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巖錄

벽암록(碧巖錄) 제78칙 개사입욕(開士入浴) _어느 보살이 욕탕에 들어가다가

碧雲 2025. 4. 24. 07:30
벽암록(碧巖錄) 제78칙 개사입욕(開士入浴) _어느 보살이 욕탕에 들어가다가
   
 【七八】舉。  【제78칙】 개사가 물을 인해 깨닫다(開士悟水因)
   古有十六開士
   (成群作隊。有什麼用處。
 這一隊不唧𠺕漢)
   於浴僧時隨例入浴
   (撞著露柱。漆桶作什麼)
   忽悟水因
   (惡水驀頭澆)
   諸禪德作麼生會。
   他道妙觸宣明
   (更不干別人事。
 作麼生會他。
   撲落非他物)
   成佛子住
   (天下衲僧到這裏摸索不著。
 兩頭三面作什麼)
   也須七穿八穴始得
   (一棒一條痕。
   莫辜負山僧好。
   撞著磕著。
   還曾見德山臨濟麼)。
   옛날에 어느 16개사(十六開士*)가
   (成群作隊해서 무슨 쓸모가 있으리오.
 이 一隊는 멍청한 놈들이다.)
   스님들 목욕할 시간에 예(例)따라 입욕(入浴)하다
   (撞著露柱*로구나. 漆桶이 무엇하려는가.)
   물을 인(因)해 홀연히 깨달았다는데
   (느닷없이 오수[惡水]를 뒤집어썼다)
   여러 선덕(禪德)들은 어떻게 이회(理會)하는가.
   그는 "오묘한 느낌이 뚜렷하여
   (더는 남의 일에 간여하지 않겠으나
 그것을 어떻게 이회하는가.
   떨어졌다면 남의 물건이 아니다.)
   불자주(佛子住*)를 성취했다"고 말했거니와,
   (天下衲僧이 이 속에 이르러는 摸索하지 못하거늘
 兩頭三面*해서 무엇 하리오.)
   마땅히 칠천팔혈(七穿八穴*)해야 하리라.
   (일방일조흔[一棒一條痕*]이면
   山僧을 저버리지 말기 바라거니와,
   당착개착[撞著磕著*]이라면
   德山, 臨濟를 만난 적이나 있겠는가)。
*十六開士; 16位의 正道를 구하는 居士菩薩로
《首楞嚴經》卷第五에 「跋陀婆羅并其同伴。十六開士即從座起。頂禮佛足而白佛言。
我等先於威音王佛。聞法出家於浴僧時。隨例入室忽悟水因。」이라 하고 있다.
《無量壽經》上卷에서는 「十六正士」,
《思益梵天所問經》卷第一에는
「跋陀婆羅等十六賢士는 跋陀婆羅(賢護), 寶積, 星德, 帝天, 水天, 善力, 大意,
殊勝意, 增意, 善發意, 不虛見, 不休息, 不少意, 導師, 日藏, 持地菩薩」이라 하였다.
*不唧𠺕漢; 唧𠺕는 민첩하다, 날렵하다는 뜻이니, 不唧𠺕漢은 '둔한 놈'.
*撞著露柱; 기둥에 부딪히다(撞著은 부딪히다. 露柱는 노출된 기둥). 안목 없는 사람에 비유.
*撲落; 떨어지다(跌落,掉落)
*佛子住; 불자의 머뭄. 불자의 지위. (예 : 보살십주)
*也須; 也應該 마땅히 ~해야 한다. 曾經 일찍이. 이전에. 이미. 벌써.
*七穿八穴; 逆順縱橫,自由自在。
禪林用語。支離破碎의 뜻이 있지만 自在通達, 無障礙를 讚賞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類似用語~七花八裂, 七縱八橫, 七通八達, 七顛八倒, 七支八節, 七零八落, 七凹八凸等。
*一棒一條痕; 한 방에 한 개의 자국. 比喻做事踏實或說話切中要點,毫不含糊。
일처리를 확실히 하거나 정확히 욧점을 가려 말하는 데에
추호도 주저하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
*撞著磕著; 부딪히고 넘어지고. 비틀거리고 불안정함. 事情이 순조롭지 못함.
𡎺著磕著. 築著磕著. 築築磕磕. 
   
