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28칙은 「부처님은 팔만장경을 설하셨으면서 왜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셨을까?」라는
의문이 주제(主題)가 되고 있다.
이 의문에 관한 《楞伽經》卷三 〈一切佛語心品〉의 말씀을 소개한다.
「대혜(大慧)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나는 어느 날 밤 최정각(最正覺)을 얻고서 어느 날 밤 열반에 들어가기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한 자(字)도 말하지 않았고, 이미 설했거나 설할 것도 아니며,
이것이 부처님 말씀이라고도 하지도 않았다.’고 하셨는데,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무슨 인연으로 ‘이것이 부처님 말씀이라고 하지도 않았다’고 하셨나이까?”
부처님이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두 가지 법으로 인해 이와 같은 말을 하였으니, 무엇이 두 가지 법인가?
소위 「스스로 얻은 법[緣自得法]」과 「본래 있는 법[本住法]」, 이 두 법을 말하거니와,
이 두 가지 법으로 인해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이니라.
무엇이 스스로 얻음에 연한 법(緣自得法)인가?
만약 저 여래가 얻은 것이면 나 또한 얻어서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으리니,
스스로 얻은 법은 구경의 경계인지라 언설(言說)과 망상(妄想)을 떠나고,
글자와 선악(善惡)의 두 갈래를 여읜 것이니라.
무엇이 본래 있는 법인가?
옛 성인의 도(道)를 말하거니와, 마치 금이나 은 등의 성품처럼 법계에 상주하여
여래가 출세하든지 출세하지 않든지 법계에 항상 머무는 것과 같아서 만일 거기로 나아가 도(道)를 이루면
마치 사대부가 광야(曠野)를 가는 중에 옛 성(城)의 평탄하고 곧은 길을 보고서 그 길을 따라 성으로 들어가
뜻대로 즐기는 것과 같으니라.
대혜야, 네 생각은 어떠하냐? 저 사대부가 이 길과 성안의 갖가지 즐거움을 만는 것이냐?”
대혜가 “아닙니다.” 하고 대답하자,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고하시되,
“나와 과거 일체제불이 법계에 상주함도 이와 같기에 그러므로 말하기를,
‘내가 어느 날 밤 최정각을 이루고서 어느 날 밤 열반에 들기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한 자도 말하지 않았고,
과거에도 말하지 않았으며, 이미 설했거나 설할 것도 아니다.'고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에 부처님께서는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어느 날 밤 도(道)를 이루어 어느 날 밤 열반에 이르기까지
이 두 중간에 나는 전혀 말한 바가 없거니와,
스스로 얻은 법에 머물기에 내가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요,
저 부처들과 나는 어떤 차별도 없느니라.」 」
【二八】舉。 | 【제28칙】 남전(南泉)의 설하지 않은 법[不說底法] |
南泉參百丈涅槃和尚。 丈問。從上諸聖。 還有不為人說底法麼 (和尚合知。壁立萬仞。 還覺齒落麼) 泉云。有 (落草了也。 孟八郎作什麼。便有恁麼事) 丈云。作麼生是不為人說底法 (看他作麼生。看他手忙腳亂。 將錯就錯。但試問看) 泉云。不是心。不是佛。不是物 (果然納敗闕。 果然漏逗不少) |
