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巖錄

벽암록(碧巖錄) 제62칙 운문(雲門)의 중유일보(中有一寶)

碧雲 2023. 7. 18. 07:40

 운문은 제 몸 안에 불성(佛性)이 숨겨져 있건만
등롱(燈籠)을 들고 불전으로만 찾아[外求] 다니는지라
선가(禪家)의 삼문(三門)을 가져다 교법[燈籠] 위에 올려 놓고자 한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설두는 실로 가져올 삼문이 없고, 선문(禪門)이 교법의 상위인듯 주장했으니

자세히 들여다 보면 구린내가 난다고 하였고,
원오는 보장론의 대의(大意)가 「어째서 무가지보(無價之寶)가
음계(陰界) 안에 숨겨져 있다는 것인가?」이므로
보장론의 말이 모두 종문(宗門)의 설화(說話)에 부합된다고 하여
敎와 禪이 차별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垂示云。 수시(垂示)
以無師智。
發無作妙用。
以無緣慈。作不請勝友。
向一句下。有殺有活。
於一機中。有縱有擒。
且道什麼人曾恁麼來。
試舉看。
스승 없는 지혜[無師智*]로
지음 없는 묘용[無作妙用*]을 발휘하고,
무연의 자비[無緣慈*]로 청하지 않은 좋은 벗이 되며,
1구(句) 하에 죽이고[殺] 살림[活]이 있고,
1기(機) 속에 놓아주고[縱] 사로잡음[擒]이 있다.
말해보라. 누가 일찍이 이러히 해 왔는지.
예를 들어 살펴보자. 

*無師智; 타인의 가르침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성취한 지혜.
*無作妙用; 아무런 작위(作爲) 없이 일어나는 신묘한 공용(功用).
*無緣慈; 【大智度論】卷40에 「慈悲心에는 眾生緣, 法緣, 無緣의 三種이 있다.
凡夫의 慈悲는 眾生緣이고, 聲聞 辟支佛과 菩薩은 처음엔 眾生緣 후에 法緣이 되며,
諸佛은 畢竟空을 잘 修行한 때문에 無緣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는 곧 大乘佛敎 空思想에 부합하는 「主客이 없는 慈悲」를 無緣의 慈悲라 한다. 

 

 【六二】舉。 【제62칙】 운문일보(雲門一寶)_운문의 한 가지 보배
   雲門示眾云。
   乾坤之內
   (土曠人稀。
   六合收不得)
   宇宙之間
   (休向鬼窟裏作活計蹉過了也)
   中有一寶
   (在什麼處。光生也。
   切忌向鬼窟裏覓)
   祕在形山
   (拶點)
   拈燈籠向佛殿裏
   (猶可商量)
   將三門來燈籠上
   (雲門大師是即是不妨誵訛。
   猶較些子。
   若子細撿點將來。
   未免屎臭氣)。
   운문(雲門)이 시중하여 이르되,
   "건곤(乾坤)의 안,
   (땅은 넓은데 사람은 귀해서
   육합<六合*>을 뒤져도 얻지 못한다.)
   우주의 사이
   (귀굴 속에 살 생각일랑 그만 두어라. 빗나갔다.)
   그 가운데 한 보배가
   (어디에 있던가? 빛이 나겠구나.
   귀굴 속에서는 절대 찾지 말라.)
   형산(形山;몸)에 숨겨져 있다는데
   (손가락으로 짚어보거라.)
   등롱(燈籠) 들고 불전(佛殿) 속으로만 향하니,
   (알만 하구나.)
   등룡 위로 삼문(三門*)을 가져오겠다" 하였다.
   (운문대사가 옳기는 옳으나 효와<誵訛*>하여 마지 않고
   조금 모자란 구석이 있어서
   만일 자세히 점검해 본다면
   구린내를 면치 못할 것이다.) 

*六合; 上下와 東南西北
*形山; 肉身. 흔히 우리의 心性(佛性)을 「祕在形山」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三門; 空, 無相, 無願의 세 해탈문.
*誵訛; ①混淆訛誤(헛갈린 착오) ②교란(攪亂)하다, 잘못알다, 잘못하다. 