楞嚴會上。跋陀婆羅菩薩。
與十六開士。各修梵行。
乃各說所證圓通法門之因。
此亦二十五圓通之一數也。
他因浴僧時。隨例入浴。
忽悟水因。云。
既不洗塵。亦不洗體。
且道洗箇什麼。
若會得去。中間安然。
得無所有。
千箇萬箇。更近傍不得。
所謂以無所得是真般若。
若有所得。是相似般若。
楞嚴會上*에서 跋陀婆羅*보살이
十六開士와 더불어 각자 梵行을 닦고서
이내 저마다 證한 바 圓通法門의 因을 說했는데
이것 또한 25圓通*의 하나이다.
그는 僧 入浴할 때 例를 따라 入浴하다가
忽然히 물을 因해 證悟하고 말하기를,
"기왕 塵도 體도 씻지 않았다" 했는데
자 말해보라. 무엇을 씻었는가?
만일 會得해 가면 中間이 安然하려니와
無所有를 얻어서
千 개고 萬 개고 더는 가까하면 아니 되리니,
이른 바 以無所得이 옳고 참된 般若이고
만약 有所得이라면 모양이 그럴듯 한 般若인 것이다.
*楞嚴會上; 佛이 《首楞嚴經》을 설하시던 法會.
*跋陀婆羅(Bhadrapāla); 賢護長者, 賢護菩薩, 賢護大士. 賢守라 譯하기도 한다.
*25圓通; 25종 圓通法門. 法性의 實을 완벽히 통달[圓通]하는 25 가지의 수단.
《楞嚴經》권5,6에 기술된 바 憍陳如 등의 25보살이 각각 「六塵, 六根, 六識과 七大」의
25 가지 중 하나를 통해 圓通을 얻었다 하고 있다.
不見達磨謂二祖云。
將心來與汝安。
二祖云。覓心了不可得。
這裏些子。是衲僧性命根本。
更總不消得如許多葛藤。
只消道箇忽悟水因。
自然了當。
既不洗塵。亦不洗體。
且道悟箇什麼。
到這般田地。一點也著不得。
道箇佛字。也須諱卻。
보지 못했는가. 達磨가 二祖에게 일러
"마음을 가져오너라. 너를 편안하게 해주마." 하니,
二祖가 "마음을 찾아봐도 찾지 못했습니다." 하였거니와,
이 안의 작은 것[心]이 衲僧의 性命*根本인지라
더 어떤 것도 허다한 葛藤 처럼 소비하지 말고
다만 忽悟水因 하듯 道에 힘쓰면
自然 了當*하리라.
기왕 塵도 씻지 않고, 體도 씻지 않았다는데,
말해보라. 그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
이런 田地에 이르러서는 한 點도 붙이지 말고
「佛」자를 말하는 것도 삼가해야 한다. 
他道。妙觸宣明。
成佛子住。
宣則是顯也。妙觸是明也。
既悟妙觸。成佛子住。
即住佛地也。
如今人亦入浴亦洗水。
也恁麼觸。因甚卻不悟。
皆被塵境惑障。粘皮著骨。
所以不能便惺惺去。
若向這裏。洗亦無所得。
觸亦無所得。
水因亦無所得。
且道。是妙觸宣明。
不是妙觸宣明。
若向箇裏。直下見得。
便是妙觸宣明。成佛子住。
如今人亦觸。還見妙處麼。
妙觸非常觸
與觸者合則為觸。
離則非也。
그가 이르기를 「妙觸이 宣明하여
佛子住를 성취했다」 하였는데,
宣은 곧 顯이니 妙觸이 밝았다는 것이요,
기왕 妙觸을 悟하여 佛子住를 이룬다 함은
곧 佛地에 머물었다는 것이다.
如今의 사람도 入浴하고 洗水도 하여
그렇게 觸하는데 어째서 도리어 不悟하는가.
모두가 塵境*과 惑障*에 씌우고 粘皮著骨*한지라
그래서 쉽사리 惺惺*해 가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이 속을 向해 씻어서도 얻은 것이 없고,
觸해서도 無所得이요,
水를 因해서도 無所得이었다면
자 말해보라. 이것이 妙觸이 宣明함인가,
妙觸 宣明이 아닌가?
만약 어딘가를 향해 直下에 見得한다면
문득 妙觸이 宣明해지고 佛子住를 성취하리라.
如今人도 觸하거니와 어찌 妙處를 보는가?
妙觸은 일상의 觸이 아니어서
느끼는 자[觸者]와 더불어 合하면 곧 觸이 되지만
離하면 곧 非觸인 것이다. 
*性命; 人性과 天命.
*了當; 마땅하게 완결짓다. 합당한 도를 성취하다.
*塵境(artha); 마음의 對象. 6境(色,聲,香,味,觸,法).
*惑障; 四障(惑障,業障,報障,見障)의 하나로
貪欲, 瞋恚, 愚痴 등의 미혹(迷惑)에 의한 장애(障碍)를 혹장(惑障)이라 한다.
*粘皮著骨; 피부와 뼛속까지 달라붙다[粘著].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음에 비유한다.
*惺惺; 환히 깨이다(淸醒).
玄沙過嶺。磕著腳指頭。
以至德山棒。豈不是妙觸。
雖然恁麼。也須是七穿八穴始得。
若只向身上摸索。有什麼交涉。
爾若七穿八穴去。何須入浴。
便於一毫端上現寶王剎。
向微塵裏。轉大法輪。
一處透得。千處萬處一時透。
莫只守一窠一窟。
一切處都是觀音入理之門。
古人亦有聞聲悟道見色明心。
若一人悟去。則故是。
因甚十六開士。同時悟去。
是故古人同修同證。同悟同解。
雪竇拈他教意。
令人去妙觸處會取。
出他教眼頌。
免得人去教網裏籠罩半醉半醒。

