脫知見.
*四根; 眼, 耳, 鼻, 舌.
善男子!一切眾生雖有如是十二因緣, 或有未具。 如歌羅邏時死,則無十二。 從生乃至老死,得具十二。 色界眾生無三種受、三種觸、 三種愛,無有老病, 亦得名為具足十二。 無色眾生無色乃至無有老病, 亦得名為具足十二。 以定得故, 故名眾生平等具有十二因緣。 善男子!佛性亦爾,一切眾生 定當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 是故我說一切眾生悉有佛性。 |
선남자야! 일체중생이 비록 12인연을 가지고 있으나 혹 다 갖추지 못하기도 한다. 가라라(歌羅邏) 때에 죽으면 곧 열두 가지가 안되고, 생으로부터 노사에 이르러야 열둘을 구족하는 것이다. 색계의 중생은 세 가지 수[三種受*]와 세 가지 촉[三種觸*], 세 가지 애[三種愛*]가 없고, 노병(老病)이 없는데도 12 가지가 구족하다고 하며, 무색계의 중생은 색(色)도 없고 노사(老死)도 없는데 역시 12 가지가 구족하다고 하거니와, 반드시 얻을 것이기 때문이니, 그래서 중생은 다같이 12인연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불성도 그러하여 일체중생은 정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게 될 것이기에 그래서 내가 일체중생은 다 불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
*三種受; 苦受, 樂受, 不苦不樂受.
*三種觸; 不動觸(識無邊處心), 無所有觸(無所有處心), 無相觸(非想非非想處心).
*三種愛; ①境界愛~臨終時 가족이나 재물 등에 애착하는 마음.
②自體愛~臨終時 자기 몸에 애착하는 마음.
③當生愛~臨終時 다음 생에 태어날 곳에 애착하는 마음.
「善男子!雪山有草名為忍辱, 牛若食者則出醍醐。 更有異草,牛若食者,則無醍醐, 雖無醍醐,不可說言雪山之中無忍辱草。 佛性亦爾,雪山者名為如來, 忍辱草者名大涅槃,異草者十二部經, 眾生若能聽受諮啟大般涅槃, 則見佛性。 十二部中雖不聞有, 不可說言無佛性也。 |
「선남자야! 설산(雪山)에는 인욕(忍辱)이라 하는 풀이 있어서 소가 먹으면 곧 제호가 나오고 다른 풀은 소가 먹어도 제호가 없으니, 제호가 없다 해서 설산에 인욕초가 없다고 말할 수 없듯이, 불성도 그러하여 설산이란 여래를 말하고, 인욕초는 대열반을 말하며, 다른 풀은 12부경을 말하거니와, 중생이 만약 대반열반을 여쭈어 들을 수 있다면 곧 불성을 볼 것이니, 12부경 가운데서 있다고 하지 않았다 해서 불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느니라. |
善男子!佛性者,亦色非色、 非色非非色, 亦相非相、 非相非非相, 亦一非一、 非一非非一, 非常非斷、 非非常非非斷, 亦有亦無、 非有非無, 亦盡非盡、 非盡非非盡, 亦因亦果、非因非果, 亦義非義、 非義非非義, 亦字非字、 非字非非字。 |
선남자야! 불성이란 색(色)이기도 하고 비색(非色)이기도 하며, 색이 아니기도 하고 비색이 아니기도 하며, 상(相)이기도 상이 아니기도 하고, 상이 아니기도 비상(非相)이 아니기도 하며, 하나이기도 하나가 아니기도 하고, 하나가 아니기도 하나 아님[非一]도 아니기도 하며, 항상(常)이 아니기도 단멸(斷)이 아니기도 하고, 항상치 못함이 아니기도 단멸치 않음이 아니기도 하며, 유(有)이기도 무(無)이기도 하고, 유가 아니기도 무가 아니기도 하며, 진(盡)이기도 진 아니기도 하고, 진이 아니기도 비진(非盡)이 아니기도 하며, 인(因)이도 과(果)이기도 하고, 인이 아니기도 과가 아니기도 하며, 의(義)이기도 의가 아니기도 하고, 의가 아니기도 비의(非義)가 아니기도 하며, 자(字)이기도 자가 아니기도 하고, 자가 아니기도 비자(非字)가 아니기도 하느니라. |
云何為色?金剛身故。 云何非色? 十八不共,非色法故。 云何非色非非色? 色非色無定相故。 云何為相?三十二相故。 云何非相? 一切眾生相不現故。 云何非相非非相? 相非相不決定故。 云何為一? 一切眾生悉一乘故。 云何非一? 說三乘故。 云何非一非非一? 無數法故。 云何非常? 從緣見故。 云何非斷? 離斷見故。 云何非非常非非斷? 無終始故。 |
어째서 색(色)이라 하는가? 금강신(金剛身)이기 때문이요, 어째서 비색(非色)이라 하는가? 18불공법(十八不共法)은 색법(色法)이 아니기 때문이며, 어째서 비색비비색(非色非非色)이라 하는가? 색(色)과 비색(非色)은 정한 모양이 없기 때문이며, 어째서 상(相)이라 하는가? 32상이기 때문이며, 어째서 비상(非相)이라 하는가? 일체중생은 상(相)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며, 어째서 비상비비상(非相非非相)이라 하는가? 상(相)과 비상(非相)이 결정치 못하기 때문이며, 어째서 하나[一]라 하는가? 일체중생이 다 일승(一乘)이기 때문이며, 어째서 하나가 아니다[非一]고 하는가? 3승(三乘)을 설하기 때문이며, 어째서 하나도 하나 아님도 아니다고 하는가? 법이 무수하기 때문이며, 어째서 항상치 못하다 하는가? 인연이라는 소견을 쫓기 때문이며, 어째서 단멸이 아니다고 하는가? 단견(斷見)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어째서 비상(非常)도 비단(非斷)도 아니다고 하는가? 시작도 끝도 없기 때문이며, |
云何為有?一切眾生悉皆有故。 云何為無?從善方便而得見故。 云何非有非無? 虛空性故。 云何名盡?得首楞嚴三昧故。 云何非盡?以其常故。 云何非盡非非盡? 一切盡相斷故。 |