 

雲門道。乾坤之內。宇宙之間。
中有一寶。祕在形山。
且道雲門意在釣竿頭。
意在燈籠上。
此乃肇法師寶藏論數句。
雲門拈來示眾。
肇公時於後秦逍遙園造論。
寫維摩經。
方知莊老未盡其妙。
肇乃禮羅什為師。
又參瓦棺寺跋陀婆羅菩薩。
從西天二十七祖處。
傳心印來。
肇深造其堂奧。
肇一日遭難。臨刑之時。
乞七日假。造寶藏論。
雲門便拈論中四句。示眾。
大意云。如何以無價之寶。
隱在陰界之中。
論中語言。
皆與宗門說話相符合。
운문이 '건곤(乾坤)의 안, 우주(宇宙)의 사이
그 가운데 한 보배가 몸에 숨겨져 있다'고 했는데,
말해보라. 운문의 뜻이 낚싯대 끝[釣竿頭*]에 있는가,
등롱(燈籠) 위에 있는가?
이는 승조(僧肇)법사의 보장론(寶藏論)있는 몇 구절인데,
운문이 가져다가 시중(示眾)한 것이다.
승조가 그때 후진(後秦) 소요원(逍遙園)에서 논을 썼는데,
유마경(維摩經)을 사경하다가
바야흐로 장자나 노자는 그 묘를 다하지 못했음을 알고
승조가 이에 구마라집을 참례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또 와관사(瓦棺寺) 발타바라(跋陀婆羅) 보살을 참례했는데
서천(西天) 27조(祖)의 처소에서
심인(心印)을 전수하고 왔는지라
승조가 그 심오한 경지에 깊이 할 수 있었다.
승조가 난을 만나 형을 받게 되었을 때
7일간의 틈을 내 보장론을 썼는데,
운문이 논(論) 중의 네 구를 가져다 시중했다.
그 대의(大意)가 「어째서 무가지보(無價之寶)가
음계(陰界) 안에 숨겨져 있다는 것인가?」이므로
보장론의 말이
모두 종문(宗門)의 설화(說話)와 서로 부합한다. 

*釣竿頭; 學人을 낚아 교화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도구.
*僧肇; 구마라즙 문하 4철(四哲) 중의 한 사람으로
般若無知論, 涅槃無名論, 寶藏論 등의 많은 논서를 저술했다.
*跋陀婆羅(Bhadrapāla); 현호보살(賢護菩薩)의 梵名.
《大寶積經》에 등장하는 王舍城의 在家菩薩.
*西天二十七祖; 般若多羅尊者.
*堂奧; 학문과 수양이 高深한 境界.
【寶藏論】 廣照空有品 中에
「夫天地之內。宇宙之間。中有一寶。祕在形山。
識物靈照。內外空然。寂寞難見。其號玄玄。
巧出紫微之表。用在虛無之間。端化不動。獨而無雙。
聲出妙響。色吐華容。窮覩無所。寄號空空。
唯留其聲。不見其形。唯留其功。不見其容。
幽顯朗照。物理虛通。森羅寶印。萬象真宗。
其為也形。其寂也冥。本淨非瑩。法爾圓成。
光超日月。德越太清。萬物無作。一切無名。
轉變天地。自在縱橫。恒沙妙用。混沌而成。
誰聞不喜。誰聞不驚。如何以無價之寶。」

不見鏡清問曹山。
清虛之理。
畢竟無身時如何。
山云。理即如是。事作麼生。
清云。如理如事。
山云瞞曹山一人即得。
爭柰諸聖眼何。
清云若無諸聖眼。
爭知不恁麼。
山云。官不容針。
私通車馬。
보지 못했는가? 경청(鏡清)이 조산(曹山)에게
"깨끗하고 텅 빈 이치[理]가
필경 몸에 없을 때는 어찌합니까?" 하고 물으니,
조산이 "이치[理]가 그렇다면 사실[事]은 어떤가?"
경청이 "이치는 이치대로이고, 사실은 사실대로입니다."
조산이 "조산 한 사람은 속인다지만
성인들의 눈은 어찌하려느냐?" 하자,
"성인들의 눈이 없다면
어찌 그렇지 않은 줄은 알겠습니까?" 하니,
조산은 "공적으로는 바늘만큼도 허용되지 않지만
사적으로는 마차도 통과 한다."고 하였다.
(*景德傳燈錄卷第十七 撫州曹山本寂禪師 章)
所以道。乾坤之內。宇宙之間。
中有一寶。祕在形山。
大意明人人具足箇箇圓成。