要令人直下灑灑落落。
「玄沙가 嶺을 넘다가 발가락을 부딪친 일*」에서
「德山의 棒」까지가 어찌 妙觸이 아니리오만
비록 그렇다 해도 모름지기 七穿八穴해야 하거니와
그저 身上을 向해 摸索만 해서야 무슨 交涉이 있겠는가.
너희가 만약 七穿八穴해 간다면 入浴이 왜 필요하리오.
문득 한 터럭 끝에 寶王剎을 나타내고
微塵 속을 향해 大法輪을 굴리되
一處를 透得하고 千處萬處를 一時에 透得하여
한 소굴(窠窟)만 고수하지 말지어다.
一切處가 다 觀音入理의 門이니라.
古人에게도 聞聲悟道 見色明心*이 있었던 것인데
한 사람이 깨달아갔다면 곧 그럴 수 있겠지만
무엇을 인해 16開士가 同時에 悟去했는가.
그래서 古人이 同修同證하고 同悟同解하는 것이다.
雪竇가 그의 教意를 찝어서[拈]
사람들로 하여금 妙觸處로 會取해 가도록
그의 教眼(가르침의 눈)을 頌해 내었다.
사람들이 教網* 속에 갇힌 채[籠罩;覆蓋]
半醉半醒해 감을 면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直下에 灑灑落落케 하고자 하였다. 
*玄沙過嶺 磕著腳指頭; 【福州玄沙宗一禪師語錄】 卷上에
「하루는 제방(諸方)을 두루 다니며 선지식을 참알하고자
베낭을 매고 고개를 넘다가 발가락을 부딪쳐 피가 흐르고 몹시 아프자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몸이 있는 것도 아닌데 통증이 어디서 오리오" 하고서
곧 雪峯으로 되돌아 갔다.」 하고 있다.
*聞聲悟道 見色明心; 소리(聲)를 들어 도를 깨우치고 사물(色)을 보아 마음을 밝히다.
즉 25通 중 憍陳如의 音聲(聲塵)과 阿那律陀의 見元(眼根)에 起因한 開悟.
見色明心은 靈雲禪師가 桃花를 보고 明心見性하여 남긴 偈로부터,
聞聲悟道는 香嚴智閑禪師가 산에서 벌초하다 돌이 대나무에 부딪쳐 난 소리를 들은 순간
豁然히 大悟했다[香嚴擊竹]는 고사로부터 유래하는 용어이다.
*敎網; 佛의 教化. 眾生을 물고기에 佛의 教法을 魚網에 비유한 표현.
가르침의 굴레 즉 어언과 문자에 대한 집착을 뜻한다.
   
