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78칙 개사입욕(開士入浴) _어느 보살이 욕탕에 들어가다가 | |
【七八】舉。 | 【제78칙】 개사가 물을 인해 깨닫다(開士悟水因) |
古有十六開士 (成群作隊。有什麼用處。 這一隊不唧𠺕漢) 於浴僧時隨例入浴 (撞著露柱。漆桶作什麼) 忽悟水因 (惡水驀頭澆) 諸禪德作麼生會。 他道妙觸宣明 (更不干別人事。 作麼生會他。 撲落非他物) 成佛子住 (天下衲僧到這裏摸索不著。 兩頭三面作什麼) 也須七穿八穴始得 (一棒一條痕。 莫辜負山僧好。 撞著磕著。 還曾見德山臨濟麼)。 |
옛날에 어느 16개사(十六開士*)가 (成群作隊해서 무슨 쓸모가 있으리오. 이 一隊는 멍청한 놈들이다.) 스님들 목욕할 시간에 예(例)따라 입욕(入浴)하다 (撞著露柱*로구나. 漆桶이 무엇하려는가.) 물을 인(因)해 홀연히 깨달았다는데 (느닷없이 오수[惡水]를 뒤집어썼다) 여러 선덕(禪德)들은 어떻게 이회(理會)하는가. 그는 "오묘한 느낌이 뚜렷하여 (더는 남의 일에 간여하지 않겠으나 그것을 어떻게 이회하는가. 떨어졌다면 남의 물건이 아니다.) 불자주(佛子住*)를 성취했다"고 말했거니와, (天下衲僧이 이 속에 이르러는 摸索하지 못하거늘 兩頭三面*해서 무엇 하리오.) 마땅히 칠천팔혈(七穿八穴*)해야 하리라. (일방일조흔[一棒一條痕*]이면 山僧을 저버리지 말기 바라거니와, 당착개착[撞著磕著*]이라면 德山, 臨濟를 만난 적이나 있겠는가)。 |
*十六開士; 16位의 正道를 구하는 居士菩薩로 《首楞嚴經》卷第五에 「跋陀婆羅并其同伴。十六開士即從座起。頂禮佛足而白佛言。 我等先於威音王佛。聞法出家於浴僧時。隨例入室忽悟水因。」이라 하고 있다. 《無量壽經》上卷에서는 「十六正士」, 《思益梵天所問經》卷第一에는 「跋陀婆羅等十六賢士는 跋陀婆羅(賢護), 寶積, 星德, 帝天, 水天, 善力, 大意, 殊勝意, 增意, 善發意, 不虛見, 不休息, 不少意, 導師, 日藏, 持地菩薩」이라 하였다. *不唧𠺕漢; 唧𠺕는 민첩하다, 날렵하다는 뜻이니, 不唧𠺕漢은 '둔한 놈'. *撞著露柱; 기둥에 부딪히다(撞著은 부딪히다. 露柱는 노출된 기둥). 안목 없는 사람에 비유. *撲落; 떨어지다(跌落,掉落) *佛子住; 불자의 머뭄. 불자의 지위. (예 : 보살십주) *也須; 也應該 마땅히 ~해야 한다. 曾經 일찍이. 이전에. 이미. 벌써. *七穿八穴; 逆順縱橫,自由自在。 禪林用語。支離破碎의 뜻이 있지만 自在通達, 無障礙를 讚賞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類似用語~七花八裂, 七縱八橫, 七通八達, 七顛八倒, 七支八節, 七零八落, 七凹八凸等。 *一棒一條痕; 한 방에 한 개의 자국. 比喻做事踏實或說話切中要點,毫不含糊。 일처리를 확실히 하거나 정확히 욧점을 가려 말하는 데에 추호도 주저하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 *撞著磕著; 부딪히고 넘어지고. 비틀거리고 불안정함. 事情이 순조롭지 못함. 𡎺著磕著. 築著磕著. 築築磕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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楞嚴會上。跋陀婆羅菩薩。 與十六開士。各修梵行。 乃各說所證圓通法門之因。 此亦二十五圓通之一數也。 他因浴僧時。隨例入浴。 忽悟水因。云。 既不洗塵。亦不洗體。 且道洗箇什麼。 若會得去。中間安然。 得無所有。 千箇萬箇。更近傍不得。 所謂以無所得是真般若。 若有所得。是相似般若。 |