雲門便拈來示眾。
已是十分現成。
不可更似座主相似。
與爾注解去。
他慈悲更與爾下注腳道。
拈燈籠向佛殿裏。
將三門來燈籠上。
且道雲門恁麼道。意作麼生。
不見古人云。
無明實性即佛性。
幻化空身即法身。
又云。即凡心而見佛心。
그래서 천지의 안과 우주의 사이,
그 중에 한 보배가 몸에 감추어져 있다고 한 것이며,
대의(大意)는 사람 사람이 구족하고
개개가 원만히 이루고 있음을 밝힌 것을
운문이 가져다 시중하였는데,
이미 다 드러난 것인지라
다시 좌주(座主)인 듯이
저들에게 주해(注解)해 줄 필요가 없었지만
그가 자비로 다시 주해를 달아 말해주기를,
 '등롱을 가지고 불전 속으로 향하니,
삼문을 가지고 등룡 위로 왔다'고 하였거니와
말해보라. 운문의 그렇게 말한 뜻이 무엇인지.
보지 못했는가?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무명(無明)의 실성(實性)이 곧 불성(佛性)이요,
환화(幻化)와 같이 텅 빈 몸이 곧 법신(法身)이다' 하였고,
또 '범부의 마음에 즉하여 부처의 마음을 본다'고 하였다. 

*官不容針私通車馬; 「官不容針」은 「겉으로 보기에는 조그만 왜곡도 허용되지 않는다」,
「私通車馬」는 「속을 들여다보면 融通無礙한 方便法門이 행해지고 있다」
선림에서는 佛法의 第一義諦는 구경히 투철하여 추호의 편차도 허용되지 않으나
第二義諦는 師家가 學人을 지도하기 위해 融通無礙한 方便이 허용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불성이 개개의 몸에 있다 했는데, 이치적으로는 그렇다지만 실제로는
없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하자, 사실이 그렇더냐? 하고 물으니,
이치와 사실은 별개의 것이다고 돌려 답하여 은근슬쩍 넘어가는 그 솜씨가 쓸만 한지라
사적으로는 봐주겠지만 다른 데서는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즉 누구나에게 불성이 있음은
이치로나 사실로나 분명하니, 부질없는 분란 일으키지 말라 한 것이다. 

*古人; 永嘉真覺大師 證道歌.
*又云; 華嚴經隨疏演義鈔에 唐代 澄觀 撰 〈疏序〉中
 「真妄交徹。即凡心而見佛心下。融真妄也。文有二對。初對正明雙融。後對不礙雙現。」

形山即是四大五蘊也。
中有一寶。祕在形山。
所以道。諸佛在心頭。
迷人向外求。
內懷無價寶不識。一生休。

又道。佛性堂堂顯現。
住相有情難見。
若悟眾生無我。
我面何殊佛面。

心是本來心。
面是娘生面。
劫石可移動。
箇中無改變。
형산(形山)은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이며,
한 보배가 그 형산에 숨겨져 있다.
그래서 말하기를, '제불은 마음 속에 있건만
미혹한 사람은 밖으로 구하면서
안에 무가보를 품은 줄 모르고 일생을 보낸다.' 하였고,
(*唐代 淨土宗 五會法師 法照의 五會法事讚)
또 말하기를, "불성은 당당하고 뚜렷이 나타나 있건만
모양[相]에 집착하니 유정(有情)들이 보기 어려운 것이다.
중생이라는 나[我]가 없는 줄 깨닫는다면
내 얼굴이 어찌 부처의 얼굴과 다르겠는가?" 하였거니와,
(*景德傳燈錄卷十 湖南長沙景岑號招賢大師 章)
마음은 본래의 마음이요,
얼굴은 어머니가 낳아주신 얼굴이니,
겁석(劫石*)은 옮길 수는 있어도
그 속을 바꿀 수는 없다. 