어째서 유(有)라 하는가? 일체중생은 다 유(有)이기 때문이며, 어째서 무(無)라 하는가? 선방편을 쫓아 보아지기 때문이며, 어째서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 하는가? 허공의 성품이기 때문이며, 어째서 다했다[盡]고 하는가? 수능엄삼매를 얻었기 때문이며, 어째서 다하지 못했다[非盡]고 하는가? 그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며, 어째서 진(盡)도 아니고 비진(非盡)도 아니다 하는가? 일체가 다한 모양이 끊겼기 때문이며, |
云何為因?以了因故。 云何為果?果決定故。 云何非因非果?以其常故。 云何為義? 悉能攝取義無礙故。 云何非義?不可說故。 云何非義非非義? 畢竟空故。 云何為字?有名稱故。 云何非字?名無名故。 云何非字非非字? 斷一切字故。 云何非苦非樂? 斷一切受故。 云何非我? 未能具得八自在故。 云何非非我?以其常故。 云何非我非非我? 不作不受故。 云何為空?第一義空故。 云何非空?以其常故。 云何非空非非空? 能為善法作種子故。 |
어째서 인(因)이라 하는가? 요인(了因*)이기 때문이며, 어째서 과(果)라 하는가? 결과가 결정적이기 때문이며, 어째서 비인비과(非因非果)라 하는가? 그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며, 어째서 의(義)라 하는가? 모두가 의무애(義無礙*)를 섭취하기 때문이며, 어째서 비의(非義)라 하는가? 말로 할 수 없기 때문이며, 어째서 의(義)도 아니고 비의(非義)도 아니다 하는가? 필경 공하기[畢竟空] 때문이며, 어째서 자(字)라 하는가? 명칭(名稱)이 있기 때문이며, 어째서 비자(非字)라 하는가? 이름 없음을 이르기 때문이며, 어째서 자(字)도 아니고 비자(非字)도 아니다 하는가? 일체의 자(字)가 끊겼기 때문이며, 어째서 고(苦)도 아니고 낙(樂)도 아니다 하는가? 일체의 수(受)가 끊겼기 때문이며, 어째서 나[我]가 아니다 하는가? 아직 8자재(八自在*)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며, 어째서 비아(非我)가 아니다 하는가? 그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며, 어째서 나(我)도 아니고 비아(非我)도 아니다 하는가? 짓지도 받지도 않기 때문이며, 어째서 공(空)이라 하는가? 제일의공(第一義空)이기 때문이며, 어째서 비공(非空)이다 하는가? 그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며, 어째서 공도 아니고 비공(非空)도 아니다 하는가? 선법(善法)을 위한 종자(種子)가 되기 때문이니라. |
*義無礙; 4무애(四無礙;法,義,辭,辯)의 하나.
제법(諸法)의 뜻[義]을 앎에 분명히 통달하여 걸림이 없는 것.
*了因; 28권에 因에는 生因과 了因의 두 가지가 있다 하셨다.
生因은 본래 갖추고 있는 법성(法性)의 이치로서 능히 일체의 선법(善法)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니,
마치 씨앗에서 싹이 돋아나는 것과 같고,
了因은 지혜로 관조하여 법성을 아는 이치로서 생성(生成)을 보조하는 자연(資緣)을 말하니,
마치 등불처럼 사물을 비추어 뚜렷히 보게 하는 것과 같다.
*八自在; 23권의 八大自在我이니,
①能示一身為多身 ②示一塵身滿大千界 ③大身輕舉遠到 ④現無量類常居一土 ⑤諸根互用
⑥得一切法如無法想 ⑦說一偈義經無量劫 ⑧身徧諸處猶如虛空을 말한다.
「善男子!若有人 能思惟解了大涅槃經如是之義, 當知是人則見佛性。 佛性者不可思議,乃是諸佛如來境界, 非諸聲聞緣覺所知。 善男子!佛性者非陰界入、 非本無今有、 非已有還無, 從善因緣眾生得見。 譬如黑鐵,入火則赤, 出冷還黑, 而是黑色,非內非外,因緣故有。 佛性亦爾,一切眾生煩惱火滅, 則得聞見。 善男子!如種滅已,芽則得生, 而是芽性,非內非外, 乃至花果亦復如是,從緣故有。 善男子!是大涅槃微妙經典, 成就具足無量功德。 佛性亦爾, 悉是無量無邊功德之所成就。」 |
「선남자야! 만일 누가 《대열반경》의 이러한 뜻을 사유하고 이해했다면 이 사람인 즉 불성을 본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불성이란 불가사의하여 제불여래의 경계인 것이요, 성문 연각이 알수 있는 바가 아니니라. 선남자야! 불성이란 음계입(陰界入)이 아니요, 본래 없던 것이 지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왕 있었던 것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선한 인연을 쫓아서 중생들이 보아지는 것인지라, 마치 검은 쇠[黑鐵]가 불에 들어가면 붉어지고, 나와서 식으면 다시 검어지거니와, 이 검은 색이 안도 밖도 아닌 인연 때문에 있는 것이듯이, 불성도 그러하여 일체중생이 번뇌의 불이 꺼지면 곧 보아지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씨앗이 멸하면 싹이 곧 생기는데, 이 싹의 성품이 안에도 밖에도 있지 않거니와, 꽃과 열매까지도 그와 같아서 인연을 좇아서 있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이 대열반이라는 미묘한 경전은 무량한 공덕을 구족히 성취하였거니와 불성도 그러하여 다 이것이 무량무변한 공덕이 성취된 것이니라.」 |
爾時師子吼菩薩摩訶薩言: 「世尊!菩薩具足成就幾法, 得見佛性而不明了? 諸佛世尊成就幾法,得了了見?」 |
이때 사자후보살마하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몇 가지 법을 구족히 성취했기에 불성을 분명히 보지 못하고, 제불세존은 몇 가지 법을 성취하셨기에 요료히 보시나이까? 」 |