楞嚴會上*에서 跋陀婆羅*보살이 十六開士와 더불어 각자 梵行을 닦고서 이내 저마다 證한 바 圓通法門의 因을 說했는데 이것 또한 25圓通*의 하나이다. 그는 僧 入浴할 때 例를 따라 入浴하다가 忽然히 물을 因해 證悟하고 말하기를, "기왕 塵도 體도 씻지 않았다" 했는데 자 말해보라. 무엇을 씻었는가? 만일 會得해 가면 中間이 安然하려니와 無所有를 얻어서 千 개고 萬 개고 더는 가까하면 아니 되리니, 이른 바 以無所得이 옳고 참된 般若이고 만약 有所得이라면 모양이 그럴듯 한 般若인 것이다. |
*楞嚴會上; 佛이 《首楞嚴經》을 설하시던 法會. *跋陀婆羅(Bhadrapāla); 賢護長者, 賢護菩薩, 賢護大士. 賢守라 譯하기도 한다. *25圓通; 25종 圓通法門. 法性의 實을 완벽히 통달[圓通]하는 25 가지의 수단. 《楞嚴經》권5,6에 기술된 바 憍陳如 등의 25보살이 각각 「六塵, 六根, 六識과 七大」의 25 가지 중 하나를 통해 圓通을 얻었다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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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見達磨謂二祖云。 將心來與汝安。 二祖云。覓心了不可得。 這裏些子。是衲僧性命根本。 更總不消得如許多葛藤。 只消道箇忽悟水因。 自然了當。 既不洗塵。亦不洗體。 且道悟箇什麼。 到這般田地。一點也著不得。 道箇佛字。也須諱卻。 |
보지 못했는가. 達磨가 二祖에게 일러 "마음을 가져오너라. 너를 편안하게 해주마." 하니, 二祖가 "마음을 찾아봐도 찾지 못했습니다." 하였거니와, 이 안의 작은 것[心]이 衲僧의 性命*根本인지라 더 어떤 것도 허다한 葛藤 처럼 소비하지 말고 다만 忽悟水因 하듯 道에 힘쓰면 自然 了當*하리라. 기왕 塵도 씻지 않고, 體도 씻지 않았다는데, 말해보라. 그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 이런 田地에 이르러서는 한 點도 붙이지 말고 「佛」자를 말하는 것도 삼가해야 한다. |
他道。妙觸宣明。 成佛子住。 宣則是顯也。妙觸是明也。 既悟妙觸。成佛子住。 即住佛地也。 如今人亦入浴亦洗水。 也恁麼觸。因甚卻不悟。 皆被塵境惑障。粘皮著骨。 所以不能便惺惺去。 若向這裏。洗亦無所得。 觸亦無所得。 水因亦無所得。 且道。是妙觸宣明。 不是妙觸宣明。 若向箇裏。直下見得。 便是妙觸宣明。成佛子住。 如今人亦觸。還見妙處麼。 妙觸非常觸 與觸者合則為觸。 離則非也。 |
그가 이르기를 「妙觸이 宣明하여 佛子住를 성취했다」 하였는데, 宣은 곧 顯이니 妙觸이 밝았다는 것이요, 기왕 妙觸을 悟하여 佛子住를 이룬다 함은 곧 佛地에 머물었다는 것이다. 如今의 사람도 入浴하고 洗水도 하여 그렇게 觸하는데 어째서 도리어 不悟하는가. 모두가 塵境*과 惑障*에 씌우고 粘皮著骨*한지라 그래서 쉽사리 惺惺*해 가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이 속을 向해 씻어서도 얻은 것이 없고, 觸해서도 無所得이요, 水를 因해서도 無所得이었다면 자 말해보라. 이것이 妙觸이 宣明함인가, 妙觸 宣明이 아닌가? 만약 어딘가를 향해 直下에 見得한다면 문득 妙觸이 宣明해지고 佛子住를 성취하리라. 如今人도 觸하거니와 어찌 妙處를 보는가? 妙觸은 일상의 觸이 아니어서 느끼는 자[觸者]와 더불어 合하면 곧 觸이 되지만 離하면 곧 非觸인 것이다. |