남전이 백장열반(百丈涅槃)화상을 찾아 갔더니, 백장이 묻기를, "위로부터 모든 성인들이 사람을 위하지 않고 설한 그런 법이 있습니까?" 하였는데, (화상이 합당히 안다면 벽립만인<壁立萬仞*>하려니와, 도리어 치아 빠짐[齒落;노쇠]을 느끼는가?) 남전은 "있습니다." 하였다. (낙초<落草>해버렸다. 맹팔랑<孟八郎*>아! 어째서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이냐?) 백장 : "어떤 것이 사람을 위하지 않은 설법입니까?" (그가 어찌하는지 보고, 그가 수망각란<手忙腳亂*>하는 것을 보려고 착오를 가져다 착오로 나아가며 그저 시험삼아 물어보았다.) 남전 :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패궐<敗闕;패배,과실>을 인정한 것이니, 결국 누두<漏逗;어쩔 수 없는 실수>가 적지 않다.) |
丈云。說了也 (莫與他說破。 從他錯一平生。 不合與他恁麼道) 泉云。某甲只恁麼。和尚作麼生 (賴有轉身處。 與長即長。 與短即短。 現長則就) 丈云。我又不是大善知識。 爭知有說不說 (看他手忙腳亂。 藏身露影。去死十分。 爛泥裏有刺。 恁麼那。賺我) 泉云。某甲不會 (乍可恁麼。賴值不會。 會即打爾頭破。 賴值這漢只恁麼) 丈云。我太殺為爾說了也 (雪上加霜。龍頭蛇尾作什麼)。 |
백장 : "설해버렸군요." (그에게 설파<說破>해 주지 말라. 그 말을 좇아 한 평생을 그르치리니, 그에게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 남전 : "나는 다만 그렇다지만 화상은 어떻습니까?" (다행히 몸 굴릴 곳이 있구나. 장<長>과 어울리면 장<長>해지고, 단<短>과 어울리면 단<短>해지는 법이니, 장<長>해 보이거든 곧 나아가라.) 백장 : "나는 더구나 큰 선지식도 아닌데, 어찌 설했는지 설하지 않았는지를 알겠습니까?" (그의 수망각란<手忙腳亂*>함을 보건대 몸을 숨겼으나 그림자가 드러났으니, 죽게 될 것이 확실하다. 질척한 진흙 속에 가시를 감춰두는 그런 수법으로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남전 : "나도 알지 못합니다." (차라리[乍可] 그렇게 모르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안 즉 너를 머리가 터지도록 때렸을 터인데, 다행이 이 자가 다만 그렇게 되어 있구나.) 백장 : "내가 그대에게 너무 심하게 말했습니다." (설상가상이로구나. 용두사미해서 무얼 하려느냐?)。 |
*壁立萬仞; 壁立千仞. '천(만) 길 높이 솟은 암벽'이란 우뚝 솟아 어찌해볼 수 없는 기상에 비유하는 용어이다.
*孟八郎; '맹랑한 여덟 번째 사내'란 '제멋대로 구는 난폭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禪林用語이다.
*手忙脚亂; 일을 황란(慌亂)히 하여 조리(條理)를 잃어버림.
到這裏。也不消即心不即心。 不消非心不非心。 直下從頂至足。 眉毛一莖也無。猶較些子。 即心非心。 壽禪師謂之表詮遮詮。 此是涅槃和尚法正禪師也。 昔時在百丈作西堂。 開田說大義者。 是時南泉已見馬祖了。 只是往諸方決擇。 百丈致此一問。也大難酬。 |
이에 이르러서는 즉심(即心)도 부즉심(不即心)도 쓰지 않고, 비심(非心)도 불비심(不非心)도 쓰지 않고서 곧바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눈썹 한 가닥도 없어야 오히려 조금은 낫다. 즉심비심(即心非心)을 수(壽*)선사는 표전차전(表詮遮詮*)이라 하였다. 이 열반화상(涅槃和尚)은 법정선사(法正禪師)이다. 과거 백장(百丈懷海) 회하에서 서당(西堂)을 맡아 있을 때 밭을 일구어야 대의(大義)를 설해주었다는 분이다. 이때 남전(南泉)은 이미 마조(馬祖) 뵙기를 마치고 오로지 제방(諸方)으로 결택(決擇*)을 다니다가 백장(百丈涅槃)이 이 한 질문을 던지니 응대하기 몹시 곤란했으리라. |
본칙에 등장하는 백장열반(百丈涅槃)을 두고 여기서 백장회해(百丈懷海)의 법을 이은 백장열반화상과
당시 세칭 열반화상이라 불렸던 백장유정(百丈惟政)과 혼동되어 뒤죽박죽이 되어있는 듯하다.
백장유정과 백장회해, 남전보원(南泉普願)은 다같이 南嶽下二世로 馬祖道一의 法嗣들이며,
백장열반화상은 南嶽下三世이니 문답상의 격이 맞지 않고,
또 '밭을 일구어야 대의를 설해주겠다'는 일화(逸話)도 오등회원에는 백장열반화상 장에 있으나,
실제로 「惟政展開兩手」라는 백장유정의 공안으로 통하고 있으니 혼란스럽다.