「善男子!菩薩具足成就十法, 雖見佛性,而不明了。 云何為十? 一者少欲、二者知足、三者寂靜、 四者精進、五者正念、六者正定、 七者正慧、八者解脫、 九者讚歎解脫、 十者以大涅槃教化眾生。」 |
「선남자야! 보살은 열 가지 법을 구족히 성취하였기에 비록 불성을 보되, 분명치는 못하나니, 무엇이 열인가? 첫째는 소욕(少欲)이요, 둘째는 지족(知足), 셋째는 적정(寂靜), 넷째는 정진(精進), 다섯째는 정념(正念), 여섯째는 정정(正定), 일곱째는 정혜(正慧), 여덟째는 해탈(解脫), 아홉째는 해탈을 찬탄함, 열째는 대열반으로 중생을 교화함이니라.」 |
師子吼菩薩言:「世尊! 少欲、知足有何差別?」 |
사자후보살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소욕(少欲)과 지족(知足)은 어떤 차별함이 있나이까?」 |
「善男子!少欲者,不求不取; 知足者,得少之時 心不悔恨。 少欲者,少有所欲; 知足者,但為法事 心不愁惱。 善男子!欲者有三: 一者惡欲,二者大欲,三者欲欲。 惡欲者,若有比丘心生貪欲: 『欲為一切大眾上首, 令一切僧隨逐我後, 令諸四部悉皆供養恭敬讚歎、尊重於我。 令我先為四眾說法, 皆令一切信受我語。 亦令國王、大臣、長者,皆恭敬我, 令我大得衣服飲食、臥具醫藥、 上妙屋宅。』 為生死欲,是名惡欲。 |
「선남자야! 소욕(少欲)이란 구하거나 취하지 않는 것이요, 지족(知足)이란 적게 얻었을 때 마음으로 회한(悔恨)하지 않는 것이며, 소욕이란 욕심내는 바가 적은 것이요, 지족이란 다만 법사(法事*)를 위하고 마음으로 근심걱정하지 않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욕(欲)에는 세 가지가 있어 첫째는 악욕(惡欲), 둘째는 대욕(大欲), 셋째는 욕욕(欲欲)이니라. 나쁜 욕심[惡欲]이란 만일 어떤 비구가 탐욕을 내서 『모든 대중의 상수(上首)가 되기를 위하기에 모든 스님들로 하여금 내 뒤를 따르게 하고, 사부대중들로 하여금 다 나를 공경찬탄하고 존중하게 하고, 나로 하여금 맨 먼저 사중(四眾) 앞에서 설법하게 하고, 모두로 하여금 내 말을 다 신수(信受)하게 하며, 또한 국왕, 대신, 장자들로 하여금 다 나를 공경하게 하고, 나로 하여금 의복이나 음식 와구(臥具), 의약(醫藥)과 상묘한 주택을 많이 얻게 하겠다.』고 한다면, 생사(生死)를 위한 욕심이니, 이를 악욕(惡欲)이라 하며, |
*法事; 佛法의 修行과 宣揚에 관한 모든 일. 佛事라고도 한다.
云何大欲? 若有比丘生於欲心: 『云何當令四部之眾, 悉皆知我得初住地乃至十住?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得阿羅漢果乃至須陀洹果? 我得四禪乃至四無閡智?』 為於利養,是名大欲。 欲欲者,若有比丘, 欲生梵天、魔天、自在天、轉輪聖王, 若剎利、居士、若婆羅門皆得自在。 為利養故,是名欲欲。 若不為是三種惡欲之所害者, 是名少欲。 欲者名為二十五愛, 無有如是二十五愛,是名少欲。 不求未來所欲之事,是名少欲; 得而不著是名知足。 不求恭敬,是名少欲; 得不積聚,是名知足。 |
어떤 것을 대욕(大欲)이라 하는가? 만일 비구가 욕심을 내서 『어떻게 사부대중으로 하여금 내가 초주(初住)나 십주(十住)까지를 얻었음을 알게 할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음을 알게 할까? 아라한과나 수다원과를 얻었음을 알게 할까? 4선(四禪)이나 4무애지(四無閡智)를 얻었음을 알게 할까?』 하고 이양(利養)을 위한다면 이것을 대욕이라 하며, 욕욕(欲欲)이란 만일 비구가 범천이나 마천(魔天), 자재천, 전륜성왕, 찰리, 거사, 바라문이거나 자재하게 나고싶어 한다면 이양을 위하는 것이므로 이를 욕욕이라 한다. 만약 이 세 가지 나쁜 욕심에 침해당하지 않는다면 이를 소욕(少欲)이라 하느니라. 욕(欲)은 25가지의 애(愛)를 이르거니와, 이러한 25애가 없는 것을 소욕(少欲)이라 한다. 미래에 하고자 하는 일을 구하지 않는 것을 소욕이라 하고, 얻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지족(知足)이라 하며, 공경해주기를 바라지 않는 것을 소욕이라 하고, 얻어서 쌓아 모으지 않는 것을 지족이라 하느니라. |
「善男子!亦有少欲不名知足, 有知足不名少欲, 有亦少欲亦知足, 有不知足不少欲。 少欲者,謂須陀洹。 知足者,謂辟支佛。 少欲知足者,謂阿羅漢。 不少欲不知足者,所謂菩薩。 善男子!少欲知足復有二種: 一者善,二者不善。 不善者所謂凡夫,善者聖人菩薩。 一切聖人雖得道果, 不自稱說,不稱說故, 心不惱恨,是名知足。 善男子!菩薩摩訶薩 修習大乘大涅槃經欲見佛性, 是故修習少欲知足。 |
「선남자야! 소욕(少欲)이지만 지족(知足)이라 하지 못할 것도 있고, 지족이지만 소욕이라 하지 못할 것도 있으며, 소욕이기도 지족이기도 한 것도 있고, 지족이지도 소욕이지도 못한 것도 있나니, 소욕이란 수다원(須陀洹)을 말하고, 지족이란 벽지불(辟支佛)을 말하며, 소욕이고 지족인 것은 아라한(阿羅漢)을 말하고, 소욕도 지족도 아닌 것은 소위 보살이니라. 선남자야! 소욕지족에는 또 두 가지가 있어서 첫째는 선(善)이요, 둘째는 불선(不善)인데, 불선이란 소위 범부요, 선이란 성인보살(聖人菩薩)이니라. 일체성인은 도과(道果)를 얻어도 자칭해서 말하지 않고 스스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아쉽지도 않으니, 이를 지족이라 한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대승 대열반경을 닦아 불성을 보고자 하기에 그 때문에 소욕지족(少欲知足)을 수습하는 것이니라. |