*性命; 人性과 天命. *了當; 마땅하게 완결짓다. 합당한 도를 성취하다. *塵境(artha); 마음의 對象. 6境(色,聲,香,味,觸,法). *惑障; 四障(惑障,業障,報障,見障)의 하나로 貪欲, 瞋恚, 愚痴 등의 미혹(迷惑)에 의한 장애(障碍)를 혹장(惑障)이라 한다. *粘皮著骨; 피부와 뼛속까지 달라붙다[粘著].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음에 비유한다. *惺惺; 환히 깨이다(淸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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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沙過嶺。磕著腳指頭。 以至德山棒。豈不是妙觸。 雖然恁麼。也須是七穿八穴始得。 若只向身上摸索。有什麼交涉。 爾若七穿八穴去。何須入浴。 便於一毫端上現寶王剎。 向微塵裏。轉大法輪。 一處透得。千處萬處一時透。 莫只守一窠一窟。 一切處都是觀音入理之門。 古人亦有聞聲悟道見色明心。 若一人悟去。則故是。 因甚十六開士。同時悟去。 是故古人同修同證。同悟同解。 雪竇拈他教意。 令人去妙觸處會取。 出他教眼頌。 免得人去教網裏籠罩半醉半醒。 要令人直下灑灑落落。 |
「玄沙가 嶺을 넘다가 발가락을 부딪친 일*」에서 「德山의 棒」까지가 어찌 妙觸이 아니리오만 비록 그렇다 해도 모름지기 七穿八穴해야 하거니와 그저 身上을 向해 摸索만 해서야 무슨 交涉이 있겠는가. 너희가 만약 七穿八穴해 간다면 入浴이 왜 필요하리오. 문득 한 터럭 끝에 寶王剎을 나타내고 微塵 속을 향해 大法輪을 굴리되 一處를 透得하고 千處萬處를 一時에 透得하여 한 소굴(窠窟)만 고수하지 말지어다. 一切處가 다 觀音入理의 門이니라. 古人에게도 聞聲悟道 見色明心*이 있었던 것인데 한 사람이 깨달아갔다면 곧 그럴 수 있겠지만 무엇을 인해 16開士가 同時에 悟去했는가. 그래서 古人이 同修同證하고 同悟同解하는 것이다. 雪竇가 그의 教意를 찝어서[拈] 사람들로 하여금 妙觸處로 會取해 가도록 그의 教眼(가르침의 눈)을 頌해 내었다. 사람들이 教網* 속에 갇힌 채[籠罩;覆蓋] 半醉半醒해 감을 면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直下에 灑灑落落케 하고자 하였다. |
*玄沙過嶺 磕著腳指頭; 【福州玄沙宗一禪師語錄】 卷上에 「하루는 제방(諸方)을 두루 다니며 선지식을 참알하고자 베낭을 매고 고개를 넘다가 발가락을 부딪쳐 피가 흐르고 몹시 아프자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몸이 있는 것도 아닌데 통증이 어디서 오리오" 하고서 곧 雪峯으로 되돌아 갔다.」 하고 있다. *聞聲悟道 見色明心; 소리(聲)를 들어 도를 깨우치고 사물(色)을 보아 마음을 밝히다. 즉 25通 중 憍陳如의 音聲(聲塵)과 阿那律陀의 見元(眼根)에 起因한 開悟. 見色明心은 靈雲禪師가 桃花를 보고 明心見性하여 남긴 偈로부터, 聞聲悟道는 香嚴智閑禪師가 산에서 벌초하다 돌이 대나무에 부딪쳐 난 소리를 들은 순간 豁然히 大悟했다[香嚴擊竹]는 고사로부터 유래하는 용어이다. *敎網; 佛의 教化. 眾生을 물고기에 佛의 教法을 魚網에 비유한 표현. 가르침의 굴레 즉 어언과 문자에 대한 집착을 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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頌云。 | 雪竇의 頌 |