*劫石; 盤石劫. 겁 동안 털어야 없어질 돌.
《菩薩瓔珞本業經》卷下에
「1리(里)에서 40리(里)까지에 달하는 거대한 돌을
무게가 3수(몹시 가벼운. 銖;24수가 1兩)인 天衣로
3년마다 한 번씩 털어서 그 돌이 다할 때까지의 시간을
1소겁(小劫)이라 한다」 하였다. 

有者。只認箇昭昭靈靈為寶。
只是不得其用。
亦不得其妙。
所以動轉不得。開撥不行。
古人道。窮則變。變則通。

어떤 이는 뚜렷히 밝고 신령한 것이 보배인 줄은 알지만
그 용(用)도 얻지 못하고
그 묘(妙)도 얻지 못하는지라
그래서 굴려보지도 못하고 펼쳐내지도 못하는데,
고인이 이르되, '궁하면 바뀌고 바뀌면 통한다' 하였다.
《易經,繫辭下》
拈燈籠向佛殿裏。
若是常情可測度得。
將三門來燈籠上。
還測度得麼。
雲門與爾一時。
打破情識意想得失是非了也。
雪竇道。我愛韶陽新定機。
一生與人抽釘拔楔。
又云。曲木據位知幾何。
利刃剪卻令人愛。
他道。拈燈籠向佛殿裏。
這一句已截斷了也。
又將三門來燈籠上。
若論此事。
如擊石火。似閃電光。
등롱을 들고 불전 안으로 향한다는 것은
보통의 사람도 짐작해 알 수 있겠지만
삼문(三門)을 가지고 등롱 위로 왔다는 것은
짐작이나 되는가?
운문이 단번에 그대들의
정식(情識)과 의상(意想), 득실, 시비를 타파해버렸다.
설두는 “나는 소양(韶陽;운문)의 신선한 기풍을 좋아한다.
평생 사람들의 못과 쐐기를 뽑아주었다”고 하였고,
또 “곡목거위(曲木據位*)가 몇 번인지 아는가?
예리한 칼로 베어버려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가 “등롱을 들고 불전으로 향한다”는
이 한 마디로 이왕 절단내버리고서
다시 “삼문을 가지고 등롱 위로 왔다”고 하였는데,
이 일을 논하자면
전광을 번쩍이고 석화를 때린 것과 같았다.

*曲木據位; 원래는 曲木禪床(僧家에서 참선할 때 사용하는 의자)에 앉는 것을 말하나
후에 住持의 자리를 맡아 대중을 指導教化한다는 뜻으로 바뀌었다.[佛光大辭典]

雲門道。汝若相當去。
且覓箇入路。
微塵諸佛在爾腳跟下。
三藏聖教。在爾舌頭上。
不如悟去好。
和尚子莫妄想。
天是天地是地。
山是山水是水。
僧是僧俗是俗。
良久云。
與我拈面前按山來看。
便有僧出問云。
學人見山是山水是水時如何。
門云。三門為什麼從這裏過。
恐爾死卻。
遂以手劃一劃云。
識得時。是醍醐上味。
若識不得。反為毒藥也。
所以道。了了了時無可了。
玄玄玄處直須呵。
운문은 "그대가 그와 같아지려거든
다만 그 진입로를 찾아라.
미진수(微塵數) 제불(諸佛)이 그대의 발 아래 있고,
삼장(三藏)의 성교(聖教)가 그대의 혀 끝에 있을 것이지만
깨달아 가는 것만큼 좋지는 않거니와,
화상들이여, 망상하지 말라[莫妄想*].
하늘은 하늘, 땅은 땅,
산은 산, 물은 물,
승(僧)은 승, 속(俗)은 속이니라." 하고서
한참 있다가
“내게 앞에 있는 산을 집어 끌어와보거라.” 하자,
어떤 스님이 나서서 물었다.
“제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임을 알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삼문(三門)이 무엇 때문에 그 속을 지나가겠느냐?
네가 죽어버릴까 두려웠으리라."
손으로 한 획을 긋고서 다시 말했다.
“이것을 알았을 때는 제호(醍醐)의 으뜸가는 맛이겠지만,
모르면 도리어 독약이 될 것이기에
그래서 말하기를, '요요히 요달했을 때 요달할 것이 없고,
현현히 현묘한 곳에서 마침내 껄껄 웃게 되리라”고 하였다. 