「云何寂靜? 寂靜有二: 一者心靜,二者身靜。 身寂靜者,終不造作身三種惡; 心寂靜者,亦不造作意三種惡; 是則名為身心寂靜。 身寂靜者,終不親近四眾, 不預四眾所有事業; 心寂靜者,終不修習貪欲、瞋恚、愚癡; 是則名為身心寂靜。 或有比丘身雖寂靜,心不寂靜。 有心寂靜,身不寂靜。 有身心寂靜。 又有身心俱不寂靜。 身寂靜心不寂靜者, 或有比丘坐禪靜處,遠離四眾, 心常積集貪欲、瞋癡, 是名身寂靜心不寂靜。 |
「어떤 것을 적정(寂靜)이라 하는가? 적정에는 두 가지가 있어서 첫째는 마음의 적정[心靜], 둘째는 몸의 적정[身靜]이거니와, 몸이 적정하면 결코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악을 짓지 않고, 마음이 적정하면 뜻으로 짓는 세 가지 악을 짓지 아니하니, 이것을 몸과 마음의 적정이라고 하느니라. 몸의 적정이란 결코 사부대중을 가까이 하지 않고, 사부대중들 하는 사업에 참예(參預)하지 않는 것이며, 마음의 적정이란 결코 탐욕과 진에, 우치를 수습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몸과 마음의 적정이라고 하느니라. 어떤 비구는 몸은 비록 적정하되 마음이 적정치 못하고, 어떤 비구는 마음은 적정하되 몸이 적정치 못하며, 어떤 비구는 몸과 마음이 적정하기도 하고, 또 어떤 비구는 몸과 마음이 다 적정치 못하기도 하거니와, 몸은 적정하되 마음이 적정치 못하다는 것은 혹 어떤 비구가 고요한 곳에 좌선하면서 사부대중과 멀리하되 마음으로 항상 탐욕과 진에, 우치를 쌓는다면 이를 일러 몸은 적정하되 마음이 적정치 못하다고 하느니라. |
心寂靜身不寂靜者, 或有比丘親近四眾、國王大臣, 斷貪恚癡, 是名心寂靜身不寂靜。 身心寂靜者,謂佛菩薩。 身心不寂靜者,謂諸凡夫。 何以故?凡夫之人,身心雖靜, 不能深觀無常無樂、無我無淨, 以是義故, 凡夫之人不能寂靜身口意業。 一闡提輩、犯四重禁、作五逆罪, 如是之人,亦不得名身心寂靜。 |
마음은 적정하되 몸이 적정치 못하다는 것은 혹 어떤 비구가 사부대중과 국왕, 대신을 가까이 하되 탐에치(貪恚癡)가 끊어졌다면 이를 마음은 적정하되 몸이 적정치 못하다고 하며, 몸과 마음이 적정하다는 것은 불보살을 말하고, 몸과 마음이 적정치 못하다는 것은 범부들을 말하는데, 왜냐하면, 범부인 사람은 몸과 마음이 적정하더라도 무상무락(無常無樂)과 무아무정(無我無淨)을 깊이 관찰하지 못하는지라 이런 뜻에서 범부는 신구의(身口意) 업을 적정히 하지 못한다는 것이며, 일천제 무리나 사중금(四重禁)을 범하거나 오역죄를 지은 이런 사람들도 몸과 마음이 적정하다고 할 수 없느니라. |
「云何精進? 若有比丘欲令身口意業清淨, 遠離一切諸不善業, 修習一切諸善業者,是名精進。 是勤精進者,繫念六處, 所謂佛、法、僧、戒、施、天, 是名正念。 具正念者,所得三昧,是名正定。 具正定者,觀見諸法猶如虛空, 是名正慧。 具正慧者,遠離一切煩惱諸結, 是名解脫。 得解脫者,為諸眾生稱美解脫, 言是解脫常恒不變,是名讚歎解脫。 解脫即是無上大般涅槃, 涅槃者即是煩惱諸結火滅。 |
「어떤 것을 정진(精進)이라 하는가? 만일 어떤 비구가 신구의 업을 청정히 하고자 일체의 모든 불선업(不善業)을 멀리하고 일체의 선업(善業)을 닦아 익힌다면 이를 정진(精進)이라 하느니라. 이 힘써 정진하는 자는 여섯 곳[六處], 소위 불(佛), 법, 승, 계(戒), 시(施), 천(天)에 마음을 모으는데, 이것을 정념(正念)이라 하고, 정념을 갖춘 자가 얻는 삼매(三昧)를 정정(正定)이라 하며, 정정을 갖춘 자가 제법(諸法)이 허공 같음을 관하여 보면 이를 정혜(正慧)라 하고, 정혜를 갖춘 자가 일체 번뇌의 결박을 여의면 이를 해탈(解脫)이라 하며, 해탈을 얻은 자가 중생을 위해 해탈을 아름다운 것이라 칭하고, 이 해탈이 항상하여 불변한 것이다고 말한다면 이를 찬탄해탈(讚歎解脫)이라고 하거니와, 해탈은 곧 무상대반열반(無上大般涅槃)이요, 열반이란 곧 번뇌와 결집이 타서 소멸해버린 것이니라. |
又涅槃者,名為室宅。 何以故?能遮煩惱惡風雨故。 又涅槃者,名為歸依, 何以故?能過一切諸怖畏故。 又涅槃者,名為洲渚。何以故? 四大暴河不能漂故。 何等為四?一者欲暴、二者有暴、 三者見暴、四者無明暴, 是故涅槃名為洲渚。 又涅槃者,名畢竟歸。 何以故?能得一切畢竟樂故。 若有菩薩摩訶薩成就具足如是十法, 雖見佛性而不明了。 |
또 열반은 방이나 집[室宅]이라고도 하니, 왜냐하면 번뇌라는 사나운 비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이며, 또 열반은 귀의[歸依]라고도 하니, 왜냐하면 모든 두려움을 지나보내기 때문이며, 또 열반은 섬[洲渚]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4대폭하(四大暴河*)가 떠내려 보내지 못하기 때문인데, 무엇이 넷인가? 첫째는 욕폭(欲暴), 둘째는 유폭(有暴), 셋째는 견폭(見暴), 넷째는 무명폭(無明暴)이니, 그래서 열반을 섬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또 열반은 필경 돌아갈 곳[畢竟歸]이라고도 하나니, 왜냐하면, 일체의 필경락(畢竟樂)을 얻기 때문이니라.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열 가지 법을 구족히 성취하면 비록 불성은 보더라도 명료치 못하느니라. |
*四大暴河(catvāra oghāh); 四暴流, 四流, 暴流라고도 하는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①欲暴流(kāma-ogha)~ 근(根)이 경(境)을 대하여 일으키는 식상(識想), 즉 5욕(五欲)을 말한다.
②有暴流(bhava-ogha)~ 色界와 無色界의 貪,慢,疑 등을 말한다.
③見暴流(drsty-ogha)~ 잘못 사(邪)에 치우친 思想見解를 말한다.
④無明暴流(avidyā-ogha)~ 어리석음과 더불어 상응하는 번뇌를 말한다.