了事衲僧消一箇 (現有一箇。 朝打三千暮打八百。 跳出金剛圈。一箇也不消得) 長連床上展腳臥 (果然是箇瞌睡漢。 論劫不論禪) 夢中曾說悟圓通 (早是瞌睡更說夢。 卻許爾夢見。 寐語作什麼) 香水洗來驀面唾 (咄。土上加泥又一重。 莫來淨地上屙)。 |
요사납승(了事衲僧*)이 한 개를 쓰고서 (나타난 한 개가 있거든 아침에 3천을 때리고 저녁에 8백을 때려라. 金剛圈을 뛰어 넘으면 한 개도 필요치 않다.) 장련상(長連床*) 위에 다리 뻗고 누웠구나. (果然 이 갑수한<瞌睡漢*>이 劫을 論하고 禪은 論하지 않는구나.) 꿈 속에서 일찍이 圓通을 깨달았다 말하는가 (일찌감치 졸더니 다시 꿈을 說하는데 네가 꿈에 본 것은 허락하겠으나 잠꼬대는 해서 무엇하려는가.) 香水로 씻고 오면 얼굴에 침 뱉으리라. (쯧쯧. 토상가니<土上加泥*>에 또 한 겹이로구나. 정결한 땅에 똥을 누지 마라.)。 |
*了事衲僧; 參學大事를 마쳐 無學이 된 衲僧. *朝打三千暮打八百; 철저히 닦고 닦아 없애고 없앤다는 뜻. *瞌睡漢; '잠자는 놈', '눈 감고 귀 막은 사람'에의 비유. *論劫不論禪; 六祖惠能大師의 말 「惟論見性 不論禪定解脫」을 인용한 듯. 「결과를 논하고 과정은 따지지 말라」는 의미. *土上加泥; 雪上加霜과 동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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了事衲僧消一箇。 且道了得箇什麼事。 作家禪客。聊聞舉著。 剔起便行。 似恁麼衲僧。只消得一箇。 何用成群作隊。 |
「요사납승(了事衲僧)은 한 개만 쓴다」라 하니 자 말해보라. 무슨 일을 마친 것인가. 作家禪客은 들춰 얘기하면 눈썹을 치켜 세우고 곧 행하니, 이러한 衲僧은 단지 하나만 쓰거늘 成群作隊를 왜 쓰겠는가. |
長連床上展腳臥。 古人道。 明明無悟法。 悟了卻迷人。 長舒兩腳睡。 無偽亦無真。 所以胸中無一事。 飢來喫飯困來眠。 |
「長連床 위에 다리 뻗고 누웠다」라 했는데, 古人이 이르되, 「明明히 깨칠 法이 없나니 깨치고 나면 도리어 迷人이로다. 두 다리 길게 뻗고 자노니 거짓도 없고 참도 없도다.」 하였다. 그래서 胸中에 아무런 일도 없이 배고프면 밥먹고 노곤하면 잠잔다. |
雪竇意道。 爾若說入浴悟得妙觸宣明。 在這般無事衲僧分上。 只似夢中說夢。 所以道。夢中曾說悟圓通。 |
雪竇가 뜻을 말하되, 네가 만약 '入浴하다가 妙觸이 宣明해짐을 깨달았다' 한다면 이러한 無事衲僧의 分位上에 있어서는 꿈 속에서 꿈을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夢中에서 일찍이 圓通을 깨달았다 말하는가」라 한 것이다. |
香水洗來驀面唾。 似恁麼只是惡水驀頭澆。 更說箇什麼圓通。 雪竇道似這般漢。 正好驀頭驀面唾。 山僧道土上加泥又一重。 |
「香水로 씻고 오면 얼굴에 침 뱉으리라」는 이러함 같아서는 다만 더러운 물을 머리에 끼얹는 것이거늘 다시 무슨 놈의 圓通을 말하느냐는 것이다. 雪竇는 이르기를 이런 놈 같아서는 좋게 곧바로 머리와 얼굴에 침 뱉겠다고 하였으나, 山僧은 '흙 위에 진흙을 더하고 또 한 번 거듭했다' 말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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