*唐代同安常察禪師撰 <十玄談> 中(景德傳燈錄卷二十九)
【一色】 : 枯木巖前差路多。行人到此盡蹉跎。
              鷺鸞立雪非同色。明月蘆華不似他。
              了了了時無可了。玄玄玄處亦須訶。
              殷勤為唱玄中曲。空裏蟾光撮得麼。
*망상하지 마라[莫妄想] ; 개오(開悟) 후에 무언가 달라질 것이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본성은 산은 산, 물은 물이듯 그대로이다는 뜻.  

雪竇又拈云。
乾坤之內宇宙之間。
中有一寶。
掛在壁上。達磨九年。
不敢正眼覷著。
而今衲僧要見。
劈脊便棒。
看他本分宗師。
終不將實法繫綴人。
玄沙云。羅籠不肯住。
呼喚不回頭。
雖然恁麼。也是靈龜曳尾。
雪竇頌云。
설두가 또 찝어서 말하기를,
“천지의 안, 우주의 사이
그 가운데 한 보배가 있다" 하였는데,
면벽(面壁)에 매달리기를 달마(達磨)가 9년을 해도
감히 바른 눈으로 엿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그대들이 알고자 한다면
등을 후려쳐 주리라(방棒으로 깨우쳐주겠다).
저 본분종사를 보건대
결코 실법(實法)으로 사람을 얽어매려 하지 않았기에
현사(玄沙)는 “그물 속에 머물려 하지도 않고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다”고 하였으나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영구예미(靈龜曳尾*)인 것이다.
설두가 송(頌)했다. 

*繫綴; 繫著(마음이 얽히고 집착하다).
*羅籠; 그물 라(羅), 대바구니 롱(籠). 羅包(그물로 에워싸다. 포괄하다. 망라하다.).
*靈龜曳尾 ; 신령스러운 거북도 살기 위해 진흙 위에서 꼬리를 끈다는 것으로,
출세하기 위하여 무리하다가 일찍 죽기보다는 좋지 않은 환경에서 살더라도
오래 사는 것이 낫다는 의미로 쓰인다. 

 

 看看
   (高著眼。用看作什麼。
   驪龍玩珠) 
   古岸何人把釣竿
   (孤危甚孤危。壁立甚壁立。
   賊過後張弓。
   腦後見腮。莫與往來) 
   雲冉冉
   (打斷始得。百匝千重。
   炙脂帽子鶻臭布衫) 
   水漫漫
   (左之右之。前遮後擁)
 明月蘆花君自看
   (看著則瞎。
   若識得雲門語。
   便見雪竇末後句)
살피고, 또 살펴보라.
(눈을 치껴 뜨고 살펴서 무엇 하겠는가?
여룡완주<驪龍玩珠*>이다.)
옛 기슭에 누가 낚싯대를 잡고 있는가?
(위태하기 심히 위태하고 험준하기 심히 험준하나
도적 떠난 뒤에 활 당긴 격이다.
뒤통수에서 뺨을 보려는 놈과는 왕래하지 말라.)
구름은 뭉실뭉실
(쳐서 잘라버려야 한다. 백 겹, 천 겹이라도.
기름 때 찌든 모자요, 노린내 나는 베 적삼이다.)
물은 넘실넘실한데
(좌로 가도 우로 가도 앞뒤가 다 막혔다.)
밝은 달과 갈대꽃이리니, 그대 스스로 살펴보라.
(보면 곧 눈이 멀어버린다.
운문의 말을 이해하면
곧 설두의 말후구<末後句*>를 보리라.)