「復次善男子!出家之人有四種病, 是故不得四沙門果。 何等四病?謂四惡欲: 一為衣欲、二為食欲、三為臥具欲、 四為有欲,是名四惡欲。 是出家病有四良藥能療是病, 謂糞掃衣能治比丘為衣惡欲, 乞食能破為食惡欲, 樹下能破臥具惡欲, 身心寂靜能破比丘為有惡欲。 以是四藥除是四病,是名聖行。 如是聖行,則得名為少欲知足。 |
「또 선남자야! 출가인은 네 가지 병이 있기 때문에 4사문과(四沙門果)를 얻지 못하거니와, 어떤 것이 네 가지 병인가? 네 가지 나쁜 욕심이니, 하나는 의욕(衣欲), 둘은 식욕(食欲), 셋은 와구욕(臥具欲), 넷은 유욕(有欲)을 말하는데, 이를 4악욕(四惡欲)이라 하느니라. 이 출가병을 치료할 수 있는 네 가지 좋은 약이 있어 분소의(糞掃衣)가 능히 의악욕(衣惡欲)을 치료하고, 걸식(乞食)이 식악욕(食惡欲)을 파하고, 나무 밑[樹下]이 와구악욕(臥具惡欲)을 파하며, 몸과 마음의 적정이 유악욕(有惡欲)을 파하는 것을 말한다. 이 네 약으로 네 가지 병을 없애는 이것을 성행(聖行)이라 하며, 이같은 성행이라야 곧 소욕지족(為少欲知足)이라 할 것이니라. |
寂靜者有四種樂。何等為四? 一者出家樂,二寂靜樂, 三永滅樂,四畢竟樂。 得是四樂,名為寂靜; 具四精進,故名精進; 具四念處,故名正念; 具四禪故,故名正定; 見四聖實故,故名正慧; 永斷一切煩惱結故,故名解脫; 呵說一切煩惱過故, 故名讚歎解脫。 善男子!菩薩摩訶薩 安住具足如是十法, 雖見佛性而不明了。 |
적정(寂靜)하면 4종락(四種樂)이 있는데, 어떤 것들이 넷인가? 첫째는 출가락(出家樂), 둘은 적정락(寂靜樂), 셋은 영멸락(永滅樂), 넷은 필경락(畢竟樂)이니, 이 4락(四樂)을 얻으면 적정(寂靜)이라 하거니와, 4정진(四精進)을 갖추었으니 정진(精進)이라 하고, 4념처(四念處)를 갖추었으니 정념(正念)이라 하고, 4선(四禪)을 갖추었으니 정정(正定)이라 하고, 4성실(四聖實)을 보기 때문에 정혜(正慧)라 하고, 모든 번뇌의 결박을 영단(永斷)하였으므로 해탈(解脫)이라 하며, 모든 번뇌의 허물을 꾸짖어 말하기 때문에 그래서 찬탄해탈이라고 하느니라.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이 같은 열 가지 법을 구족하는 데에 머물러 있으니, 불성을 비록 보지만 명료치는 못하느니라. |
「復次善男子!菩薩摩訶薩聞是經已, 親近修習,遠離一切世間之事, 是名少欲。 既出家已不生悔心,是名知足。 既知足已,近空閑處遠離憒閙, 是名寂靜。 不知足者不樂空閑, 夫知足者常樂空寂, 於空寂處常作是念: 『一切世間悉謂我得沙門道果, 然我今者實未能得, 我今云何誑惑於人?』 作是念已,精勤修習沙門道果, 是名精進。 親近修習大涅槃者,是名正念。 隨順天行,是名正定。 安住是定,正見正知,是名正慧。 正見知者能得遠離煩惱結縛, 是名解脫。 十住菩薩為眾生故稱美涅槃, 是則名為讚歎解脫。 善男子!菩薩摩訶薩安住具足如是十法, 雖見佛性而不明了。 |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이 경을 듣고 가까이 하고 닦아서 세간의 모든 일을 멀리 여의면 이를 소욕(少欲)이라 하거니와, 기왕 출가하고서 후회하지 않는 것을 지족(知足)이라 하며, 지족한 뒤에 한적한 곳을 가까이하고 소란한 곳을 멀리하면 이것을 적정(寂靜)이라 하느니라. 지족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한적한 곳을 좋아하지 않지만 대체로 지족한 자는 고요한 곳을 항상 좋아하여 공적한 곳에서 늘 생각하기를, 『일체세간이 모두 내가 사문의 도과(道果)를 얻었다고 하지만 나는 지금 실로 얻지 못했거늘 내가 어찌 사람들을 속일 수 있겠는가?』 하고, 이런 생각 끝에 사문의 도과를 정근(精勤)하여 닦는 이것을 정진(精進)이라 하며, 대열반을 친근하여 수습하면 이를 정념(正念)이라 하고, 천행(天行*)에 수순(隨順)하는 것을 정정(正定)이라 하며, 이 정(定)에 안주하여 바로 보고 바로 아는 것이 정혜(正慧)요, 바로 보고 알면 번뇌의 결박을 멀리할 수 있으니, 이를 해탈(解脫)이라 하고, 십주(十住)보살이 중생을 위해 열반을 찬미(稱美)하는 이것이 곧 찬탄해탈(讚歎解脫)이거니와,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이 같은 열 가지 법을 구족하여 안주하면 불성을 비록 보지만 명료치는 못하느니라. |
*天行; 제11권 聖行品에서 말씀하신 보살이 닦아야 할 五種行 중의 하나.
天은 第一義天, 즉 天然實相의 이치를 말하며,
보살은 天然의 이치로 말이암아 妙行을 성취하므로 天行이라 한다.
「復次善男子!夫少欲者, 若有比丘住空寂處,端坐不臥, 或住樹下,或在塚間,或在露處, 隨有草地而坐其上, 乞食而食,隨得為足; 或一坐食,不過一食; 惟畜三衣、糞衣、毳衣; 是名少欲。 既行是事,心不生悔,是名知足。 修空三昧,是名寂靜。 得四果已,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 心不休息,是名精進。 繫心思惟如來常恒,無有變易, 是名正念。 修八解脫,是名正定。 得四無礙,是名正慧。 遠離七漏,是名解脫。 稱美涅槃無有十相,名讚歎解脫。 十相者,謂生、老、病、死、 色、聲、香、味、觸、無常。 遠離十相者名大涅槃。 善男子!是名菩薩摩訶薩 安住具足如是十法, 雖見佛性而不明了。 |
「또 선남자야! 대체로 소욕(少欲)이란 비구가 만일 공적한 곳에서 단좌(端坐*)하여 눕지 않거나, 혹은 나무 아래나 무덤 사이나 노천(露天)에 풀밭이 있으면 그 위에 앉아서 걸식하여 먹고, 얻은 것으로 만족하거나, 혹은 일좌식(一坐食*)을 하여 하루 한 끼 이상 먹지 않고 삼의(三衣*)와 분의(糞衣*), 취의(毳衣*)만을 지닌다면 이것을 소욕(少欲)이라 하며, 기왕 이런 일을 행하면서 후회하지 않는 것이 지족(知足)이니라. 공삼매(空三昧) 닦는 것을 적정(寂靜)이라 하고, 4과(四果)를 얻은 뒤에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을 정진(精進)이라 하며, 여래는 항상하고 변역이 없음을 온 마음 기울여 사유하는 것을 정념(正念)이라 하며, 팔해탈(八解脫) 닦는 것을 정정(正定)이라 하고, 사무애(四無礙) 얻는 것을 정혜(正慧)라 하며, 칠루(七漏*) 여의는 것을 해탈(解脫)이라 하고, 열반에 십상(十相)이 없음을 찬미하는 것을 찬탄해탈이라 하는데, 십상(十相)이란 생(生), 노(老), 병(病), 사(死),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무상(無常)이니, 십상을 멀리 여의었다는 것은 대열반(大涅槃)을 말하거니와, 선남자야! 이를 일러 보살마하살이 이 같은 십법(十法)을 구족하여 안주하여 불성을 보되, 명료치 못하다고 하는 것이니라. |
*端坐; 위의(威儀) 바르게 앉는 것.