추정컨대 백장유정과 백장열반은 동일인으로 보이며 법계보 상으로도 동일한 남악하 2세라야
본칙 대담의 격이 맞다고 여겨진다.
*壽禪師(904~976); 杭州慧日永明延壽智覺禪師(天台德韶 法嗣) 青原下10世
*表詮遮詮; 表德遮情과 같은 말.
否定과 迷情(錯誤한 見解)에 기대어 消極적으로 真智를 끌어들이는 것을 遮情, 또는遮情門이라 하고,
반면 真如의 功德을 直接表現하는, 즉 事物의 實相과 狀態 등을 直接表現하여
積極적으로 真智를 얻는 것을 表德, 또는 表德門이라 한다.[佛光大辭典]
遮詮門은 아닌 바[所非]를 차단해 보내는 것, 또는 그와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
마치 涅槃을 不生不滅, 真空寂滅이라 말하는 것은 空門의 言詮이니, 遮情門이고,
表詮門은 옳은 바[所是]를 드러내는 것, 또는 自體를 直示하는 것.
마치 涅槃을 常樂我淨, 三德秘藏이라 말하는 것은 有門의 言詮이니, 表德門이다.
이 遮詮表詮은 法相宗에서 쓰는 용어이고, 遮情表德은 華嚴宗과 真言宗에서 쓰는 용어이다.[佛學大辭典]
*決擇; 決斷簡擇(nairvedhika).
無漏의 聖智로 모든 의혹을 決斷하고 分別하여 四諦의 相 등을 簡擇하는 것.[佛光大辭典]
의혹을 결단하고 그 이치를 분별하는 지혜의 작용.[佛學大辭典]
云從上諸聖。 還有不為人說底法麼。 若是山僧。掩耳而出。 看這老漢一場懡㦬。 若是作家。 見他恁麼問便識破得他。 南泉只據他所見。便道有。 也是孟八郎。 百丈便將錯就錯。 隨後道作麼生是不為人說底法。 泉云。不是心。不是佛。不是物。 這漢貪觀天上月。失卻掌中珠。 |
이르기를, "위로부터 모든 성인들이 사람을 위하지 않고 설한 그런 법이 있습니까?" 하였는데, 만약 나였다면 귀를 막고 나와서 이 노인네로부터 한바탕 창피[懡㦬;慚愧의 梵語]를 당했을 것이다. 만일 작가(作家)였다면 그의 그러한 질문을 받자마자 식파(識破)하여 그의 뜻을 얻었으련만 남전은 제 소견만을 들어 문득 "있다."고 하였으니, 그야말로 맹팔랑(孟八郎*)인 것이다. 백장이 곧 잘못을 가져다 잘못으로 나아가서 뒤따라 "어떤 것이 사람을 위하지 않고 설한 법입니까?" 하고 묻자, 남전은 "마음도 부처도 물건도 아니다." 하였으니, 이 자가 하늘의 달을 탐내 보다가 손 안의 구슬을 잃은 격이다. |
丈云。說了也。可惜許。 與他注破。當時但劈脊便棒。 教他知痛痒。雖然如是。 爾且道什麼處是說處。 據南泉見處。 不是心不是佛不是物。不曾說著。 且問爾諸人。 因什麼卻道。說了也。 他語下又無蹤跡。 若道他不說。 百丈為什麼卻恁麼道。 |
백장은 "설했다."고 말했는데 가히 애석하다. 그에게 답해줄 당시에 단지 등짝에 방(棒)을 가해 통양(痛痒)을 알게 했어야 했다. 비록 그렇다지만 너희가 말해보라. 어느 곳이 설한 곳인가? 남전의 견처(見處)에 의거하면 '마음도 부처도 물건도 아니다'는 일찍이 설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묻겠는데, 무슨 근거로 도리어 설했다고 말했겠는가? 그의 말 아래는 또 자취가 없거니와, 만일 그가 설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백장은 어째서 도리어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