頌云。 雪竇의 頌
 了事衲僧消一箇
   (現有一箇。
   朝打三千暮打八百。
   跳出金剛圈。一箇也不消得)
 長連床上展腳臥
   (果然是箇瞌睡漢。
   論劫不論禪)
  夢中曾說悟圓通
   (早是瞌睡更說夢。
   卻許爾夢見。
   寐語作什麼)
  香水洗來驀面唾
   (咄。土上加泥又一重。
   莫來淨地上屙)。
 요사납승(了事衲僧*)이 한 개를 쓰고서
   (나타난 한 개가 있거든
   아침에 3천을 때리고 저녁에 8백을 때려라.
   金剛圈을 뛰어 넘으면 한 개도 필요치 않다.)
 장련상(長連床*) 위에 다리 뻗고 누웠구나.
   (果然 이 갑수한<瞌睡漢*>이
   劫을 論하고 禪은 論하지 않는구나.)
  꿈 속에서 일찍이 圓通을 깨달았다 말하는가
   (일찌감치 졸더니 다시 꿈을 說하는데
   네가 꿈에 본 것은 허락하겠으나
   잠꼬대는 해서 무엇하려는가.)
  香水로 씻고 오면 얼굴에 침 뱉으리라.
   (쯧쯧. 토상가니<土上加泥*>에 또 한 겹이로구나.
   정결한 땅에 똥을 누지 마라.)。
*了事衲僧; 參學大事를 마쳐 無學이 된 衲僧.
*朝打三千暮打八百; 철저히 닦고 닦아 없애고 없앤다는 뜻. 
*瞌睡漢; '잠자는 놈', '눈 감고 귀 막은 사람'에의 비유.
*論劫不論禪; 六祖惠能大師의 말 「惟論見性 不論禪定解脫」을 인용한 듯.
「결과를 논하고 과정은 따지지 말라」는 의미.
*土上加泥; 雪上加霜과 동의어.
   
了事衲僧消一箇。
且道了得箇什麼事。
作家禪客。聊聞舉著。
剔起便行。
似恁麼衲僧。只消得一箇。
何用成群作隊。
「요사납승(了事衲僧)은 한 개만 쓴다」라 하니
자 말해보라. 무슨 일을 마친 것인가.
作家禪客은 들춰 얘기하면
눈썹을 치켜 세우고 곧 행하니,
이러한 衲僧은 단지 하나만 쓰거늘
成群作隊를 왜 쓰겠는가. 
長連床上展腳臥。
古人道。
明明無悟法。
悟了卻迷人。
長舒兩腳睡。
無偽亦無真。
所以胸中無一事。
飢來喫飯困來眠。
「長連床 위에 다리 뻗고 누웠다」라 했는데,
古人이 이르되,
「明明히 깨칠 法이 없나니
깨치고 나면 도리어 迷人이로다.
두 다리 길게 뻗고 자노니
거짓도 없고 참도 없도다.」 하였다.
그래서 胸中에 아무런 일도 없이
배고프면 밥먹고 노곤하면 잠잔다. 
雪竇意道。
爾若說入浴悟得妙觸宣明。

在這般無事衲僧分上。
只似夢中說夢。
所以道。夢中曾說悟圓通。
雪竇가 뜻을 말하되,
네가 만약 '入浴하다가
妙觸이 宣明해짐을 깨달았다' 한다면
이러한 無事衲僧의 分位上에 있어서는
꿈 속에서 꿈을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夢中에서 일찍이
圓通을 깨달았다 말하는가」라 한 것이다. 
香水洗來驀面唾。
似恁麼只是惡水驀頭澆。
更說箇什麼圓通。
雪竇道似這般漢。
正好驀頭驀面唾。
山僧道土上加泥又一重。
「香水로 씻고 오면 얼굴에 침 뱉으리라」는
이러함 같아서는 다만 더러운 물을 머리에 끼얹는 것이거늘
다시 무슨 놈의 圓通을 말하느냐는 것이다.
雪竇는 이르기를 이런 놈 같아서는
좋게 곧바로 머리와 얼굴에 침 뱉겠다고 하였으나, 
山僧은 '흙 위에 진흙을 더하고 또 한 번 거듭했다' 말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