*一坐食; 12두타행(頭陀行)의 하나로 하루에 한 끼만 걸식하여 먹는 것.
*三衣; ①僧伽梨(Saṅghāṭi)~ 眾聚時衣. 입궐하거나 경건한 대중집회 때 입는 9條~25條의 袈裟.
②鬱多羅僧(Uttarāsaṅga)~ 겉옷. 안타회(安陀會;내의) 위에 입는 옷.
③安陀會(Antarvāsaka)~ 속옷. 내의.
*糞衣; 낡고 헤진 옷.
*毳衣; 새 깃털을 얽어 만든 옷.
*七漏; 七種 有漏煩惱.
①見漏~ 여러가지 사견(邪見)을 말하니, 도를 보아야[見道] 끊어지는 것이다.
②修漏~ 貪, 瞋, 癡 등을 말하니, 도를 닦아야[修道] 끊긴다.
③根漏~ 육근(六根)에 의해 생기는 번뇌.
④惡漏~ 일체의 나쁜 일로 말미암아 생기는 번뇌.
⑤親近漏~ 衣服, 飲食, 房舍, 醫藥 같은 네가지 일로 생기는 번뇌.
⑥受漏~ 三受(苦, 樂, 捨)를 말하며, 이 三受가 貪, 瞋, 癡를 일으키므로 受漏라 한다.
⑦念漏~ 邪念을 말하며 邪念이 煩惱를 일으키므로 念漏라 한다.
「復次善男子!為多欲故, 親近國王、大臣、長者、 剎利、婆羅門、毘舍、首陀, 自稱我得須陀洹果乃至阿羅漢果; 為利養故行住坐臥乃至大小便利; 若見檀越,猶行恭敬接引語言。 破惡欲者名為少欲。 雖未能壞諸結煩惱, 而能同於如來行處, 是名知足。 |
「또 선남자야! 다욕(多欲)을 위해 국왕이나 대신, 장자, 찰리, 바라문, 비사, 수타를 가까이 하여 자칭 내가 수다원과에서 아라한과까지를 얻었노라 하거나, 이양(利養)을 위해 행주좌와나 크고 작은 편리(便利)를 행하지만 단월(檀越)을 만나면 오히려 공경한 언어로 대하면서 나쁜 욕심을 버린다면 소욕(少欲)이라 하려니와, 비록 아직 번뇌의 결박을 깨뜨리지 못했더라도 여래가 행하는 곳과 같아질 수 있으니, 이를 지족(知足)이라 하느니라. |
善男子!如是二法, 乃是念、定近因緣也, 常為師宗同學所讚。 我亦常於處處經中, 稱美讚歎如是二法。 若能具足是二法者, 則得近於大涅槃門及五種樂, 是名寂靜。 堅持戒者,名為精進。 有慚愧者,名為正念。 不見心相,名為正定。 不求諸法性相因緣,是名正慧。 無有相故,煩惱則斷,是名解脫。 稱美如是大涅槃經,名讚歎解脫。 善男子!是名菩薩摩訶薩安住十法, 雖見佛性而不明了。 |
선남자야! 이와 같은 두 법이 결국 념(念)과 정(定)에 가까워지는 인연인지라 항상 종사(宗師)와 동학(同學)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고, 나 또한 경전 곳곳에서 늘 이런한 두 법을 칭미(稱美)하고 찬탄하느니라. 만약 이 두 법을 구족할 수 있다면 곧 대열반문(大涅槃門)과 오종락(五種樂*)에 가까워지리니, 이를 일러 적정(寂靜)이라 하고, 지계(持戒)를 굳건히 하는 것을 정진(精進)이라 하며, 참괴(慚愧)가 있는 것이 정념(正念)이요, 심상(心相*)을 보지 않는 것이 정정(正定)이고, 법의 성상(性相*)과 인연을 구하지 않는 것이 정혜(正慧)이며, 상(相)이 없으니 번뇌도 끊긴 것이 해탈(解脫)이고, 이 같은 대열반경을 칭미(稱美)하는 것이 찬탄해탈이거니와, 선남자야! 이를 일러 보살마하살이 십법(十法)에 안주하여 불성을 보더라도 명료치는 않다고 하는 것이니라. |
*五種樂; 出家樂, 寂滅樂, 寂靜樂, 菩提樂, 遠離樂.
*心相; 마음이 행하는 모양[行相], 즉 견분(見分).
*性相; 體性과 相狀. 변치 않고 절대적이며 진실한 본체.