南泉是變通底人。便隨後一拶云。 某甲只恁麼。和尚又作麼生。 若是別人。未免分疏不下。 爭柰百丈是作家。 答處不妨奇特。便道。 我又不是大善知識。 爭知有說不說。 南泉便道箇不會。 是渠果會來道不會。 莫是真箇不會。 百丈云。我太殺為爾說了也。 且道什麼處是說處。 若是弄泥團漢時。兩箇淈淈𣸩𣸩。 若是二俱作家時。如明鏡當臺。 其實前頭二俱作家。 後頭二俱放過。 若是具眼漢。分明驗取。 且道作麼生驗他。 看雪竇頌出云。 |
남전은 변통(變通*)한 사람인지라 곧 뒤따라 한 번 찔러 "나는 다만 그렇하지만 화상은 어떻소." 하였는데, 다른 사람이었다면 답하지 못하고 어쩔줄 몰라 했겠지만 백장은 작가임을 어쩌겠는가? 답처(答處)가 기특하여 마지않게 쉽게 말하기를, "나는 또 대 선지식이 아닌데 어찌 설한지 안한지를 알겠소." 하니, 남전이 곧 "이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그가 과연 알고서 모른다고 말하는 것인가? 혹시 정말로 모르는 것은 아닐까? 백장은 "내가 그대에게 너무 심하게 말했습니다." 하였다. 자, 말해보라. 어느 곳이 말한 곳이냐? 만약 농니단한(弄泥團漢*)일 때는 둘 다 희미하고 흐리멍텅하며, 둘 다 작가일 때라면 마치 명경(明鏡)이 대(臺)에 걸린 것 같겠지만, 그 진실은 앞머리에서의 두 사람은 모두 작가였고, 뒷 부분에서는 두 사람이 모두 지나쳐버린 것이다. 만약 안목을 갖춘 자라면 분명히 검증해 취하려니와, 자, 말해보라. 어떻게 그를 검증하겠는가? 설두가 송출(頌出)한 말을 살펴보자. |
*變通; 상황의 변천에 순응하여 비원칙적이고 탄력있게 대처하는 것.
*分疏; 자신을 자세히 밝혀 설명하다.
*莫是; 或許是(혹 ~은 아닐까) *真箇; 真的(정말로, 진짜로, 참으로)
*弄泥團漢; 어린애 흙장난이나 하는 놈.
禪林에서는 '情識으로 思量分別하고 計度愁慮하는 禪徒'를 꾸짖을 때 가져다 쓰는 말이다.
祖佛從來不為人 (各自守疆界。 有條攀條。 記得箇元字腳在心。 入地獄如箭) 衲僧今古競頭走 (踏破草鞋。 拗折拄杖。高掛缽囊) 明鏡當臺列像殊 (墮也。破也。 打破鏡來與爾相見) 一一面南看北斗 (還見老僧騎佛殿出山門麼。 新羅國裏曾上堂。 大唐國裏未打鼓) 斗柄垂 (落處也不知。在什麼處) 無處討 (瞎。可惜許。 碗子落地。楪子成七八片) 拈得鼻孔失卻口 (那裏得這消息來。果然恁麼。 便打) |
불조(佛祖)께서 여태껏 사람을 위하지 않으시는지라 (각자 강계<疆界>를 지켜야 하고, 조항<條項>이 있으면 조항을 따라야 하거늘, 글자 나부랭이[元字腳]나 기억하여 마음에 두고 있으면 지옥으로 들어감이 쏜살같을 것이다.) 납승(衲僧)이 예나 지금이나 머리 다투어 달려서 (짚신을 밟아 닳아뜨리느니 주장자 요절내고 발낭<缽囊>을 높이 걸어라.) 명경(明鏡)을 대(臺)에 걸고 나열되는 상(像)들의 다름을 (떨어뜨리고 깨뜨려야 한다. 거울을 깨뜨려가야 너와 더불어 서로를 보게 된다.) 낱낱이 면남간북두(面南看北斗*)하였으되 (노승이 불전<佛殿>을 타고 산문<山門> 나서는 것도 보았는가? 신라국 안에서 상당<上堂>하는데 대당국 안에서 타고<打鼓>한 적이 없다.) 두병(斗柄*)만 드리웠을 뿐 (낙처<落處>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가?) 찾아볼 곳이 없었거니와, (눈이 멀었구나. 애석하다. 사발이 땅에 떨어지면 그릇이 칠 팔 조각이 난다.) 콧구멍을 염득(拈得)하면 입을 잃어버리리라. (어느 속에서 그 소식을 얻었는가? 과연 그렇구나! 갑자기 치다.) |