*驪龍玩珠; 검은 용 턱 밑 구슬이란 《莊子·雜篇·列禦寇》에 나오는 故事에 등장하는 말로서
佛祖로부터 傳來한 大法에의 비유이다.
驪龍은 전설 속의 사나운 검은 용을 말하며, 그 용의 턱 밑에 아름다운 구슬이 있다는데
그 구슬을 쟁취하려면 생사를 초월한 모험을 감행해야만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賊過後張弓 ; 五燈會元 趙州章에
「조주스님이 황벽선사의 처소에 이르자 황벽선사가 오는 것을 보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자 조주스님은 "불이야! 불이야!"하고 외쳐댔다.
황벽스님이 나가서 붙잡아 놓고 말했다. "말해라, 말해보아라."
조주스님은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쏘셨습니다." 하였다.」
이 설화에서 조주구화(趙州救火; 조주의 '불아야!')라는 공안(公案)이 비롯되었다.
*腦後見腮 ; '품위와 흥취가 느껴지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는 당시의 속어이다.
*看著則瞎 ; 보면 곧 눈이 먼다 함은 어떤 견해에 의해 자기의 소견이 막혀버리는 것.
*末後句 ; 철저한 대오(大悟)가 극에 달하여 토하는 지극한 한마디 말. 

 

若識得雲門語。
便見雪竇為人處。
他向雲門示眾後面兩句。
便與爾下箇注腳云。
看看。
爾便作瞠眉瞠眼會。
且得沒交涉。
古人道。靈光獨耀。
迥脫根塵。
體露真常。
不拘文字。
心性無染。本自圓成。
但離妄緣。即如如佛。
若只向瞠眉努眼處坐殺。
豈能脫得根塵。
운문의 말이 이해되면
곧 설두의 사람 위하는 곳을 볼 것이다.
그가 운문 시중(示眾)의 뒷부분 두 구(句)를 향해
너희에게 주해를 달아주며 말하기를,
 '살피고 살펴보라.' 하였는데,
너희가 눈썹 치켜 세우고 눈 부릅뜨는 것으로 안다면
또 전혀 무관한 것이다.
고인이 이르되, "신령한 빛이 홀로 찬란하니
근진(根塵)을 철저히 벗어났고,
그 진상(真常*)을 온전히 드러내니
문자에 구애되지 않거니와,
심성(心性)은 물듦이 없고 본래 스스로 원만하니,
다만 망연(妄緣)을 여의면 곧 여여한 부처니라." 하였거늘
두 눈 부릅뜨고 죽은 듯이 앉아 있기만 해서야
어찌 근진(根塵)에서 벗어나지겠는가?

*古人; 百丈懷海禪師
*靈光; 사람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佛性은 영롱히 비추면서 빛을 발한다.
*體露; 통째 드러나다. *真常; 真實常住.
*瞠眉努眼處; 눈썹 치켜 세우고 양 눈을 부릅뜨는 곳. 坐禪臺에의 비유. 

雪竇道。看看。
雲門如在古岸把釣竿相似。
雲又冉冉。水又漫漫。
明月映蘆花。
蘆花映明月。
正當恁麼時。
且道是何境界。
若便直下見得。
前後只是一句相似 
瞠(抽庚切。直視也)。
설두가 '살피고 살펴보라'고 한 것은
운문이 낚싯대 쥐고 옛 기슭에 있는 것과 같다.
구름은 뭉개뭉개, 물은 넘실넘실한데
밝은 달이 갈대꽃에 비치고,
갈대꽃은 밝은 달에 비치는
바로 이러한 때를 당해서는
말해보라. 이것이 어떤 경계인지.
곧바로 보아진다면
앞과 뒤가 다만 이 1구(一句*)와 같으리라.
"당(瞠)!" (추경절<抽庚切>로서 직시<直視>의 뜻.)

*一句 ; 원오의 말후구(末後句), 즉 당!(瞠; 눈을 부릅뜨고 쏘아보며 내뱉는 외침)