「善男子!如汝所言, 十住菩薩以何眼故, 雖見佛性而不了了? 諸佛世尊以何眼故, 見於佛性而得了了? 善男子!慧眼見故,不得明了; 佛眼見故,故得明了。 為菩提行故,則不了了; 若無行故,則得了了。 住十住故雖見不了; 住不住故則得了了。 菩薩摩訶薩智慧因故,見不了了; 諸佛世尊斷因果故,見則了了。 一切覺者名為佛性, 十住菩薩不得名為一切覺故, 是故雖見而不明了。 善男子!見有二種: 一者眼見,二者聞見。 諸佛世尊眼見佛性, 如於掌中觀阿摩勒果。 十住菩薩聞見佛性故不了了, 十住菩薩唯能自知 定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而不能知一切眾生悉有佛性。 |
「선남자야! 네가 묻기를, 십주보살은 어떤 눈이기에 불성을 요료히 보지못하고, 제불세존은 어떤 눈이기에 불성을 요료히 보느냐고 하였는데, 선남자야! 혜안(慧眼)이 보는 까닭에 명료치 못하고, 불안(佛眼)이 보기 때문에 명료해지는 것이니라. 보리행(菩提行)을 하므로 요료치 못하거니와, 만일 무행(無行)이라면 요료해지며, 십주(十住)에 머물기에 비록 보되 명료치 못하고, 부주(不住)에 머물기에 요료해진 것이며, 보살마하살은 지혜라는 인(因) 때문에 견(見)이 요료치 못하고, 제불세존은 인과(因果)가 끊겼기 때문에 견이 요료한 것이며, 일체를 깨달았다는 것이 불성인데, 십주보살은 일체를 깨달았다 할 수 없으니, 그래서 비록 보지만 명료치 못한 것이니라. 선남자야! 견(見)은 두 가지가 있어서 하나는 눈으로 봄[眼見]이요, 둘은 들음으로 봄[聞見]인데, 제불세존은 불성을 안견(眼見)하기를 손바닥에서 아마륵과(阿摩勒果) 보듯 하지만, 십주보살은 불성을 문견(聞見)하므로 요료치 못하니, 십주보살은 오로지 자기가 정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만 알고, 일체중생이 다 불성이 있음을 모르는 것이니라. |
「◎善男子!復有眼見, 諸佛如來、十住菩薩眼見佛性。 復有聞見, 一切眾生乃至九地聞見佛性。 菩薩若聞一切眾生悉有佛性, 心不生信,不名聞見。 善男子!若有善男子、善女人, 欲見如來,應當修習十二部經, 受持讀誦、書寫解說。」 |
「◎선남자야! 또 어떤 안견(眼見)은 제불여래와 십주보살이 불성을 안견하고, 또 어떤 문견(聞見)은 일체중생에서 9지보살까지가 불성을 문견하거니와, 보살이 일체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고 듣고 믿지 않는다면 문견(聞見)이라 하지 못하리니, 선남자야! 선남자 선여인이 만약 여래를 보고자 하거든 응당 12부경을 닦아 익히고, 수지독송하고, 서사(書寫)하여 해설해야 할 것이니라.」 |
師子吼菩薩摩訶薩言: 「世尊!一切眾生不能得知如來心相, 當云何觀,而得知耶?」 |
사자후보살마하살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일체중생은 여래의 심상(心相)을 알 수 없사온데, 어떻게 관찰해야 알게되나이까?」 |
「善男子!一切眾生實不能知如來心相, 若欲觀察而得知者,有二因緣: 一者眼見,二者聞見。 若見如來所有身業, 當知是則為如來也,是名眼見; 若觀如來所有口業, 當知是則為如來也,是名聞見。 若見色貌一切眾生無與等者, 當知是則為如來也,是名眼見; 若聞音聲微妙最勝, 不同眾生所有音聲, 當知是則為如來也,是名聞見。 |
「선남자야! 일체중생은 실로 여래의 심상을 알 수 없거니와, 만일 관찰하여 알고자 한다면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안견(眼見)이요, 둘째는 문견(聞見)이니라. 여래가 소유한 신업(身業)을 보고서 이것이 곧 여래임을 안다면 이를 안견(眼見)이라 하고, 여래의 구업(口業)을 보고서 이것이 곧 여래임을 안다면 이를 문견(聞見)이라 한다. 만약 용모(容貌;色貌)가 일체중생과 다름을 보고서 이것이 곧 여래임을 알면 이를 안견이라 하고, 음성이 미묘하고 가장 뛰어나서 중생이 지닌 음성과 같지 않음을 듣고서 이것이 곧 여래임을 알면 이를 문견이라 하느니라. |
若見如來所作神通, 為為眾生,為為利養? 若為眾生,不為利養, 當知是則為如來也,是名眼見; 若觀如來以他心智觀眾生時, 為利養說?為眾生說? 若為眾生,不為利養, 當知是則為如來也,是名聞見。 云何如來而受是身? 何故受身?為誰受身? 是名眼見; 若觀如來云何說法? 何故說法?為誰說法? 是名聞見。 以身惡業加之不瞋, 當知是則為如來也,是名眼見; 以口惡業加之不恚, 當知是則為如來也,是名聞見。 |
여래가 짓는 신통(神通)이 중생을 위해 하는 것인가, 이양을 위해 하는 것인가를 살펴 중생을 위하고 이양을 위한 것이 아님을 보고서 이것이 곧 여래임을 안다면 이를 안견이라 하고, 여래가 타심지(他心智)로 중생을 관찰할 때 이양을 위한 말씀인가, 중생을 위한 말씀인가를 살펴 만일 중생을 위하고 이양을 위한 것이 아님을 보고서 이것이 곧 여래임을 알면 이를 문견이라 하며, 어떻게 여래는 그 몸을 받았고, 어째서 몸을 받았으며, 누구를 위해 몸을 받았을까? 하는 이것을 안견이라 하고, 여래가 어떻게 설법하고, 무엇 때문에 설법하며, 누구를 위해 설법할까를 살피는 이것을 문견이라 하거니와, 몸으로 악업을 가해도 눈을 부릅뜨지 아니하니, 이것이 곧 여래임을 알면 이를 안견이라 하고, 입으로 악업을 가해도 성내지 아니하니, 이것이 곧 여래임을 알면 이를 문견이라 하느니라. |
若見菩薩初生之時, 於十方面各行七步, 摩尼跋陀、富那跋陀鬼神大將, 執持幡蓋,震動無量無邊世界, 金光晃曜彌滿虛空, 難陀龍王及跋難陀 以神通力浴菩薩身, 諸天形像承迎禮拜, 阿私陀仙合掌恭敬。 盛年捨欲,如棄涕唾, 不為世樂之所迷惑, 出家修道樂於閑寂, 為破邪見六年苦行, 於諸眾生平等無二, 心常在定初無散亂, 相好嚴麗莊飾其身, 所遊之處丘墟皆平, 衣服離身四寸不墮, 行時直視不顧左右, 所食之物物無完過, 坐起之處草不動亂。 為調眾生故往說法, 心無憍慢,是名眼見。 |
만약 보살이 처음 태어나 열 방면으로 각 칠보(七步) 씩을 걸을 때, 마니발타(摩尼跋陀*)와 부나발타(富那跋陀*) 귀신대장이 번개(幡蓋)를 받쳐들었고, 무량무변한 세계가 진동하고, 허공 가득히 금빛이 찬란히 빛나는데, 난타(難陀)와 발난타(跋難陀) 용왕이 신통력으로 보살의 몸을 목욕시키고, 모든 하늘의 형상(形像)들이 영접나와 예배하고, 아사타(阿私陀) 선인이 합장하여 공경하였으며, 성년(盛年)이 되어서는 욕심을 침뱉듯 버리고, 세간락에 미혹되지 않았으며, 출가하여 수도하면서는 한적한 곳을 좋아하여 사견(邪見)을 파하고자 6년을 고행하였으며, 모든 중생에게 둘 없이 평등히 하고, 마음은 항상 정(定)에 있어서 애당초 산란하지 아니하며, 엄려(嚴麗)한 상호(相好)로 그 몸을 장식하고서 다니는 폐허[丘墟]가 다 그만그만하지만 조금이라도 옷이 몸에서 벗어난 곳이 없고, 걸을 때 앞을 곧바로 보고 좌우를 살피지 아니하며, 먹는 음식물의 완전하고 허물 있고를 가리지 않고, 앉았던 곳의 풀이 어지럽지 아니하며, 중생 조복을 위해 찾아가 법을 설하되 마음에 교만이 없음을 본다면 이것을 안견(眼見)이라 하느니라. |
*摩尼跋陀(Maṇibhadra); 摩尼跋陀羅. 야차(夜叉) 팔대장 중 하나로 寶賢이라 역한다.