釋迦老子出世。四十九年。 未曾說一字。 始從光耀土。終至跋提河。 於是二中間。未嘗說一字。恁麼道。 且道是說是不說。 如今滿龍宮盈海藏。 且作麼生是不說。 豈不見修山主道。 諸佛不出世。四十九年說。 達磨不西來。少林有妙訣。 又道諸佛不曾出世。 亦無一法與人。 但能觀眾生心。 隨機應病。與藥施方。 遂有三乘十二分教。 其實祖佛。自古至今。 不曾為人說。 只這不為人。正好參詳。 山僧常說。 若是添一句。甜蜜蜜地。 好好觀來。正是毒藥。 若是劈脊便棒。驀口便摑。 推將出去。方始親切為人。 |
석가 노인네께서는 세상에 나와 49년 동안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하지 않으셨다. 처음 광요토(光耀土*)로부터 발제하(跋提河*)에서 마치기에 이르기까지 이 두 중간에 한 글자도 설한 적이 없다고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말해보라. 설한 것인가 설하지 않은 것인가? 지금 용궁(龍宮)에 가득하여 해장(海藏*)에 넘쳐나는데 또 어째서 설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어찌 보지 못했는가? 수산주(修山主*)는 '제불(諸佛)이 불출세(不出世)했더라도 49년을 설했고, 달마가 서래하지 않았어도 소림에 묘결(妙訣)이 있었다' 하였고, 또 '제불은 일찍이 출세한 적이 없고 또한 한 법도 사람에게 준 것이 없다' 하였거니와, 다만 중생의 마음을 관(觀)하여 근기를 따르고 병을 따라 약을 주고 방편을 베푸시어 마침내 삼승(三乘) 십이분교(十二分敎)가 있는 것이라 사실은 조불(祖佛)이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위해 설한 적이 없다는 것이니, 다만 이 '사람을 위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르게 참상(參詳)해야 한다. 산승(山僧)이 늘 말하기를, '만약 더해진 한 구(句)가 달콤한 것이거든 두고두고 살펴보면 바로 이것이 독약인 것이며, 만약 등짝에 몽둥이질 하고 갑자기 입을 쥐어박아 내쫓아버린다면 비로소 친절히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였다. |
*光耀土; '빛이 찬란한 땅'이란 부처님 成道하신 尼連禪河(Nairañjana)邊을 이르는 듯하다.
*跋提河(Hiraṇyavati); 부처님 涅槃하신 인도 5대강 중 하나이다.
*海藏; 《海龍王經卷三》 請佛品에 '용왕의 아들 受現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감격하여
용궁에 도리천궁 같은 최상의 전당을 건립하여 세존의 법보를 모시고 백천 겁동안 공양하겠노라'고 하였으니,
이 전당이 바로 바닷 속 보장(寶藏)인 海藏이다.
*修山主; 撫州龍濟紹修禪師(羅漢桂琛 法嗣)
衲僧今古競頭走。 到處是也問。不是也問。 問佛問祖。問向上問向下。 雖然如此。 若未到這田地。也少不得。 如明鏡當臺列像殊。 只消一句。可辨明白。 |
'납승이 예나 지금이나 머리 다투어 달렸다' 하였는데, 도처에서 시(是)도 묻고 불시(不是)도 묻고, 부처를 묻고 조사도 묻고, 향상(向上)을 묻고 향하(向下)도 묻고 비록 이와 같이 하더라도 어떤 전지(田地)에 이르지 못하면 조금도 얻지 못함이 마치 명경(明鏡)에 비춰진 상(像)들의 다름과 같다는 다만 한 구(句)를 써서 가히 명백히 판별하였다. |
古人道。 萬象及森羅。一法之所印。 又道。森羅及萬象。總在箇中圓。 神秀大師云。 身是菩提樹。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勿使惹塵埃。 大滿云。他只在門外。 雪竇恁麼道。 且道在門內在門外。 爾等諸人。各有一面古鏡。 森羅萬象。長短方圓。 一一於中顯現。 爾若去長短處會。卒摸索不著。 所以雪竇道。 明鏡當臺列像殊。 卻須是一一面南看北斗。 既是面南。為什麼卻看北斗。 若恁麼會得。 方見百丈南泉相見處。 此兩句頌百丈挨拶處。 |
고인[馬祖道一]이 말하기를, 「만상(萬象)과 삼라(森羅)가 한 법의 소인(一法之所印*)이다」 하고, 또 「삼라와 만상이 모두 그 법 안에서 원만히 존재한다」 하였으며, 신수대사(神秀大師*)가 이르되, 「몸은 보리수(菩提樹)요 마음은 명경대(明鏡臺)와 같나니 때때로 힘써 털고 닦아서 진애(塵埃)가 일게 하지 말지어다」 하니, 대만(大滿;五祖弘忍의 諡號)이 「그는 다만 문 밖에 있다」 하였는데, 설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 말해보라. 문 안에 있는 것인가 문 밖에 있는 것인가? 너희 모두에게 각각 하나의 해묵은 거울이 있어서 삼라만상의 장단(長短)과 방원(方圓)을 낱낱이 그 안에 드러내 보이면서도 너희가 장단처(長短處)를 알려고 하면 결코 모색하지 못할 것이라 그래서 설두가 말하기를, '명경(明鏡)을 대에 걸면 나열되는 상(像)들의 다름'을 모름지기 '낱낱이 면남(面南)하여 북두(北斗)를 보았다' 하였는데, 기왕 남쪽을 대면하여 어째서 도리어 북두를 볼까? 하고 이렇게 알아 얻는다면 바야흐로 백장과 남전의 상견처(相見處)를 볼 것이다. 이 두 구절은 백장이 애찰(挨拶*)한 곳을 송(頌)한 것이다. |
*萬象及森羅 一法之所印; 馬祖道一禪師의 「一乘心法」 법문으로서,
삼라만상이 한 법으로 찍어낸 것이다는 것은 이 한 법이 심법(心法)을 말하니,
「삼계가 오직 마음이다[三界唯心]」와 같은 의미이다.
*神秀大師; 5조 홍인의 수좌였으나 갓 들어온 혜능에 밀려 5조의 법맥을 계승하지 못하였다.
혜능은 남으로 피신하여 남선(南禪)을 창시하였으니, 혜능과 신수를 남능북수(南能北秀)라 하였다.
《육조단경》을 보라.
*挨拶; 挨는 「강하게 나아가다[強進]」, 拶은 「핍박(逼迫)」의 뜻이니, 「강하게 밀어부치다, 세게 윽박지르다」.
선가(禪家)에서 문답 응수하며 서로 의견과 지식을 교환하면서 서로 오도(悟道)와 지견(知見)의
깊고 얕음을 감험(勘驗)함으로써 향상의 자량(資糧)을 삼아가는데,
문답하는 중 상대를 강하게 윽박질러가는 것을 말한다.
丈云我。又不是大善知識。 爭知有說不說。 雪竇到此頌得。落在死水裏。 恐人錯會。卻自提起云。 即今目前斗柄垂。 爾更去什麼處討。 爾纔拈得鼻孔失卻口。 拈得口失卻鼻孔了也。 |
백장이 '나는 더구나 큰 선지식도 아닌데, 어찌 설(說)이 있고 없고를 알겠는가?' 하였는데, 설두가 이 송(頌)에 이르러 사수(死水*) 속에 빠짐을 얻고 사람들이 잘못 알까 염려하여 스스로 제기(提起)하여 이르기를, '바로 지금 목전에 두병(斗柄)이 드리웠거늘 너희가 다시 어느 곳으로 가서 찾는가? 너희가 겨우 콧구멍을 염득(拈得)하면 입을 실각(失却)하고 입을 염득하면 콧구멍을 실각해버릴 것이다'고 하였다. |
*死水; 죽은 물이란 정지되어 흐르지 않는 물이니, 생기가 전혀 없는 사람이나
가만히 앉아 꼼짝하지 않는 사람에 비유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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