*富那跋陀(Pūrṇabhadra); 神將名. 譯하여 滿賢.
若聞菩薩行七步已,唱如是言: 『我今此身最是後邊。』 阿私陀仙合掌而言: 『大王當知,悉達太子, 定當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終不在家作轉輪王。 何以故?相明了故。 轉輪聖王相不明了。 悉達太子身相炳著, 是故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見老病死復作是言: 『一切眾生甚可憐愍, 常與如是生老病死共相隨逐, 而不能觀常行於苦, 我當斷之。』 |
보살이 칠보를 걸은 뒤에 외치기를, 『내 지금의 이 몸이 최후의 몸이다!』고 하자, 아사타 선인이 합장하고서 『대왕께서는 실달태자(悉達太子)가 꼭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시리니, 결코 재가(在家)하여 전륜왕이 되지 않으실 것이온데, 왜냐하면 상(相)이 뚜렷하기 때문임을 아셔야합니다. 전륜성왕께서는 상(相)이 명료치 않지만 실달태자는 신상(身相)이 뚜렷하기에[炳著],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실 것입니다.』고 하였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보고서 다시 말하기를, 『일체중생은 심히 가련하구나. 항상 이런 생노병사와 어울려 함께 따라다니면서 늘 괴로움을 행하는 줄을 보지 못하니, 내 마땅히 끊어주겠노라.』고 하였으며, |
從阿羅邏五通仙人受無想定, 既成就已,後說其非。 從欝陀伽仙受非有想非無想定, 既成就已,說非涅槃是生死法。 六年苦行無所剋獲,即作是言: 『修是苦行空無所得, 若是實者我應得之, 以虛妄故我無所得, 是名邪術非正道也。』 既成道已,梵天勸請: 『惟願如來 當為眾生廣開甘露說無上法。』 佛言:『梵王! 一切眾生常為煩惱之所障覆, 不能受我正法之言。』 梵王復言:『世尊! 一切眾生凡有三種, 所謂利根、中根、鈍根。 利根能受,惟願為說。』 佛言:『梵王!諦聽,諦聽! 我今當為一切眾生開甘露門。』 即於波羅㮈國轉正法輪, 宣說中道。 |
아라라(阿羅邏) 오통선인(五通仙人)에게서 무상정(無想定)을 받아 기왕 성취한 뒤에는 그것이 옳지 못하다고 하고, 울타가(欝陀伽) 선인에게 비유상비무상정(非有想非無想定)을 받아 성취한 뒤에는 열반법이 아닌 생사법(生死法)이다고 하였으며, 6년 고행하여 쟁취[剋獲]한 바가 없자 『이 고행을 닦는 것은 공하여 소득이 없다. 그것이 진실하다면 내가 응당 얻었어야 하지만, 허망하기 때문에 내가 얻은 것이 없는 것이니, 이는 사술(邪術)이지 정도(正道)가 아니다.』고 하였다. 기왕 성도(成道)한 뒤에는 범천(梵天)이 청하기를, 『원컨대 여래께서는 중생을 위해 감로의 무상법(無上法)을 널리 펼쳐 주소서.』 하니, 부처님이 『범왕아! 일체중생은 항상 번뇌에 가려서 내 정법(正法)의 말씀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시고, 범왕이 다시 『세존이시여! 일체중생은 대개 세 가지여서 소위 이근(利根)과 중근(中根), 둔근(鈍根)이온데, 그중 이근(利根)은 받을 수 있사오니 설해 주소서.』 하니, 부처님이 『범왕아! 자세히 잘 듣거라! 내 이제 일체중생을 위해 감로법문을 열리라.』 하시고서 곧 바라내(波羅㮈)국 에서 정법륜을 굴리시어 중도(中道)를 말씀하셨는데, |
一切眾生不破諸結, 非不能破,非破非不破, 故名中道。 不度眾生,非不能度, 是名中道。 非一切成,亦非不成, 是名中道。 凡有所說,不自言師, 不言弟子,是名中道。 說不為利,非不得果, 是名中道。 正語實語、時語真語, 言不虛發,微妙第一。 如是等法,是名聞見。 善男子!如來心相實不可見。 若有善男子、善女人,欲見如來, 應當依是二種因緣。」 |
일체중생은 번뇌를 파하지 못하지만 파하지 못할 것도이 아니고 파하거나 파하지 못할 것도 아니니, 그래서 중도라 하는 것이며, 중생을 제도하지 못할 것도 제도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중도라 하는 것이요, 누구나 이루는 것도 이루지 못할 것도 아니니, 이를 중도라 하는 것이며, 대개의 말씀하신 바가 스스로 스승이라 할 수도 없고 제자라고도 말하지 못하니, 이를 중도라 하는 것이다. 말씀이 이익을 위하지도 않고 과(果)를 얻지 못할 것도 아니니, 이를 중도라 하는 것이다. 바른 말, 진실한 말, 적적한 시기의 말, 참된 말, 허망히 하지 않는 말이어서 미묘하기 제일인 이와 같은 법을 듣는다면 이를 문견(聞見)이라 하나니, 선남자야! 여래의 심상(心相)은 실로 볼 수가 없지만 만일 어느 선남자 선여인이 여래를 보고자 한다면 응당 이 두 가지 인연을 의지해야 하느니라.」 |
◎ 大般涅槃經卷第二十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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